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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시
바바라 오코너 지음, 이은선 옮김 / 놀 / 201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빨강머리 앤, 성냥팔이 소녀, 잭과 콩나무 등등.
내가 어릴 때 본 동화들은 대개 가난하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착하고 성실한 아이가 역경을 헤쳐나가는 내용이었다.
물론 성녕팔이 소녀는 결국 역경을 헤쳐나가지 못했고, 인어공주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지만..
여튼, 대개는 순하고 착한 아이들이 주인공이었다면, 요즘은 그 반대가 대세인 듯 하다.
(이유가 무엇이든) 거칠고 맹랑한 아이가 가족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식의 이야기가 많다.
그 옛날 화두가 먹고 살지 못하는 절대적 빈곤 그 자체였다면,
지금은 가족의 해체가 보다 큰 사회적 문제라는 걸 보여주는 지도 모른다.
<위시>의 주인공 찰리.
아빠는 걸핏하면 싸워 교도소에 가고, 엄마는 우울증으로 소파에서 꼼짝도 않는다.
사회복지사의 결정으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모 부부에게 맡겨진다.
시골, 촌스러운 친구들. 처음엔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빨리 엄마와 언니가 있는 도시로 돌아가고 싶다.
다행히 천천히 그곳에 적응한다.
"사람들은 누군나 고민거리가 있고 너보다 심각한 고민거리를 가진 사람도 있다는 얘기야."
라며, 의젓한 말을 건네주는 하워드와 친구가 되고, 그의 가족과도 부드럽게 융화된다.
이모 내외도 한없이 좋은 사람들이고, "위시본"이라는 개도 키우게 된다.
찰리는 그곳 삶에 적응하며, 그 집 식구가 된 것 같은 생각에 빠지고, "나는 도대체 어디 소속일까?" 하는 의문을 갖기도 한다.
행복한 날을 보내고 있던 중 다시 사회복지사가 다시 찾아와, 집의 상황이 나아졌으므로 돌아가야 한다고 결정한다.
집을 떠나는 것도,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도 찰리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는다.
잠깐 와서 쓰윽 보는 사회복지사의 결정일 뿐.
스웨덴 소설 <오베라는 남자>에서도, 치매 노인을 국가에서 요양 시설로 데려가려고 하자 떨어지고 싶지 않은 그의 배우자는 절망에 빠진다.
원칙주의, 관료제 하에 이뤄지는 복지는 한명 한명의 특수성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을 복지국가로 보기는 힘들지만) 복지가 미비한 나라에서는 그나마 요원한 희망사항이 되겠지만, 후발주자로서는 부정적인 면 역시 보완하며 따라갈 수 있는 이점이 있지 않나 싶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사회복지사가 그렇게 결정했으나, 오랜만에 통화한 엄마는 조금도 달라보이지 않는다.
찰리는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 깨닫는다.
이모와 찰리는 사회복지사를 설득하고, 새로운 가족이 되어 함께 살기로 결정한다.
가족이 꼭 생모와 생부로 구성된 집단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새로운 가족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소설은 말하고 있다.
행복이 꼭 남들과 똑같은 모습을 찾아가는 것은 아님이 분명하다.
조금은 특별한 삶도 괜찮다고, 바바라 오코너는 이 시대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