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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각본
김지혜 지음 / 창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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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혜 교수님의 신간, <가족각본>의 가제본을 받아 보았습니다. 생각보다 얇아서 처음에는 좋았습니다. 요즘 안 그래도 바쁘고 정신 없는 시기인데 서평단을 신청하다니, 하며 약간은 후회를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다 읽고 나니 출간되는 책은 이보다 최소 다섯 배는 두꺼웠으면 하는 바람이 듭니다. (목차를 보면 무리한 요구일 것 같긴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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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제에 어느 정도 공감하며 책을 펴는 독자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독자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다행히도 첫 번째 경우였는데요. 읽으면서 느낀 점은 김지혜 교수님이 '설득'에 정말 능한 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가족각본'이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도, 매 장 앞머리마다 던져지는 질문들을 읽을 때에도 제가 교수님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질문들은 늘 저를 멈춰 세웠습니다. 왜? 어떤 근거로 그런 말을 하지? 스스로에게 물으면 잘 대답할 수가 없었고 오히려 혼란스러워졌습니다. 하지만 그 장을 다 읽고 나면 혼란스럽던 머리가 말끔해지는 느낌이었어요. 김지혜 교수님은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가장 올바른 해결책은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시선을 가진 분이고, 그 목소리에는 믿음을 주는 힘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낍니다.

그렇게 이 얇은 가제본 한 권을 다 읽고, 저는 뿌연 안개 속에 들어갔다가 무지개를 만나기를 몇 번을 반복한 기분이었습니다. 이 책의 주장에 공감하지 않는 독자라도 이런 글을 읽으면 분명 설득당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의문을 제기하고 대안가족의 가능성을 제안하는 콘텐츠가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그에 대한 반박의 목소리도 많이 들립니다. 이 책은 그런 사람들과 두 편의 사이에서 물음표로 가득한 채 갈팡질팡하는 사람들의 손을 끌어다 앉혀 놓고 처음부터 하나씩 설명해 주는 친절한 안내서 같습니다. 하지만 만만하지는 않아요. 이 책은 그 모든 콘텐츠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펼칠 수 있도록 밑바닥을 든든히 받쳐 주는 버팀목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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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런 류의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제가 느끼는 평등함과 올바름을 다른 이에게 이해시킬 수 있는 언어를 쥐어 주기 때문입니다. 저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머릿속에 있는 생각은 잘 정리되지 않고 어렵게 정리한 생각을 입 밖으로 낼 용기를 모으려면 또 한나절이 걸립니다. 그런 사람이어서인지 이런 명쾌한 책을 읽으면 늘 기분이 좋습니다. 대리 만족이랄까요.

저희 가족은 여성으로만 삼대가 같이 삽니다. 외할머니, 엄마, 그리고 저인데요. 성별로 인한 갈등이랄 게 별로 없을 것 같은 구성이지만 가끔씩 답답한 지점들이 생깁니다. 출간되는 완전한 버전의 <가족각본>을 읽으면 어쩌면 그런 답답한 순간에 조금은 더 목소리를 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족 안에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의문을 가져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이 책을 읽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가족은 응당 이래야 한다는 한국사회의 오래된 각본이 과연 우리의 인식 속 어디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김지혜 교수님의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처음 보았을 때가 생각납니다. 출간되자마자 큰 반응을 얻은 책이지만 저는 약 1년이 지나서야 읽었던 것 같습니다. 세상이 떠들썩하면 왠지 휩쓸려가고 싶지 않은 이상한 오기 때문이었을까요. 귀여운 오리와 캐치하고 명쾌한 제목은 충분히 독자를 끌어들일 만했다고 생각합니다. 책의 내용도 좋았지만,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서인지 저는 기대보다 약간 약하다고 느꼈습니다. 호흡이 좀 짧았다고 할까요... 가제본의 설렘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점에서 저는 이번 책이 더욱 마음에 남고 뒷부분이 기대됩니다. 호흡이 끊어지지 않으면서 한 주제를 여러 방향으로 쑥쑥 파고 들어가는 느낌이 시원스럽습니다.

덧붙여 이렇게 멋진 기획을 꾸미고 이 책을 탄생시키신 담당 편집자님께도, 신입 편집자로서 존경의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더 기대하게 만드는 책입니다. 저도 언젠가 이런 저자분을 만나 이런 책을 낼 수 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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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아리움이 문을 닫으면
셸비 반 펠트 지음, 신솔잎 옮김 / 창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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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마다 텅 빈 아쿠아리움을 청소하는 70대 할머니 토바와 아쿠아리움에 사는 거대태평양문어 마셀러스. 수조를 탈출했다가 전선 더미에 몸이 끼인 마셀러스를 토바가 구해 준 다음부터 둘은 비밀스러운 우정을 키워간다. 마셀러스는 인간이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높은 지능을 가진 문어이지만 아쿠아리움의 좁은 수조에 갇힌 신세인 데다가 살날이 160일밖에 남지 않았다. 토바는 아들과 남편을 잃고 고독에 침잠하여 살아가고 있는 노부인이다. 인간과 문어, 너무나 다른 이 두 존재는 어디인지 모르게 닮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들 앞에 껄렁해 보이는 30살 남성 캐머런이 등장한다. 인간의 지문과 열쇠의 패턴을 모두 기억하여 구분하고 유전자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마셀러스는 토바가 전선에 얽힌 자신을 구해 주었던 것과 같이 과거의 아픔에 얽매여 있는 토바를 구해 줄 수 있을까?

 

이 책은 인간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부분은 내지가 일반적인 하얀 종이인 반면 마셀러스가 화자가 되는 장에는 색깔이 있다.(내가 읽은 것은 가제본이라 옅은 회색인데, 실제로 출판된 책에서는 더 예쁜 색일 것이라 믿는다.) 전자에서는 현실적이고 보편적이지만 흥미진진한 인간사가 빠르게 전개된다면, 똑똑한 문어 마셀러스가 독자에게 말을 거는 부분은 그러한 일상을 낯설게 볼 수 있는 렌즈를 제공하며 우리에게 짜릿한 깨달음을 준다. 독자는 이러한 소설의 호흡에 녹아들어 어느 순간 하얀 페이지를 읽을 때에도 마셀러스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궁금해하게 된다.

 

"완벽하지 않고 엉망진창인 인간들이 비슷한 문제로 얽히고설켜 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쿠아리움을 배경으로 설정하고 실제로든 비유적으로든 어딘가에 갇혀 있거나 무언가에 얽매여 있는 인물들을 등장시켰습니다." (pp.7-8, 한국 독자들에게 중)

 

이 책은 작가 셸비 반 펠트의 데뷔작이다. 그럼에도 자신이 전달하고자 의도한 바를 이렇게 잘 표현해냈다니 놀랍다. ‘아쿠아리움이 문을 닫으면이라는 제목과 표지만 보아서는 꼭 박물관이 살아 있다처럼 마법 같은 세계가 펼쳐지는 판타지 소설일 것 같지만, 사실은 너무나 평범하고 지나치게 일상적인 사람 사는 이야기가 내용의 주가 되는 소설이다. 아들과 남편을 잃고 마음의 문을 닫은 채 청소에 전념하며 살아가는 할머니, 사람이 이렇게나 많이 해고당해도 되는 걸까 싶을 정도로 해고를 당하다가 동거하던 여자친구의 집에서 쫓겨난 캐머런, 작은 마트를 운영하며 동네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수다 떠는 것을 낙으로 삼는 할아버지 이선까지. 어쩌면 모두 어떤 영화의 조연으로 등장할 법한 별볼일 없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거기에 한 스푼의 낯섦을 추가하는 것이 괴팍하지만 매력적인 문어 마셀러스이며 이 소설의 매력이다. 퉁명스럽지만 인간을 사랑하는 문어 마셀러스를 상상하면 절로 웃음이 지어진다. 출간 즉시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오를 법하다.

 

평소에 두꺼운 소설책을 찾아 읽는 편은 아니지만 이 책만큼은 뒤 내용을 확인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다. 아직 출판되지 않은 책이 내 손에 들려 있다니 처음에는 신기하고 들뜨는 마음이었는데, 가제본 서평단이 이렇게나 가혹한 일이었다니. 이렇게나 중요한 시점에 이야기를 끊어버리다니... 아침 드라마보다 더하다. 호락호락한 두께는 아니지만 작가가 의도한 바와 같이 따뜻하고 유쾌한 이야기이기에 손에서 놓을 새도 없이 가볍게 읽힌다. 읽다 보면 어느새 미소가 피어나고 위로가 되는 신기한 소설이다. 토바와 캐머런이 각자 원하는 해답에 닿을 수 있을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우리 마셀러스의 탈출 시도는 계속될지 무척 궁금하니 서점에서 이 책을 마주치는 분들은 꼭 확인해 보시기 바란다.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가제본(비매품)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아쿠아리움이문을닫으면 #소설베스트셀러 #힐링소설 #소설추천 #가제본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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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
이길보라 지음 / 창비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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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공감은 훼손되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한다고 느낄 때 

당신은 가장 무지한 상태일 수 있다.

 

책의 뒤표지에 적힌 문구입니다. 묵직하고 강렬한 제목, 그리고 한국장애인인권상을 수상한 작가의 책이라는 말에 끌려 서평단을 신청했습니다. 책을 읽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길보라 작가님에 대해 검색해 보았고, 이전에 쓰신 책들도 꼭 읽어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어디까지 공감할 수 있을까요? 그 누구도 100% 같은 인생과 경험을 공유하지 못하니 어쩌면 공감이라는 개념은 판타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고통에 공감하는 것이 정말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걸까요? 많은 질문을 떠올리게 하는 제목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제목은 두 가지 방식으로 해석이 가능한 것 같습니다. 첫째는 다수에 속하지 못한 소수자는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착각, 그리고 둘째는 자신이 그 고통에 완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입니다. 이길보라 작가님은 당사자의 시선에서 쓰이고 찍힌 작품들을 소재로 진정한 공감을 위해 우리가 갖추어야 할 시각과 감수성을 제시하고 연대의 힘을 강조합니다.

 

긍정적인 뜻으로 쓰이는 말은 아니지만 납작하다라는 표현을 참 좋아합니다. ‘너의 의견은 충분히 입체적이지 못해. 좀 더 다각적으로 생각해 봐. 고차원적으로, 깊이 있게 생각해 봐.’라고 할 때는 모호하기만 하던 것이 그건 납작한 생각이야!’라고 할 때 더 충격적으로 와닿았던 경험이 있거든요. 단순하고 직관적인 표현으로 정신이 번쩍 들게 해준 말입니다. 내 생각이 납작한 거였다니! 자존심이 팍 상하면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 많이 읽고 공부할 수 있도록 채찍질하는 말입니다. 이 책의 프롤로그 제목이 단순하고 납작한 착각을 넘어설 때인데요. 작가님은 책의 제목과 프롤로그의 제목만으로 이미 독자 한 명을 사로잡으셨습니다.

 

다큐멘터리 영화와 르포·에세이 문학을 지도 삼아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익혀왔다. 좋은 작품들은 다름과 상실, 고통이 부정적인 의미로만 쓰이지 않는다는 걸 가르쳐주었다. 고통을 납작하게 바라보기보다는 고통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가치를 배웠다. 고통에 공감한다는 단순하고 납작한 착각을 넘어설 때 비로소 더 깊고 넓은 세계를 만날 수 있다. (pp. 10-11)

 

이길보라 작가님은 작가로서,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으로서, 또 코다로서 자신의 경험을 풀어냅니다. 하지만 이 책은 농인과 코다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작가님이 경험한 농인 사회와 청인 사회에서의 경험을 시작으로 이 책은 미나마타병 환자들, 재일조선인, 미등록 이주아동, 재일조선인, 페미니스트, 장애학생 부모, 이동권 투쟁을 하는 장애인, 전쟁 난민에 이르는 다양한 집단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2부에서는 창작자로서 작가님이 겪은 고민들과 함께 로드스쿨러, 가족 제도, 가부장제, 영 케어러, 여성 정치, 기후 위기 등의 의제를 다루는 작품들을 소개하며 가장 사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매체는 작가가 사랑하는 르포, 에세이 문학과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뒤표지에 빼곡이 적힌 작품들의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는 이 많은 작품을 다 다룬다고?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책을 덮은 지금은 작가가 사랑하는 작품에 나온 목소리들을 엮어 진정한 연대로 이어지는 훌륭한 한 장의 지도를 만들어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적 다큐멘터리에 대한 마지막 꼭지의 내용이 인상 깊습니다.

 

이제는 안다. ‘사적 다큐멘터리 영화라는 형식적 분류로 나의 영화의 가치를 폄훼할 수 없다는 것을. 애정하고 지지하는 사적 영화가 관습과 체제라는 어렵고 복잡하고 감히 건들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개념을 가장 거세게 흔들 수 있는 도구가 충분히 될 수 있다는 걸 말이다. (pp. 201-202)

 

사족으로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보자면, 저는 선천적으로 왼쪽 귀의 청력이 없습니다. 부모님은 어렸을 때부터 늘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너는 한쪽 귀가 안 들리지만, 그래도 일상생활을 하는 데에 큰 불편함이 없어서 다행이라고요. 나도 아예 불편하지 않은 건 아닌데, 큰 불편함은 뭐고 작은 불편함은 뭐지? 어렸을 때에도 그런 생각을 어렴풋이 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매년 3월 담임 선생님께 편지를 썼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리 배정 때마다 짝꿍의 왼편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친한 친구들은 이 사실을 알았지만, 굳이 학급 전체에 알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대학교에 가기 전까지 한 번도 저 스스로와 장애인을 연결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대학교 때 우연히 장애 인권에 대한 스터디를 하며 처음으로 나는 장애인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었어요. 그제야 청각장애인의 기준을 검색해 보고, (국가가 정한 기준에 따르면) 제가 청각장애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는 묘한 기분에 빠졌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열정적으로 썼던 글은 엉성하지만 지금까지도 가장 아끼는 글 중 하나입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몇몇 이야기에 저의 경험이 어느 정도 겹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쪽 귀가 들리지 않는 것은 분명 어느 정도의 불편을 동반하지만, 매 순간 고통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저는 집에서 가족들과 있을 때는 전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저의 상태를 알고 습관적으로 제 오른편에서 서거나 제가 잘 못 듣는다 싶으면 조금 소리를 높여 말해 주니까요. 이는 가정이라는 공간에서 당연한 규칙이기에 미안함이나 불편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친한 친구 몇 명과의 모임에서도 마찬가지이고요. 하지만 매번 새로운 반, 새로운 학교, 새로운 직장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는 긴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사람의 왼편에 앉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편지를 쓸 담임 선생님은 이제 계시지 않습니다. 특히 시끄러운 공간, 다수의 사람이 동시에 이야기하는 회식과 같은 상황에서는 스트레스가 극에 달합니다. 대화의 절반 정도는 알아듣지 못한 채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방금 한 말이 웃어도 되는 말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러다 보면 귀에 대한 이야기를 편히 꺼내지 못하는 제 자신이 미워질 때가 많습니다. 지금 여기서, 이 사람에게 저 사실 왼쪽 귀가 안 들려요말을 해도 될까, 너무 놀라거나 당황하면 어쩌지, 안쓰러운 눈빛으로 보는 것도 싫은데.... 진 빠지는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며 체념하곤 합니다. 작가님의 이야기를 읽다 보니 왠지 제 이야기도 하고 싶어져서 풀어놓아 보았습니다.

 

다큐멘터리도, 르포도, 에세이도 모두 누군가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이길보라 작가님은 그런 면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이를 조각조각 잘 정리하여 멋진 한 권의 책으로 우리 앞에 가져다 주신 것 같습니다. 무거운 주제일 거라 걱정했었는데, 명쾌하고 가끔은 유쾌한 작가님의 필력에 책장이 술술 넘어갔습니다. 한국 사회의 다양한 소수자 문제과 당사자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사람뿐 아니라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히고 싶은 모두가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책입니다.


다큐멘터리 영화와 르포·에세이 문학을 지도 삼아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익혀왔다. 좋은 작품들은 다름과 상실, 고통이 부정적인 의미로만 쓰이지 않는다는 걸 가르쳐주었다. 고통을 납작하게 바라보기보다는 고통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가치를 배웠다. 고통에 공감한다는 단순하고 납작한 착각을 넘어설 때 비로소 더 깊고 넓은 세계를 만날 수 있다. - P10

그들 사이에서 우리 부모는 ‘장애인’이 아니었다. ‘보라네 부모님’이었다. … 내가 속한 공동체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부모님의 얼굴은 사라졌다. 눈썹과 얼굴 근육을 움직여 말하는 ‘보라네 부모님’이 아니라 가정 설문지 내의 ‘고졸’ ‘자영업’ ‘특이사항: 청각장애인’이 되었다. - P19

"우리는 모두 고통을 겪는다. 그러나 이 고통은 우리 자신의 다른 경험들에 대한 부정을 뜻하지 않는다." - P50

모국어는 "근대 국민국가에서 국가가 교육과 미디어를 통해 구성원들에게 가르쳐 국민으로 만드는 장치로 기능"하며 "모어와 모국어가 일치하는 경우는 국가 내부의 언어 다수자들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어느 곳이든 모어와 모국어를 달리하는 언어적 소수자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 P57

‘단일민족으로 구성된 국가’라는 말 사이에 지워진 존재를 바라본다. 모어와 모국어 사이의 간격이 끝도 없이 벌어지고, 모국어가 가지는 권력이 모어가 가지는 권력과 판이하게 다를 때 벌어지는 일을 마주한다. 흑인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인 미국 시인 오드리 로드는 "주인의 도구로는 결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썼다. 나는 모어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모어와 모국어를 오가며 기존의 집을 무너뜨린다. - P59

나는 부모의 농(Deafness)을 자랑스럽게 말한다. 들리지 않는 게 뭐 어때서, 말 못하는 게 뭐 어때서, 대신 우리는 수어로 말해, 눈으로 세상을 읽어. 그러나 파트너의 우울증에 대해서는 함구해왔다. 그의 우울은 부끄럽고 숨겨야 하는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그의 남성성을 완성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 P75

앤드류 솔로몬은 "가족은 차이를 둘러싼 관용과 불관용의 시험대이며, 차이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이런 과정이 강조될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이고 시급한 장소"라고 쓴다. - P91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는 누구의 시선으로 전쟁을 바라보고 재현해왔는지 묻게 된다. 전쟁에 대한 논의와 담론을 전유해왔던 남성의 시각이 아닌, 평범한 시민이자 당사자, 여성이자 어머니로서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전쟁을 말함으로써 무겁고 거대하고 어렵게만 느껴지는 전쟁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된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보편적인 관계성을 통해 전쟁을 말하는 행위는 곧 가장 개인적이면서 가장 정치적이다. - P108

학교 밖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필요했다. 글을 썼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었다. 그 과정을 책으로 엮었다. ‘로드스쿨러’(Road-shooler)라는 단어가 탄생했다. 학교를 벗어나 다양한 학습공간을 넘나들며 공부하고 교류하고 연대하는 청소년이 스스로를 부르는 말이다. - P116

주관적 자아와 객관적 자아 사이를 오가며 나와 세상 사이의 연결 고리를 발견할 때 이야기는 비로소 사회적 담론이 된다. - P127

작가는 『아빠의 아빠가 됐다』에서 "나는 효자가 아니라 시민"이라고 선언한다. 아버지와 나는 부모와 자식이 아니라 시민과 시민으로 관계 맺을 것이며 자신의 돌봄이 비가시적인 소모가 아니라 사회적인 의미를 갖는 행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 P148

정치하는 사람은 타고나지 아니한다. 몫을 찾기 위해 택하는 것이 바로 정치다. 여성은 몫을 찾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정치한다. - P160

그런 그에게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그레타와 같은 다음 세대가 세상을 구할 것이라고,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고. 그런 어른들에게 그레타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말한다. 기후위기로 인한 대멸종이 시작되면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을 다음 세대가 바꿀 수는 없다고 말이다.
- P166

그러나 언제까지 이들은 결정권이 없는 다음 세대이자 청소년, 청년이어야 하나? 대멸종의 시대를 살아갈지도 모르는 이들이 권력을 가지고 의제를 선정하고 정책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기후위기 문제에 있어 그 누구보다 강박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아스퍼거 증후군을 가진 그레타가 환경부 장관이거나 대통령이어야 한다. - P169

멋진 작품을 만날 때면 가슴에 손을 얹게 된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내내 가슴에 손을 얹었다. 사회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홀로 살아가며 섬의 변화를 기록하는 행위가 도리어 가장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일이 될 수 있다는 걸 꺠달았다. - P178

정수은 감독과 함께 ‘두 번째 영화, 찍을 수 있을까?’라는 여성 신진 감독 모임을 만들어 활동한 남순아 감독은 유독 여성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들이 사적 다큐멘터리 영화로 분류되면서 다양한 사회적 담론과 연결되지 못한 채 고립되어 있는 현실에 대해 지적하며 "사적 다큐멘터리라는 분류는 젠더화되어 있으며, 은연 중에 그 다큐멘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덜 중요한 것’ ‘사소한 것’으로 만든다"고 쓴다. - P193

김옥영 작가는 "좋은 다큐멘터리는 ‘좁은 창구멍을 통해 넓은 세계를 내다보는 것"이며 "지극히 개인적인 소재를 다룬다 하더라도 ’나‘의 현실이 얼마나 ’우리 모두의 현실‘을 환기할 수 있느냐, 얼마나 문제의식을 확장할 수 있느냐에 그 성취가 달려 있다"고 쓴다.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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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여자들은 세계를 만든다 - 분단의 나라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김성경 지음 / 창비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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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소설 같기도, 문화 기술지 같기도, 사회학 논문 같기도 한 이 책은 작가가 만난 수많은 북조선 여성들의 목소리과 그들은 만나며 변화한 작가 자신의 목소리를 생생히 담고 있다. 북조선 여성들이 전쟁과 분단을 겪으며 살아남은 경험담을 기반으로 작가는 우리에게 전쟁과 분단을 마주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이 책에 관심이 생긴 것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잇는 가장 한국적인 다큐 에세이라는 문구 때문이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말 그대로 충격적인 책이었기에 그 한국 버전이라니, 궁금증이 생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단순히 그 책의 한국 버전일 것이라는 나의 예상이 얼마나 납작한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이 책은 한반도의 분단과 전쟁, 그리고 그를 둘러싼 국제 관계와 이데올로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은 여성들을 그려냄으로써 자신만의 새로운, 온전한 길을 개척해 낸다. 말 그대로 살아남은 여자들이 세계를 만들어 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책의 내용과 정말 잘 어울리면서 캐치하기까지 한 멋진 제목이다.

 

 이 책은 크게 세 파트로 나뉜다. 1북조선의 살아남은 여자들에서는 북한의 선전 및 각종 매체에 등장한 실제 북한 여성들의 삶과 작가의 인터뷰 내용을 기반으로 북한 여성의 삶을 픽션으로 그려낸다. 프랑스와 영국 같은 세계사보다 오히려 북한의 근현대사에 더 무관심한 남한의 일반 대중을 고려했을 때 이와 같은 서술 방식은 훌륭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여성들의 삶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전후 북한의 상황과 천리마 운동, 시장화, 고난의 행군 등과 굵직굵직한 사건을 중심으로 시대적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


 2경계에서 만난 여자들은 작가가 연구를 진행하며 만난 각 지역의 여성들의 모습을 담았다. 연길 접경 지역의 조선족과 북조선 사람들의 관계, 가족을 위해 중국 각지로 넘어와 일을 하며 북조선으로 송금하는 어머니들, 그리고 중간자적 위치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노력하고 있는 일본의 조선적 자이니찌들까지. 이 장에서는 작가가 만난 이들의 목소리를 보다 직접적으로 담아내며, 그들을 만나며 작가가 느낀 바도 생생히 전해진다.

 마지막 3분단, 북조선 여자들, 그리고 나에서는 해당 연구를 진행하며 작가가 느낀 바를 솔직히 풀어낸다. 이 부분을 읽으며 앞에 나열된 각 여성들의 서사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또 그들을 만나는 모든 순간의 경험이 작가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를 생각해보고 정리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2부의 접경 지역 여성들 이야기가 깊이 와닿는다. 나는 10살부터 19살까지 중국 북경에서 살았는데, 종종 북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가 지인과 평양 음식을 파는 식당에 다녀왔는데 식당 종업원이 모두 북한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도 했었고, 한국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면 북한 사람을 만났던 경험을 이야기해 주는 택시 기사도 있었다. 어머니는 건너건너 알게 된 북한 사람과 인사를 한 적도 있었고,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내가 다녔던 한국학교를 치외법권 지역으로 오해하여 담을 넘어 들어온 탈북민들의 이야기도 들었다. 북한 사람을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한국이었다면 이조차도 상상하기 힘든 경험들이기에 그렇게 전해 들은 이야기들이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이렇듯 어린 시절의 기억 속 파편으로 남아 있는 중국의 북한 사람들, 그들에 대한 글을 읽을 기회는 없을 줄로만 알았는데 뜻밖에 마주치게 되어 마음이 복잡했다. 중국까지 나와서 돈을 벌 수 있다면 북한에서도 잘 사는 상류층이겠거니, 생각하고 부모님과 이야기한 적도 있는 나로서는 그 삶이 얼마나 다양한지, 또 어떤 아픔들이 있었는지 직접 듣는 것이 충격적이었던 듯하다. 어떤 삶의 굴곡을 거쳐 북한을 떠나 중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는지, 또 중국에서 북조선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읽으며 어린 시절의 편견과 무관심을 한편으로는 반성하게 되었다.

 

 또한 3장에서 연구자로서 자신이 갖고 있던 한계와 개인적인 콤플렉스를 가감 없이 드러내며 연구 과정의 어려움을 고백하는 작가가 대단하다고 느꼈다. 사실 작가가 이야기한 선입견과 고정관념, 무관심 등은 대부분의 남한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읽으면서 더욱 공감이 갔고, 작가가 들려주는 목소리와 새로운 시각을 더욱 편안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사회적 문제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당사자성, 위치성에 대한 고민을 맞닥뜨리게 된다. 여자가 아니라면 페미니즘을 이야기할 수 없는가? 성소수자가 아닌 이가 성소수자의 편에 서서 함께 싸울 수 없는가? 이 책의 작가가 제시한 해결책은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알고 그로 인해 생길 수 있는 문제를 인정하며 경계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모두가 소수자에 대한 담론에 뛰어들기 전 가져야 할 자세라고 생각한다.

 


 출판사 서평단에 당첨되어 책을 받아보았을 때, 이번 서평은 더 꼼꼼히 쓸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에 오랜만에 인덱스를 붙여 가며 읽었더니 책이 아주 알록달록해졌다. 마음에 와닿은 문장을 모으다 보니 밑줄 긋기가 너무 많아진 느낌이지만, 더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록해 본다. 좋은 책으로 깊이 있는 독서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김성경 작가님과 창비 출판사에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북조선에 대한 적대감은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거리감을 만들어냈다. 그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가 그들과 미래를 함께하겠다는 의지를 갖는 것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북조선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은 남한사회의 역사적 중층성에 대한 무지로 이어진다. 그들이 사실은 우리의 거울상이라는 것, 그들의 고단한 삶의 경험과 의식에 남한 사람들도 깊게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 P9

남한사회는 북조선 사람들에 대해 무지하다. ‘북조선’이라는 국가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이들의 행위주체성의 다면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분단을 가로질러 이주하면서 탈분단적 정체성을 구축하기도 하고, 국경을 넘나들며 코즈모폴리턴적 주체로 재탄생하기도 한다. - P10

아무쪼록 분단 같은 것은 이제 별 의미 없다고, 북조선은 우리와 별 상관 없는 타자라고 외치는 대부분의 남한 사람들이 그녀들의 이야기에 좀더 귀기울였으면 한다. 단순히 그들의 삶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함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녀들의 전쟁과 같은 일상을 통해서 여전히 분단에서 자유롭지 못한 남한사회를 한번쯤 되짚어보는 기회로 삼도록 하기 위함이다. - P15

사실 난 ‘인간개조의 선구자’라는 칭송이 어색했어. 길건실이라는 이름이 어느날 갑자기 길확실로 바뀐 것도 어리둥절했단다. … 내가 열심히 일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혁신을 이뤄낸 것도 아니었거든. 작업반을 잘 이끌어야겠다는 다짐이나 의무감은 분명히 있었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투철한 사명감으로 나를 희생하면서 작업반장 노릇을 한 것은 아니었어. - P47

아무리 천리마의 정신으로 일한다고 하더라도 멈춘 공장은 무슨 수로 돌리겠니. 그나마 우리 공장이야 워낙 중요한 곳이니 완전히 멈추지는 않았다만 지방 공장들을 유지하려고 천리마 정신을 운운하는 것이 안타깝기까지 해. 결국 국가의 실패를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것이니 말이다. - P51

천리마시대를 대표하는 노동영웅인 길확실은 지금까지도 북조선에서 ‘영웅’으로 해석된다. … 그만큼 길확실이라는 ‘대중영웅’은 김일성 시대부터 김정은 시대까지 미디어와 문학예술을 통해 지속적으로 활용되는 것으로 보이며, 북조선에서는 그녀의 삶을 통해서 젊은 여성 노동자의 희생과 노동자의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를 ‘개조’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강조하고 있다. - P54

만자가 부업에 본격적으로 나선 이유는 자아실현과 관련이 있었다. 직장생활을 꾸준히 하지 못했던 만자는 마음속 깊은 곳에 일종의 콤플렉스가 자리하고 있었다. 사회적으로 쓸모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던 것이다.
- P63

고난의 행군 이후에 본격화된 시장화 과정에서 주요 행위자는 여성이었다. 특히 결혼한 여성들은 당장 가정경제를 책임지는 역할에 내몰리게 되었다. 북조선 여성들이 시장에서 분투한 이야기는 그들과의 심층면접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 P85

수련이 배치된 곳은 중국 톈진의 북조선 식당이었다.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는 곳으로 이곳에 ‘실습’ 나온 학급 동무들도 12명이 넘었다. … 일은 고됐지만 재미도 있었다. 손님으로 식당을 찾은 중국인과 남한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세상 돌아가는 모양새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수련은 무엇보다 좋았다. - P102

중국에서의 삶이 만족스럽다. 겉으로는 외화벌이를 해서 북조선 당국에 기여해야 하는 삶을 살고 있지만 그 속내를 조금만 깊숙이 살펴보면 자신의 꿈을 이뤄가는 방식이었다. 수련은 중국과 북조선을 드나들면서 살게 되었고, 경제적으로도 안정적이었으며, 무엇보다 일상에서 자유로움을 만끽하면서 지내게 되었다. - P108

연선 지역의 조선족에게는 중국, 북조선과 같은 국가보다 강 건너 이웃마을이 훨씬 더 가까웠던 것이다. - P124

무엇보다 조선족 청년들의 마음속 깊은 곳의 혼란이 걱정스러웠다. 중국의 국가 정체성과 조선족이라는 민족 정체성 사이에서의 혼란도 그러하고, 이주자의 가족으로서 연길과 서울을 동시에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고통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 P128

또한 나는 중국에서 결코 주눅들지 않았던 순영 할머니를 보면서 잠시 안도했던 것 같다. 삶의 고단함을 힘없이 증언하는 피해자의 모습이 아니라 자존감이 높아 뭐든 해보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여성들이 만들어가는 희망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가늠할 수 있었다. 아무리 고단한 상황이나 혹독한 운명 앞에서도 나름의 행위주체성을 발휘하려는 여성들의 힘을 직접 목격하였다. - P153

원래 폭력은 가장 약한 이들에게 더 가혹한 법이겠지만, 자식을 부양하러 중국으로 넘어온 북조선 여성이 마주한 상황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국경을 넘은 수많은 북조선의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이러한 성폭력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P166

이렇듯 조선적 자이니찌 커뮤니티라는 것이 정치적 집단 정체성이나 국적을 뜻하는 것으로 작동하기보다는 이상을 공유하는 공동체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적어도 이날 밤 선술집에 모인 사람들이 각자의 지친 일상을 공유하며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고 서로 위로하는 모습에서 정치나 이데올로기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 P190

나에게 분단 문제는 어쩌면 현지조사에서 존재하는 것이지 내 삶과는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즉, 분단 문제를 ‘직업’으로 접근했지만 그것이 나와 관련되어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였다. - P210

나 또한 북조선에 대한 기성세대의 적대감에 이유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곱씹게 되었다. … 몸에 새겨진 부정적 감각이 시간의 풍파를 겪어 완고해진 것을 두고 노년층의 고집으로 단순히 매도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 P217

내가 ‘위치성’(position)이라는 것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된 시점이 이때쯤이었다. 나의 인식의 위치는 어디이며 그것의 구조적 한계와 가능성은 무엇인가? 그로 인해 내가 감각하고 문제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무엇일까? 중산층 연구자는 노동자나 하층민의 불평등 문제에 대해서는 질문할 수 없는 것인가? 난민이나 소수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구는 당사자만이 가능한 것인가? 그렇다면 사회 불평등이나 권력의 폭력성에 천착한 사회학 연구자는 피지배층이라는 실존적 위치에 놓인 이들이어야 하는가? - P225

이렇듯 나의 북조선 출신자 연구는 단순히 그들의 삶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 연구자인 내가 그들을 만나면서 마주하는 심적 요동을 성찰적으로 분석하는 것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질적 연구의 과정이란 연구자에서 연구 참여자로의 일방향이 아니라 두 주체가 상호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기에 더더욱 그러하다. 남북 출신자가 연구를 통해 접촉하고 교류한다는 것은 분단체제 내에서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주체들의 만남이 만들어내는 상호 변화 가능성을 가늠하게 한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 P238

이러한 놀라운 경험을 더 많은 이들이 함꼐했으면 한다. 그래서 낯선 타자와의 만남이야말로 좁디좁은 각자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한명이라도 더 알아차리기를.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제발 주변을 찬찬히 돌아보기를. - P240

국가와 이데올로기라는 강건한 구조를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만들어낸 북조선 여성들의 분투기는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철옹성 같아 보이는 권력과 이데올로기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살아내는 사람들의 해방적 실천을 통해서 무력화될 수 있다는 것을 북조선 여성들이라는 존재가 증명하고 있다. 국경이 체제 경쟁과 같은 견고한 틀을 소위 가장 약하다는 여성, 그것도 자본주의적 기준에서는 가장 가난한 북조선 여성들이 넘나들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을 시사하는지도 되짚어봐야 할 것이다. -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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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도록 뮤지컬
이수진 지음 / 테오리아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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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관극 횟수 20 회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뮤린이입니다. 

통장 사정상 아직은 대극장 뮤지컬이나 유명한 작품 위주로만 보고 있지만 

보고 싶은 작품은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한가득 쌓여 가는 중입니다. 

뮤지컬을 10 번 정도 보고 나니 '나의 취향'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갈피가 잡히더군요. 

아무리 넘버가 좋고 멋진 배우가 나오는 유명한 작품이라도 

스토리라인이 탄탄하고 메시지가 의미 있지 않으면 만족도가 확실히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나만의 취향을 찾아 헤매고 있는 뮤덕으로서 이런 뮤지컬 소개서는 몹시 반갑습니다만 

책장을 넘기기 전 이런저런 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첫째, 내용 소개와 스포일러의 경계를 잘 지키고 있는가? 

둘째,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간략한 줄거리와 기본 정보 나열에 그치지는 않는가? 

셋째, 감상이 충분히 깊이 있고 의미 있으면서도 미래의 관극 경험에 지나친 영향을 주지 않는가? 


기대 반 걱정 반 책을 펼친 뒤 짧은 작가의 말을 읽고는 

얼마 전 관극한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부분으로 바로 넘어갔습니다. 

스포일러를 경계하는 편이기도 하고, 극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니 작가분의 시선이 궁금했지요. 

그리고 그 꼭지를 후루룩 읽어 버린 뒤 앞선 모든 걱정이 의미없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비기독교인으로서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는 솔직히 어려운 작품입니다. 

배경 지식이 부족한 데다, 성스루 뮤지컬이다 보니 덜 친절한 편에 속합니다.

무대 위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의 지저스에 대한 태도와 그 동기를 이해해야 

작은 몸짓과 마디마디에 숨겨진 메시지들을 읽어낼 수 있는 작품이겠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첫 관극 때 이해도가 60%였다면 두 번째에서 85% 정도로 올라간 느낌이었는데요, 

이 책을 읽고 남은 15%가 속 시원히 채워졌습니다.

제가 찾아본 이 작품의 어떤 줄거리 요약보다 구체적이면서도 명확하고 깔끔했으며, 

관극 시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인물의 감정선을 쉽게 풀어 설명해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글을 읽음으로서 제가 느끼는 뮤지컬의 작품성까지 한껏 올라 갔습니다.



그렇게 이전에 봤던 작품의 꼭지를와 나머지 작품들에 대한 부분도 모두 읽었습니다. 

그 다음 든 생각은 이 작가님이 쓰신 다른 글도 전부 읽어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작품의 일부는 제목도 들어보지 못한 고전에 가깝지만 

그마저도 모두 매력적으로 느껴지게 하는 글 솜씨입니다. 

작품의 배경 지식과 줄거리를 사족 없이 알차게 풀어내면서 

독자가 그 넘버를, 나아가 그 작품과 그 배우, 그 창작진을 궁금해하게 만듭니다. 

특히 작품 속 여성 캐릭터와 그 의의를 짚어내는 부분을 읽으며 

이런 2차 콘텐츠가 더 많이 나와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문정 감독님, 정성화 배우님의 추천사가 한 자도 틀리지 않다는 걸 증명하는 책입니다.

또한 각 뮤지컬의 가장 대중적이고 유명한 넘버를 꼽는 대신 

작가가 사랑한 한 곡만을 중심으로 뮤지컬의 본질을 풀어나가는 구성도 너무나 완벽했습니다. 


뮤지컬을 향해 보내는 작가님의 러브레터를 내내 훔쳐 읽고 싶은 기분입니다. 

뮤지컬에 입문하고자 하는 관객부터 뮤지컬 애호가까지

누구든 이 책을 읽으면 뮤지컬을 더욱 깊이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객석에 처음 앉았을 때, 막이 오르기 전의 두근거림을 누구보다도 사랑한다. 슬프게도 공연을 보면 볼수록, 이 두근거림은 점점 줄어든다. 두근거림이 사라진 자리에 취향이 자리잡는다. 나는 바로 그 즈음부터 나 자신을 씨어터고어로 인식하게 되었다. 꾸준히 평생 극장에 가는 사람. - P5

수업이 끝난 교실에서 혼자 칠판에 끄적여 보는 소심한 사랑 고백 같은 글이다. 훗날 온갖 공연 프로그램 책자들과 공연 음반들 사이에서 발견될 고백. 뮤지컬이여, 받아주시기를. - P6

인간의 입장에서 유다와 마리아는 예수의 마음속 분량을 두고 싸우지만 둘 다 그의 마음을 얻기에는 실패한다. 육신을 떠난 예수는 다시 신의 영역으로 들어가 버리니 말이다. - P40

이 노래에서 광대를 들여보내라는 가사가 반복될 때마다 데지레는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새롭게 인식하며 상대방과 자신을 돌아보며 성찰을 계속해 나간다. - P53

대부분의 뮤지컬에서 이토록 강력한 노래들은 대대로 남성 인물들의 전유물이었다. 여성 인물 하나를 두고 사랑의 라이벌이 되어 대립할 때나, 전쟁을 치르거나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싸울 때 등, 대치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노래들이다. 그런데 이 노래는 두 여성이 각자의 다른 애정관을 두고 물어뜯기라도 할 듯이 자신의 사랑법이 옳다고 주장한다. - P79

누구보다 큰 질곡을 겪으면서도 쓰러지지 않은 강한 인물이건만 송화를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그를 망가뜨리면서도 사랑한다고 부르짖던 그 사람들의 시선 안에 갇힌다. - P115

그리고 이 노래 ‘롤라의 세상‘은 롤라가 세상을 향해 나란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포효하는 노래다. - P132

크리스티안이 눈먼 사랑을 노래할 때 사틴은 사랑이라는 말에 삶 그 자체를 담았음을 크리스티안이 어찌 알까.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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