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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 색다르고 과감한 페미니스트 선언
제사 크리스핀 지음, 유지윤 옮김 / 북인더갭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제사 크리스핀은 보편적 페미니즘에 강하게 반기를 든다. 모두에게 다가가기 위한 페미니즘은 진부하고 위협적이지 않으며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애초에 사람들을 불편하게 함으로서 사람이나 사회 정서의 변화를 꾀하는 것인데, 모두를 포섭하겠다는 목표로 그 본연의 임무를 완전히 망각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보편적 페미니즘이 결국 페미니스트 운동을 방해한다고 말한다. 누가 무엇을 하든 페미니스트라는 이름표를 달 수 있게 되자, 페미니즘은 오히려 가부장제를 강화하는 것으로 이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예로, 페미니즘의 성공지표로 언급되는 것이 자본주의의 성공지표와 같다는 것을 지적한다. 바로 돈과 권력이다. 페미니즘이 가부장적 가치에 의해 손상되었으며, 가부장적 세계에서 승리하기 위해 페미니스트들이 가부장의 역할을 자임했고, 기존의 시스템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시스템에 속한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도덕적 관점에서 낫다고 말할 근거는 없다.
"여성들을 권력에 접근 가능하도록 양육하는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더 평등한 세상이 아니라 그 안에 여성만 더 많아진, 이전과 같은 세상일 뿐이다."(p80)
"페미니즘이 사회에 의문을 제시하고 관계를 맺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며 자신의 삶에 질문을 던지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하는 정치체제에서 방향을 틀어 자기역량 강화와 자기 계발의 방편으로 바뀌는 순간, 그것은 보편적 페미니즘이 된다."(p32)
자기역량 강화와 자기 계발의 추종은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이나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을 억압하는데 이용된다는 지적, 놀랍다. 그녀는 페미니즘을 받아들일 수 없는 여성들에 대해 말한다. 페미니즘을 받아들임으로서 더욱 불안한 세상 속으로 던져져야 한다면, 생존을 더욱 위협당해야 한다면 어찌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페미니즘이 할 일은 그들을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불행이 모두의 불행과 일치하지는 않는지 돌아보고, 이들의 바람과 욕구에 귀기울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함께 연대하여 탐욕에 기반을 둔 이 사회, 빈곤과 폭력, 착취로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이 사회 전체가 종식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기만 한다면 우리는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p84)
선택 페미니즘을 비판하기도 한다. 이는 생활방식, 가족관계, 대중문화, 소비에 이르기까지 여성이 무엇을 선택하든 페미니스트에 걸맞은 선택을 한다는 믿음이라고 한다. 소위 성공한 여성이 무조건 페미니즘을 실천하고 있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저자는 피해자 사고방식과 비인간화 관점의 위험성도 지목한다. 무조건 여성이 피해자라는 관점은 복수의 냄새까지 풍긴다는 것이다. 우리가 고통과 억압을 받았다고 해서 연민과 배려를 거둘 필요는 없음을 말한다. 또한 분노나 복수라는 파괴적인 역학에 빠져 있는 것은 건설적인 일에 쓰일 에너지를 고갈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라이프스타일 페미니즘에서 벗어날 것을 강조한다. 페미니즘을 상징하는 비싼 옷이나 소품을 걸치고는, 실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현재의 페미니즘을 비판하지만 그녀가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은 새로운 사상에 대한 상상이다. 상상해야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부장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소비사회를 해체하려면 돈과 가치를 동일시하는 이야기를 멈추어야 한다고, 가치는 사랑과 돌봄으로 표현되는 세상을 상상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문화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문화를 점령해야 한다. 이 세상이 지금 같으리라는 법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착취행위에 상을 주어선 안 되고, 우리 지구와 우리 몸과 영혼의 타락을 거들 필요도 없다. 우리는 저항할 수 있다. 더 큰 사고를 해야만 한다." (p187)
책은 여타의 페미니즘 책과 같지만 다르고, 다르지만 같다. 새로운 상상을 촉구하며, 실천하는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데서 같고, 페미니즘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를 높이고 선명성을 요구한다는데서 다르다. 제목과 달리, 서두와 달리, 딱히 도발적이지만은 않다고 생각이 들기도 할 때쯤, 옮긴이의 말엔 그녀의 인터뷰 내용이 등장한다. 페미니스트라면, 당장 이혼부터 하라고. 그것은 가부장제에 편입된 것이니. 그녀의 제언은 도발적이다. 생각할 거리가 많은 책이다. 페미니스트임을 자임하면서도 제모와 날씬한 몸에 집착하는 많은 여성들에겐 더욱이.
"페미니즘이 보편적이라면, 즉 모든 여성과 남성이 '올라 탈' 수 있는 것이라면, 그런 페미니즘은 사절이다.
페미니즘이 정치적 진보를 가장하여 개인의 영달을 위해 이용되고 만다면, 그런 페미니즘도 사절이다.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면서 '나는 화나지 않았고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안심시켜야만 한다면, 그런 페미니즘도 절대 사절이다.
나는 화가 났다. 그리고 꽤 위협적이고 싶다."(pp12-13)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 제사 크리스핀 지음, 유지윤 옮김/ 북인더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