反기업 인문학 - 인문학은 어떻게 자본의 포로가 되었는가?
박민영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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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한쪽에서는 인문학 열풍이란 말이, 다른 한쪽에서는 인문학이 위기에 처했다는 말이 들린다. 어떻게 동시에 가능한 걸까. 

저자는 '기업 인문학'이란 개념으로 이 현상을 설명한다. 유행하는 것은 '기업 인문학'이요, 존폐의 위기에 놓인 것은 '정통 인문학'이다.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대학이라고 피해갈쏘냐. 저자는 학생들이 취업이 잘 되는 학과에 몰리고, 비인기학과는 통폐합 되는 등 존립의 위기에 처한 것에 주목한다. 비인기학과는 대개 인문학이고, 비정규직 인문학자(시간 강사 등)들은 위기에 처한다. 그에 따르면,  "인문학은 죽음의 학문이 되었다."(p37) 이는 은유에 그치지 않아서 자살 또한 적지 않다고.

"신자유주의 시대의 주된 통치 전략은 대중이 시간과 돈에 허덕이게 만들어 무기력, 무저항의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p48)

그 전략은 인문학자에게도 침투된다고 한다. 정부의 학술 연구 지원은 인문학자의 순수한 연구를 더욱 망가뜨린다는 것. 국가 정책에 합치하는 연구를 하게 되어 인문학의 비판정신을 없앤다. 그나마도 인문학 분야에 대한 지원은 타 분야에 비해 적다.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반성적 학문이다. (중략) 이런 반성적 학문들은 인간의 지성과 학문의 발달, 사회와 역사의 진보에서 꼭 필요하다. 그러나 그를 통해 발달하는 비판적 이성과 안목은 기득권자들에게 불편함(불쾌함)을 안겨주기 쉽다."(p72)

저자가 '인문학'과 구분해 사용하는 '기업 인문학'이란 기업 이익과 자기계발에 복무하는 인문학이다. 보편적으로 쓰는 말은 아니나, 문제의 본질을 파헤치고 정통 인문학과 구분하기 위해 사용했다고 한다. 인문학은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질문하고 비판하는 학문인데, '기업 인문학'은 인문학이 기업 이익의 논리에 복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설명이다. 저자에 따르면, 기업 인문학은 하나의 수단으로서 목적(생존, 출세, 성공, 경제적 이익)에 복무하고, 정통 인문학은 존재 그 자체가 목적이다. 

"기업 인문학은 앞서 말했듯이 인문학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그 과정은 이렇다. 우선 기업들은 자신의 거대한 자본권력을 동원해 자신이 원하는 인문학을 요구한다. 그 요구에 따르는 대중이 많아짐에 따라 '기업의 요구'는 '사회의 요구', '대중의 요구'로 비화한다. 그것은 거대한 '기업 인문학 시장'을 만들어낸다. 기업 인문학 시장이 커질수록 본격 인문학은 위축된다. 기업 인문학 시장의 요구에 타협하는 본격 인문학자, 학술 시장이나 학계에서 축출되는 본격 인문학자가 많아진다.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기업 인문학자들이 대학에서 양산된다. 그리하여 인문학은 점진적으로 기업의 식민지가 된다."(pp106-107)

저자는 좌파 지식인들의 기업 인문학 참여가 진보의 외연 확장이 아니라 지식인의 타협이고 투항이며, 결국 변하는 것은 자본가나 자본 권력이 아니라 좌파 지식인과 본격 인문학이라고 주장한다. 

책은 클레멘트 인문학(일명 '노숙자 인문학')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한다. 전형적인 자기계발의 논리로 운영되며, 소외계층에 대한 통치 및 관리의 기술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또한 국가주도의 평생 학습 또한 기업 주도의 국민교육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평생교육은 시민들에게 이로운 것이 아니라, 순응적 국민을 양산하고자 하는 국가-자본에 이로운 것이다."(p161)


"우민화는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우리가 처한 현실에 대해 잘 모르게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대중을 친기업적 사고로 무장시키는 것이다. 이 두가지를 관철시키기 위한 도구로 자본은 인문학을 이용한다."(p173)


사회적 경제와 협동 조합, 자선사업 또한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의 보완재이며 체제 방어적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문제 의식이었다.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이 책이 아니었다면 생각해보지 못했을 것들을 돌아보게 된 것은 큰 소득이다. 모든 것에 동의할 수는 없었고, 정통 인문학과 기업 인문학의 칼같은 구분은 과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내가 만든 김치찌개가 정통 한식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래서 뭐?정통이 무엇인지부터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그러나 저자의 말마따나 논지를 전개하기 위해서 필요한 구분이었다는 것에 동의한다. 모든 사안에 설득당할 수 없어도, 문제제기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설령 정답이란 없을 때라도 마찬가지다. 

<반기업 인문학 - 박민영 지음/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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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 색다르고 과감한 페미니스트 선언
제사 크리스핀 지음, 유지윤 옮김 / 북인더갭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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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 크리스핀은 보편적 페미니즘에 강하게 반기를 든다. 모두에게 다가가기 위한 페미니즘은 진부하고 위협적이지 않으며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애초에 사람들을 불편하게 함으로서 사람이나 사회 정서의 변화를 꾀하는 것인데, 모두를 포섭하겠다는 목표로 그 본연의 임무를 완전히 망각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보편적 페미니즘이 결국 페미니스트 운동을 방해한다고 말한다. 누가 무엇을 하든 페미니스트라는 이름표를 달 수 있게 되자, 페미니즘은 오히려 가부장제를 강화하는 것으로 이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예로, 페미니즘의 성공지표로 언급되는 것이 자본주의의 성공지표와 같다는 것을 지적한다. 바로 돈과 권력이다. 페미니즘이 가부장적 가치에 의해 손상되었으며, 가부장적 세계에서 승리하기 위해 페미니스트들이 가부장의 역할을 자임했고, 기존의 시스템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시스템에 속한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도덕적 관점에서 낫다고 말할 근거는 없다. 

"여성들을 권력에 접근 가능하도록 양육하는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더 평등한 세상이 아니라 그 안에 여성만 더 많아진, 이전과 같은 세상일 뿐이다."(p80)

"페미니즘이 사회에 의문을 제시하고 관계를 맺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며 자신의 삶에 질문을 던지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하는 정치체제에서 방향을 틀어 자기역량 강화와 자기 계발의 방편으로 바뀌는 순간, 그것은 보편적 페미니즘이 된다."(p32)

자기역량 강화와 자기 계발의 추종은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이나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을 억압하는데 이용된다는 지적, 놀랍다. 그녀는 페미니즘을 받아들일 수 없는 여성들에 대해 말한다. 페미니즘을 받아들임으로서 더욱 불안한 세상 속으로 던져져야 한다면, 생존을 더욱 위협당해야 한다면 어찌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페미니즘이 할 일은 그들을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불행이 모두의 불행과 일치하지는 않는지 돌아보고, 이들의 바람과 욕구에 귀기울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함께 연대하여 탐욕에 기반을 둔 이 사회, 빈곤과 폭력, 착취로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이 사회 전체가 종식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기만 한다면 우리는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p84)

선택 페미니즘을 비판하기도 한다. 이는 생활방식, 가족관계, 대중문화, 소비에 이르기까지 여성이 무엇을 선택하든 페미니스트에 걸맞은 선택을 한다는 믿음이라고 한다. 소위 성공한 여성이 무조건 페미니즘을 실천하고 있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저자는 피해자 사고방식과 비인간화 관점의 위험성도 지목한다. 무조건 여성이 피해자라는 관점은 복수의 냄새까지 풍긴다는 것이다. 우리가 고통과 억압을 받았다고 해서 연민과 배려를 거둘 필요는 없음을 말한다. 또한 분노나 복수라는 파괴적인 역학에 빠져 있는 것은 건설적인 일에 쓰일 에너지를 고갈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라이프스타일 페미니즘에서 벗어날 것을 강조한다. 페미니즘을 상징하는 비싼 옷이나 소품을 걸치고는, 실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현재의 페미니즘을 비판하지만 그녀가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은 새로운 사상에 대한 상상이다. 상상해야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부장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소비사회를 해체하려면 돈과 가치를 동일시하는 이야기를 멈추어야 한다고, 가치는 사랑과 돌봄으로 표현되는 세상을 상상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문화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문화를 점령해야 한다. 이 세상이 지금 같으리라는 법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착취행위에 상을 주어선 안 되고, 우리 지구와 우리 몸과 영혼의 타락을 거들 필요도 없다. 우리는 저항할 수 있다. 더 큰 사고를 해야만 한다." (p187)

책은 여타의 페미니즘 책과 같지만 다르고, 다르지만 같다. 새로운 상상을 촉구하며, 실천하는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데서 같고, 페미니즘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를 높이고 선명성을 요구한다는데서 다르다. 제목과 달리, 서두와 달리, 딱히 도발적이지만은 않다고 생각이 들기도 할 때쯤, 옮긴이의 말엔 그녀의 인터뷰 내용이 등장한다. 페미니스트라면, 당장 이혼부터 하라고. 그것은 가부장제에 편입된 것이니. 그녀의 제언은 도발적이다. 생각할 거리가 많은 책이다. 페미니스트임을 자임하면서도 제모와 날씬한 몸에 집착하는 많은 여성들에겐 더욱이. 

"페미니즘이 보편적이라면, 즉 모든 여성과 남성이 '올라 탈' 수 있는 것이라면, 그런 페미니즘은 사절이다.
 페미니즘이 정치적 진보를 가장하여 개인의 영달을 위해 이용되고 만다면, 그런 페미니즘도 사절이다.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면서 '나는 화나지 않았고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안심시켜야만 한다면, 그런 페미니즘도 절대 사절이다. 
 나는 화가 났다. 그리고 꽤 위협적이고 싶다."(pp12-13)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 제사 크리스핀 지음, 유지윤 옮김/ 북인더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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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 고백 김동식 소설집 4
김동식 지음 / 요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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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는 나는, 어떤 책들은 차마 펼쳐볼 용기를 내지 못한다. 혹시 실망할까봐, 실망했는데 어떤 이유들로 솔직하게 말할 수 없을까봐, 지레 겁먹고 펼쳐보지 못한다. 김동식의 소설 역시 그랬다. 

신간을 눈여겨 보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모르고 넘어갈 수 없을만큼, 성공적인 홍보였다. 한 번도 소설 창작을 배워보지 않았다는, 액세서리 공장에서 10여 년을 일했고,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고작 3년째라는 작가다. 그가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 써온 글들이 엮여, 책으로 출간됐다. 기존의 체제를 탈피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작가가 된 것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데, 혹시 읽고나서 실망할까 걱정했다. 다행히, 실망은 없었다. 

읽기는 매우 쉽다. 문장은 단순하고 공백도 많으니, 가독성은 끝내준다. 그러나 생각할 거리가 많은 책이다. 책장을 넘기려다 말고 얼음. 몇번이고 그대로 멈췄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반복되는 것은, 부차적인 것에 신경쓰지 않겠다는 패기로 느껴질 정도다. 좋았으니 모든 것이 좋게 해석되는지도 모른다. 

벌써 다섯권의 소설집이 나왔다고 한다. 작가의 무서운 창작 속도를 생각하면, 그가 쓰는 시간보다 내가 읽는 시간이 더 걸리는 건 아닌가 순간 억울해질 정도다. 그러나 그가 쓰지 않았던 시간 동안에도, 분명 글들은 차곡차곡 응축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시간을, 일상을, 나의 생을 허투루 보내지 말아야겠다는, 뜬금없는 생각. 

<양심고백>은 짧은 단편 26개가 모인 소설집이다.
'인간 평점의 세상'은 금수저, 흙수저 운운하는 현 시대를 생각하게 하고, '톡 쏘는 맛'은 보다 복잡한 메시지를 던진다. 노동이란 무엇인지, 과연 우리는 노동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 묻는다.  '레버를 돌리는 인간들'과 '재능을 교환해주는 가게'는 인간의 비합리성을 꼬집는다. 미래에 행복하겠다고 현재를 불행하게 만드는, 그것을 현명하고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믿고 사는 것이 인간 아니던가. 

'단체 감옥'은 인간의 이기심과 존엄함을 동시에 보여주기도 한다. 우리나라 유통업의 문제를 고발하는 '똑똑한 살인 청부업자’는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물론 씁쓸한 웃음이다. 

'다시 시작', '말더듬이 소년의 꿈'은 부모들의 이기심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너를 위한 것이라는, 이게 다 사랑이라는 말의 허상.

'대단한 빌머 이야기'에서는 한 문장에 꽂혔다.
"좋다. 너 자신이 그렇게 특별하다고 생각한다면, 한 가지 방법은 있지." (p272)
인간의 착각과 오만은, 나라는 사람의 최근 화두다. 

인간을 꼬집고, 대한민국의 현실을 지적하고 있지만, 저자의 세계관을 벌써 단정지어선 안될 듯하다. '자살하러 가는 길에’의 대책없는 긍정성을 보자. 

저자의 독특한 이력에 대한 홍보가 많이 이뤄지고 있다. 지난해 연말부터 나온 다섯 권의 책은, 그 홍보 덕분에 큰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다음 책은 <회색인간>의 작가, 혹은 소설가 김동식으로 홍보되어도 충분할 듯하다. 장르적인 독특함도 좋았고, 기존의 체계와 동떨어진 작가의 탄생이라는 것도 신선했다.
물론, 그의 글이 기대를 무너뜨리지 않아서, 그게 제일 좋았다. 작가의 계속되는 창작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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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주거 (양장) 일상성.일상생활연구회 9
대안사회를 위한 일상생활연구소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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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관한 이야기다. 모두가 알다시피, 한국의 현대사는 급격한 변화를 이루었고, 이에 따라 집의 형태 역시 급속히 변했다. 책에 의하면, 한국의 아파트 주거 비율인 60%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 보기 힘든 수치이며, 총 공동주거의 형태는 75%를 점한다고 한다. 이에 따라 주택정책은 물론 공동주거로 인한 많은 갈등이 야기되었다는 것에 책은 주목한다.
"이에 이 책에서는 일상생활론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집의 의미를 현재적 주거 문화로의 이행 과정과 특징, 국가의 주거정책, 다양한 주거 문화 등을 통하여 살펴보았다." (p9)


집의 기본적 기능과 의미부터, 한국의 산업화, 도시화에 따라 주거 생활이 어떻게 변했는지, 왜, 어떤 과정을 통해 아파트가 우리사회에서 지금의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는지 등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다. 아파트를 최초로 주장한 르코르뷔지에는, "못사는 사람들도 햇빛을 받고 바람을 쏘일 수 있게 하기 위해"(p114) 고층 아파트의 필요성을 주장했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최초엔 저소득층을 위한 주거 대책으로서 등장했던 아파트가 표준적인 주거양식으로 굳어져가는 과정은 들을 때마다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고로, 정부의 주거정책은 두눈을 크게 뜨고 지켜봐야할 것이다. 대한민국이 아파트 공화국이 되기까지의 현대사를 돌아보려면 강남 개발의 역사도 빠지지 않는다. 민간 자본에 의존한 저소득층 밀어내기 식의 개발은 씁쓸하기 그지없다. 그것이 비단 70-80년대 군사정권 시기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비통함을 더한다.

"2014년의 세월호 참사와 정부의 부적절한 대응, 그 진상 규명에 대한 회피, 시민집회에 대한 차벽 설치와 폭력적 진압, 백남기 씨 사망 사고에 이르기까지, 국가 권력에 의한 폭력은 여전히 자행되고 있다." (p88)


책에 의하면,
 한국은 '세계 슬럼 퇴거 사건사' 규모면에서 2위를 차지한다고 한다(p150). 미얀마 양곤의 100만명 규모의 강제 퇴거 사건 다음으로 가장 큰 규모로서, 1988년 서울시가 80만명을 퇴거시켰다는 것이다. 

살 집을 직접 만들던 시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니 절로 <월든>이 떠오르기도 한다. 현재, 모든 것은 세분화된 직업인들에게 맡겨졌고, 그리하여 집의 다른 어떤 가치보다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중요해졌다는 설명이다. 
"모든 물건이 상품화되는 사회로의 이행에서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p130)
먹을 것, 입을 것이 그렇듯, 살 곳 역시 상품인 것이 당연하겠지만, 그것이 내포하는 것들을 생각하면 씁쓸하다. 자본주의는 내게 애증의 대상이다. 

책은 교외의 삶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누군가는 별장처럼, 제2의 집처럼 어떤 로망을 품고 찾아가는 곳, 누군가는 더이상 갈 곳이 없어 쫓기듯 몰려나게 된 곳, 교외의 집이다. 책은 이를 경제적 의미뿐만 아니라, 기존의 지역사회와의 충돌이나 통합 등의 측면에서도 바라보고 있다. 교외를 설명하는 다음의 말은, 어느 곳에나 해당될 수 있을 듯하다.
"(...) 교외 특성이 고착화되었을 때 그것이 그곳에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방향으로든 내면화를 초래한다는 점이다. 사람의 목적과 조건, 지역의 환경이 만나서 특정한 '교외'를 만들어냈을 때, 그 '교외'는 다시 사람들의 일상에 내면화될 수 있다. 즉, 하나의 교외가 특정 이미지로 고착된다는 것은 그 속에서 일상을 영위하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의미로든 하나의 꼬리표가 된다."(p155)
누군가에게는 등에 달고 다니고 싶은, 누군가에게는 떨쳐내고 싶은 꼬리표가 되리라.
"급격한 산업화 및 물질 중심주의 아래 우리의 주거 문화와 주거 환경은 올바로 정착되기 어려웠으며 집을 통한 구별 짓기, 즉 차별화 및 양극화 현상은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특히 이러한 사회의 변화는 '집=돈=높은 경제적 위치=높은 사회적 지위'라는 인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집을 통한 차별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p167)

어느 동네, 어느 아파트에 산다는 것으로 나를 드러내려는 천박함, 그것으로 타인을 평가하는 몰상식함에 관한 이야기도 나온다. 물론 책은 이보다는 고상하게 표현한다. 다음의 말은 고지식하고 태평하게 들리지만, 원칙을 살피는 것은 문제 해결의 시작일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집을 과시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녹아 있는 진솔한 생활공간으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도시에서의 가족과 이웃이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첫번째 조건일 것이다." (p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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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사랑 마지막 의식 - 이언 매큐언 데뷔 40주년 특별기념판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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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설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고맙다. 쓴 맛에 놀라도, 단 맛에 녹아내려도, 그것으로 충분하다. 내 취향과 맞지 않아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지라도, 잠자고 있던 내 어딘가를 각성시켰다면. 그러니까, 나는 변태 독자다.
이언 매큐언은 말한다. 
"소설을 쓰는 사람에게는 독자의 손을 잡고 막다른 곳까지 이르러 거기서 뛰어내려야 할 의무가 있는 거라고. 내 임무는 한계를 찾아 그것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p10)
나는 그의 손을 덥썩 잡았다. 

총 8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가정 처방>의 소년은 “나는 이 얘기가 레이먼드에 관한 것이지, 동정이나 성교, 근친상간과 수음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p49)라고 너스레를 떨지만, 책엔 그것들이 넘쳐난다. 덧붙이자면, 살인 정도. 

그 소년의 이야기부터 해볼까. 소위 중2병의 끝판왕쯤 도달한 <가정 처방>의 소년은 동생을 강간하기로 결심한다. 그래, 역겹다. 이 음험한 소년을 대체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소년의 계획은 동생의 협조 덕분에 성공한다. 역겹다는 말로는 부족한데, 이 역겨움을 설명하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까. 인간은 동물이 아니라고 우겨볼까. 사회의 근간과 정의에 대해 말해야 할까. 과연 정의와 불의가 물과 기름처럼, 그렇게 쉽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이던가. 물론 나는, 허세와 악의, 어설픈 존재론적 자각으로 뭉친 어린 아이들이, 꼭 지켜질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십대의 치기를 인생으로 끌고 들어가지 않을 수 있도록. 다만, 내가 확고하게 믿고 있는 모든 것들, 가령 말할 것도 없이 당연한 양성평등이, 한 때는 사회를 전복시키는 충격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카프카의 <이방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단편 <나비>가 있다. 
"목요일에 나는 난생처음으로 시체를 보았다. 오늘은 일요일이고 아무 할 일이 없었다. 날은 무더웠다." (p125)
어머니의 죽음에도, 자신의 죽인 소녀의 시체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이 괴물은, 외로움에 지친 덜 자란 어른이다. 살인자의 편을 들어줄 생각은 없다. 다만 이야기는 들어보자, 제2의 괴물을 키우지 않기 위해. 특이한 얼굴로 고립되었던 소년이 보인다. <여름의 마지막 날>의 제니는 또 다른 희생자다. 공동체의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헌신으로 인한 혜택을 입지만, 누구 하나 감사의 표시를 하지 않는다. “딱히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녀를 따돌리는 그들만의 방식”(pp100-101)으로, 그녀는 교묘하게 혼자가 된다. 단지 육중한 몸집 때문에. 

소설을 작가의 이야기로 착각하는 우를 범하진 않겠지만, 갓 성인이 된 작가는 사회로의 편입에 두려움을 느끼진 않았을까 잠시 생각해 보기도 한다. <벽장 속 남자와의 대화>엔 정신이 온전치 못한 엄마에 의해 아이처럼 자라야 했던 남자가 있다. 드디어 세상으로 걸어나가게 된 남자는 명백한 퇴행을 보인다. "난 자유롭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아기들이 부럽습니다. (...) 나도 그러고 싶어요. 난 왜 그럴 수 없죠?"(p180) 표제작 <첫사랑 마지막 의식> 역시, 다 자랐으나 모든 것을 책임질 준비가 되지 않은 어린 커플이 나온다. 이 작품의 또 다른 묘미는 기괴한 아름다움이다. 시궁쥐의 묘사라니. 이는 <가장 파티>에서 더욱 그렇다. 어린 조카에게 여성 역할까지 시키며 가장놀이를 요구하는 미나. 그녀에게 굴복한 헨리, 이들의 모습은 실로 괴이하다. 분열될 듯한 소년의 정신을 따라가는 것도 벅차다.  

너무 음침하게 말한 것 같으니, 그의 독특한 유머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극장의 코커 씨>는 연극 무대 위에서 진짜 섹스를 하고 만다. 연출자는 “음부의 털이 부딪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릴(p117) 지경을 원했지만, 진짜 섹스를 보고 혐오를 느낀다. 자신의 고매한 작품에 대한 자부심을 갖지만, 그 공연에 진정으로 몰입한 자는 역겨워 눈뜨고 볼 수 없다는 아이러니다. 오직 나만이 옳은 <입체기하학>의 ‘나’는 아내의 사랑 투정 따위엔 관심이 없다. 그러나 실은 아내를 증오하는 것 외에는 말할 거리도, 어떤 영감조차도 없는 그다. 본인이 알지 못할 뿐.  

평범하기 그지없는 나는, 상상할 수 없는 세계를 구성하는 작가들의 능력을 높이 산다. 그리고 상상한 그것을 발설하는 작가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들이 아니었으면, 나는 내 작은 세계에 갇혀 한 치 앞도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이언 매큐언의 하나같이 정 붙이기 힘든 악마적 ‘나’들 덕분에, 나는 다른 세상이 있음을 엿본다. 내게 숨구멍이 되어줄 다른 세계가 있음을, 혹은 절대 발들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 세계가 있음을 깨달으며, 나는 오늘도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첫 사랑 마지막 의식 - 이언 매큐언 소설, 박경희 옮김/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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