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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각본
김지혜 지음 / 창비 / 2023년 8월
평점 :
김지혜 교수님의 신간, <가족각본>의 가제본을 받아 보았습니다. 생각보다 얇아서 처음에는 좋았습니다. 요즘 안 그래도 바쁘고 정신 없는 시기인데 서평단을 신청하다니, 하며 약간은 후회를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다 읽고 나니 출간되는 책은 이보다 최소 다섯 배는 두꺼웠으면 하는 바람이 듭니다. (목차를 보면 무리한 요구일 것 같긴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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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제에 어느 정도 공감하며 책을 펴는 독자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독자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다행히도 첫 번째 경우였는데요. 읽으면서 느낀 점은 김지혜 교수님이 '설득'에 정말 능한 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가족각본'이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도, 매 장 앞머리마다 던져지는 질문들을 읽을 때에도 제가 교수님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질문들은 늘 저를 멈춰 세웠습니다. 왜? 어떤 근거로 그런 말을 하지? 스스로에게 물으면 잘 대답할 수가 없었고 오히려 혼란스러워졌습니다. 하지만 그 장을 다 읽고 나면 혼란스럽던 머리가 말끔해지는 느낌이었어요. 김지혜 교수님은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가장 올바른 해결책은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시선을 가진 분이고, 그 목소리에는 믿음을 주는 힘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낍니다.
그렇게 이 얇은 가제본 한 권을 다 읽고, 저는 뿌연 안개 속에 들어갔다가 무지개를 만나기를 몇 번을 반복한 기분이었습니다. 이 책의 주장에 공감하지 않는 독자라도 이런 글을 읽으면 분명 설득당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의문을 제기하고 대안가족의 가능성을 제안하는 콘텐츠가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그에 대한 반박의 목소리도 많이 들립니다. 이 책은 그런 사람들과 두 편의 사이에서 물음표로 가득한 채 갈팡질팡하는 사람들의 손을 끌어다 앉혀 놓고 처음부터 하나씩 설명해 주는 친절한 안내서 같습니다. 하지만 만만하지는 않아요. 이 책은 그 모든 콘텐츠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펼칠 수 있도록 밑바닥을 든든히 받쳐 주는 버팀목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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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런 류의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제가 느끼는 평등함과 올바름을 다른 이에게 이해시킬 수 있는 언어를 쥐어 주기 때문입니다. 저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머릿속에 있는 생각은 잘 정리되지 않고 어렵게 정리한 생각을 입 밖으로 낼 용기를 모으려면 또 한나절이 걸립니다. 그런 사람이어서인지 이런 명쾌한 책을 읽으면 늘 기분이 좋습니다. 대리 만족이랄까요.
저희 가족은 여성으로만 삼대가 같이 삽니다. 외할머니, 엄마, 그리고 저인데요. 성별로 인한 갈등이랄 게 별로 없을 것 같은 구성이지만 가끔씩 답답한 지점들이 생깁니다. 출간되는 완전한 버전의 <가족각본>을 읽으면 어쩌면 그런 답답한 순간에 조금은 더 목소리를 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족 안에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의문을 가져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이 책을 읽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가족은 응당 이래야 한다는 한국사회의 오래된 각본이 과연 우리의 인식 속 어디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김지혜 교수님의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처음 보았을 때가 생각납니다. 출간되자마자 큰 반응을 얻은 책이지만 저는 약 1년이 지나서야 읽었던 것 같습니다. 세상이 떠들썩하면 왠지 휩쓸려가고 싶지 않은 이상한 오기 때문이었을까요. 귀여운 오리와 캐치하고 명쾌한 제목은 충분히 독자를 끌어들일 만했다고 생각합니다. 책의 내용도 좋았지만,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서인지 저는 기대보다 약간 약하다고 느꼈습니다. 호흡이 좀 짧았다고 할까요... 가제본의 설렘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점에서 저는 이번 책이 더욱 마음에 남고 뒷부분이 기대됩니다. 호흡이 끊어지지 않으면서 한 주제를 여러 방향으로 쑥쑥 파고 들어가는 느낌이 시원스럽습니다.
덧붙여 이렇게 멋진 기획을 꾸미고 이 책을 탄생시키신 담당 편집자님께도, 신입 편집자로서 존경의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더 기대하게 만드는 책입니다. 저도 언젠가 이런 저자분을 만나 이런 책을 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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