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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책 좀 읽었다고 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거쳐갔을 김훈 님의 작품들. 좀 부끄럽지만(사실 나는 책 좀 안 읽었으니 덜 부끄러워해도 되려나; ^ ^;) 나는 이제 두 번째 만남이다. 그 유명한 <칼의 노래>, <현의 노래>는 책꽂이에 꽂아둔 채 아직 읽어보질 못했고, 어느 잡지의 추천책으로 만난 <자전거 여행>은 그 옛날 읽다가 접었던 기억만이 남아있을 뿐. 그의 짧다막한 소설 <개>에 이은 두 번째 만남은 그리하여 나를 설레게 했다.
오천년의 빛나는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 민족에게 과연 영광의 날들만 있었겠는가. 기쁜 날이 있었다면 또 슬픈 날들도 있었고, 영광의 날이 있었다면 치욕의 날도 있었으리라.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의 배경인 병자호란도 그 치욕의 순간 중 하나다. 시대의 흐름을 쫓아가지 못하고 대의명분만 중시하다 결국 온 나라가 짓밟히는 상황 속에서도 손도 못 대고 가만히 앉아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그 시대에 무기력한 임금과 각자의 신념을 주장하는 관리들, 그리고 죄없이 고통 당하는 백성들의 모습이 담겨있는 <남한산성>은 이런 비극적이고 치욕적인 역사의 한 순간을 책 속으로 고스란히 옮겨놓는다.
병자년 겨울, 청나라의 군사들이 조선으로 밀려오고 신하들은 인조에게 강화행을 권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정묘호란의 기억을 되살리며 착찹한 마음으로 강화도로 길을 떠나는 인조일행은 강화로 가는 길마저 막히자 어쩔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길머리를 돌린다. 산세가 가파르고 사방이 막혀있어 숨어있기 좋으나 그 반대로 평야로 뚫린 입구를 막으면 꼼짝달싹할 수 없이 갇혀있는 형세인 남한산성. 그 속으로 숨어든 임금의 행렬은 진퇴양난, 청군에 짓밟힌 조선의 운명과 어째 그 모양새가 비슷하다.
고립된 성 안의 모습은 바깥과 다르지 않다. 제한된 식량과 자원으로 일년 중 가장 혹독한 추위를 견뎌내는 그들의 모습을 김훈은 그저 담담히 들려줄 뿐이다. 한겨울 추위를 이기기 위해 병사들이 깔고 자는 가마니를 뺏어 말을 먹이고, 먹이가 부족한 말들이 굶어죽고, 앙상한 뼈를 드러내며 죽은 말들을 잡아 다시 병사들을 먹이는 악순환은 그들이 감당해야 할 고통 중의 한 단면일 뿐이다. 그리고 제대로 싸움다운 싸움 한 번 하지 못한 채 성을 지키고 있는 군인들과 자신의 생활터전을 떠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그곳에 남아있는 백성들, 그리고 임금과 그의 신하들은 점점 그속에서 지쳐간다.
또한 계속되는 청나라 장수 용골대의 압박으로 그들과 화해하고 손을 잡아야 한다는 주화파 최명길과 절대 그들과는 함께 할 수 없다는 척화파 김상헌의 대립이 조정을 뒤흔든다.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주어진 환난에 대한 답을 움켜쥐고 있는 이 대답을 대체 누가 내릴 수 있으며, 그것들을 주장하는 그들을 감히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고 평할 수 있겠는가. 그 시대를 살았던 그들도, 후세에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도 감히 함부로 단언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다 쓰러져가는 조선의 운명을 앞에 두고 갇힌 성 안에서 명나라에 예를 올리는 조선 임금의 모습은 한 마디로 참담했다. 그들이 주장하는 죽어서 아름답다는 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대의명분이란 무엇인가. 그들이 그토록 핏대를 세워 주장하는 명나라에 대한 예는 과연 아름다운 것인가. 그들이 떠받들던 중국은 그토록 대단한 것인가. 답답하고 답답하다. 그 시대적 상황이 답답하고, 사대사상으로 가득찬 그 시대 사람들이 답답하며, 그럼에도 어찌할 수 없었던 우리가 답답하다.
매섭던 바람이 잦아들고 땅에 봄기운이 조금씩 스밀 때쯤, 견디고 견디던 남한산성에서의 47일은 청태종 앞에서 무릎을 꿇은 인조로 인해 끝이 난다. 더불어 기나긴 전쟁도 마무리된다. 청의 말발굽에 온통 상처입어 너덜너덜해진 조선은 언 땅을 뚫고 싹을 틔우는 연약한 풀들처럼 그렇게 다시 지난한 삶을 이어갈 것이다. 잊을 수 없는 치욕은 다시 삶을 이어주고 그 삶이 이어져 지금에 이르렀다. 그러니 우리가 그 때의 일들과 전혀 상관없다고 말할 순 없을 것이다.
김훈의 문체는 짧고 강하다. 그 속에서 힘이 넘쳐난다. 그러나 치욕적인 역사현실에서도 그의 시선은 담담하다. '나는 누구의 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고통 받는 자들의 편이다.'라는 그의 말처럼 그의 시선은 치우치지 않고 그 시간을 훑어나간다. 그리고 자신의 무기력에 한탄하는 인조, 자신들이 교육받은 성리학 안에서 나름 최선의 길을 찾고자 하는 신하들, 척박한 현실속에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려는 군인들, 그리고 견디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뿔뿌리 민중들에 이르기까지 고통받는 자들의 구슬픈 표정을 책 속에 풀어낸다.
소설 속 <남한산성>의 현실이 과연 그 시대에 한정된 것일까. 아니다. 아닐 것이다. 다만 섬김의 대상이 명나라에서 다른 것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외교적으로 큰나라에게 끌려다니는 내 나라의 모습을 보는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답답하기가 매한가지다. 역사는 살아있는 거울이다. 그냥 조상들의 삶으로 끝나는 과거가 아니라 내 삶을 발전시킬 수 있는 열쇠를 발견하는 현재와 미래의 주춧돌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치욕의 아픈 역사를 담은 김훈의 <남한산성>은 현시대의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남겨주는 소설이 아닐까 한다.
* 군소리 *
국사를 공부할수록 개인적으로 참 아깝다고 생각되는 임금 중에 한 명이 광해군이다. 그의 능력을 펼쳐보기도 전에 숙청당한 비운의 임금, 광해군. 물론 그에게 도덕적 허물이 없는 건 아니지만 왕자의 난을 통해 왕위에 오른 태종이나 조카를 죽이고 임금이 된 세조가 그에 비해 떳떳하다고 할 수 있을까. 밖으론 명청 교체기에 현실을 직시한 중립외교를, 안으론 민생안정을 위한 개혁정치를 펴던 광해군. 사대주의에 어긋나는 중립외교와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에 타격을 가하는 개혁정치가 사대부들에게 곱게 보일리 만무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대부들에게 뽑아야 할 눈의 가시로 여겨졌을 것이고, 정치적 희생물이 됐다.
가끔 그가 자신의 정치적 능력을 좀 더 펼칠 수 있었다면 조선은 조금 달라졌지 않을까..하는 상상을 해보곤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더더욱 강해졌다. 중립외교를 펼쳤다면 그 알량한 대의명분을 그르쳤을진 몰라도 최소한 양란으로 고통받는 백성과 잃어버린 문화재는 물론이고 후금에게 무릎꿇는 치욕의 역사를 만들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역사에 있어 만약.이란 가정법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안다. 신라가 아닌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더라면~하고 아무리 가정한다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짙은 아쉬움은 어쩔 수 없으니.. 혼자 안타까워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