시몬 드 보부아르의 소설은 처음 읽었다. 페미니즘 고전 [제 2의 성]과 사르트르와의 계약 결혼 정도의 얕은 배경 지식을 갖고 천 페이지가 넘는 소설을 한 달 넘게 읽었다. 1944년 말 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가 해방되는 시기부터 시작되는 소설은 3인칭 '앙리'의 시점과 1인칭 '안'의 시점이 교차되며 전개된다.
앙리가 주인공인 장에선 당대 프랑스 지식인들의 이념 싸움이 생생하게 묘사된다. 해방 이후 우파는 미국을 옹호하고 좌파는 소련을 이상화하며 각자의 언론 매체에서 서로를 공격한다. 소련의 공산주의를 이상향으로 생각한 지식인들이 소련 강제수용소 뉴스에 혼란스러워하며 사람들을 강제로 가두고 죽인다는 명백한 증거 앞에서도 어떻게든 이를 정당화하는 모습이 소름끼친다. 앙리를 중심으로 자신의 자아를 세계와 일치시켜 '내가 세상을 구원해야 한다'는 도취감에 취한 당시 지식인들 묘사가 흥미로웠다.
안이 주인공인 장은 나이 든 육체 속에서 괴로워하며 갈등하다 정신분석 강연 초청을 받아 떠난 미국에서 젊은 작가 루이스 브로건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심리 묘사가 이어진다. 안은 '내 머리는 산 채로 내 뼈와 같은 색깔을 갖게 되겠지'(1권 157쪽) 라 독백하며 다시는 사랑에 빠지지 못하리라 좌절하다 우연히 만난 미국 남성과 불같은 사랑에 빠진다. 사랑에 빠져들고 서로 사랑하다 상대의 사랑이 먼저 식고 그 앞에서 괴로워하다 이별하는 일련의 심리가 굉장했다.
앙리도, 안도, 안의 남편 뒤브레유와 딸 나딘도, 소설 속 등장인물 모두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내고 그걸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신문사를 사수하는 앙리의 투쟁과 자신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스스로를 진단하는 안의 싸움은 처절하다. 사랑하는 연인을 잃고 스스로를 학대하는 나딘의 악의, 천재 지식인이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 세계 앞에서 실패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뒤브레유, 대독 협력자를 테러하며 살아가는 뱅상, 앙리와의 사랑에 모든 것을 건 폴, 다들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찾기 위해 처절하게 애쓴다. 이 전쟁에서 왜 내가 살아남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