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자르기

하늘은 높고 청명하며 가을의 햇살은 따사롭다.
폭포수 아래에서 검법을 익히는 자가 있다.
일명 '칼로 물 베기’
이 검법을 익혀야 '달빛 자르기'로 들어 갈 수 있다.
심신(心身)이 하나가 되고, 나아가 몸과 마음을 잊는 경지에 도달해야 검신(劍神)이 될 수 있다.
‘칼로 물 베기’ 수련을 시작한 지 어언 17년이 흘러갔다.
이제는 폭포수의 무게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달인(達人)의 경지에 도달했다.
천지 기운을 검(劍)에 모아 우렁차게 떨어지는 폭포수를 찰라에 자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폭포수는 순식간에 잘라진 상처가 아물었다.
이제 ‘달빛 자르기’를 익힐 때가 되었다.
달빛은 물과 달리 형체가 없는 빛이다.
보름달이 밝게 뜨면 바위산 정상에 오른다.
소나무 가지 사이로 요요(耀耀)히 만월(滿月)이 흐른다.
달빛을 느끼려면 심신이 공적(空寂)한 상태에 몰입되어야 한다.
일말(一末)의 번뇌 망상이 일어나면 달빛은 느낄 수 없다.
오로지 성성(惺惺)한 육감과 영감으로 달빛의 흐름을 감지 할 수 있는 것이다.
‘달빛 자르기’는 자르는 자도 없고 자르는 대상도 없는 자르기다.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일으키는 무위자(無爲子)의 행위인 것이다.
그것은 불법(佛法)을 깨친 수도자의 불행(佛行)과 같다.
고른 호흡으로 내공을 쌓아 망상이 일어나지 않으면 마음이 우주와 활연관통(活然貫通)한다.
달과 내가 둘이 아니며 심신이 경계에 무애하여 자재한다.
서슬 푸른 칼과 소나무 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달빛과 어우러져 검무(劍舞)가 펼쳐진다.
“야~앗! “
‘달빛 자르기’도 완성한 그는 하산하기로 하였다.
이제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간다.
아, 얼마만인가! 아내와 아들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속세에서 검술을 펼치는 것이 더욱 어려운 것이다.
이제까지 닦은 무예를 보전하고 세속사와 감정에 흔들리지 않도록 보임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행각의 전략은' 지피지기 백전백승(知彼知己 百戰百勝)' 일 뿐이며
살인검(殺人劍)과 활인검(活人劍)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할 수 있는 수완을 길러야 한다.
멀리 장천(長天)으로 학이 울고 간다.
달빛은 더욱 시리고
그리운 산정에는 노송(老松)이 고고(孤孤)히 버티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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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봉

매봉에 앉으면 나는 독수리다. 하루 동안에 사면팔방을 주유하고 정오가 되면 이곳에 날개를 쉰다. 북한강을 퍼 마시고 바람을 맞으며 땀을 날리고 산과 산을 연이어 바라본다. 사시사철이 좋으나 울긋불긋한 가을산이 좋아라.

흑암 어둠의 사신 죽음의 사자가 칼과 창을 쨍그렁 쨍그렁 흔들며 나를 잡으러 온다. 순수 백설은 바람에 나부끼며 나를 좁은 길로 인도하는구나. 절명의 순간에도 처절한 환희를 맞보며, 장승 같은 죽음의 사자들 다리 사이를 웅크리며 필사적으로 빠져 나온다. 골수를 얼게 하는 비참과 치욕을 참으며, 세포 세포의 살아 용약하는 힘을 모아 희미한 빛으로 향한다. 나는 아직 죽지 않는다 살고 싶다. 여신이여! 뜨거운 심장의 피를 나에게 부어주오.백설이 흩날리는 광야 방황하는 나에게 안식처가 되어주오. 매봉으로 가자. 거친 피부를 할퀴는 마귀 할망구가 낄낄대고 웃더라도, 북한강 갈증에 허덕이는 목구멍을 적시자. 드디어 아침이 오고 있다 밝은 해가 뜬다. 죽음의 사신이 도망간다. 산과 나무들이 고개를 숙이고 경배를 올리니 나는 왕이로소이다.

희망 청록의 맹아 나의 아들아. 황하의 진흙먼지 헤치며 누더기 걸치고 힘든 보리고개 넘어간다. 진달래꽃잎 씹으며 풀피리 분다. 사랑하는 여인이여! 울끈불끈 핏줄 넘치는 이 팔뚝을 보라. 나에게 안겨 넘치는 생명을 나누어 받으라. 시작이여 인생의 시작이여. 꿀벌은 부지런히 집을 짓고 화초를 오가며 꿀을 따는구나. 나무의 거친 숨소리가 매봉에 가득하다. 독수리는 구름 위를 빙빙 돌며 얼음을 씹는다. 산이 쑥쑥 자라고 바람은 노래를 부르고, 저녁 어스름 푸른 강 어부가 그물을 친다.

질투 풍요 속의 빈곤. 고독한 나그네 방랑의 시작. 비는 내리고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길이 보이지 않는다. 뙤약볕 아래 노동자의 비애는 비참하다. 무참한 진화는 차라리 전쟁 사랑도 이제는 전쟁. 욕망이 춤추는 매봉에는 쉴 곳이 없고 폭풍우 몰아치는 마을 처마 밑에 몸을 숨긴다. 독수리는 낮게 선회하며 살찐 토끼를 노리고 사람들은 저자 거리로 모인다. 광기는 숲 속에 가득하고 새소리 요란하구나. 강 안개 몽실거리는 새벽에 어부가 무거운 그물을 거둔다.

산마다 홍엽 냉기는 푸른 생명을 난도질한다. 핏빛으로 물드는 산하 차라리 성스럽구나.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애욕과 야망 떨구고 빈 마음으로 돌아가리라. 탐스런 감 서너 개 손에 들고 매봉으로 돌아가리라. 어린 새끼들 짹짹거리고 겁먹은 암컷 기다리는 감옥으로 돌아가리라. 짧은 형기를 마치는 날 낙엽은 우수수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 서리를 따 먹으며 살리라. 강 위에는 눈부신 햇살 받으며 빈 배가 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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