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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 폐허의 철학자 에밀 시오랑의 절망의 팡세
에밀 시오랑 지음, 김정숙 옮김 / 챕터하우스 / 2013년 5월
평점 :
그의 말들은 날카로웠고, 선명하게 절망적이었고, 더할 나위 없이 솔직해 나를 놀라게 했다.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얼마나 절망스러울 수 있는지 이렇게 정확한 언어로 이야기하는 사람을 나는 보지 못했다.
함부로 말해, 병상 일기처럼 느껴지기까지 할 정도.
가령,
"삶이 내게 주는 모든 것 때문에, 죽음에 대한 생각 때문에 나는 폭발할 것 같다. 외로움 때문에, 사랑 때문에, 증오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것 때문에 죽을 것만 같다. 내게 닥치는 일들은 나를 곧 터질 것만 같은 풍선처럼 확장시킨다." ("더 이상 살 수 없음" 중 일부 )
"이상한 불안이 내 몸 전체에 스미는 것을 느낀다. 문제가 많은 실존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일까 아니면 불안에서 오는 혼란일까? 이러한 집요한 생각에 시달리면서 계속 살 수 있을까? 내가 느끼는 것이 삶의 일부일까 아니면 터무니없는 꿈일까?" ("일상성의 변모" 중 일부)
모순일까. 나는 이 책을 소장하길 참 잘했다 생각한다. 두고 두고 재독하고 말 테니까.
(짤막한 글들이 모인 산문집이다. 이하 "발췌문" 이후 나오는 괄호는 각 꼭지의 제목이다.)
그의 글은 위험했다. 고통스러운 절망으로 향한다.
나는 이렇게도 솔직하고 선명한 절망의 말을 본 적이 없다.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 세상의 무의미함을 증명한다." (이 세상과 나)
"나는 세상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한다. 내 삶의 방식은 단 하나, 괴로워하는 것 뿐이기 때문이다." (상동)
무의미의 고통. 자신이, 그리고 세상이 무의미하다는 끊임없는 자각.
"내가 내 자신을 괴롭히든 고통스러워하든 혹은 뭔가를 생각하든 무슨 상관인가? 나라는 존재는 몹시 애석하게도 몇 사람의 평온한 삶을 흔들어놓거나, 더욱 애석하게도 다른 몇 사람의 무의식 상태를 방해하기만 할 뿐이다."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지금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으며 어떤 희망도 갖고 있지 않다. 살아가는 즐거움들이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몸이 존재한다는 것)
"인간에게 실존이란 의문 부호다. 이 의문 부호는 중요한 것이다. 그에 대한 답으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앞으로도 얻지 못할 테니까. 삶은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어떤 의미를 가질 수도 없으니까." (마지막의 의미)
그의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은, 때로 과대망상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나는 희망없이 살고 있는 유일한 인간이다." (개인적 고독과 우주적 고독)
"밤의 순간순간을 헤아리며, 이 세상에서 나는 혼자이고, 내가 살고 있는 비극이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는 생각이 드는 불면의 고문을 겪은 적이 있는가? 그때에 역사란 아무런 의미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게 된다. 내 안에서 끔찍한 불꽃이 타오르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절망과 그로테스크)
"나는 나의 비극이 역사에서 가장 중대한 것처럼 느끼면서도, 은연중에 나 자신이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세상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굳게 믿지만, 또한 동시에 나의 존재만이 유일한 현실이라고 느낀다."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어떤 고통이 다르던가.
심지어 그 역시 고통의 그러한 속성을 명확히 간파하고 있으니.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의 가장 특이한 점은 자신의 고통이 절대적이라고 믿는 것이며, 그 믿음 때문에 자신이 고통을 독점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나는 세상의 모든 고통이 내 안에 농축되어 있고, 나만이 고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고통의 독점)
실로 많은 고통이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에 대한 망상과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한 헛된 생각으로 이루어진다.
그에 비하면, 과거도 현재도 미래에도 아무 것도 의미가 없을 것임을 확신하는데서 오는 그의 고통이, 오히려 현실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날카롭게 벼려진 정신으로 절망을 말할 수밖에 없는 그는, 세상의 무의미함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들을 질투하기도 한다.
"모두가 천진난만함을 잃은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불행한 것은 아니다. 어리석은 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삶에 밀착해 살아왔고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 그들은 삶에 동화되어 삶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절망의 끝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들을 부러워할 수밖에 없다. 삶의 적인 깨달음, 그 깨달음은 천진난만함이라는 뛰어난 능력을 파괴한다." (소외)
"가장 불행한 사람은 무의식에 대한 권리가 없는 사람들이다. 의식이 늘 깨어 있어 계속해서 세상과 맺고 있는 관계를 다시 정립하는 것, 항상 깨달음의 긴장 속에서 사는 것, 그것은 바로 인생을 망쳤다는 뜻이다. 깨달음은 재앙이며 의식이란 삶의 한 가운데 벌어진 상처이다." (완전한 불만족)
그러나, 깨달은 자가 깨닫지 못한 자를 정녕 순수하게 부러워만 할 수 있을까.
"삶은 졸렬한 자들만이 갖는 특권이다. 그들만이 정상적 온도에서 살 수 있으며, 나머지는 격렬한 내면의 불로 소진한다." (이 세상과 나)
그는 본질적으로 절망을 생각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 하는 동시에, 불쌍히 여긴다.
"정신적 풍요를 나타내는 것은 오로지 본질적 모순들과 정신적 이율배반뿐이다. 풍성한 내면의 흐름을 실현시킬 수 있는 방법은 그것들뿐이다. 한계를 체험해보지 못한 빈곤한 영혼의 소유자들에게는 상반된 성향이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모순이 있을 수 없다." (모순과 자가당착)
"나는 인간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현상의 경험을 끝까지 밀고 가보았으니까. 깊이 있게 그 경험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만이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한다."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행복할 수 있는, 빈곤한 영혼의 소유자들이여.
그의 우울과 절망을 그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테다.
그러나 기질적으로 끊임없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자, 혹은 피나는 노력 끝에 생각할 능력을 가진 자, 그도 아니면 어떤 계기로 인하여 생각할 능력을 섬광처럼 부여받게 된 자가 있다면, 에밀 시오랑의 글로 기묘한 위로를 받게 될지도 모를 것이라 확신한다.
우리를 고단하게 하는 생각들을 악령, 질병으로, 그러므로 우리는 불행할 수밖에 없다고 단정지음에도 느껴지는, 말 그대로의 기묘한 위로.
당신의 절망의 노래는 경이롭다.
내가 미처 닿아보지 못한 영역이지만, 피와 살이 넘쳐나는 잔혹한 그림과 영화에서 극한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들었다. 혹은 카타르시스.
회피하지 않은 채 절망을 끊임없이 목도하고, 그것을 처절하리만치 선명하게 그려낸 그의 글은, 그 처절함으로 인해 절망 너머를 보여주는 경이로움을 보였다.
기묘한 위로는 한 가지 더.
그의 삶은, '역자후기'에 의하면 "지극히 소박"했다고.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과 직통 전화로 연결되었던 철학자라는 것도 그에 해당할 수 있다면-
그는 삶을 살았다.
"내게 삶은 형벌이지만, 나는 삶을 포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명분에서든 나 자신을 희생시킬 만한 절대적 가치를 믿지 않으니까. 정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왜 내가 계속 살고 있는지, 왜 내가 삶을 중단하지 않는지 모른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그로선 끝까지 살아낸 삶조차 무의미함과 절망의 증명일지 모르나, 나로선 성취로 바라보겠다.
에밀 시오랑, 끊임없이 절망하였으나, 그러나 살았노라고.
아픈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 그의 경이로운 산문들.
그리고 무언가를 잃고, 또 찾게 했다면, 그것이 꼭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라고.
잘 알지도 못하는 페미니즘을 거론할 생각은 없지만 여성에 대한 생각은 눈에 밟히고 만다.
"여자들은 당혹스러운 존재들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다. 세상의 궁극적 본질을 심사숙고할수록 입을 다물고 침묵하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해독할 수 없는 세상의 무한성 앞에서 어리둥절하게 되는 반면, 텅 빈 여성의 속성 앞에서는 신비를 느낀다. 여성은 남성을 괴로운 정신적 긴장에서 벗어나게 하는 임무를 띠고 있다. 여성은 구원이 될 수 있다. 우아함은 세상을 구원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여성은 구원한 것이다." (우아함의 본질)
긴 리뷰, 마지막 발췌는 이것이다. 순간을 살아야 한다는 에밀 시오랑의 전언.
"인간에게는 모두 같은 단점이 있다. 살기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순간을 살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왜 순간순간에 충분한 열정을 투자하여, 그 순간들을 영원성으로 만들지 못하는가? 더이상 아무것도 기다릴 것이 없는 순간에야 비로소 우리는 사는 것을 배운다." (간접적 동물)
감히, 에밀 시오랑과 꼭 같은 생각을 한다고 말할 수 없고, 말하기도 싫지만,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위험한 생각의 공유였다.
위험한 생각,의 공유. 위험한, 생각의 공유.
우울함이 찾아올 때 그것을 파고드는 사람들에게 권한다.
더 우울해지거나, 덜 우울해지거나.
어쨌든 피로 맺은 동지를 얻는 기분.
쉽게 얻지 못하는 행운.
원제는 "절망의 끝에서"라고 한다.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에는 누군가의 해석이 들어간 듯하지만, 같은 지점을 느낄 수 있어 다행이다.
위험한 책이라는 내 감상엔 변함이 없다.
덧.
제목에 쓴 '피와 살과 신경'은 그의 본문에서 따왔다.
"서정이란 피와 살과 신경의 노래다."
"인간은 악하고 앙심을 잘 품으며 배은망덕하고 위선적이라고 당신들은 불평하는가? 나는 죽음의 고통을 겪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세상과 나)
"매우 유감스럽게도 매 순간 내가 깨닫는 것은, 생각이 없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사는 데 꼭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사실이다. 진정한 사고란 삶의 샘을 흐리게 하는 악령이거나, 삶의 뿌리를 상하게 하는 질병과 같은 것이다. 언제나 생각하는 것, 시종일관 본질적 문제를 제기하는 것, 자신의 운명에 대해 계속 의심을 품는 것, 사는 데 피로를 느끼고 자신의 생각과 존재 자체 때문에 몹시 지쳐 있는 것, 자신의 뒤로 마치 비극과 죽음의 상징처럼 피와 연기의 꼬리를 늘어트리고 있는 것, 이것은 바로 정신 문제에 멀미를 내고 사고를 저주로 생각할 정도로 당신이 불행하다는 것을 뜻한다. 아무것도 유감스러워하지 말아야 할 세상에 유감스러운 것이 너무 많다. 이 세상은 진정 내가 유감스러워할 가치가 있는가? " (슬픔에 대하여)
"나는 고통을 통해서 나의 가장 좋은 부분을 얻었고, 잃어버렸던 것을 되찾았다. 그러므로 고통을 좋아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비난할 수도 없다." (고통의 희열에 에 관한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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