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학교 : 나이 드는 법 인생학교 How to 시리즈
앤 카르프 지음, 이은경 옮김 / 프런티어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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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이 듦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다면, 읽어볼 만하다. 

언제나 그렇듯, 책이 답을 모셔다 주는 경우는 없으나 영감은 준다고 생각한다. 


나이 드는 법에 대한 특별한 비결이나 처방은 제공하지 않는다고 여는 글에서 밝히고 있다. 

"반대로 비교적 나이 든 혹은 젊은 사람이 어떻게 보여야 하고, 어떻게 말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라는 규범적인 개념에서 스스로를 해방시켜야 한다는 신념에서 시작한다."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 시대의 화두가 아닐지. 복지 역시 근간은 같은 것으로 본다.


나이 듦에 대한 불편함을 조장시키는 현상은 전사회적으로 퍼져 있다.

노령 인구가 많아진 인구 분포도는 늘 부정적으로 언급된다. 심지어 잿빛 쓰나미라는 말까지. 

"(...) 증가하는 수명에 대한 모든 논쟁은 누가 누구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가와 관련해 수상쩍고 불필요한 불안을 조장한다." 

노령 인구의 사회적 기여는 경시되고, 사회적 '부담'으로서만 해석된다. 

노령은 외롭고, 연약하게 묘사된다. 

틀니와 보청기는 노인을 일반화하는데 사용되고, 이는 노인을 능력이 아니라 장애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노인 세대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일찍 은퇴해서 연금을 받으면 젊은 세대의 피를 빠는 거머리 취급을 받는다. 은퇴 연령이 지나서도 계속 일을 하면 젊은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돌린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부정적으로 굳어진 인식은 '나이 듦'에 대한 공포를 조장한다. 

무려 20세에 '나이 듦'의 공포를 갖고, (극단적인 경우 8세 소녀마저!), 불안에 떠는 30대 여성은 광고주의 주요 타겟이 된다. 


인간은 과거보다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살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나이 듦을 걱정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것이다. 

늙는 시기도, 죽는 시기도 늦어졌지만, 젊을 때부터 늙을 것을 걱정하느라 인생을 소비하니, 과연 이것이 수명 연장의 축복이라 할 수 있을지.


어떤 이들은 '예외론자'가 된다. 다른 사람들의 나이 듦을 수긍하면서도, 자기 자신은 나이 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사람일수록 은퇴하거나 직업 정체성을 상실했을 때 받는 충격이 강력하다. 

"그들은 지속할 수 있는 자질을 기르는 데 실패했고, 비록 당시는 불평불만을 늘어놓았을지라도 일이 강요하는 억압 구조 없이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른다."


노령은 치료 대상으로 간주되고, 이는 나아가 죽음을 부자연스럽게 보도록 일조한다. 

영국에서 '자연사'라는 사망 원인은 불법이라고 한다.

"서구 국가에서는 죽음을 삶에서 불가피한 부분이라기보다는 의료 실패로 간주하는 시각이 점점 만연해진다."


이렇게 전방위적으로 부정적으로 묘사된 노령인구는 사회적으로 격리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노인들을 시야에서 치우고 싶어하는 이유는 그들이 우리 역시 늙고 죽는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연령 격리는 과연 바람직한 방향일까. 


꼭 노령 인구가 아니어도, 존재보다는 효용 가치로 사람이 평가되는 태도는 돌아볼 만하다. 

"존재가 평가 절하되고 행위가 과대평가되는 문화에서 노령이 경멸과 수치로 여겨지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노령 인구는 그들이 이룬 성과와 효용성을 주장해야 할까. 

그들이 행복해지는 것도, 그저 존재하는 것으로도, 전 연령대에게 희망이나 어떤 가능성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적으로 더 존재하고 외적으로 덜 실행하는" 것도, 사회적 기대로부터 해방되는 것도, 보다 더 자기 자신다운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도, "존재에서 얻는 환희"가 될 수 있다.


저자는 "나이 듦"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나이 들며 '축어 기억'은 감퇴하더라도 '요점 기억'은 증진되는 등의 장점 역시 있으나, 이를 차치하고라도, 나이 듦의 변화 자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 애도는 즐겁게 나이 들어가는 과정에 필수적인 요소다. 애도를 통해 삶의 어떤 측면에 작별을 고하고 새로운 측면을 반길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상실에 대한 슬픔과 비탄을 견뎌내는 힘은 나이를 불문하고 우리가 나이 드는 데 도움이 되는 필수적인 자원이다."

"나이를 포용한다는 것은 노령을 포용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변화의 과정을 수용한다는 의미다."

"일단 자신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정말로 충분히 이해하기 시작하면 노령은 훨씬 덜 두려운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당신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말은, 다시 말해 당신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키케로는 "오로지 바보들만이 자기 자신의 연약함을 나이 탓으로 돌린다고 믿었다"고 한다.

그는 <노년에 관하여>에서 "자기 안에 바람직하고 행복한 삶을 구축할 자원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어떤 나이라도 힘겹게 느낀다." 고 말한다. 


그렇다. 연령이 문제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연장자들의 인간성을 회복하고, 나이 든 사람 역시 젊은이와 우리에게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것과 똑같이 풍부한 내면 세계, 열정 및 복잡한 인간세계를 지님을 인정해야 한다."


또한 편견으로부터 빠져 나와야 한다. 

나이 든 사람이 젊은 사람에게 그 시절엔 어떠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나, 

젊은 사람이 나이 든 사람에게 '한창 때' 어땠는지 물어보는 것이나 별반 다를 바 없이 진부하다는 말은 인상적이다. 

사람의 한창 때란 다 다른데다가, 심지어 타인에게 당신의 "한창 때"가 지나갔을 것이라는 단정어린 언사는 매우 무례하다. 

현명한 누군가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사실 오늘이 한창 때란다. 그리고 내일도 그럴 거야."


사람들이 말하는 "늙은 것 같은 기분"은 보통 우울함인 경우가 많으며, 혹은 고용주가 그들을 대하는 방식으로 언급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니, 씁쓸할 따름이다. 


저자는 인종 격리가 시대에 역행하듯, 연령 차별주의와 연령별 격리에서 벗어나 모든 연령대가 융화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세대 간의 연대는 필요하고, 실제로 행하고 있는 나라도 많다고. 

"모든 연령대의 사람을 잠재적인 친구로 보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평생에 걸쳐 우정을 키움으로써 우리는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로부터 배울 수 있고 영감을 얻을 수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을 포용하는 것은 나이 드는 과정을 포용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내가 꿈꾸는 사회지만, 나이를 곧 위계로 받아들이는 우리 사회에선 요원한 일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바람직하게 나이 드는 사람은 가장 가볍게 여행하는 사람, 자기 삶의 한 단계에서 고수했던 규범적인 생각이 다른 단계에 적당하지 않음을 알았을 때 과감히 버릴 수 있는 사람이다. 정신의 유연함이 필요하다."


연상되는 책으로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죽어가는 자의 고독>, 앤 이니스 대그의 <동물에게 배우는 노년의 삶>이 있다.

전자는 노화와 죽음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지, 나아가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풀어나간다는 점에서, 후자는 노화의 미덕을 말한다는 점에서.

엄연히 주제는 다르지만, 사회적 약자들을 더이상 약자가 아닐 수 있게 만들어야 함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천정환의 <자살론>도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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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누이
싱고 지음 / 창비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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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도록 천천히" 읽어달라는 '작가의 말'에도 불구하고,

앙증맞은 그림에, 휘리릭 넘겨봐야지 생각하며 펼쳤다가.

이내,

그녀 말대로 천천히,

공들여 마음 들여 읽게 되었다. 


작가의 사랑스러운 글·그림과 함께, 좋은 시들이 수록되어 있다.

파장을 일으키는 글들이 많았다. 

아, 서늘하며 뜨거운 가시가 박힌다. 


시를 거의 읽지 않고 살았지만,

마음 깊이 들어오는 시들이 많았다. 


내가 바라는 '나의' 리뷰는, 나만이 쓸 수 있는 리뷰다.

있지도 않은 필력 때문이 아니라, 나만의 경험과 나만의 생각이 어우러지면, 그건 오직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이다.

감상이 얕든, 잘못되었든, 상관없다. 나아지면 좋겠으나 일단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내 글을 통해 다른 사람이 원문을 보고 싶든, 아니든,  그건 내 관심사가 아니다.

우선은 나를 위해 쓰는 글이기 때문이고, 

그렇게 이어지는 책을 통한 대화가 행복하지만, 나는 책보다 생각의 교류에 보다 방점을 둔다. 


그러니.. 처음이거나, 적어도 아주 오랜만인 듯 한데,

이 책은.. 다른 분들도 읽고 싶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  

특히 나처럼 시를 멀리하고 살았으나, 가까이 하고 싶은 마음이 있던 분들이라면.


세월호 이야기,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 촛불 등의 이야기도 담겼다.

갓 출간된 베스트셀러를 대체로 좋아하지 않지만, 

동시대를 품고 있다는 매력을 간과할 수는 없는 듯하다.


"시와 친해지고 싶은데, 어떤 시부터 읽어야 할지 막막하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이 책을 펼쳐주세요." - 작가의 말 중


좋은 선택이 될 듯하다.

딱, 내겐 주효했다. 

마음을 열고, 시를 읽어봐야지. 

시가 읽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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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가 아니었다면 - 실패를 찬양하는 나라에서 71일 히치하이킹
강은경 지음 / 어떤책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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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어느 부분을 친구에게 읽어주다가 왈칵, 눈물이 났다. 

황급히 전화를 끊고, 심호흡을 했다.


저자는 30년 동안 소설가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했으나 번번이 좌절한다.

노안이 찾아오자 "인생 볼 장 다 봤다!"라는 생각으로 펜을 꺾고 "실패를 찬양하는 나라"라는 아이슬란드로 떠난다. 

그 71일간의 히치하이킹 여행이 담겼다.


프롤로그 중, 

"세상에나, 그 긴 세월을?! 쯧쯧, 미련 고집불통이다, 라고 하시겠어요? 훌륭한 옹고집이다, 하시겠어요? 좀 헷갈리죠?"


어느 부분에서 눈물이 났던가.

여행을 결정하는 자조섞인 말이었나.

"나는 아이슬란드에서 찬양받아 마땅한 '인생 실패자' 아닌가!"

여전히 간직한 듯한 미련 때문이었나. 

"저 양처럼 죽을 힘을 다해 전력질주했다면, 나도 바늘구멍 같은 '등단'이라는 구멍을 통과할 수 있지 않았을까?"


몇몇 대목을 옮긴다. 

"뭐가 되든 못 되든, 결말이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더라고요. 아니, 뭐가 되고 못 되었다는 게 어떻게 우리의 결말일 수 있겠어요?"


"언젠가 사라질 것들은 모두 눈물겨운 존재다."


"꿈에서 깨면 전부 사라진다.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진다. 또 머지않아 이런 인식조차 깡그리 날아가겠지. 그러면 슬플까, 홀가분할까? 그조차 못느끼겠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건 슬픔일까, 자유일까? 어쨌든 지금 내겐 이 순간 순간의 악몽도 고통도 사랑도 애틋하다."


책의 말미, 인생을 실패했다는 그녀의 말에, 아이슬란드 할머니는 말한다. 

"당신은 쓰고 싶은 글 쓰며 살았잖아요. 그랬으면 됐지, 왜 실패자라는 거죠? 지금 여기에 앉아 있는 당신이 인생을 다 실패했다니, 난 당신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당신에겐 사는 게 뭐죠?"


처음부터 나는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당신이 대체 왜 실패자냐고.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았으면 그럼 되는 거 아니냐고. 

결국, 자신의 삶에 대한 것은 본인의 만족 여부로 결정되겠지만,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응원할 뿐.

무언가를 향한 삼십년의 도전은 이미 숭고하다. 


앞부분만 읽고도 눈물을 쏟으며 전율했던 것과 달리, 여행기는 지루한 감도 있었다.

본문에 앞서 실려 있는 컬러사진은 참 좋았지만, 본문엔 사진 한 장 없는 여행기라는 것은 약간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었다.

읽지 않았다면, 앞부분의 전율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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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론 - 고통과 해석 사이에서
천정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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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중, 요즘은 무슨 책을 읽냐고 물어온 사람이 둘 있었다.

제목만 듣고는, 둘 다 왜 그런 무서운 책을 읽냐고. 

덕분에 저자가 말하는 자살이 터부시되는 사회적 분위기도 새삼 확인했달까. 

오해다. 전혀 무섭지 않다. 

엄청 재미있게 읽었다. 

지적이고 유희적이며, 이성적이고 감성적이다. 

매우 만족스럽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정몽헌 회장의 자살을 계기로 자살을 화두로 삼게 되었다고 밝힌다. 

"정몽헌 회장의 죽음이 자살로서는 훨씬 완벽해 보였다. 생활고에 떼밀려, 혼란스런 마음의 벼랑 끝에 섰기에, 복수하기 위하여, 또는 우울증의 끝에 택해지는 자살들에 비하여." 


우연히 같은 자리에 있어 함께 그 사건을 접한 "병색에 찌든 얼굴과 가난한 외양"을 한 아낙은, "에유~ 쯧쯧!"하고 혀를 찬다.

"모든 산 자는 죽은 자를 위해 혀를 차며 동정할 권리를 가진 것인가."


저자는 도처에 널려있던 자살을 떠올린다.

"1986년의 봄에도 많은 어린 사람들이 다치고 죽었다"는 것. 

"인간들은 더 강하고 깊게 서로 연결돼 있었던 듯하다. 타자들의 가난과 죽음이 나의 실존에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변수였던 듯하다."

"그러니까 그 중에서도 지나치게 선하고 예민한 사람들은 '5월'을 넘어 살아내기가 어려웠다. 자기 자신이라도 내던지고 공격해 세계의 비참과 불의에 작은 생채기라도 내고 싶어했던 듯하다." 

누군가는 세상에 소리라도 내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데, 그 세상의 사람들이 이 죽음을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저자는 자살자들이,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자살을 주변 사람들에게 시사하거나, 토로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자살자는 최후까지 구원을 기대한다."

"누구에게나 삶이 딱 한 번이듯, '죽음'도 딱 한 번인 것이다. 그런데 이 어려운 타자의 '딱 한 번'에 우리가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저자는 "자살이란 우리네 삶과 사회의 한계 자체"라고 짚고, 관심을 촉구한다. 

"직접성을 잃고 신자유주의의 효율에 '저당잡힌 삶'은, 죽음을 아무것도 아닌 사건으로 만들어버"리고 있지만, 

"죽음에 대한 더 많은 앎이 삶을 더 존중하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믿기에 이런 글을 쓴다"고. 


아래의 문장으로 저자의 논지를 보다 확실히 이해할 수 있다. 

"정몽헌씨의 자살이 좀더 '자살 그 자체'에 가까운 것은, '생계형 자살자'의 죽음이 타살로서의 성격이 훨씬 더 강하기 때문이다."

철저히 개인적인 자살이 얼마나 되겠는가. 

가난해서, 도저히 살아낼 수가 없어서 죽는 생계형 자살이 진정 자살일까. 

열녀를 칭송하는 사회, 정절을 잃거나 남편이 죽으면 따라죽어야 명예로운 것으로 간주되는 사회에서, 여성의 생명이나 인권은 '정절' 앞에서 한낱 이야깃거리도 되지 못하는 사회에서, 여성의 자살이 순수한 자살일까. 


책에 의하면, 2012년 한 해 자살자는 14,779명, 하루 40여명 꼴이라고 한다. 

뼈아픈 말, "사실상 우리 모두는 자살생존자다."


죽음, 특히 자살을 터부시하는 우리 문화에서 우리는 자살에 대해 무지하고, "무지와 기피는 자살을 방조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고로, 자살을 연구하는 것은 사회를 연구하는 것이다.


저자는 "자살이야말로 우리 사회와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살아 있는' 비판"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사는 곳이 아귀지옥임을 말해주고, 희생양이 되어 우리의 가해를 대속하는 존재라고. 


국가는 자살의 '원인'을 정신질환 같은 개인의 문제로 돌리려 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는 전체주의의 속성과 관계가 깊고, 박정희정권 역시 자살 통계를 포함한 각종 국가 통계를 비밀문서로 분류하고 통제, 은폐했다고. 

지금의 한국은 자살률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실질적인 대책을 내놓지 않는다.

이는 대자본과 시장이 국가의 모든 것을 지배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진단한다. 


책은 방대한 통계와 역사적 자료들은 물론 문학적 텍스트들을 활용하고 있어 매우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덕분에 문학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동시에 이성적인 독서를 할 수 있었다. 

수입된(!) 정사(情死)가 식민지 조선에서 근대의 표징, 즉 '연애의 시대'를 드러내는 기능을 했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60년대까지 드물지 않게 등장했던 정사 및 실연자살은, 이제 드문 일이 되었다.

저자는 사회적으로 계몽되고 경제적 독립성이 커진 여성이 결혼(제도)이 가진 모순을 통찰하게 되었으며, 특히 신자유주의가 연애와 결혼의 의미를 변형시키고 있다고 분석한다. 

남녀관계는 프로젝트가 되고 있으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자체를 시작하지 않게 하므로, 정사와 같은 극단적인 일은 애초부터 차단되는 셈이라고. 

70년대까지도 언론에서 심심치 않게 써왔다는 '정사'라는 단어 자체가 지금은 사어가 되다시피 한 것도 이를 드러낸다. 


우리가 현재 목도하는 자살의 모든 '이유'와 양상이 1910~20년대부터 본격화되고 극성을 부리기 시작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조선에 이식된 자본주의는, 노동 능력이 없거나 최하층 소속의 사람들이 곧 '벌거벗은 생명'이 될 수 있는 성격의 자본주의였던 듯하다."

"요컨대 조선의 자살자와 아사자는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살자와 아사자는 또한 다 같은 "자연법칙의 희생자"다. 식민지 자본주의는 '문명'이 아니라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 지배하는 일종의 '자연'인 것이다."

또한 조선의 자살률 증가를 조선총독부가 '문명화', 즉 문화 진전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로 간주했다는 통탄할 만하다. 

지금도 그런 식의 사고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꺼림칙한 마음이 든다. 

저자는 "'성장'은 '자살'과 반대되는 자리에 있는 개념이라 할 수 있는 '행복'이나 '자아존중'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을 통계와 자료를 들어 설명한다. 성장만이 우리를 구원할 진리라고 믿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싶다. 

"사회학자 정승화가 말한 것처럼 박정희의 근대화 개발이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이던 1960~70년대의 "개발독재 시기는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자살률이 높았던 '절망의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곧 '아노미적 자살'의 개념인데, 박정희 통치 연간은 일종의 사회적 '위기' 국면이자 인간적 삶의 '비상 사태'였던 것이다. 오늘날 사회과학은 그것을 '압축성장'이라는 부드러운 말로 불러준다."

"성장은 물론 중요한 가치다. 그러나 '누구를 위한 어떤 성장인가'가 이슈일 때 성장은 진정으로 의미있다. 결국 문제는 정치적 주권과 계급관계일지 모른다."

"자살과 경제 문제의 '최종심급'에도 결국 '정치'가 있을 것이다."


자살이 만연한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다. 

저자는 자살자들이 생명을 존중하지 않거나 건강한 가치관을 갖지 않은 것처럼 바라보는 시각은 위험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모든 현상을 다각적으로 바라보고, 실질적 대책을 찾아야 한다. 

"그러다가 우리는, 바우만이 말한 것처럼 죽지 않고 죽음을 당한다." 


저자의 논지만을 파악하자면 이렇게 긴 지면은 필요없겠다 싶기도 하지만,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매우 만족스러운 독서를 할 수 있었다.

국문학과 교수의 사회 현상 바라보기라. 

문학이 사회를 어떻게 반영하는지, 다시 사회는 문학을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도 해 퍽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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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9
패니 플래그 지음, 김후자 옮김 / 민음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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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너무 많은 등장인물에 정신없는 순간이 지나고,

어느 새 웃고, 어느 틈엔 울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마흔 여덟 에벌린의 자아 찾기.

늦은 게 어디있나, 행복으로 가는 길에. 


에벌린에게 여성 해방 운동은 너무 늦게 찾아와버렸다.  

결혼을 꼭 해야 되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땐 이미 두 아이의 엄마였고, 무언가 바꾸기엔 늦어버린 것 같다. 

세상은 너무 변해버렸고, 다 큰 아이들은 낯설고, 남편은 늘 그랬듯이 남편 역을 수행하는 사람 같기만 하다. 

유일한 낙은 달콤한 군것질. 

그러나 불어가는 몸과 반복적으로 시도하고 또 실패하는 다이어트는 그녀를 더욱 무기력하게 만든다. 

이런 저런 모임에도 참석해보지만 어디에도 쉽게 소속될 수 없다. 

남자를 행복하게 하는 것만이 행복이라는 모임 '완벽한 여성'은 주최자의 이혼으로 어이없게 끝나버리고, 

지지하는 성향이 마음에 들어 일원이 되고 싶었던 여성 커뮤니티는, 성기를 자세히 살펴보라는 제안 이후로 두번 다시 갈 수 없다.

동창회에 갔다가, 그녀는 또래의 여인들이 모두 비슷한 혼란 속에 있음을 깨닫기도 한다. 

그러니까, 요리 파티에 참석하긴 따분하고, 제 성기를 들여다보자니 겁이 나는 세대.


그녀는 자신의 삶에 환멸을 느낀다.

"그녀가 두려워한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회색빛 중환자 대기실을 연상시키는 그녀 자신의 삶이었다." 


무언가 달라질 거라 기대도 해보지만,

"마침내 변할 게 아무것도 없음을, 와서 데려가 줄 사람이 어디에도 없음을 깨닫기 시작했을 때, 은근한 초조함과 끔찍한 절망감이 밀려왔다. 마치 우물 밑바닥에서 아무도 듣지 못하는 비명을 지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시어머니의 문병 때문에 매주 의무적으로 찾아가던 요양원에서, 에벌린은 스레드굿 부인을 만나게 된다.

에벌린은 스레드굿 부인을 통해 약 반세기 전의 휘슬 스톱 마을 이야기를 듣게 되고, 그에 빠져든다.  


휘슬 스톱  이야기의 중심엔 사랑으로 엮인 이지와 루스가 있다. 

못말리는 정의감과 사랑으로 뭉친 이지는 상상을 뛰어넘는다. 여자라는 한계 따윈 그녀에게 없다.

KKK단 때문에 공원에 갈 수 없는 흑인 꼬마 팬시가 코끼리가 보고 싶다며 앓아 눕자, 코끼리를 마을로 데려오는 기상천외함!

기차 식료품칸을 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던, 둔갑술까지 하는 깜둥이이라고 소문난 존재 역시 다름아닌 이지였다. 


루스 역시 용감함으로 치자면, 누구 못지 않다. 

이혼이라는 것을 상상할 수 없던 시절, 폭력과 학대에 시달린 과거를 뒤로 하고 당당히 남편으로부터 벗어나 제 삶을 찾아 나선 인물이다. 

이게 용기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때론 뻔한 일들이 반갑기도 하다. 

루스를 괴롭힌 남편 프랭크가 행방불명된 후, 흑인 빅 조지와 이지가 살인범으로 몰렸을 때 독특한 방법으로 서로를 돕는 마을 사람들.

권선징악이어서가 아니라, 은혜를 아는 사람들이라서 좋다. 어디 모두 그렇던가. 


에바의 캐릭터는 대단했다.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에바는 지극히 향락적으로 살 수 있었다."

에벌린에게 이지와 루스 못지 않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그 놈의 남의 눈 따위. 


예뻐하기 힘든 캐릭터도 있다. 

베스타 애드콕! 흑인 일꾼을 차로 치어놓고는, 그가 낮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 문제라고 말하는 그녀. 

끝까지 일관성을 잃지 않는 그녀의 삶은 코믹하기까지. 


휘슬 스톱, 그러니까 스레드굿 부인의 이야기 속에도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말하자면 일제와 독재를 빼놓을 수 없는 것처럼, 미국의 20세기를 말하려면 인종차별을 빼놓을 수 없는 듯하다. 

흑인은 병원에도 못 가고, 억울하게 살인미수죄로 잡혀가질 않나. 


에벌린은 스레드굿 부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긍정성을 조금씩 찾고 현실의 고통을 잊어 가다가도, 

막되먹은 낯선 아이의 상종할 가치도 없는 막말 "이 피둥피둥한 멍청이 같은 년아!"에 다시 무너지기도 한다.

"(...) 에벌린은 다시금 늙고 뚱뚱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것은 "말로 당한 강간"이고 "능욕"이었다. 에벌린은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머리를 겨누고 내 삶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총, 그 힘, 그 음험한 위협.... 욕먹는 것에 대한 그 공포는 무엇일까?"

그녀는 깨닫는다. 

남의 눈 때문에 순결을 지켰고, 남의 눈 때문에 결혼을 했으며, 남의 눈 때문에 오르가즘을 연기하고, 아이를 갖고, 바가지를 긁지 않고, 언성을 높이지도 않으며.. 모든 것이 남의 눈, 남의 눈, 남의 눈 때문에 이뤄졌다는 것을! 

타인이 규정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고 모든 것에 순종했으나, 결국 그녀에게 남은 건 남의 말 한마디에 무너져버리는 약해빠진 자아일뿐. 

생각은 이어지고, 왜 욕설은 늘 성적인지부터 시작해 그녀가 깨닫는 것은 페미니즘을 깨치는 과정이기도 하다. 


불알에 대한 남편의 집착의 의미를 생각하는 에벌린.

"그 조그만 불알 두쪽은 모든 문을 여는 열쇠였다. 보다 앞서 가야 할 때, 누군가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어야 할 때, 가볍게 받아들여지지 않아야 할 때 필요한 신용카드였다. 에드가 아들을 원했던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녀에겐 불알이 없기에, 가족의 불알 수를 계산에 넣어도 될까 생각하며 수를 헤아리는 장면에선 폭소와 눈물이 동시에 터졌다. 

아슬아슬하기도 했다.

"기독교가 그처럼 번창했던 것도 이상할 게 없지. 예수와 열두 제자를 생각해 봐... 거기에 세례요한까지 포함시키면 열네 쌍이니까 스물여덟개 나 돼. 이젠 모든 게 아주 분명해졌어. 예전엔 어떻게 이런 것도 까맣게 모르고 살았지? 그래, 내가 해냈어. 여자들이 수세기 동안 찾아 헤맸던 비밀을 내가 밝혀낸 거야... 이것이 해답이야..."

깨침이 곧바로 창대한 시작이 되진 못했다. 

에벌린은 '보복자 토완다'라는 상상의 인물을 만들어 모든 사람들에게 보복하는 공상에 빠진다. 

한동안 토완다는 에벌린을 휘어잡고, (건방진 아이들의 차를 뭉개버리는 장면에선 쾌재를 불렀지만!), 그녀는 자신이 위험한 지경에 빠졌음을 깨닫게 된다. 

그녀는 자유로운 듯 보이는 흑인이 부럽기까지 하다. 


이렇게 혼란에 빠져 있는 에벌린에 비해 삶에 통달한 듯 보이는, 바비큐와 파이만 먹으면 행복할 것 같다는 여든 여섯의 스레드굿 부인. 

늙음이 꼭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아니라고,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이 있다고 태연하게 보여주는 것만 같다.  


에벌린은 스레드굿 부인에게 주님을 찾아뵙기로 약속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흑인들의 교회, 마틴 루서 킹 기념 침례교회를 찾아간다. 

흑인들의 삶을 생각하게 된 에벌린. 그곳에서 드디어 해방을 얻는다. 속박에서 풀려난다.  

"분노와 증오라는 무거운 짐들이 스르르 풀어져 허공에 흩어졌다. 토완다도 더불어 자유로웠다!"

"자기 자신을 용서했다. 그녀는 자유로웠다. 자유로웠다. 온갖 고난을 겪었으면서도 증오와 두려움이 사랑의 정신을 죽이게 두지 않았던, 바로 오늘 이곳에 모인 사람들처럼."

약한 자들의 아름다운 연대여. 


자유를 찾은 에벌린은 자학을 멈춘다.

자신감을 되찾고, 실제로 대단한 일을 해낸다. 유능한 영업사원으로서 분홍색 캐딜락을 받고, 남편을 변하게 한다. 그녀의 삶은 아직 많이도 남았다! 


스레드굿 부인은 편안히 영면하게 되고, 에벌린이 그녀의 유품을 건네받는 장면은, 뻔하면서도 눈물이 핑 돌고 만다.

에벌린은 더이상 늙거나 죽는 일이 두렵지 않다.  


그녀가 여성 해방 운동이 자신에겐 너무 늦게 찾아왔다, 라는 말을 할 때 무언가 가슴이 철렁했다.

<82년생 김지영>들의 세상을 살아가는 나로서, 

많은 이야기들이 가슴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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