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글쟁이들 - 대한민국 대표 작가 18인의 ‘나만의 집필 세계’
구본준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한겨레> 문화부 책 담당 기자가 1년간 취재한 글쟁이 18인의 특별한 서재 이야기이다. 그들만의 글쓰기 노하우와 자료 정리법, 정보 습득 기술을 총체적으로 공개한다. 특히 글로만 만나오던 글쟁이들의 편안한 모습과 사적인 공간을 사진기자의 카메라를 통해 만나볼 수 있다.



우리 시대 최고의 인문교양 글쟁이_ 국문학 저술가 정민
“이거, 병원에서 의사들이 환자 차트 꽂아두는 거치대에요. 우연히 의료용품점 앞을 지나가다 보고 ‘이거다’ 싶어 거금을 주고 바로 산 겁니다.” 수백 개 차트 등에는 하나하나 정 교수가 직접 쓴 제목들이 적혀 있었다. 정 교수는 차트꽂이에서 손 가는 대로 하나를 뽑아 보여주었다. 이미 책을 낸 아이템이었는데 초기 기획서와 메모 등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몇 십 배는 될 만한 아이디어들이 거치대에 꽂혀 생각과 내용이 익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 물건을 ‘씨앗 창고’라고 부른다. 물론 ‘생각의 씨앗’이다.
출판사들이 왜 정 교수를 특급 필자로 평가하는지, 그에게 책을 내자고 몰려가는지 알 수 있었다. 책으로 쓸 것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사는 필자가 대한민국에 몇이나 되겠는가. 그가 외국 연수를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출판사들이 달려갔다는 이야기가 조금씩 실감나기 시작했다. (p.9)

미술과 대중을 이어준 도전적인 개척자_ 미술 저술가 이주헌
1995년 봄, 그는 무작정 화랑 겸 출판사인 학고재의 우찬규 사장을 찾아갔다. 그는 우 사장에게 유럽 주요 미술관을 가족과 함께 답사해 기행문처럼 들려주는 대중적 미술책을 펴내자고 제안 했다. 그리고 그 취재비용으로 1천만 원을 먼저 달라고 요청했다. 책의 인세를 미리 받는 선인세를 조건으로 내건 것이다. 우 사장은 놀랍게도 그 자리에서 흔쾌히 이씨의 조건대로 책을 펴내기로 약속했다. 그렇게 출판사에서 1100만 원을 먼저 지원받은 이씨는 저금한 돈 400여만 원에서 달랑 100만 원만 남기고 모두 인출해 여행비에 보탰다. 그해 8월 말, 이씨는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유럽으로 출발했다. 이씨 나이 33세, 아이들은 겨우 세 돌과 한 돌이 지났을 때였다. (p.28)

삶과 글이 일치하는 글쟁이_ NGO 저술가 한비야
한씨의 일기장은 특별하지 않은 특별한 일기장이다. 취재수첩 같이 생긴 작은 스프링노트가 일기장이다. 여기에 ‘그날 하루 느끼고 떠올린 모든 것들’을 적는다. 그가 건져 올린 생각이며 인상적인 장면은 일차적으로 이 메모장에 즉석에서 담기고, 그 뒤 다시 꺼내어져 글로 다듬어진다. “저는 사실 현장을 전하는 리포터에 가까워요. 현장의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이 감동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잖아요. 칼럼을 모아서 책을 내는 것은 절대 안 해요.”
인터뷰를 하는 도중에도 수시로 메모를 해댔다. 표현이 좋다 싶으면 바로 받아 적고, 또 떠오른 아이디어가 있다며 바로 적어넣곤 했다. “쓰신 책을 읽어보면 ‘문체는 사실을 넘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직접 체험한 것을 잘 전달해주는 생생함이 아무리 공들여 쓴 소설 묘사보다도 감동적이게 되는 거잖아요.” “문체는 사실을 뛰어넘지 못한다고요? 그거 구기자가 한 말이에요?” “네, 그냥 제 지론이에요.” “좋은 말인데요. 나도 적어둬야지.” 누가 취재를 하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실제 한씨 말고도 다른 글쟁이들 상당수가 메모광들이다. 아무리 뛰어난 머리도 잉크를 따라가지 못한다. 글쟁이에게 메모보다 좋은 무기는 없다. (p.62)

치열한 지식 전사, 진정한 프로 저술가_ 동양철학 저술가 김용옥
1980년대 당시 교수에 대한 모든 고정관념을 깨자고 작정한 듯 등장했던 도올도 환갑을 앞두면서 바뀌어가는 듯 하다. 요즘에는 특유의 ‘잘난 척’과 ‘오버’ 그리고 ‘공격성’이 그래도 많이 덜해졌다는 평을 듣는다. “내가 예전 내 책들을 봐도 과했다는 생각이 들어. 그걸 수용해준 사회에 감사해요. 사실 그때 내가 그렇게 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나를 까대고 뭉개려는 인간들에 대한 생명력의 표출이었어요. ‘너희들이 그렇게 까대도 도올은 사라질 수 없다’는 생명력을 보여주는 과시였던 거지. 이제는 좀 정갈한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p.73)

“나는 고객 성공을 위한 가치창조자”_ 자기계발 저술가 공병호
최근 들어 공씨의 생산 속도는 더 빨라졌고 시장에서 브랜드의 힘은 더 커졌다. 이런 상승세는 연간 300회 가까이 펼치는 강연에서 얻는 아이디어 덕분이다. 강연에서 아이디어와 아이템을 얻고 이를 다시 강연 아이템으로 바꿔 가다듬어 책으로 낸다. 이런 과정에서 시장 예측력이 강해지고 다시 책이 인기를 얻어 강연 요청도 늘어나면서 공씨의 수입도 초기보다 몇 배나 늘어났다.
“강연이라는 건 대중들 앞에서 두 시간 동안 쇼 비즈니스를 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청중들에게 받은 자극을 받은 것을 가지고 책을 써요.” 이 같은 ‘선 강연-후 출간’ 방식은 베스트셀러가 나오면 강연이 늘어나는 상호작용을 한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책으로 펴내기 전에 또 다른 강연에서 시험해보고 청중들의 반응을 살피며 예측한다. 책 아이템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시장예측력은 이런 강연으로 확보하는 것이다. (p.114)

가장 뛰어난, 그러나 가장 불행한 글쟁이_ 만화작가 김세영
김씨의 방에는 책상이 있고 그 옆에 이불 없이 요 하나가 방 한가운데에 깔려 있다. 이 요가 그의 진짜 ‘작업 공간’이자 ‘구상 공간’이다. 그는 평소 이 요 위에 엎드린 자세로 구상을 하고, 종이에 콘티를 짠다. “수평적인 자세일 때 가장 창조력이 샘솟는 것 같다”고 김씨는 웃으며 설명했다. 말풍선 모양도 여러 가지고, 칸 모양도 변화가 많아 컴퓨터 작업보다는 손작업으로 콘티를 짜는데, 엎드린 자세가 익숙해져 가장 편하다는 것이다.
작업 특성상 만화스토리는 이야기와 영상을 동시에 생각해야만 한다. 그런 복잡한 작업을 김씨는 처음부터 치밀하게 구성해서 진행하지는 않는다. 완급조절도 마찬가지.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쓸 뿐이라고 한다. “장면 연출 때문에 머리 짜내고 고심한 적은 없어요. 상상력이라는 것이 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어려서부터 공상을 많이 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작품 구상은 생각이 흘러가는 대로 그냥 맡긴다. 치밀한 반전, 아귀가 맞는 구성이 돋보이는 『타짜』 같은 작품들도 모두 전혀 구상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p.158)




구본준 - <한겨레> 사회부 기동취재팀장을 거쳐 2008년 현재 문화부 대중문화팀장으로 일한다. 블로그주소는 blog.hani.co.kr/bonbon 이다.



2000년대 한국 출판계의 주역으로 떠오른 우리 시대 글쟁이들은 출발점에 따라 학자 집단과 전문가 집단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학자 집단에는 교수 글쟁이와 전업 글쟁이가 있는데, 모두 자기가 연구한 성과나 전공 분야의 최신 정보를 주기적으로 책으로 펴내고 있다. 이 책에서 소개한 정민, 주경철, 정재승, 임석재 교수 등이 대표적이다. 이 중에는 아주 드물지만 교수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버리고 글쓰기로 대중과 직접 만나는 이들도 있다. 1980년대 일찌감치 '프로 지식인'을 선언하고 자기 브랜드를 구축해온 도올 김용옥 씨가 여기 속한다.
그리고 이들 이상으로 확실한 저술가라고 볼 수 있는 이들이 교수가 아닌 학자 저술가들이다. 자리가 제한적이고 대중적 글쓰기에 대한 억압 풍토가 여전히 남아 있는 교수 사회에 속하지 않은, 또는 교수가 되지 못해 프로 저술가가 된 이들이다. 이덕일 주강현, 노성두, 허균, 공병호 씨 등이다. 박사학위 소지자거나 유학파들로, 학문적 지식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춘 글을 통해 자기 분야 대중화에 앞장선다. [......]
나는 책 담당 기자로 일하면서 각 분야별로 글쟁이들이 등장하고, 주목받으며 저술가로 자리 잡는 과정을 흥미롭게 지켜봐왔다. 이들의 책을 즐겨 읽으면서 팬으로서 다음 책을 기다리기도 했다. 그래서 잠시 책 담당 기자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면서 이들을 조명하는 기사를 써보기로 마음먹었다. 마침내 2006년부터 2007년까지 분야별 최고 저술가들을 만나 '한국의 글쟁이'라는 시리즈를 <한겨레> 책 섹션에 1년 가까이 연재하게 되었다. [......]
가장 뜨거운 반응을 보인 사람들은 흥미롭게도 내가 소개한 저술가 자신들이었다. 교수가 아닌 저술가들의 경우, 독자들에게는 높은 평가와 인기를 얻고 있는데 정작 언론에서는 학자들보다 못한 2진급으로 평가받는 아픔을 겪고 있었다. 교수 저술가들도 아직 대중과 소통하는 것을 경시하는 학계의 풍토 속에서 힘들게 연구와 글쓰기를 병행하고 있었다. 그런 어려움에 주목해준 첫 번째 평가자였다는 점에 그들은 고마워했다. 나 역시 그들과 만나 새로운 지식, 새로운 주제, 미래의 책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기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자 행복을 만끽했다. 그런 행복감 덕분에 신문에서 못 다한 이야기를 더해 다시 이 책을 썼다. ('인터뷰 후기' 중에서)



    




우리 시대 최고의 인문교양 글쟁이_ 국문학 저술가 정민
미술과 대중을 이어준 도전적인 개척자_ 미술 저술가 이주헌
대중이 원하는 역사는 따로 있었다_ 역사 저술가 이덕일
삶과 글이 일치하는 글쟁이_ NGO 저술가 한비야
치열한 지식 전사, 진정한 프로 저술가_ 동양철학 저술가 김용옥
스스로 새로워지는 힘을 만드는 글쟁이_ 변화경영 저술가 구본형
교양만화의 아버지_ 만화가 이원복
“나는 고객 성공을 위한 가치창조자”_ 자기계발 저술가 공병호
좌절을 딛고 일어선 2모작 인생_ 과학칼럼니스트 이인식
너희가 아키비스트를 아느냐_ 민속문화 저술가 주강현
가장 뛰어난, 그러나 가장 불행한 글쟁이_ 만화작가 김세영
글쟁이 팔자는 타고나는가_ 건축 저술가 임석재
책은 집념과 오기의 산물_ 교양미술 저술가 노성두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아름다운 교향곡을 지휘하다_ 교양과학 저술가 정재승
“나는 문필가여”_ 동양학 저술가 조용헌
옛 사람 마음을 읽어 들려주다_ 전통문화 저술가 허균
가장 이상적인 지식인 글쟁이의 모델_ 서양사 저술가 주경철
“나는 내 직업을 만들었다”_ 출판칼럼니스트 표정훈

    


책은 살아 있다. 그리고 세상은 저술가를 필요로 한다.
우리 시대를 바꾸는 18인의 글쟁이와의 유쾌한 만남


정민 이주헌 이덕일 한비야 김용옥 구본형 이원복 공병호 이인식
주강현 김세영 임석재 노성두 정재승 조용헌 허균 주경철 표정훈


글 하나로 먹고사는 이들, 글쓰기가 삶의 중심인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글쟁이, 저술가다.
우리의 눈에는 학자들의 탁월한 논문과 저널리스트들의 훌륭한 특종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세상을 바꾸는 것은 그 시대에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대중에게 이야기해주는 저술가들의 책일 수 있다.
세상은 저술가를 필요로 한다....
책은 살아 있다. 그리고 세상은 저술가를 필요로 한다.
우리 시대를 바꾸는 18인의 글쟁이와의 유쾌한 만남


정민 이주헌 이덕일 한비야 김용옥 구본형 이원복 공병호 이인식
주강현 김세영 임석재 노성두 정재승 조용헌 허균 주경철 표정훈


글 하나로 먹고사는 이들, 글쓰기가 삶의 중심인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글쟁이, 저술가다.
우리의 눈에는 학자들의 탁월한 논문과 저널리스트들의 훌륭한 특종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세상을 바꾸는 것은 그 시대에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대중에게 이야기해주는 저술가들의 책일 수 있다.
세상은 저술가를 필요로 한다.

대한민국 대표 작가 18인의 서재를 만나다

<한겨레> 문화부 책 담당 기자가 1년간 취재한 글쟁이 18인의 아주 특별한 서재 이야기. 그들만의 글쓰기 노하우와 자료 정리법, 정보 습득 기술을 총체적으로 공개한다. 특히 글로만 만나오던 글쟁이들의 편안한 모습과 사적인 공간을 사진기자의 카메라를 통해 만나볼 수 있다. 최고의 글쟁이들이 풀어놓은 비장의 무기들은 각 장별로 팁으로 묶어 독자들에게 보너스로 선사한다.

대중 독자와 예비 작가들을 위한 최고의 外傳!

한 명의 글쟁이를 너무나도 사랑하여 그의 작품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독자들에게 작가의 서재를 엿볼 수 있는 기회는 ‘초콜릿 공장에 들어가는 찰리의 황금티켓’만큼이나 값진 것이다. 독서광들 역시 책을 읽기 전에 작가에 대해 조사해보는 것이 기본이다. 한 달에 책 한 권도 안 보는 ‘독서꽝’이라 해도 관심 있는 분야를 알기 위해서는 그 분야 최고 글쟁이들의 책을 읽을 수밖에 없을 것인데, 제대로 된 마스터피스를 고르기 원한다면 <한국의 글쟁이들>을 앞서 권한다. 매일 일기를 쓰는 청소년부터 작가를 꿈꾸는 지망생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까 고민하는 이 땅의 수많은 글쟁이들에게도 이 책은 밝은 등불이 되어줄 수 있다.

활자로만 만나온 특급 작가들의 인간적인 고백록

긴 취재를 통해 대중이 쉽게 만날 수 없는 골방 속 작가들의 일상과 지나온 인생길, 글 쓰는 고통에 대한 진한 고백들을 담았다. 얼마나 많은 땀과 정성과 시간을 쏟아야 한 권의 책이 나오고 연재 칼럼이 쓰이는지, 어느 정도의 희생이 감내되어야 한 분야의 글쟁이로 우뚝 설 수 있는지 이 시대 최고 작가들의 육성을 통해 들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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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자르기

하늘은 높고 청명하며 가을의 햇살은 따사롭다.
폭포수 아래에서 검법을 익히는 자가 있다.
일명 '칼로 물 베기’
이 검법을 익혀야 '달빛 자르기'로 들어 갈 수 있다.
심신(心身)이 하나가 되고, 나아가 몸과 마음을 잊는 경지에 도달해야 검신(劍神)이 될 수 있다.
‘칼로 물 베기’ 수련을 시작한 지 어언 17년이 흘러갔다.
이제는 폭포수의 무게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달인(達人)의 경지에 도달했다.
천지 기운을 검(劍)에 모아 우렁차게 떨어지는 폭포수를 찰라에 자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폭포수는 순식간에 잘라진 상처가 아물었다.
이제 ‘달빛 자르기’를 익힐 때가 되었다.
달빛은 물과 달리 형체가 없는 빛이다.
보름달이 밝게 뜨면 바위산 정상에 오른다.
소나무 가지 사이로 요요(耀耀)히 만월(滿月)이 흐른다.
달빛을 느끼려면 심신이 공적(空寂)한 상태에 몰입되어야 한다.
일말(一末)의 번뇌 망상이 일어나면 달빛은 느낄 수 없다.
오로지 성성(惺惺)한 육감과 영감으로 달빛의 흐름을 감지 할 수 있는 것이다.
‘달빛 자르기’는 자르는 자도 없고 자르는 대상도 없는 자르기다.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일으키는 무위자(無爲子)의 행위인 것이다.
그것은 불법(佛法)을 깨친 수도자의 불행(佛行)과 같다.
고른 호흡으로 내공을 쌓아 망상이 일어나지 않으면 마음이 우주와 활연관통(活然貫通)한다.
달과 내가 둘이 아니며 심신이 경계에 무애하여 자재한다.
서슬 푸른 칼과 소나무 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달빛과 어우러져 검무(劍舞)가 펼쳐진다.
“야~앗! “
‘달빛 자르기’도 완성한 그는 하산하기로 하였다.
이제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간다.
아, 얼마만인가! 아내와 아들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속세에서 검술을 펼치는 것이 더욱 어려운 것이다.
이제까지 닦은 무예를 보전하고 세속사와 감정에 흔들리지 않도록 보임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행각의 전략은' 지피지기 백전백승(知彼知己 百戰百勝)' 일 뿐이며
살인검(殺人劍)과 활인검(活人劍)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할 수 있는 수완을 길러야 한다.
멀리 장천(長天)으로 학이 울고 간다.
달빛은 더욱 시리고
그리운 산정에는 노송(老松)이 고고(孤孤)히 버티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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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봉

매봉에 앉으면 나는 독수리다. 하루 동안에 사면팔방을 주유하고 정오가 되면 이곳에 날개를 쉰다. 북한강을 퍼 마시고 바람을 맞으며 땀을 날리고 산과 산을 연이어 바라본다. 사시사철이 좋으나 울긋불긋한 가을산이 좋아라.

흑암 어둠의 사신 죽음의 사자가 칼과 창을 쨍그렁 쨍그렁 흔들며 나를 잡으러 온다. 순수 백설은 바람에 나부끼며 나를 좁은 길로 인도하는구나. 절명의 순간에도 처절한 환희를 맞보며, 장승 같은 죽음의 사자들 다리 사이를 웅크리며 필사적으로 빠져 나온다. 골수를 얼게 하는 비참과 치욕을 참으며, 세포 세포의 살아 용약하는 힘을 모아 희미한 빛으로 향한다. 나는 아직 죽지 않는다 살고 싶다. 여신이여! 뜨거운 심장의 피를 나에게 부어주오.백설이 흩날리는 광야 방황하는 나에게 안식처가 되어주오. 매봉으로 가자. 거친 피부를 할퀴는 마귀 할망구가 낄낄대고 웃더라도, 북한강 갈증에 허덕이는 목구멍을 적시자. 드디어 아침이 오고 있다 밝은 해가 뜬다. 죽음의 사신이 도망간다. 산과 나무들이 고개를 숙이고 경배를 올리니 나는 왕이로소이다.

희망 청록의 맹아 나의 아들아. 황하의 진흙먼지 헤치며 누더기 걸치고 힘든 보리고개 넘어간다. 진달래꽃잎 씹으며 풀피리 분다. 사랑하는 여인이여! 울끈불끈 핏줄 넘치는 이 팔뚝을 보라. 나에게 안겨 넘치는 생명을 나누어 받으라. 시작이여 인생의 시작이여. 꿀벌은 부지런히 집을 짓고 화초를 오가며 꿀을 따는구나. 나무의 거친 숨소리가 매봉에 가득하다. 독수리는 구름 위를 빙빙 돌며 얼음을 씹는다. 산이 쑥쑥 자라고 바람은 노래를 부르고, 저녁 어스름 푸른 강 어부가 그물을 친다.

질투 풍요 속의 빈곤. 고독한 나그네 방랑의 시작. 비는 내리고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길이 보이지 않는다. 뙤약볕 아래 노동자의 비애는 비참하다. 무참한 진화는 차라리 전쟁 사랑도 이제는 전쟁. 욕망이 춤추는 매봉에는 쉴 곳이 없고 폭풍우 몰아치는 마을 처마 밑에 몸을 숨긴다. 독수리는 낮게 선회하며 살찐 토끼를 노리고 사람들은 저자 거리로 모인다. 광기는 숲 속에 가득하고 새소리 요란하구나. 강 안개 몽실거리는 새벽에 어부가 무거운 그물을 거둔다.

산마다 홍엽 냉기는 푸른 생명을 난도질한다. 핏빛으로 물드는 산하 차라리 성스럽구나.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애욕과 야망 떨구고 빈 마음으로 돌아가리라. 탐스런 감 서너 개 손에 들고 매봉으로 돌아가리라. 어린 새끼들 짹짹거리고 겁먹은 암컷 기다리는 감옥으로 돌아가리라. 짧은 형기를 마치는 날 낙엽은 우수수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 서리를 따 먹으며 살리라. 강 위에는 눈부신 햇살 받으며 빈 배가 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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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1 이외수 장편소설 컬렉션 6
이외수 지음 / 해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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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수



 1946년 경남 함양 출생
 1972년 춘천교육대학교 중퇴
 1972년「강원일보」신춘문예에 단편 '견습 어린이들'로 당선
 1975년「세대」지에 중편 '훈장'으로 신인문학상 수상
 1978년 장편 <꿈꾸는 식물>출간
 1990년 나우갤러리에서 4인의 에로틱 아트전 개최
 1992년 장편 <벽오금학도>출간
 2002년 조각보 잇듯 여러 인물을 선보인 장편 <괴물> 출간
저자 홈페이지 : http://www.oisoo.co.kr/
저자 Email : oisoo@chollian.net


 
초지일관 정신과 영혼의 문제를 소설 소재로 삼아온 이외수. 그는 춘천의 명물중 하나다. 태어난 곳은 경남 함양군 수동면 상백리지만 춘천교대에 입학한 1965년 이후 쭉 춘천에 살고 있다. 한 계간지는 그와의 인터뷰에서 춘천과 이외수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했다.

"춘천 교동의 한림대 앞에서 그를 찾으면 그의 집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만큼 그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 한달 평균 3백여명이 되는 식객들과 어울려 산다. 그의 문하생들과 독자, 무작정 찾아와 인생을 상담하는 사람들까지... 1년 내내 그의 집을 찾는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가 더 춘천에 애정을 갖고있는 것은 도시가 가진 아름다움 때문이다. 예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해야하는 분야다. 춘천은 아직도 순수와 낭만이 남아있다. 요즘처럼 낭만이나 멋스럼이 점점 사라져가는 시대에 환경은 정말 중요하다. 지나친 도시적 환경속에선 삭막한 글이 나온다. 특히 그는 감성적 글을 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욱 춘천의 존재는 크다." (「문학포럼」- 2001년 여름호 중에서)

춘천교대 자퇴 1호생인 이외수는 1972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견습 어린이들'이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이후 다방 DJ, 시골분교 소사, 페인트공, 학원 강사 등을 전전하며 작품활동을 해왔다. 학창시절에는 농구, 탁구, 핸드볼 선수였다. 특히, 그림에 탁월한 소질이 있어 작가 데뷔 후 선화(仙畵 ) 개인전--94년 7월, 신세계 갤러리--을 열기도 했다.

풍기는 이미지와 달리 그는 컴퓨터 통신(인터넷이 보편화된 이후에는 웹서핑)과 게임 마니아다. 한 달에 200시간 가까이 통신을 하다가 통신업체로부터 건강에 해로우니 지나친 컴퓨터 통신은 삼가라는 전화까지 받았다. 게임에도 푹 빠져서 끼니도 거르고 13시간 동안 축구 게임만 하는 경우도 있다. 또다른 취미는 작곡. '물방울'이란 곡은 피아노 소품으로 물방울이 통통 튀는 모습을 보고 직접 창작한 것이라 한다.

2002년 현재, 그는 <황금비늘> 후 5년만에 장편 <괴물>을 출간해 독자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고 있다. 그 역시도 지금까지 써온 작품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손꼽았는데, 이전에 쓴 작품들은 이 소설을 위한 습작이었다고 할 정도. 평소 문체를 밀도있게 연구해 온 그는, <괴물>에서 다채로운 문체 변화를 보여준다.


 
소설은 왜 쓰는가. 행복을 위해서 쓴다. 내가 얻은 깨달음, 내가 얻은 아름다움을 독자와 공유하는 행복감 때문에 쓴다.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사랑도 없다. (1997년 9월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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