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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장 가까운 적, 성병
엘렌 스퇴켄 달 지음, 이문영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3월
평점 :
성병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질병이다. (11쪽)
와오. 이렇게 말하는 직업인이라니 얼마나 멋진가. 물론 저자가 좋아하는 것은 고통이나 분비물이 아니라 의사로서 환자를 치료할 수 있다는 설렘과 자신감이다. 멋지지 아니한가.
전작 <질의응답>이 그랬듯 오묘한 농담이 그득한 책이다. 가령, 임질에 걸리면 수도관이라도 새는 듯 분비물이 계속 쏟아진다는데, 그 챕터를 여는 인용문은 이러하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마침내 홍수가 나서,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 누가복음서 17장 27절
덕분에 여러 흥미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현미경이 만들어지고 세균을 발견하게 된 뒤에도 그게 무엇인지는 몰랐다는 것도 그렇다. 현미경이 보여주는 세포나 세균, 기생충 등을 아름답게 따라 그렸을 뿐 그 정체를 알게 된 것은 삼백 년쯤 뒤라고. 인간사 참.
AIDS의 기원이 동물과의 밀접한 접촉에 있다고 하나, 성관계라기보다는 도살하고 도축하는 과정에서의 접촉 때문이라는 설도 생각 못 한 포인트. 거기까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겠지만.
책을 보다 보면 성병뿐 아니라 인간에 대해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매독이 처음 나타났을 때 이탈리아인은 프랑스병, 프랑스인은 이탈리아병, 독일과 영국은 프랑스병, 러시아는 폴란드병, 아시아인은 유럽인병 등등으로 불렀다고. 허허.
"재앙이 닥치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무언가, 더 나아가 누군가를 탓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76)
흔히 위험한 직업일수록 신이나 미신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다고들 하는데, 어쩌면 의지에 앞서 탓할 대상이 필요한지도.
그런가 하면 인간의 본능이 얼마나 질기고 위대한가 싶기도 하다. 미생물을 발전시킨 것이 포도주 덕분이라는 것도 그 예다. 더 좋은 포도주를, 더 많이, 더 안정적으로 만들기 위해 과학을 발전시킨 것. 위대한 술과 욕망이여!
질 검사를 위해 쓰이는 검경이 무려 이천 년 전의 도시, 폼페이에서 발견되었다는 것도 놀랍다. 또한 검경을 발전시키기 위해 수많은 노예들이 희생되었다는 것에서, 질확대경의 발전을 위해 수많은 유태인이 희생되었다는 점에서는 몸서리가 처지기도 했다.
그 밖에도 니체가 보인 말년의 광기가 매독 때문이라는 유력한 설부터, 자궁경부암 검사는 5년에 한 번이면 충분하고 어떤 검사는 굳이 할 필요 없다는 등의 실용적인 이야기들도 담겼다. 하지만 머니머니 해도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으로 보인다.
성병은 도덕성과는 관련이 없다. 성병에 걸렸다는 사실이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를 말해 주지 않는다. 성병에 걸리는 일은 섹스의 일반적인 결과이며, 결국 섹스는 우리 인간이 즐기도록 프로그램된 활동이다. 성병은 누구나 걸릴 수 있으므로 감염은 종종 우리가 하는 선택만큼이나 운이 좋으냐 나쁘냐의 문제이다.
12쪽
모두가 성병을 좋아하기 바란다기보다는 극단적인 편견이나 시각을 바꾸길 바라는 것이다. 가령 입 주위의 헤르페스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도 생식기 헤르페스에는 수치심을 느낄 필요는 없다는 것.
그러나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 어떤 병에도 절대 걸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해지는 건 어쩔 수 없... 하기야 어떤 병이든 마찬가지겠지만.
또 한 가지, 저자는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도 건네준다. 인류에게 훌륭한 치료제가 많다는 것은 좋은 소식. 그러나, 내성도 만만치 않다는 나쁜 소식도.
"항생제 내성은 오랫동안 예측된 건강 위기이며 우리 시대의 큰 도전 중 하나다. 내성 발달을 늦추기 위해서는 항생제를 아껴 써야 한다. 우리는 상식과 존중으로 항생제를 다루어야 한다."(32)
아픈 게 죄는 아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만큼은 관리 잘 해서 잘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