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성 나르시시스트와 그 희생자들 - 악성 나르시시스트의 정체와 그 희생의 메커니즘을 찾아서
장 샤를르 부슈 지음, 권효정 옮김 / 바다출판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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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스트뿐만 아니라 그 희생자들에게 초점을 맞췄다는 점이 흥미롭다. 

어쩌다 그들은 나르시시스트의 희생양이 되었는가.


(책은 악성 자기애자, 악성 나르시시스트, 도착자라는 말을 혼용하고 있다. 다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악성 자기애자는 외면적으로는 사랑스러운 사람이며, 동정과 연민을 가장한다. 

그러나 실은 스스로 죄책감을 모르면서, 타인에게는 죄책감을 안겨준다. 

자신이 타인보다 위에 있으며, 특별한 존재로서 존경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만족적이고, 겸손이 부족하고, 타인을 무시하고 자신에게 과도하게 몰두한다. 애정에 대한 욕구는 사회관계 속에서 어느 정도 조율될 수 있고, 원하는 바를 달성할 수도 있다. 

자신의 장점은 과대평가하고, 실패나 인간관계를 악화시키는 스스로의 과오는 과소평가한다. 질투심이 강하다. 

자기애성 인격장애는 외동, 혹은 첫째에게서 주로 나타난다. 


그들은 부모로부터 받은 특징 중 일부를 못견뎌한다. 물려받았음을 알지만 받아들이고 싶지 않기에, 타인에게 그 부분을 떠넘긴다.

도착자는 피해자를 비난하고, 자신이 옮긴 일에 대한 책임을 피해자에게 전가한다. 본인은 좋은 사람, 심지어 자기가 피해자라는 인식을 상대에게 심어준다. 

가령 자신의 외도에 대한 책임을 상대에게 묻고, 스스로는 그 책임에서 벗어나 피해자가 된다.


악성 자기애자의 주무기는 '말'이다. 역설적 명령을 통해 피해자의 자아를 약화시키고, 현실에 대한 판단을 흐리게 한다.

상대방을 폄하하고 상대에게 자신의 감정을 투사하며 자신의 갈등을 타인에게 전가하고 본인은 우울증에서 벗어난다. 

도착자가 상대를 조정하며 기쁨을 느끼는 동안, 희생자는 큰 혼란에 빠진다. 


악성 자기애자는 자기애의 결핍으로 고통받는다. 자신감이 부족하고 부정적인 자기상을 갖는다. 스스로 사랑받지 못할 존재로 느끼고, 자존감이 없고, 인격 형성이 잘 되지 않았다. 이를 보상 하려는 듯, 자신에 대한 과대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혼란스러운 내면과 약한 자존감, 그렇기에 어떻게서든 지켜내야 할 자신에 대한 과대한 이미지가 공존하는 것이다. 

악성 자기애자들은 연인과의 관계에서 일방적인 착취 행위를 가한다. 그 누구에게도 고마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반면 세상의 모든 이가 자신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한다. 


진짜 자아상이 성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가치가 아닌 타인(혹은 집단)의 가치만을 높이 산다. 

진정으로 타인과 교류하는 것이 힘들다. 세상과 절연하지 않기 위해 피상적 인간관계를 유지해 갈 뿐이다. 

내면의 자아를 용기있게 마주할 필요가 있다. 장점과 단점 모두를 포함한,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상담치료사 또한 악성 자기애자의 정체를 쉽게 식별해내기 어렵다. 그들이 투사의 기제를 써서 피해자처럼 가장하기 때문이다. 

환자의 잘못이 없다고 말하기보다, 그들 자신의 가치관과 내면에 대해 숙고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희생양은 대체로 인심이 후하고 진정성이 있고 타인에게 열린 마음을 갖고 있다. 스스로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는 것도 공통된다.

누군가 자신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여 완벽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관계를 바라며, 과도하게 감정이입을 잘하고 책임감이 강하다. 

그들은 타인을 보호해주려 하며 사랑하고 위로하고 달래준다. 쉽게 스스로를 비난하고 죄책감을 느낀다. 비판적 시각과 자율성과 존엄성을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려 노력하며 자신의 최고의 모습만을 보여주려 한다. 타인에게 쉽게 종속되고, 사랑하는 대상에 환상을 품고, 그것을 오래 지속한다. 자신의 사랑을 자랑스러워하고 현실을 직면하길 원치 않으며, 스스로 희생양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때때로 그들은 마조히스트 기질을 보이기도 한다. 

도착자도, 희생자도 모두 자기애가 결핍된 사람들이다. 


공격자는 이를 쉽게 간파하고 이용한다. 악성 자기애자는 희생양이 자신에게 거리를 두는 것을 허락지 않고, 그들의 관계가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없도록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도 용인하지 않는다. 피해자를 계속 비하하며 고립시켜간다. 그렇게 함으로써, 피해자가 그를 대신하여 광기의 증상을 나타내게 만든다. 희생양들은 우울증과 폭력상태로 이끌어진다. 

악성 자기애자 앞에서 이성을 잃고 화를 낸다면, 그들의 시나리오에 말려든 것이다. "이제야 너의 본 모습을 드러내는구나."


가장 이상적 해결책은 악성 자기애자와 완전히 인연을 끊는 것이다. "삶을 살아가며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것보다 더 우선하는 일은 없다." 도착자 또한 새로운 희생양을 찾거나 자신에 대해 성찰해 볼 수 있다. 

도착자를 떠나기 위해서는 관심을 완전히 자신에게로 돌려야 한다. 스스로를 잘 알기 위해, 본질과 조우하기 위해.

스스로를 깊이 이해함으로써 상대의 비난에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다. 


악성 자기애자는 희생자들의 욕망뿐 아니라 주체성 또한 완전히 무시한다. 문제는 피해자 자신 역시 그것을 모두 부정하게 되는 위험이다. 그들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나 행동을 던짐으로써 혼돈을 일으킨다.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한, 혼란은 지속된다. 아예 무시하는 것이 혼돈에서 벗어나기 위한 첫걸음이라 할 수 있다.


악성 자기애자는 영유아기 때 정신발달 상태에 머물러 있다. 자신의 현실을 자각하고 재창조하길 원하며 주변 사람들을 파괴하면서까지 자신의 전능함을 확인하려 한다. 


악성 자기애자를 잔인하리만치 끔찍하게 이야기한 것 같지만, 저자는 동정심을 보이는 것을 잊지 않는다. 

악성 자기애자를 관찰하다보면, 그들 역시 또 다른 도착자로부터 상처입은 피해자였음을 알게 된다. 도착이 대물림되는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면에 대해 깊이 연구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스스로를 묶어놓았던 속박의 사슬을 끊고 자신이 자유로워져야만 곁에 있는 타인도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

저자는 말한다.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고, 가해자에 대한 용서는 신의 몫이라고. 

"그들도 과거 어느 시절에는 학대에 고통 받았던 힘없고 조그만 아이였단 사실을 잊지 말자.

 희생양은 어느 순간 지옥을 벗어날 수 있지만, 도착자는 자신의 정신세계에 갇힌 가여운 포로다."


퍽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스스로의 인간관계에서 같은 패턴이 반복된다면, 자신의 문제를 냉정하게 돌아볼만 하다.

(상대방 혹은 스스로) 나르시시스트는 아닌지, 번번히 그들을 찾아다니는 자발적 희생자들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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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좋은 사람
줌파 라히리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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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뒤표지의 문구처럼, "줌파 라히리식 가족 오디세이"가 펼쳐진다.

단편 하나를 넘길 때마다, 가만히 멈춰 생각에 잠겼다.

우리는 서로를 얼마나 아는가. 과연 알 수 있을까. 알아야만 할까. 모르기에 잔인하고 그래서 숭고한 것은 아닐까. 

지금 이대로는 좋은가. 언젠가, 모두가 동등한 인류애의 가치 아래 가족은 해체되어야 할까. 과연, 영원히 유지해야만 하는 걸까. 


모두의 근원이었던 가족. 

그렇다하여, 마냥 사랑만이 가득하고 늘 서로를 환영하며 언제든 안기고 싶은 그 공동체가 가족이던가. 

혹은, 비관과 우울의 씨앗, 모든 불행의 근원이 가족이던가. 

모두가 맞고, 모두가 틀리다. 

지나친 역설은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따뜻하면서도 냉철한 이 소설이 너무 좋다. 

인간애로 무장된 집요한 관찰자 줌파 라히리. 인간과 가족을 말한다. 


1부는 <길들지 않은 땅>, <지옥-천국>, <머물지 않은 방>, <그저 좋은 사람>, <아무도 모르는 일> 총 다섯 개의 단편으로 이뤄져 있고, 2부는 《헤마와 코쉭》이라는 제목 아래 <일생에 한 번>, <한 해의 끝>, <뭍에 오르다> 각각 완결성 있는 세 편의 단편으로 모인 연작소설이다.


인도를 떠나 미국에 정착한 이민자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가까운 친구나 친척집에 방문해도 각 가정마다 다른 분위기를 실감하는데, 하물며 본 터전을 떠나 완전히 새로운 정착지에 가서 맞닥뜨린 세계는 각 개인에게 어떻게 다가올까. 

그러나, 같은 경험을 한다고 해서 같은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평생을 보아온 가족조차 알 수 없다. 


<길들지 않은 땅>의 루마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혼자 남게 된 아버지를 생각하면 불편해진다.

아버지를 모시지 않는다는 죄의식과 동시에, 아버지를 책임져야 할까봐 두렵다. 미국인인 남편은 이런 루마를 이해하지 못한다.

루마는 고민 끝에 아버지께 함께 살자고 제안하고, 아버지는, 이런 딸이 부담스럽다. 

딸이 그녀의 필요에 의해 자신을 부른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거절하는 것에, 그 또한 죄책감을 느낀다.  

그는 홀가분해진 지금의 삶이 좋다.

루마에게 아버지는 장남의 역할을 요구했던 사람이었고, 아버지에게 루마는 "의무감 없이 자라", "제 삶을 살"아온 딸이다. 

이렇게, 서로를 모른다. 

태어나서 처음 만난 존재, 그 생명을 만든 존재, 생명을 함께 탄생시킨 동반자까지, 그러나 우리는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한 일임을, 루마의 아버지는 담담히 받아들인다. 자신 역시 멀어진 자식이었고, 이것이 숙명임을.


<지옥-천국>의 부부는 어떠한가.

'나'의 엄마는 외로운 타지에서 만난 동향 사람 프라납을 사랑한다. 

"이제 내가 봐도 엄마가 삼촌을 사랑하는 건 분명했다."

"삼촌은 엄마의 삶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즐거움이고 기쁨이었다."

엄마는 프라납이 미국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하자 분노를 표출하고, 아무도 모르게 미수에 그치고 말지만 분신자살을 시도할 정도. 

이런 프라납의 존재를, 아빠는 좋아하는 듯하다. 

"엄마를 인도에서 떠나게 했던 죄책감에서 조금 해방된 기분이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엄마가 행복해 하는 모습에 다행스러워했을지도 몰랐다."

가족이란 이렇게 유지되는가.


<그저 좋은 사람>의 수드하에게 동생 라훌이 생긴다는 것은, 이런 의미도 있다. 

"라훌 덕분에 부모님의 이상한 결혼 생활의 목격자가 한 명 늘어난 셈이었다."

벵골인 가정의 수드하, 라훌 남매는 부모님의 기대와 압박 속에서 성장한다. 수드하 역시 동생을 끔찍이 아끼며 자란다. 

라훌의 알콜 중독 증상을 알게 되자, 부모는 현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자기 아들을 탓하는 대신 미국과 그 법을 탓한다. 

이 맹목적 믿음은 부담인 동시에, 축복이다.

어디에서도 감히 요구할 수 없는, 근거없는 믿음.

결국 라훌이 퇴학당하고, 부모님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자, 그는 모든 부모가 두려워하는 인물이 된다.

수드하는 어린 시절 함께 술을 감춰두고 마셨던 것이, 라훌에겐 놀이가 아니라 삶이 되어버렸다고, 그래서 인생을 망쳐 버렸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죄의식을 느낀다. "자신의 인생이 그의 인생처럼 박살나지 않은 게 미안했다."

아, 가족을 옭아매는 이 죄의식. 

잠시 아이를 봐주기로 했던 라훌이 위험한 행동을 하자, 수드하는 남편에게 동생의 알콜 중독을 고백하고, 남편은 이를 숨긴 수드하를 향해 경멸을 숨기지 않는다.

"그녀는 더 이상 자기를 신뢰하지 않을 남편과 이제 막 울기 시작한 아이와 그날 아침 쪼개져 열려버린 자기 가족을 생각했다. 다른 가족들과 다르지 않은, 똑같이 두려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

어린 아이에게 엄마는 "그저 좋은 사람"일 뿐인데, 대체 언제부터 세상은 이렇게 복잡해지고 마는가. 


<머물지 않은 방>의 아밋은 둘째 아이가 생긴 후 결혼생활이 사라졌음을 깨닫는다. 그는 혼자 있는 시간이 그립다.

"인생의 짝을 찾는다고 그렇게 헤매고서, 그 사람과 아이까지 낳고서, 아밋이 메건을 그리워한 것처럼 매일 밤 그 사람을 그리워하면서도, 그렇게 절실하게 혼자 있길 원한다는 건 끔찍하지 않은가. 아무리 짧은 시간이고, 그조차 점점 줄어든다 해도 사람을 제정신으로 지켜주는 건 결국 혼자 있는 시간이라는 사실이."


<뭍에 오르다>의 헤마는 "남편과 자식 없는 중년 여자로 살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에 결혼을 마음 먹는다. 

약혼자를 두고 어린 시절 첫사랑을 만나지만, 결혼을 파기할 생각은 없다. 그녀는 약혼자를 만나며 생각한다. 

"그의 모습을 보니 혐오감이 느껴졌어. 내가 그를 배신해서가 아니라 그가 아직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이, 나 때문에 여기 왔고 앞으로도 살날이 창창하다는 사실이 끔찍했어."

곧 새 생명을 품은 헤마. 이렇게 저렇게, 가족은 탄생한다. 


장미빛으로 그려내지 않은 가족이란 잔인할까. 

<길들지 않은 땅>에서 루마의 아버지는 말한다. 

"가족을 이루는 일 자체, 이 땅에 아이들을 낳는다는 자체가 때로 만족감을 주는 만큼 애초부터 어딘가 잘못된 일이다."

어딘가 잘못된, 어딘가 신비스럽고, 그렇기 때문에 신성한, 그래서 이해할 수 없고, 그래서 숭고한 것은 아닐까.

어디서도 일어날 수 없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불가사의한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는 그 곳. 세상의 시작.


<한 해의 끝>의 코쉭은 죽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것으로 인생을 꾸려나간다.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마치 죽음을 연습하듯이. 

어머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저 좋은 사람"이었는지, 아니었는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나의 어머니였으므로, 그것으로 충분하다.

코쉭은 아버지를 부담스러워하는 루마가 됐을 수도 있으며, 동생에 죄의식을 느끼는 수드하가 됐을 수도 있다.


섬세한 줌파 라히리의 글들은 더없이 좋았다. '옮긴이의 말'에 의하면, 저자 스스로도 "어렸을 때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도 관찰하는 거리를 두고 있다고, 그래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지 않다고" 했단다. 

타고난 작가다. 무엇보다, 자기 연민이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글들이 너무 좋았다. 

록산 게이는 옅은 피부의 혼혈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줌파 라히리는 인도계 미국 이민자의 삶을 이야기한다.

한국의 조남주 작가는 82년생 김지영을 이야기한 바 있다.

문득, 내 자신이 품고 있는 숨길 수 없는 정체성이 있다면 어떤 것일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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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의 사람들 - 인간 악의 치료에 대한 희망 보고서, 개정판
M. 스콧 펙 지음, 윤종석 옮김 / 비전과리더십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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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요주의 경고는 농담이 아니었다. 충격과 진정을 왔다 갔다 했다. 

부제는 "인간 악의 치료에 대한 희망"이다. 

"악의 현상이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 이 책의 핵심 명제이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무지와 무기력의 수준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악의 심리학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또 나가야만 한다."


정확히 명명되어야 통제력을 확보할 수 있으므로, "악"을 정신과 병명 중 하나로 확실히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병명조차 없다면, 의학은 악의 희생자들을 도와주는 수준에 그칠 뿐, 그들을 직접 다룰 수가 없으므로. 

"악이란 인간의 안 또는 밖에 존재하는 생명이나 생명성을 죽이고자 하는 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악이란 '자신의 병적인 자아의 정체를 방어하고 보전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정신적 성장을 파괴하는데 힘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악을 다루는 일이 왜, 얼마나 위험한지, 또 크게 주의를 요하는 작업이라는 것을 거듭 강조한다. 

"여러분은 일단 마음속에 한 가지만 유념하면 된다. 자신에 대한 판단과 치유에서 시작하지 않는 한 우리의 판단은 안전한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악을 치유하려는 씨름은 언제나 나에게로부터 시작된다. 자기를 깨끗게 하는 것이야말로 언제나 우리의 최대 무기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남 판단할 생각말고 일단 자기부터 돌아보자. 아래 사실도 주지하고. 

"다른 사람들을 악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악한 사람들의 한 특성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결함을 인정할 수 없는 까닭에 다른 사람들을 탓함으로써 자신의 결함을 무마시켜야만 한다."


"악한 사람들은 나르시시즘적 성격 장애의 한 특수한 변이로 분류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 같다."

악한 사람들은, 일반적 성격 장애 질환의 공동 특징인 책임 기피와 아울러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고.

1. 파괴적 행동, 희생양 찾기(책임 전가) 행동이 일관성 있게 나타나며 그 양상은 대개 아주 미묘하다.

2. 비난이나 그 밖의 형태의 나르시시즘적 상처들을 지나치리만큼 못 견뎌하는데 대개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3. 사람들 앞에서의 자기 이미지와 사람들이 자기를 존중해 주는가에 대하여 유별난 관심을 갖고 있다. 이로 인하여 생활 양식이 견고해진다는 장점은 있으나, 동시에 그것은 증오나 복수심을 부정하게 하고 위선의 정도를 심하게 만든다.

4. 지적인 속임수를 자꾸 쓰게 됨에 따라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가벼운 정신 분열증적 장애와 같은 모습이 점점 많이 나타난다.


그가 실제 겪었던 상담 사례들을 예시로 드는데, 너무 현실적이면서도 소름끼쳐서, 웬만한 장르소설을 보는 것 이상의 섬뜩함이 있었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정신과 환자들의 사례에서 문학적 영감을 얻었다는 것이 백분 이해되는 순간. 

당연한지도 모르지만 슬픈 사실은, 정신이 건강한 사람이 오히려 치료가 쉽고, 반대로 환자의 병이 심하고 부정직하며 사고의 왜곡이 심하면 심할수록, 치료는 어렵다고 한다. 스스로 치료의 필요성이나 자신의 불완전을 인정하지 않기에 치료가 쉽지 않으며, 이따금 "치료 불가"라는 진단도 내려진다고. 


일반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악한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자주 경험하게 되는 감정은 혐오감이라고 한다. 즉각적일 수도 있고, 관계가 깊어짐에 따라 커질 수도 있다. 악이 혐오감을 주는 이유는 위험해서다. 악과 너무 오래 마주하게 되면 그 악은 반드시 사람을 오염시키거나 파괴하므로, 저자는 특별히 해결책을 모른다면 그 악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혐오감 외 또 다른 반응은 혼돈이다. 거짓은 사람을 혼돈시킨다. 치료자 또한 여기 빠질 수 있고, 혼돈이 통찰될 수 있어야만 치료가 가능하다고 한다. 


저자는 악한 사람들을 반사회적 이상 성격자와는 다르다고 구분한다. 악한 사람들은 외형상의 도덕적 순결을 지킨다. 사회적 규범, 이미지 등을 잘 가꾼다. 그들의 선함은 모두 가식과 위선의 수준에서의 선함이다. 책 제목 그대로, "거짓의 사람들".

거짓은 악의 원인인 동시에 증상이기도 하다. 

"악한 사람들은 투사와 희생양 찾기(책임 전가)를 통하여 자신들의 고통을 남에게 떠넘김으로써 스스로 죄책감의 고통을 깨끗이 거부한다. 죄책감은 자신의 죄, 부적절성, 불완전성을 일깨워 주는 고통스러운 인식인 까닭에서다. 이로써 그들 자신은 고통이 없을는지 몰라도 대신 주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게 된다. 그들은 고통 유발자이다. 악한 사람들은 자기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병 든 사회의 축소판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저자는 철저히 기독교적 세계관을 고수하고 있다.

인간이 완벽히 자유로운 존재라는 저자의 말에 완전히 동의하긴 힘들다. 모든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를 누릴 기회가 주어진다고 믿진 않을 뿐더러, 설령 완벽하게 이상적인 환경에서 자란다 한들, 타인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그런 상황에서, 모든 것이 본인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 하기엔 잔인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교육을 해결책으로 보는 것엔 이견이 없다. 그 외에 무엇이 있을 수 있겠나. 


책의 뒷부분은 구마(驅魔)와 축사(逐邪)에 상당부분 할애되고 있다. 

그는 구마와 축사를 악한 사람들에 대한 "가능성 있는 구원의 방책"이라고 믿고 있다. 신중한 독서가 필요할 듯하다. 

꼭 '악'이라기보다는, 흥미로운 정신 상담의 세계를 엿보는 것으로도 그 가치를 한다. 지독한 나르시시스트, 또한 나와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심리상태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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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남자 - 2017 제11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황정은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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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표제작 <웃는 남자>)에 수록된 작품중 김 숨의 <이혼>부터 리뷰를 남긴다. 

제목부터가 이혼이니 설마 낭만적인 내용이 펼쳐질까마는, 책에 등장하는 사연마다 하나같이 가슴을 옥죄어온다.


『민정은 결혼도 하기 전에 이혼하는 꿈을 꾼 적이 있다. 꿈 속의 남자는, 아버지였다.

등단을 해 필명을 가지며, 그녀는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을 버리기 위해 그토록 시를 쓰고 등단이란 걸 하고 싶어했음을" 깨닫는다. 

민정의 어머니는 평생을 남편에게 구타당하고, 스스로 이혼을 원하는지 아닌지 조차 판단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한때 그녀는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폭력이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비롯된 것 같은 망상에 시달렸다. 세상 모든 폭력의 근원이 아버지 같았다. 심지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자행되는 폭탄 테러도 아버지에게서 비롯된 것만 같았다."


이혼을 앞둔 어떤 여자는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사람에게서 "어지간하면 참고 살라"는 말을 듣고 분개한다. 

민정의 한 선배는, 이혼 때문에 해고를 당하고, 추문에 휩싸이고, 번번이 그 사적인 '이혼' 때문에 발목을 잡힌다. 

어떤 목사의 아내는, 유방암에 걸린 것이 믿음과 기도가 부족해 벌을 받는 거라는 남편의 말 때문에, 온몸에 암세포가 퍼져 죽을 것만 같은 공포에 휩싸이는데도 이혼하지 못한다. "모태에서부터 받은 신과의 이혼이기도 해서."


어떤 이는 "남편이 아니라 아들이라고 생각하면 너그러워"진다며, 그러면 용서 못할 일도 없다며 결혼을 유지하기도 하지만,

일본에서는 "사후이혼"이 유행하기도 한다. 죽어서까지 해야하는 이혼이다. 


민정은 그녀가 간절히 원할 때 한 번도 곁에 있어주지 않은 남편과의 이혼을 택하고, 남편은 그녀에게 죄책감을 떠안긴다. 


"네가 날 버리는 건 한 인간의 영혼을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러므로 앞으로 네가 쓰는 시는 거짓이고, 쓰레기야."


그녀는 그를 구원할 신이 아니며, 그럴 의무감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고통을 떠안는다. 

마치 저주처럼 그의 비난을 들은 후로 시를 쓰지 못하지만, 민정은 스스로의 선택을 번복하지 않는다.』


민정의 남편이 그녀에게 "나는 고아가 되는 건가?" 한다. 마흔 일곱살 먹은 그가. 

민정의 엄마는 딸에게, 너 때문에 이혼하지 못한다, 한다. 

헛소리라는 걸 알아도 좀처럼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을 옭아매는 죄책감들이 세상에 널려 있다.  

세상의 모든 헛소리들을 상대할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그 헛소리들에 스스로를 묻어버려서는 안 된다. 


나를 구원해야 타인을 도울 수도 있다는 사실, 

무엇보다 나를 구해야 한다는 그 사실을, "이혼"이라는 다소 도발적 서두로 작가는 건네고 있다. 

물론 나를 구하는 그것이 꼭 이혼만은 아니라는 것을 덧붙일 필요는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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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 - 개정판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선집 2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영화 <리플리>의 원작자로도 유명한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장르소설을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나 조이스 캐럴 오츠로 처음 접했다면, 난 분명 이 분야의 열혈 독자가 되었을 거다.

살인이 등장하지 않는 섬뜩함. 평범한 얼굴 속의 그로테스크함. 사건 자체보다 인간에 집중하게 한다.


총 11개의 단편이 실려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하이스미스 스스로 어린시절 동화나 소설보다 정신과 환자들의 사례에서 더 강한 문학적 영감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한다. 

무의식에 집중한 그녀는 '심리소설가'라는 평을 받기도 한다고. 심리소설가, 딱이다. 

표제작을 비롯한 몇 편만 이야기해본다. 


<고양이가 물어온 것>

고양이가 물어온 사람의 손가락. 살인이 있었고, 범인과 피해자가 누구인지도 알게 되나, 모두 침묵하기로 한다.

피해자는 "비굴한 사람이었던 것 같으니까요!"

편견, 편리한 자기 확신. 

뒤늦게 가해자가 죄책감을 느낄거라 짐작하면 뭐하나. 당신들의 죄책감은 어디에?


<당신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

첫 단편부터 소름이 확 끼쳤는데, 이건 더하다. 

여유롭고 부유한 자들의 자칭 "우리 같은 특권층의 모임"이 있다. 

모두 에드먼드를 싫어한다. 이유같지도 않은 이유들로. 담배를 끊은 것을 시기하고, 절제된 생활을 질타한다. 

가여운 에드먼드는, 자신의 고객들이 점심시간에 술을 마시고 한밤중에도 전화해대는 부류의 인간들이어서 불편해하나, 이 모임이 그런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사실은 자각하지 못한다. 아, 제발 벗어나!

그들은 짓궂다는 말로는 부족한 장난을 시작하고, 에드먼드가 걸려들자 "짜릿한 쾌감에 맛을 들이게 된"다.

마치 취미처럼, 에드먼드를 증오하는 일에 골몰하는 사람들. 

그들의 과녁이 된 에드먼드의 인생은 파국을 맞는다. 

"우리가 그를 죽였어." 생각하나, 딱히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인간들. 


인간의 대수롭지 않은 악의들. 집단 나르시시즘이란 게 이런 걸까. 죽고 사는 극단적 상황까진 아니었다 해도, 집단이 모여 이상한 힘을 발휘하는 것을 얼마나 많이 보았던가. 수건 돌리기하듯 대상을 바꿔가며 벌어지던 학창시절의 은밀한 따돌림도. 애초부터 적었던 죄책감은 나누고 나눠 분산되어 사라진다. 아, 이 평범한 악마성. 돋아난 소름이 오랫동안 가라앉질 않는다.


<검은 천사가 지켜보다>

리는 욕설과 악담을 퍼부으며 자신의 인생에 개입했던 어머니를 만나지 않고, 양로원에 돈을 보내는 것으로 경제적으로 부양한다. 

'노인들은 죽지도 않지.' 

갑작스레 알게 된 사실. 어머니는 벌써 몇 해 전 사망했고, 자신을 돕는다고 생각했던 윈이 중간에서 돈을 갈취하고 있었다.

며칠 뒤, 윈은 편지로 아들의 부고를 알린다. "자네가 이 소식을 들으면 좋아할 것 같아서 알리네."

그 안에 담긴 복잡한 심정. 미안함과 원망. 

얼마 안 가 윈과 공범이었던 양로원 원장이 자살하고, 윈 역시 곧. 

양심은 누구의 것인지, 누구의 편인지, 죄인은, 범인은 과연 누구인지, 저자는 질문을 던진다. 


<노인 입양>

선의로 양로원에서 노부부를 모셔와 함께 살기 시작한 매킨타이어 부부. 

노부부에게 가족이 되어줄 것을 상상했으나, 뻔뻔한 노부부는 그들을 마치 종처럼 부리고, 매킨타이어 부부는 분노하기 시작한다.

양로원도, 노부부의 가족도, 그들을 다시 받아주려고 하지 않고, 법적으로도 곤란한 상황에 빠지고. 


선의가 늘 선의로만 돌아오진 않는다. 

선의가 내 발목을 잡는 덫이 되는 순간도, 그 이후의 그들의 모습도, 모든 것이 섬뜩하다. 이런 충분히 가능한 범위내의 섬뜩함이란 하이스미스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지. 

나 스스로를 돌아보고, 내 옆의 사람을 낯설게 바라보게 한다. 


옮긴이의 말에 의하면, "지젝은 히치콕 영화와 더불어 하이스미스의 단편소설을 정신분석의 주요한 독해 자료로 삼고 있다" 한다. 

하이스미스는 정신분석을 소설의 영감으로 삼고, 지젝은 하이스미스를 정신분석의 자료 삼고.

누가 소설을 단순한(?) 창작물이라 할 수 있을까.

나와 타인을 돌아보게 하는 하이스미스 소설의 매력에 듬뿍 빠져들 수밖에 없는 단편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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