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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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정말 유쾌한 책이다. 

죽음을 이야기하는 유쾌한 수다라니, 반갑지 않을 수가. 


전부 죽음에 관한 지적이고도 유머 가득한 이야기들이지만, 내겐 크게 세 가지 주제로 구분된다.

종교, 죽음, 그리고 작가로서의 죽음에 대한 고찰.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엔 '기억'이란 무엇인지가 배경으로서 자리한다.

기억은 작가로서, 특히 줄리언 반스로서 천착하는 주제가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이 책의 장르를 굳이 한정한다면 에세이나 회고록쯤 되겠지만, 기억의 신뢰성이나 가치에 대해서도 먼저 짚고 넘어가니, 

굳이 진실만을-그런 게 있다해도- 요구할 필욘 없을 것 같다.

그런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가의 방식 또한 얼마나 유쾌한지, 쿡쿡 웃을 수 밖에.

철학자인 형은 기억을 신뢰하지 않고, "나는 그에 비해서는 기억을 신뢰하는 사람이거나 혹은 자기기만적인 인간일 테니, 내가 기억하는 모든 것이 진실인 양 얘기를 계속해나가겠다."

난 특별한 목적의 글쓰기가 아닌 한, 작가에게 '사실'만을 요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그래야 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한다.

포크레인이 있는데 굳이 삽질만을 고집하는 건, 자원 낭비라고. 그런 면에서, 작가의 다음 말에도 완전 동의. 


"나는 기억을 불신하지 않으며, 오히려 상상의 활동으로서, 자연주의적인 진실과 반대되는 상상력이 풍부한 진실을 담고 있는 것으로서 기억을 신뢰한다. 포드 매독스 포드는 동시에, 그리고 같은 문장 안에서 위대한 거짓말쟁이자 위대한 진실의 발화자일 수 있다."


먼저 종교.

원제가 <NOTHING TO BE FRIGHTENED OF>이고, 부제는 <I DON'T BELIEVE IN GOD, BUT I MISS HIM>이다.

그가 형에게 그 말을 했을 때, 철학교수인 형의 대답은 간단했다고. 

"질척해." 

형과의 대화가 많이 등장하지만, 이 대화만큼 죽음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간단명료하게 보여주는 것도 없다. 

무신론자인 형과 불가지론자인 저자. 확고한 무신론자 앞에서 불가지론자는 당연히 약자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물론 유신론자 앞에서도. (때론 반어적인 의미로)


저자는 죽음을 바라보는 다양한 방식을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죽음이 무서워서 신앙을 갖는 것 뿐이라고 확고하게 믿는 무신론자 어머니를 비롯해, 부모님 각자가 죽음을 맞이하던 방식, 각계각층 사람들의 죽음에 관한 견해, 관련된 일화 등  

종교가 그를 압박하던 순간을, 자위행위를 할 때마다 누군가 자기를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고,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을 친구들과 함께 환영했다는 말은 코믹하다. 

감당안되는 엄숙한 주제일수록 희화화는 중요하고, 필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하는 바. 

리처드 도킨스를 여러번 언급하기도 하고, <만들어진 신>에서 본 유사한 논리들이 나온다.

다른 것은 리처드 도킨스는 신을 부정한다는 것, 줄리언 반스는 스스로를 불가지론자로 규정한다는 것 정도.

나이가 들수록 스스로의 앎에 대해 회의를 느낀다는 겸손의 표현 외에, 크게 다를 것은 없어보인다.


시종일관, 특히 후반부에서 작가로서의 죽음과 자신이 죽음을 바라보는 방식, 무엇보다 작가 정신을 읽는다.

"손상된 사진 한 장. 회한에 사무칠 이유가 될 만하다. 이 지점이 우리 소설가들이 거하는 곳, 무지의 틈새, 모순과 침묵의 땅이다. 외견상 알려진 것으로 당신을 설득하겠노라고, 혹은 그 모순을 해결하겠노라고, (혹은 유용할 정도로 생생히 밝히겠노라고) 그래서 그 침묵을 깨고 말을 하게 만들겠노라고 계획하는."

"바로 소설가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가 기억 못하는 것의 서로 다른 버전들을 조작하는 사람이라는 규정이다."


마지막 독자를 만나는 순간을 이야기하는 대목은 압권.

읽은 사람은 누구나 그의 마지막 독자가 되진 않겠다고 다짐할 것이 분명하다. 그가 소중히 여길 것 같은가? 마지막 독자를?


책은 시종일관 유쾌하고, 농담 가득하다. 킥킥 웃게 만드는 부분도 상당히 많다.

다만 에세이집이 대개 그렇듯, 완급을 조절하는 기승전결 식의 구조는 없고, 죽음이라는 한가지 주제를 관통하는 이야기만을 줄곧 하고 있어서 독서가 약간 늘어지는 면은 있다.

하지만 죽음에 대해 내가 생각해온, 생각했으나 결론내리지 못한 (거의) 모든 공상들이 담겼고, 그보다 많은 부분이 내가 미처 생각도 상상도 하지 못한 수많은 사색으로 채워져 있어서, 매우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누군가와 재미있으면서도 진지한 수다를, 자타 눈치 보지 않고 실컷 즐긴 기분. 유쾌한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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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알고 싶은 독서치유의 모든 것
윤선희 지음 / 소울메이트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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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에 관한 이야기는 일단 눈길이 간다. 

독서의 유용성을 말하든, 유희로서의 독서를 말하든, 책에 관한 에세이든 소설이든간에. 

나로선 독서가 모든 것인 동시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치유 또한 가능하다고 본다.

독서의 능력을 높이 사서가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라면이 보약이 될 수 있듯이, 썩은 물 한바가지가 생명수가 될 수 있듯이. 


'독서치유'라는 것에 집중하기보다, 독서의 능력과 즐거움을 함께 공감하는 맛으로 읽었다.

아무런 효용이 없어도 즐거운 것이 독서지만, 효용, 있어도 좋고 말고.


독서의 효용이란 끝도 없겠고, 많은 것들을 말하고 있다.

인생 연습, 삶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지속'시킬 수 있는 매개체, 객관적으로 자신을 평가/반성하게 하는 도구, 삶의 방향 제시 등.

책에서도 언급되듯, 책을 통해 나라는 존재에 대해 알아갈 수 있다는 것은 그 위력의 핵심 아닐까.


"동일시의 효과"를 설명하며 나온 "불신의 자발적 중지(willing suspension of disbelief)".

19세기 시인 사무엘 콜러리지가 문학적 허구를 진실한 전제로 받아들이려는 독자들의 심리를 설명한 개념이다. 

그 동일시로 우리는 픽션에 깊이 몰입할 수 있지만, 때로 베르테르 효과처럼 부정적 결과를 낳기도 한다고.

나같은 경우, 피가 난무하는 작품은 책이든 영화든 거부하는데, 사실 볼 수는 있다. 저게 가짜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면.

그런데 그렇게 보면 곧 지루해지고 아무런 의미를 상실하더라는. 적당한 몰입은 픽션을 즐기는 핵심.


치유를 위해 책을 고를 때는 거리조절이 가능한 책을 골라야 한다고 말한다.

'객관화시켜서 보기'와 '건설적인 문제 해결책'이 가능한지 따져봐야 한다고. 

그 둘이 성립되지 않으면 오히려 자신이 피해자라는 부정적 시각에 매몰되거나 아픔을 한 번 더 느낄 뿐에 그칠 수 있다고.


동일시와 정화의 과정을 거쳐 자신의 문제를 인식했다면, 고찰을 통해 그 인식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때 글을 쓰는 행위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생산적 독서치유"로서.

와닿는 문구들과 자신만의 메모를 함께 남기는 독서노트 또한 생산적 독서치유의 한 방법이다.

책 리뷰를 하는 블로거들은, 아프든 안아프든 독서치유의 한 방법을 쓰고 있으니, 치유가 아니면 예방이라도 될 듯. 좋구나!


 편협하지 않은 말들이 좋다. 

"무엇이든 읽고 보고 듣고 생각할 수 있다면 좋은 치유의 매개체로 활용 가능하다." - 본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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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에게 배우는 노년의 삶 - 늙은 동물은 무리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
앤 이니스 대그 지음, 노승영 옮김 / 시대의창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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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늙은 동물에 대한 정보가 얼마나 희소한지 말한다. 

어떤 연구에서는 원숭이의 개체를 '어린 유아, 유아, 나이든 유아, 어린 청소년, 청소년, 준 성체, 근 성체, 성체'로 세부적으로 나누지만, 

'늙은 성체'라는 범주는 없다고. 

무려 8단계의 생애 주기가 있지만, 성체 이전만이 존재하고 이후는 존재하지 않는 것. 

늙은 동물 역시 성체의 범주에 들어갈테지만, 

지난한 과정을 거쳐 성체가 되고 바야흐로 노화를 맞이해 죽음에 더 가까워진 개체는 따로 분류될 가치도 없을까.


저자는 늙은 동물에 대한 자료를 찾기 힘든 여러 이유들을 말한다. 
동물의 나이를 판단하기 힘들다는 것. 천수를 다하는 동물이 사실상 전무하다는 것(식용가축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동물학자들도 개체의 진화적 측면에 보다 관심을 갖지, 번식이 끝난 동물에겐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번식은 진화론의 주춧돌이다. 그렇다면 노년에 이른 사회적 동물의 삶이 진화적으로 중요할 수 있을까?
진화적 관점에서는 늙어서 식량을 축내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편이 더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동물이 늙어서도 살아가는 것을 보면 무언가 진화적 이유가 있음이 틀림없다."

이것이 저자의 접근 방식이다. 나로선 과연 모든 것을 진화적 관점으로 이해해야만 하는지 의문이 남는다.
진화적 측면이 아니기에 관심이 없는 부분을, 진화적 이유가 있을 것임이 분명하다고 가정하고, 다시 또 진화적 관점으로 설명하려 한다는 것.
모든 것을 설명하는 유일한 관점이라. 

늙은 사회적 동물의 필요를 크게 네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노년까지 살아남은 동물은 훌륭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음이 틀림없다.
둘째, 번식 능력이 없는 암컷도 "중요하다고 짐작할 수 있다." 어린 새끼를 키우는 등.
셋째, "일부 유전자는 나이 든 동물의 행동에 영향을 미쳐 집단 전체에 긍정적 결과를 가져온다."
넷째, 상당수 늙은 동물은 족벌성이나 이타성을 발휘해 친족의 삶을 개선시키고 자기 유전자의 생존 가능성을 높인다.

(서로 중첩되기도 하지만) 위의 큰 틀 안에서, 다양하고 흥미로운 사례들을 이야기한다.
어른 코끼리 없이 자란 코끼리들의 공격성, 늙은 동물이 가진 지혜의 효용과 전달, 경험의 축적과 리더쉽, 
침팬지 무리의 교미를 8년동안 조사한 결과, 수컷을 유혹하는데 있어 젊은 암컷은 늙은 암컷보다 조금도 더 유리하지 않다는 것은 놀라웠다.
등장하는 동물들을 각각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 역시, 저자의 관점을 짐작하게 했다. 

늦게 낳은 새끼 때문에 고생하는 동물들의 사례도 흥미로웠고,
"클래런스는 참새로서는 고령인 12세에 뇌졸중을 일으켰는데..."
참새의 뇌졸중이라는 의외성에, 진지한 대목인데 잠깐 웃기도 했다. 내 수준을 드러내는 것인진 몰라도.
 
"스콧은 후손을 많이 둔 늙은 양이 지도자가 되는 이유 중 하나는 새끼를 돌볼 때 복종 성향이 감소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뭔가 모르게 감동적이기도 하고, 

"젊은 어미는 현재의 자식에게 상대적으로 적게 투자하고 자신의 생존과 꾸준한 성장에 상대적으로 많이 투자한다."
뜨악하기도 하고. 
'진화적 자제 가설'에 의하면, 전성기 암컷이 늙은 암컷에 비해 새끼를 방치할 가망성이 더 높다고 한다. 이후 자식을 더 많이 낳을 기회가 있기 때문에.

동물의 세계는 흥미로웠다. 
노년의 유용함이란 끝도 없었고, 책은 매우 유익했다.
내겐 의문 한 가지가 남는다.
과연 우리는 노년의 유익함을 깨닫고 이용해야만 할까. 
책은 노년이 공동체에 얼마나 큰 도움을 주는지 설명하고 있고, 모두 충분히 공감이 가고도 남는다.
그러나, 그 모든 도움을 전혀 줄 수 없는 상태에 이른 노년이라면?
타인에게 도움을 주긴커녕, 스스로를 도울 수도, 거동할 수도, 심지어 자신이 누군지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 이른다면?
그때의 노년은 어떻게 설명할텐가.

그들의 무용함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왜 늙음의 유익함에 집중해야 하냐는 것. 유익하지 않은 것은 존재 가치가 없을까. 그 역시 진화적 관점인가. 
그들이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아도,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에 집중할 순 없을까. 
혹은 그들, 연약한 자들을 모두가 함께 돌본다는 우리의 인간성에 집중하면 안되는 걸까.
내 늙은 부모를 잘 공양했을 때 내 자식이 나를 잘 공양할 거라는, 그런 식의 이해관계 역시 떠나서, 
사회 전체가 어떤 이익도 노리지 않고 약자를 보호한다는 그 사실. 
약자를 노린 범죄가 판치는 사회,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것만이 지상 최대의 목표인 사회, 서로를 믿을 수 없는 사회에서 
어떤 대가도 없이, 약자가 철저히 보호되는 사회로 변모한다면, 과연 그 변화의 가치는 미미할까. 
낭만적 공상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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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 - 부끄러움을 모르는 카리스마, 대한민국 남자 분석서
오찬호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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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남성들이 선호하는 신부감 직업 1위를 차지하는 '초등학교 교사'에 숨겨진 함의.

저자는 (조주은의 <페미니스트라는 낙인>을 인용하며) 이것이 여성의 노동력을 안팎으로 착취하며 남성 권위를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낸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남성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되, 집안일과 보살핌의 노동은 그대로 해주길 바라는 이중착취의 욕망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저자 역시, 사회학과 여성학을 공부하면서도 이 부분을, 또 많은 부분을 미처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고백하기도 한다. 


그렇게 되기까지, 안다. 안다. 

한국 사회에서 남성들이 가정 경제를 이끄는 모든 책임을 떠맡았고,

가뜩이나 먹고 살기 힘들었는데, 신자유주의네, 노동시장 유연화네 뭐네 해서 이제는 더욱 더 힘들어졌다는 거.

일은 일대로 하고, 성평등이네 뭐네 해서 집에서도 쉬지도 못하고, 권위는 아버지 세대와 다른데, 의무는 더 무겁기만 하다. 

그러니까, 그 무거운 책임에서 조금이라도 더 해방되기 위해서라도 성 평등이 이뤄지는 게 낫다는 거다. 


"아무리 인간답게 살겠다고 개인이 발버둥친들, 가정을 꾸리면 삼라만상의 기운이 아내의 경력단절을 부추길 것이고 그때부터 생계부양자인 남자는 적당한 권위를 집안에서 행사하다가 종국에는 '나만 뼈빠지게 고생하네'라면서 우울증을 앓을 것이 분명하다."


위의 그 흔한 시나리오, 이상적인가.

페미니즘이란 말부터 여성 할당제, 여성 전용 무엇 등등이 나오면 대번에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들었다. 

모두를 차별이나 경쟁의 상대로 보지 않고, 오히려 공동체의 권리와 의무를 함께 행할 나의 친애하는 동료로서 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  


페미니즘 관련 책을 읽을 때마다 의아한 부분도 많고,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다.

페미니즘을 공부한 저자와 나는 당연히 지식의 격차가 존재하니, 그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은 나의 무지 때문일 수도 있고, 끝내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일 수도 있다.

그러나 크고 작게 존재하는 이견들 때문에, 누군가 무턱대고 거부감을 갖진 않았으면 좋겠다. 

누구나 약자가 될 수 있다.

약자를 보호하고 나아가 모두의 해방을 말하는 것이 페미니즘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끌어내리자는 것이 아니라. 


저자는 쉬운 언어들로, 듣기 순하게 포장하는 것 없이 -더러, 인터넷 상에 올라왔던 욕설까지 그대로 옮기며- 직설화법으로 다양한 소재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한국을 지배하고 있는 군대문화에 대해서, 박노자는 "전국 병영화는 비공식적 국시"라고 까지 표현했다고. 

모두들 끔찍했던 기억이고 다시 꾸고 싶지 않은 악몽으로 군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남자가 군대는 다녀와야 한다고 목에 핏대 세워가며 주장하는 나라. 

CBS의 변상욱 기자가 했다는 말은 인상깊다. 

"만약에 자기 한계를 넘어서는 혹독한 군사훈련이나 외부로부터 격리된 집단 수용생활이 인간을 절제와 협동심, 인내심, 자기 성찰로 이끄는 효과과 뛰어나다면 남성 대부분이 군 복무를 한 우리나라는 품격 있는 신사로 가득 찼어야 한다."


라이따이한, 코피노가 보여주는 문제점,

운전 못하는 '김여사'라는 농담이 보여주는 것.

노키즈존이 품고 있는 차별의 함의 등. 생각해볼만한 이야기들이 담겼다. 


저자는 학생들과 양성평등이 이뤄진 사회를 상상해봤다고 한다. 흐뭇한 그 상상, 언제고 반드시 현실이 되었으면.

나는 어리숙한 덕분(?)에 헛된 망상이나마 가져봤지만, 어린 시절부터 학습되는 수많은 함의들을 일찌감치 눈치챈 똑똑하고 잠재력 많은 여성들은 진작 좌절하거나, 꿈조차 남성들의 그것과는 달리했을지도.


책의 말미에 말하는 저자의 개인적 경험은 무척 의미있게 느껴진다.

성별에 따라 개인의 정체성을 구속시키는 것을 하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음에도, 

일곱 살 딸이 아빠, 나 예뻐?를 골백번 물어보며 모델과 동화속 공주님의 포즈들을 취할 때 느꼈던 참담함.

이어지는 고백은 무척 솔직하다.

"'사회화'의 과정으로만은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타고난 본성인 것일까? 사회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굴욕적이지만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속 편하지 않을까 했다." 

그러나,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이미 약 5년이나 사회를 경험하는 현대의 시스템에서, 가정 교육만으로는 이미 가정 밖에서 경험하는 사회화의 무게를 뒤집을 수 없다는 반증임을 분명히 한다.

모두 다 함께 변해야, 사회 전체가 변해야, 다음 세대는 달라질 수 있다. 

다들 딸이 그렇게 좋다면서(이 말 역시 조금 불편하지만), 그 딸들을 위해서라도. 


속표지를 넘기면 나오는 첫번째 문장, 

"남성다움 혹은 여성다움의 본질은 쉽게 분류되지 않는다." - 앤서니 기든스 

아직 2차 성징도 나타나지 않은 작은 꼬마들을 '남자애니까', '여자애라서' 식으로 구분하는 것이 부당하게 여겨졌던 나임에도, 

<모비딕>을 읽으며, 이건 너무도 '남성적인'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나 역시 이 사회의 평범한 틀 안에서 살아왔고, 그 이분법 안에 편안하게 기대고 싶은 마음마저 있는 인간이니.  

갈 길이 멀었다. 멀다고 안 갈텐가. 



"약자에 대한 표현의 자유는 혐오 범죄일 뿐"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언어가 혐오 발언을 보호하는데 쓰이는 실정이다." (리베카 솔닛 재인용)

"인종, 젠더, 계급간의 위계에서 약자에 대한 강자의 표현의 자유는 혐오 범죄일 뿐이다. (...) 표현의 자유는 보편적인 권리가 아니라 보편성을 향한 권리다." (정희진의 표현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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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 폐허의 철학자 에밀 시오랑의 절망의 팡세
에밀 시오랑 지음, 김정숙 옮김 / 챕터하우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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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들은 날카로웠고, 선명하게 절망적이었고, 더할 나위 없이 솔직해 나를 놀라게 했다.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얼마나 절망스러울 수 있는지 이렇게 정확한 언어로 이야기하는 사람을 나는 보지 못했다. 

함부로 말해, 병상 일기처럼 느껴지기까지 할 정도.


가령,

"삶이 내게 주는 모든 것 때문에, 죽음에 대한 생각 때문에 나는 폭발할 것 같다. 외로움 때문에, 사랑 때문에, 증오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것 때문에 죽을 것만 같다. 내게 닥치는 일들은 나를 곧 터질 것만 같은 풍선처럼 확장시킨다."  ("더 이상 살 수 없음" 중 일부 )


"이상한 불안이 내 몸 전체에 스미는 것을 느낀다. 문제가 많은 실존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일까 아니면 불안에서 오는 혼란일까? 이러한 집요한 생각에 시달리면서 계속 살 수 있을까? 내가 느끼는 것이 삶의 일부일까 아니면 터무니없는 꿈일까?" ("일상성의 변모" 중 일부)


모순일까. 나는 이 책을 소장하길 참 잘했다 생각한다. 두고 두고 재독하고 말 테니까. 

(짤막한 글들이 모인 산문집이다. 이하 "발췌문" 이후 나오는 괄호는 각 꼭지의 제목이다.)


그의 글은 위험했다. 고통스러운 절망으로 향한다.

나는 이렇게도 솔직하고 선명한 절망의 말을 본 적이 없다.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 세상의 무의미함을 증명한다." (이 세상과 나)

"나는 세상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한다. 내 삶의 방식은 단 하나, 괴로워하는 것 뿐이기 때문이다." (상동)


무의미의 고통. 자신이, 그리고 세상이 무의미하다는 끊임없는 자각. 


"내가 내 자신을 괴롭히든 고통스러워하든 혹은 뭔가를 생각하든 무슨 상관인가? 나라는 존재는 몹시 애석하게도 몇 사람의 평온한 삶을 흔들어놓거나, 더욱 애석하게도 다른 몇 사람의 무의식 상태를 방해하기만 할 뿐이다."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지금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으며 어떤 희망도 갖고 있지 않다. 살아가는 즐거움들이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몸이 존재한다는 것)

"인간에게 실존이란 의문 부호다. 이 의문 부호는 중요한 것이다. 그에 대한 답으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앞으로도 얻지 못할 테니까. 삶은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어떤 의미를 가질 수도 없으니까." (마지막의 의미)


그의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은, 때로 과대망상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나는 희망없이 살고 있는 유일한 인간이다." (개인적 고독과 우주적 고독)

"밤의 순간순간을 헤아리며, 이 세상에서 나는 혼자이고, 내가 살고 있는 비극이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는 생각이 드는 불면의 고문을 겪은 적이 있는가? 그때에 역사란 아무런 의미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게 된다. 내 안에서 끔찍한 불꽃이 타오르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절망과 그로테스크)

"나는 나의 비극이 역사에서 가장 중대한 것처럼 느끼면서도, 은연중에 나 자신이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세상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굳게 믿지만, 또한 동시에 나의 존재만이 유일한 현실이라고 느낀다."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어떤 고통이 다르던가. 

심지어 그 역시 고통의 그러한 속성을 명확히 간파하고 있으니.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의 가장 특이한 점은 자신의 고통이 절대적이라고 믿는 것이며, 그 믿음 때문에 자신이 고통을 독점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나는 세상의 모든 고통이 내 안에 농축되어 있고, 나만이 고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고통의 독점)

실로 많은 고통이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에 대한 망상과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한 헛된 생각으로 이루어진다. 

그에 비하면, 과거도 현재도 미래에도 아무 것도 의미가 없을 것임을 확신하는데서 오는 그의 고통이, 오히려 현실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날카롭게 벼려진 정신으로 절망을 말할 수밖에 없는 그는, 세상의 무의미함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들을 질투하기도 한다.

"모두가 천진난만함을 잃은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불행한 것은 아니다. 어리석은 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삶에 밀착해 살아왔고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 그들은 삶에 동화되어 삶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절망의 끝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들을 부러워할 수밖에 없다. 삶의 적인 깨달음, 그 깨달음은 천진난만함이라는 뛰어난 능력을 파괴한다." (소외)

"가장 불행한 사람은 무의식에 대한 권리가 없는 사람들이다. 의식이 늘 깨어 있어 계속해서 세상과 맺고 있는 관계를 다시 정립하는 것, 항상 깨달음의 긴장 속에서 사는 것, 그것은 바로 인생을 망쳤다는 뜻이다. 깨달음은 재앙이며 의식이란 삶의 한 가운데 벌어진 상처이다." (완전한 불만족)


그러나, 깨달은 자가 깨닫지 못한 자를 정녕 순수하게 부러워만 할 수 있을까. 

"삶은 졸렬한 자들만이 갖는 특권이다. 그들만이 정상적 온도에서 살 수 있으며, 나머지는 격렬한 내면의 불로 소진한다." (이 세상과 나)


그는 본질적으로 절망을 생각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 하는 동시에, 불쌍히 여긴다.

"정신적 풍요를 나타내는 것은 오로지 본질적 모순들과 정신적 이율배반뿐이다. 풍성한 내면의 흐름을 실현시킬 수 있는 방법은 그것들뿐이다. 한계를 체험해보지 못한 빈곤한 영혼의 소유자들에게는 상반된 성향이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모순이 있을 수 없다." (모순과 자가당착)

"나는 인간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현상의 경험을 끝까지 밀고 가보았으니까. 깊이 있게 그 경험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만이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한다."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행복할 수 있는, 빈곤한 영혼의 소유자들이여. 


그의 우울과 절망을 그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테다. 

그러나 기질적으로 끊임없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자, 혹은 피나는 노력 끝에 생각할 능력을 가진 자, 그도 아니면 어떤 계기로 인하여 생각할 능력을 섬광처럼 부여받게 된 자가 있다면, 에밀 시오랑의 글로 기묘한 위로를 받게 될지도 모를 것이라 확신한다.  

우리를 고단하게 하는 생각들을 악령, 질병으로, 그러므로 우리는 불행할 수밖에 없다고 단정지음에도 느껴지는, 말 그대로의 기묘한 위로. 

당신의 절망의 노래는 경이롭다. 


내가 미처 닿아보지 못한 영역이지만, 피와 살이 넘쳐나는 잔혹한 그림과 영화에서 극한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들었다. 혹은 카타르시스. 

회피하지 않은 채 절망을 끊임없이 목도하고, 그것을 처절하리만치 선명하게 그려낸 그의 글은, 그 처절함으로 인해 절망 너머를 보여주는 경이로움을 보였다. 


기묘한 위로는 한 가지 더. 

그의 삶은, '역자후기'에 의하면 "지극히 소박"했다고.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과 직통 전화로 연결되었던 철학자라는 것도 그에 해당할 수 있다면-

그는 삶을 살았다. 

"내게 삶은 형벌이지만, 나는 삶을 포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명분에서든 나 자신을 희생시킬 만한 절대적 가치를 믿지 않으니까. 정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왜 내가 계속 살고 있는지, 왜 내가 삶을 중단하지 않는지 모른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그로선 끝까지 살아낸 삶조차 무의미함과 절망의 증명일지 모르나, 나로선 성취로 바라보겠다.

에밀 시오랑, 끊임없이 절망하였으나, 그러나 살았노라고.

아픈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 그의 경이로운 산문들. 


그리고 무언가를 잃고, 또 찾게 했다면, 그것이 꼭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라고.  


잘 알지도 못하는 페미니즘을 거론할 생각은 없지만 여성에 대한 생각은 눈에 밟히고 만다. 

"여자들은 당혹스러운 존재들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다. 세상의 궁극적 본질을 심사숙고할수록 입을 다물고 침묵하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해독할 수 없는 세상의 무한성 앞에서 어리둥절하게 되는 반면, 텅 빈 여성의 속성 앞에서는 신비를 느낀다. 여성은 남성을 괴로운 정신적 긴장에서 벗어나게 하는 임무를 띠고 있다. 여성은 구원이 될 수 있다. 우아함은 세상을 구원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여성은 구원한 것이다." (우아함의 본질)


긴 리뷰, 마지막 발췌는 이것이다. 순간을 살아야 한다는 에밀 시오랑의 전언. 

"인간에게는 모두 같은 단점이 있다. 살기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순간을 살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왜 순간순간에 충분한 열정을 투자하여, 그 순간들을 영원성으로 만들지 못하는가? 더이상 아무것도 기다릴 것이 없는 순간에야 비로소 우리는 사는 것을 배운다." (간접적 동물)


감히, 에밀 시오랑과 꼭 같은 생각을 한다고 말할 수 없고, 말하기도 싫지만,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위험한 생각의 공유였다. 

위험한 생각,의 공유. 위험한, 생각의 공유. 


우울함이 찾아올 때 그것을 파고드는 사람들에게 권한다. 

더 우울해지거나, 덜 우울해지거나.

어쨌든 피로 맺은 동지를 얻는 기분. 

쉽게 얻지 못하는 행운.  


원제는 "절망의 끝에서"라고 한다.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에는 누군가의 해석이 들어간 듯하지만, 같은 지점을 느낄 수 있어 다행이다.

위험한 책이라는 내 감상엔 변함이 없다. 


덧.

제목에 쓴 '피와 살과 신경'은 그의 본문에서 따왔다.

"서정이란 피와 살과 신경의 노래다." 


"인간은 악하고 앙심을 잘 품으며 배은망덕하고 위선적이라고 당신들은 불평하는가? 나는 죽음의 고통을 겪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세상과 나)

"매우 유감스럽게도 매 순간 내가 깨닫는 것은, 생각이 없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사는 데 꼭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사실이다. 진정한 사고란 삶의 샘을 흐리게 하는 악령이거나, 삶의 뿌리를 상하게 하는 질병과 같은 것이다. 언제나 생각하는 것, 시종일관 본질적 문제를 제기하는 것, 자신의 운명에 대해 계속 의심을 품는 것, 사는 데 피로를 느끼고 자신의 생각과 존재 자체 때문에 몹시 지쳐 있는 것, 자신의 뒤로 마치 비극과 죽음의 상징처럼 피와 연기의 꼬리를 늘어트리고 있는 것, 이것은 바로 정신 문제에 멀미를 내고 사고를 저주로 생각할 정도로 당신이 불행하다는 것을 뜻한다. 아무것도 유감스러워하지 말아야 할 세상에 유감스러운 것이 너무 많다. 이 세상은 진정 내가 유감스러워할 가치가 있는가? " (슬픔에 대하여)

"나는 고통을 통해서 나의 가장 좋은 부분을 얻었고, 잃어버렸던 것을 되찾았다. 그러므로 고통을 좋아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비난할 수도 없다." (고통의 희열에 에 관한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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