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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급생
프레드 울만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2월
평점 :
마지막 문장의 충격에 대한 이야기를 미리 들은 바 있다.
호기심은 증폭되었다. 대체 무엇이기에.
마지막 문장이 아니어도 이미 훌륭했지만, 그 문장의 충격은 듣던 그대로였다. 나는 잠시 얼어붙었다.
공간적 배경이 되는 슈바벤은, 전혜린이 그토록 흠모하고 그리워하던 '슈바빙'이 아닐까 한다.
여러장을 전부 할애해 묘사되는 그곳의 평화와 풍요는 안타까움을 더한다.
그 아름다운 예술의 도시도, 나치즘의 광기를 피해갈 순 없었구나 하는 탄식.
나치즘을 말하는 순간,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최악을 대면하는 것은 분명 괴로운 일이므로.
그러나 서정적인 감성으로 풀어내는 이야기들은, 다른 방식으로도 그 이야기를 할 수 있음을, 영원히 이야기해야함을 알려준다.
"인종청소를 위해 시체들을 녹여 비누로 만"든 구체적 악랄함은, 1977년판 서문에 잠깐 등장할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결코 그 무게를 희석하진 않는다.
짧은 책이지만, 말하려고 마음 먹는다면이야 책보다 긴 감상을 쓸 수 있게 만드는 책이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영감 가득한 책.
1932년, 열 여섯의 한스는 학교에서 새로운 동급생을 만난다.
어쩐지 더 성숙해 보이는, 남들과 달라보이는 그 아이의 이름은 "그라프 폰 호엔펠스, 콘라딘".
여전히 유효한 명성의 귀족 집안 자제.
"내가 그를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친구"라는 "로맨틱한 이상형"을 열망하던 한스는, 그와 친구가 된다.
어느 날 화재가 발생해 이웃 가족 5명 전원이 죽게 되고, 이 사건은 한스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내가 보기에 가능성은 단 두가지뿐이었다. 하느님이라고는 없든지, 만일 있다면 힘이 있는데 극악무도하거나 힘이 없어서 쓸데없는 하느님이거나.
나는 자비로운 창조주에 대한 모든 믿음을 마지막 하나까지 깡그리 버렸다."
한스는 종교보다는 과학에 몰두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당시 한스를 스쳐가는 모든 주제는 콘라드와 함께 한다. 책, 시, 예술, 후기 인상파와 표현주의, 연극과 오페라, 여자 등.
그들을 격렬하게 다투게 한 유일한 문제는, 한스가 유대인이라는 것에 기인했다.
콘라드의 어머니는 열렬한 히틀러 지지자였으며, 아들의 한스와의 교제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것.
한스에게 스스로 유대인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내가 알고 있던 것은 여기가 시작도 끝도 없는 내 나라, 내 집이며,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붉은 머리가 아니라 검은 머리로 태어났다는 사실만큼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뿐이었다. 첫째로 우리는 슈바벤 사람이었고 그 다음은 독일인이었고 그 다음이 유대인이었다."
"그 <유대인 혈통>이라는 것은 1년에 한 번, 속죄일에 어머니는 유대교 회당엘 가고 아버지는 담배를 피우거나 여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그것도 아버지가 유대교를 믿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해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아버지는 "나치스는 건강한 몸에 생긴 피부병"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단히 믿고 있었다.
히틀러 때문에 나라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지 않냐는 시온주의자의 질문에 한스의 아버지는 말한다.
"전혀 아니오. 나는 내 독일을 알고 있소. 이건 일시적인 질병, 경제 상황이 나아지기만 하면 바로 사라질 일종의 홍역 같은 거요.
당신 정말로 괴테와 실러, 칸트와 베토벤 같은 우리나라의 위인들이 이따위 쓰레기에 넘어갈 거라고 믿는 거요?"
그러나, 역사는 그의 믿음을 완전히 배반한다. 처절하리만큼, 완벽하게.
새로 학교에 부임한 선생은 아리아인의 우수성을 교육하고, 아이들은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한스를 경멸하기 시작한다.
한스는 부모님의 결정에 의해 미국으로 보내진다.
그가 떠난 뒤, 아버지는 어머니가 잠든 사이 가스를 틀어 동반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부모가 유대인 수용소에서 죽었다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은, 아아, 한스의 차분함으로 나는 절망에 부대낀다.
30년이 지났지만, 사랑했던 독일은 한스에게 여전한 아픔이다.
독일인을 만나려면 그의 전력을 확인해야 했고, 스스로 독일어를 구사하는 것도 원치 않는다.
광기의 시대는, 모두를 죽였다. 죽은 사람은 죽음으로, 산 사람마저 죽음으로.
독일을 떠나기 직전, 콘라드의 마지막 편지는 이렇게 끝난 바 있다.
"친애하는 한스! 너는 내게 크나큰 영향을 미쳤어. 나에게 생각하는 법과 의심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의심을 통해 우리 주님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법도 가르쳐 주었어."
책의 마지막 문장은, 그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콘라드의 결정은, 그의 어머니와 조국과 신앙, 그가 속한 모든 세계를 전복하는 일이었으리라.
정당성을 획득한 자의 자연스러운 행보보다, 정당성을 부여받지 못한 자가 자신의 세상을 뒤집는 결정이 더 격렬했을지도 모른다.
그 잔혹한 역사 속에서, 희생자는 어느 한 집단이 아니었다. 빠짐없이 모두 희생자.
모두가 희생자인데, 선량한 사람을 평생 따라다닐 이 죄책감은 무엇일까.
콘라드를 성숙하게 한, 의심할 줄 알게 한 한스는 콘라드의 데미안이었는지도 모른다.
콘라드가 보여준 것은 한줄기 빛이다.
그러나 그 빛이 반짝반짝 빛남에도 불구하고, 이 데미안은 과연 행복하기만 할 수 있을까. 부채감이 돌고 돈다.
비극은 이야기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여기에도 죄의식이 있다.
누가 그런 일을 겪어 마땅하단 말인가.
다시 그러나,
이야기 하지 않는 죄의식보다 이야기하는 죄의식을 택해야만 한다.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이성과 감성을 벼리는 수밖에. 무뎌지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