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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합격, 계급 - 장강명 르포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8년 5월
평점 :

이 책을 읽게 된
첫 번째 독자의 신상명세,
대학교 졸업반 때부터 사범대생으로서 자연스럽게 임용고시를 준비,
3년 만에 최종 3차 까지 갔다가 1.5점이 부족하여 낙방,
바로 다음 해 1차에서 광탈, 다시는 임용고시를 보지 않기로
결심,
한 뒤부터 한겨레문화센터와 문지문화원 등 각종 소설창작강의를 수강하며 습작
시작,
5년 동안 20편 가량의 단편을 습작하고 장편 초고 집필 중,
신춘문예와 문예지 공모전 최종에도 올라가 본 적 없음, 1차라도 통과한 건지 알 수
없음,
누구도 내게 말해주지 않으니까
내가 무엇 때문에 시험에서 떨어진 건지, 어디가 부족한 건지, 왜 입시에 성공하지
못하는지 아무도 내게 평가 기준 같은 것들을 알려주지 않으니까.
내 이십대를 지배한 임용고시와 신인문학상 공모전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키가 팔척 장신에 손이 여덟 개 달린 거대한 검은 그림자를 상상한다. 그
얼굴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손에 무엇을 쥐고 있는지 나는 결코 알 수 없다.
공립학교 교사와 등단 작가를 선발하는 그 손은 어떤 기준으로 사람을 뽑는지, 왜 저
사람은 합격하고 나는 떨어진 건지 평가기준을 명확히 알려주지 않는다. 임용고시는 모범답안을 공개하지 않고, 당선작의 기준은 소문만 무성하다.
임용고시에 합격한 정교사들과 등단한 작가들이 들어간 '높은 성'에 왜 나는 입장할 수
없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내 스스로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나를 구성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분해하여 분석하고
재조립한다. 공부가 부족했구나, 심사위원이 선호하는 문체와 거리가 멀구나, 올해 유행하는 개론서는 무엇이고 신춘문예용 글꼴과 자간은 어떤
것이지? 확신 없는 싸움 속에서 나는 서서히 닳아 갔다. 내 안에서 나를 조금씩 갉아 먹는 괴물, 패배감이라는 우울증이었다.
-17쪽, 이것은 어떤 시스템의 일부다. 입시가 있는
시스템. 세계는 둘로 나뉘어 있고,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들어가려면 시험을 쳐야 한다. 시험 한쪽은 지망생들의 세계, 다른
한쪽은 합격자의 세계인 것이다. 문학공모전이 바로 그 시험이다.
대학 입시와 기업의 공채 제도, 각종 고시나 전문직 자격증 시험도 모두
본질적으로 같다. 대단히 효율적이지만 동시에 매우 획일적이고, 지독히 한국적이다. 지원자는 모두 한 시험장에 들어가 동일한 문제로 시험을 친다.
소수의 합격자와 다수의 불합격자가 생긴다. 불합격자들이 좌절로 괴로워하는 동안 합격자들은 불합격자들과 멀어진다. 그들은 합격자들의 세계에서
새로운 규칙을 배운다. 패거리주의, 엘리트주의가 생기는 것도 자연스럽다.
괴물의 정체는 공채라는 시스템이다. 수능, 고시, 공채, 지극히 한국적인 시스템.
누구든 시험을 칠 수 있고, 아무나 합격하지 못한다. 수능이나 고시의 공정성은 누구나 인정하며 그것을 폐지하려는 기미만 보여도 큰 반발이
일어난다. 입시에 수많은 이들이 매달리며 자존감을 잃고 창의성을 갉아먹어도 '시험이 그나마 낫다'는 정서가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왜 이 시스템이 이렇게까지 커져버린 걸까?
작가는 입시가 힘을 얻는 가장 큰 근거로 '간판'을
꼽는다. 2000년 이후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장편소설공모전이라는 또 하나의 '입시'는 작가들에게 '등단'이라는 간판을 주고 출판사는 '소설상
수상작'이라는 간판을 얻게 했다. 인정받은 작가라는 안정감과 함께, 서점을 방문한 독자들이 책을 고르는 기준점으로 이 장편소설공모전이 힘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그 단체 구성원이 되는 입시에 통과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 일종의 자격증처럼 작동한다.(289쪽)'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작가의 신분은 다른 직종에 비해 불확실한 부분이 있고, 이를 등단이라는 제도가 간판 역할을 해 왔다.
문제는 이 간판이 입시에 성공한 소수의 사람들을 성공 이후 발전하지 못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간판을 얻지 못한 다수의 사람들을 패배감과 좌절감에 빠지도록 한 악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의 전공 과목 최신 이론 공부를
소흘히 하는 정교사, 일년에 단 한 번 치뤄지는 임용고시에서 합격하지 못한 이들을 최소한으로 지원하는 제도 하나 없는 현실, 수많은 소설가
지망생들의 사라진 시간들, 간판 하나 얻기 위해 버려진 시간과 노력.
나 역시 그 간판을 얻기 위해 도서관에서 고시 공부를 했고, 작가라고 불리고 싶어
공모전용 틀에 맞춰 글을 썼다. 문학 자습서를 쪼개 외우고 신춘문예용 글꼴로 내 글을 편집했다.
그 속에 내가 되고 싶었던 국어교사는 없었다.
내가 쓰고 싶었던 글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작가는 소설 등단 제도와 취업 공채 제도를 번갈아가며 제시하고 분석한 뒤, 현 사회의
문제점을 짚는다-간판의 권위가 지나치게 높아졌다.
이에 대한 해결책을 하나 제안한다-그렇다면 간판 높이를 낮추자,
구체적으로
믿을 수 있는 정보, 충분한 보상, 실패했을 경우의 대비책.
특히 믿을 수 있는 정보를 제시하고 투명하게 공유할 것을 주장하는 부분이 흥미로웠다.
'모험을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지도를 그려 제공하자는 게 나의 제안이다. 지금 한국의 독서 생태계나 노동시장은 너무
깜깜하다. '무슨 무슨 시험에 합격했다'는 간판들만 빛나는 어두운 거리 같다.(429쪽)' 등단이라는 간판을 필요 이상으로 크게 만들어 버린, 한국소설을 외면하는 독자를 위해 '독자들의
문예운동'을 전개해 보자는 시각에 동의한다. 영화에 비해 책, 소설은 비평의 절대적 개수가 적고, 등단 자격증을 딴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칭찬하기에만 바쁘다. 미등단 작가들도 활발히 활동하고 읽히는 환경, 베스트셀러나 몇몇 평론가의 의견보다 동네 책방 추천이나 작은 독서 모임에서
다양한 책이 공유되는 네트워크 구축, 등등.
서평을 지금보다도 더 부지런히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좋은 독자가 되어야, 언젠가 내 글을 읽어 줄 또 다른 좋은 독자가 등장할
테니까.
객관적인 1차 자료들과 각종 도표, 분석 자료로 가득한 르포 형식인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뜻밖에도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건조한 문체와 아직은 제안 단계인 해결 방안을 보며 내 자아는 괴물이 갉아먹어
너덜너덜해진 부분들을 조금씩 고치기 시작했다.
나의 실패는 온전히 내 탓만이 아니었다.
공정했다고 생각했던 제도의 경직화와 각종 부작용을 정확히 알게
되었다.
그 세계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나 자신만을 책망하는 것은 내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간판이 아닌 내 본래의 욕망을 생각했다.
선생님이라는 자격만을 받고 싶은지,
아이들에게 읽고 쓰는 즐거움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고 싶은지.
작가라는 이름 하나에 만족하는 사람이 되려 하는지,
매 순간 내가 쓸 수 있는 글을 최선을 다해 써서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고
싶은지.
나를 직시하고, 곧장 행동에 옮긴다.
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이 책은 분명하게 말해 주었다.
덕분에 나는 그림자에서 벗어나 한 발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이 책을 써 주신 작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