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9
패니 플래그 지음, 김후자 옮김 / 민음사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너무 많은 등장인물에 정신없는 순간이 지나고,

어느 새 웃고, 어느 틈엔 울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마흔 여덟 에벌린의 자아 찾기.

늦은 게 어디있나, 행복으로 가는 길에. 


에벌린에게 여성 해방 운동은 너무 늦게 찾아와버렸다.  

결혼을 꼭 해야 되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땐 이미 두 아이의 엄마였고, 무언가 바꾸기엔 늦어버린 것 같다. 

세상은 너무 변해버렸고, 다 큰 아이들은 낯설고, 남편은 늘 그랬듯이 남편 역을 수행하는 사람 같기만 하다. 

유일한 낙은 달콤한 군것질. 

그러나 불어가는 몸과 반복적으로 시도하고 또 실패하는 다이어트는 그녀를 더욱 무기력하게 만든다. 

이런 저런 모임에도 참석해보지만 어디에도 쉽게 소속될 수 없다. 

남자를 행복하게 하는 것만이 행복이라는 모임 '완벽한 여성'은 주최자의 이혼으로 어이없게 끝나버리고, 

지지하는 성향이 마음에 들어 일원이 되고 싶었던 여성 커뮤니티는, 성기를 자세히 살펴보라는 제안 이후로 두번 다시 갈 수 없다.

동창회에 갔다가, 그녀는 또래의 여인들이 모두 비슷한 혼란 속에 있음을 깨닫기도 한다. 

그러니까, 요리 파티에 참석하긴 따분하고, 제 성기를 들여다보자니 겁이 나는 세대.


그녀는 자신의 삶에 환멸을 느낀다.

"그녀가 두려워한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회색빛 중환자 대기실을 연상시키는 그녀 자신의 삶이었다." 


무언가 달라질 거라 기대도 해보지만,

"마침내 변할 게 아무것도 없음을, 와서 데려가 줄 사람이 어디에도 없음을 깨닫기 시작했을 때, 은근한 초조함과 끔찍한 절망감이 밀려왔다. 마치 우물 밑바닥에서 아무도 듣지 못하는 비명을 지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시어머니의 문병 때문에 매주 의무적으로 찾아가던 요양원에서, 에벌린은 스레드굿 부인을 만나게 된다.

에벌린은 스레드굿 부인을 통해 약 반세기 전의 휘슬 스톱 마을 이야기를 듣게 되고, 그에 빠져든다.  


휘슬 스톱  이야기의 중심엔 사랑으로 엮인 이지와 루스가 있다. 

못말리는 정의감과 사랑으로 뭉친 이지는 상상을 뛰어넘는다. 여자라는 한계 따윈 그녀에게 없다.

KKK단 때문에 공원에 갈 수 없는 흑인 꼬마 팬시가 코끼리가 보고 싶다며 앓아 눕자, 코끼리를 마을로 데려오는 기상천외함!

기차 식료품칸을 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던, 둔갑술까지 하는 깜둥이이라고 소문난 존재 역시 다름아닌 이지였다. 


루스 역시 용감함으로 치자면, 누구 못지 않다. 

이혼이라는 것을 상상할 수 없던 시절, 폭력과 학대에 시달린 과거를 뒤로 하고 당당히 남편으로부터 벗어나 제 삶을 찾아 나선 인물이다. 

이게 용기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때론 뻔한 일들이 반갑기도 하다. 

루스를 괴롭힌 남편 프랭크가 행방불명된 후, 흑인 빅 조지와 이지가 살인범으로 몰렸을 때 독특한 방법으로 서로를 돕는 마을 사람들.

권선징악이어서가 아니라, 은혜를 아는 사람들이라서 좋다. 어디 모두 그렇던가. 


에바의 캐릭터는 대단했다.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에바는 지극히 향락적으로 살 수 있었다."

에벌린에게 이지와 루스 못지 않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그 놈의 남의 눈 따위. 


예뻐하기 힘든 캐릭터도 있다. 

베스타 애드콕! 흑인 일꾼을 차로 치어놓고는, 그가 낮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 문제라고 말하는 그녀. 

끝까지 일관성을 잃지 않는 그녀의 삶은 코믹하기까지. 


휘슬 스톱, 그러니까 스레드굿 부인의 이야기 속에도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말하자면 일제와 독재를 빼놓을 수 없는 것처럼, 미국의 20세기를 말하려면 인종차별을 빼놓을 수 없는 듯하다. 

흑인은 병원에도 못 가고, 억울하게 살인미수죄로 잡혀가질 않나. 


에벌린은 스레드굿 부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긍정성을 조금씩 찾고 현실의 고통을 잊어 가다가도, 

막되먹은 낯선 아이의 상종할 가치도 없는 막말 "이 피둥피둥한 멍청이 같은 년아!"에 다시 무너지기도 한다.

"(...) 에벌린은 다시금 늙고 뚱뚱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것은 "말로 당한 강간"이고 "능욕"이었다. 에벌린은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머리를 겨누고 내 삶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총, 그 힘, 그 음험한 위협.... 욕먹는 것에 대한 그 공포는 무엇일까?"

그녀는 깨닫는다. 

남의 눈 때문에 순결을 지켰고, 남의 눈 때문에 결혼을 했으며, 남의 눈 때문에 오르가즘을 연기하고, 아이를 갖고, 바가지를 긁지 않고, 언성을 높이지도 않으며.. 모든 것이 남의 눈, 남의 눈, 남의 눈 때문에 이뤄졌다는 것을! 

타인이 규정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고 모든 것에 순종했으나, 결국 그녀에게 남은 건 남의 말 한마디에 무너져버리는 약해빠진 자아일뿐. 

생각은 이어지고, 왜 욕설은 늘 성적인지부터 시작해 그녀가 깨닫는 것은 페미니즘을 깨치는 과정이기도 하다. 


불알에 대한 남편의 집착의 의미를 생각하는 에벌린.

"그 조그만 불알 두쪽은 모든 문을 여는 열쇠였다. 보다 앞서 가야 할 때, 누군가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어야 할 때, 가볍게 받아들여지지 않아야 할 때 필요한 신용카드였다. 에드가 아들을 원했던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녀에겐 불알이 없기에, 가족의 불알 수를 계산에 넣어도 될까 생각하며 수를 헤아리는 장면에선 폭소와 눈물이 동시에 터졌다. 

아슬아슬하기도 했다.

"기독교가 그처럼 번창했던 것도 이상할 게 없지. 예수와 열두 제자를 생각해 봐... 거기에 세례요한까지 포함시키면 열네 쌍이니까 스물여덟개 나 돼. 이젠 모든 게 아주 분명해졌어. 예전엔 어떻게 이런 것도 까맣게 모르고 살았지? 그래, 내가 해냈어. 여자들이 수세기 동안 찾아 헤맸던 비밀을 내가 밝혀낸 거야... 이것이 해답이야..."

깨침이 곧바로 창대한 시작이 되진 못했다. 

에벌린은 '보복자 토완다'라는 상상의 인물을 만들어 모든 사람들에게 보복하는 공상에 빠진다. 

한동안 토완다는 에벌린을 휘어잡고, (건방진 아이들의 차를 뭉개버리는 장면에선 쾌재를 불렀지만!), 그녀는 자신이 위험한 지경에 빠졌음을 깨닫게 된다. 

그녀는 자유로운 듯 보이는 흑인이 부럽기까지 하다. 


이렇게 혼란에 빠져 있는 에벌린에 비해 삶에 통달한 듯 보이는, 바비큐와 파이만 먹으면 행복할 것 같다는 여든 여섯의 스레드굿 부인. 

늙음이 꼭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아니라고,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이 있다고 태연하게 보여주는 것만 같다.  


에벌린은 스레드굿 부인에게 주님을 찾아뵙기로 약속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흑인들의 교회, 마틴 루서 킹 기념 침례교회를 찾아간다. 

흑인들의 삶을 생각하게 된 에벌린. 그곳에서 드디어 해방을 얻는다. 속박에서 풀려난다.  

"분노와 증오라는 무거운 짐들이 스르르 풀어져 허공에 흩어졌다. 토완다도 더불어 자유로웠다!"

"자기 자신을 용서했다. 그녀는 자유로웠다. 자유로웠다. 온갖 고난을 겪었으면서도 증오와 두려움이 사랑의 정신을 죽이게 두지 않았던, 바로 오늘 이곳에 모인 사람들처럼."

약한 자들의 아름다운 연대여. 


자유를 찾은 에벌린은 자학을 멈춘다.

자신감을 되찾고, 실제로 대단한 일을 해낸다. 유능한 영업사원으로서 분홍색 캐딜락을 받고, 남편을 변하게 한다. 그녀의 삶은 아직 많이도 남았다! 


스레드굿 부인은 편안히 영면하게 되고, 에벌린이 그녀의 유품을 건네받는 장면은, 뻔하면서도 눈물이 핑 돌고 만다.

에벌린은 더이상 늙거나 죽는 일이 두렵지 않다.  


그녀가 여성 해방 운동이 자신에겐 너무 늦게 찾아왔다, 라는 말을 할 때 무언가 가슴이 철렁했다.

<82년생 김지영>들의 세상을 살아가는 나로서, 

많은 이야기들이 가슴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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