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브 뉴 휴먼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17
정지돈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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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쪽, 내가 이런 꼴인 건 체외인이기 때문일까. 부모도 없고 가족도 없는, 뿌리도 역사도 없는 인간들. 의무감도 책임감도 정체성도 없는 일회용품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정지돈, 브레이브 뉴 휴먼, 은행나무


소설이 가진 권력 중 하나는 지금은 가능하지 않은 일을 실현시킬 수 있는 힘이다. 인공자궁이 실현화되어 정자와 난자만으로 인간이 태어날 수 있다면? 인간의 신체 없이도 출생이 가능해진 세계라면? 자연스럽게 올더스 헉슬리의 1932년 소설 [멋진 신세계]가 떠오른다. 모든 인간이 인간 부화기에서 태어나는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의 뒤를 이어, 한국인의 일부가 인공 자궁에서 태어나는 204X년의 세계는 멋지다고 할 수 있을까?


인공 자궁에서 태어난 체외인은 '멋진 인간brave new human'이라 할 수 있을까? 소설을 통해 우리는 잠시 상상해 본다. 생물학적으로 인간과 구분되지 않지만 태어나면서부터 부모가 존재하지 않고 가족을 가지지 않은 인간은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혹 사랑의 결여나 무딘 감정 등 비인간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애초에 인간이란 무엇이고 인간성이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정지돈의 소설은 인공 자궁을 다룬 디스토피아 소설이자, 인공 자궁이라는 소재를 거울 삼아 용기 있게 인간의 내부에 존재하는 심연을 들여다 본 하나의 시도다. 거울 속에 비친 건 악몽(-47쪽, 우리는 악몽을 업데이트하고 있다.)이다.


-135쪽, 사람들이 삶을 유지하기 위해선 희망이나 열정, 믿음이 필요했다. 혐오는 믿음과 동전의 양면이었다. 신을 맹신하면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들을 혐오할 수밖에 없다. 가족을 본질적인 가치로, 근본 원리로 여기는 사람에게 가족이 결여된 인간은 인간으로서 자격 미달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가치 있게 여기는 순간 반대편에는 언제나 그림자가 드리웠다. 인간은 영원히 이 그림자를 떨쳐낼 수 없을 것이다. 혐오와 증오를 포기하는 순간 존재할 이유 역시 사라질 테니까.


'차별 없는 세계는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다(153쪽)' [브레이브 뉴 휴먼] 출간 기념 북토크에서 정지돈 작가님은 '차별'을 작품의 주요 화두로 언급했다. 차별과 편견 없이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차별은 인간 안에 내재해 있다. 인공 자궁으로 인간이 출산으로부터 해방되면 평등과 자유의 유토피아가 도래할 것 같지만, 실제 세계는 이 소설에서 이야기하듯 체외인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디스토피아에 가까울 것이다. 국가가 출산을 규제하고, 엇나가는 체외인을 처벌하고, 체외인은 인간이 아니라며 드러내 놓고 혐오하고, 테러와 분쟁이 멈추지 않는 세계는 결코 멋지지 않다.


중요한 건 우리 안에 내재된 차별을 인정하고 그 선을 어디에 둘 것인지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끄집어 내는 것이다. 체외인은 인간을 비추는 거울이자, 곧 도래할 미래의 꿈이다. 인공 자궁, 복제 인간,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선'을 침범하고 깨뜨릴 도끼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다. 선을 깨고 밀려들 새로운 인간을 받아들일 용기는 훈련이 필요하다. 가령 이 소설을 읽는 것과 같은.


유토피아도 디스토피아도 아닌 방식으로, 지금까지 존재해온 방식이 아닌 다른 경로로. 다른 세계는 꿈속에 있지 않다. 현실이 꿈의 일부다.

정지돈, [브레이브 뉴 휴먼],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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