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뒀다가 잊을 만하면 한번씩 다시 읽어보자.
p. 84~
... 뇌는 위협에 대한 적응 기제를 하나만 가진 게 아니다. 이 경우 샌디는 너무나 작고 무기력하며 위협에 지나치게 압도되어 맞서 싸우지도, 도망치지도 못했다. 이런 경우 심장 박동 수를 올려 근육이 어떤 행동을 하도록 준비하면 상처를 입을 때 출혈이 더 커져서 오히려 생명이 위험해진다. 놀랍게도 사람의 뇌는 이런 상황에 대한 적응 기제도 준비해 놓았다. '해리 반응'이 그것으로, 트라우마 관련 증상을 이해할 때 꼭 알아야 하는 현상이다.
해리는 매우 원시적인 반응이다. 초기 생명체(또는 고등 동물종의 새끼)의 경우 스스로 위급 상황을 피할 힘이 거의 없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자신을 공격하거나 해칠 때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기본적으로 조용히 쓰러져서 가능한 한 몸을 작게 웅크리고 기적을 바라며 도와 달라고 우는 것이다. 이런 반응은 가장 원시적인 뇌 조직인 뇌간과 그 인접 부위에서 나온다. 싸우지도, 도망가지도 못하는 영아나 유아의 경우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해리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흔하다.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좀 더 자주 나타나고, 해리 상태가 지속되며 외상후스트레스 증상을 악화시킨다.
해리 상태에 들어간 사람의 뇌는 일단 상해에 대비한다. 팔다리에 혈액공급이 줄어들고 심장 박동도 느려져서 부상을 당해도 혈액 손실이 적게 한다. 뇌에 존재하는 자연상태의 헤로인과 같은 물질인 오피오이드가 쏟아져 나와 몸의 긴장을 풀고 고통을 없애 주며 마음을 평온하게 안정시킨다. 또한 벌어지고 있는 일에 심리적 거리감을 부여한다.
해리 반응도 과각성 반응처럼 각 단계들이 연속적으로 나타난다. 보통 상태는 백일몽을 꾸는 것과 유사하며, 잠에서 막 깨어나는 순간이 해리의 중간 정도 형태다. 최면에 걸린 것 같은 무아지경도 있다.
하지만 극단적인 해리 현상을 겪으면 현실과 완전히 단절된 채 자신의 내부로만 침잠한다. 생각을 관장하는 뇌 영역은 계획 활동을 중단하고 짐승과 같은 생존 본능으로 자기 자신만을 보호한다. 시간은 느려지고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호흡도 느려진다. 고통이나 공포감조차 사라진다. 감정이 없어지고 무감각해지며 심지어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트라우마를 겪을 때에는 대부분 이런 주요 반응들이 복합해서 나타난다. 사실 많은 경우 트라우마 사건이 벌어지는 도중 중간 정도의 해리 현상을 일으키면 집중력이 떨어지고 지속적인 과각성 반응이 동반된다. 전투에 나선 병사가 '마비'되어 로봇처럼 변하면 공황에 빠지지 않고 효과적으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한두 가지 패턴만이 우세하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나타난 패턴이 반복적으로 오랫동안 활성화되면 트라우마의 강도, 지속성, 패턴 등으로 인해 이런 반응을 중재하는 뇌에 '사용 의존적' 변화가 발생한다. 그 결과 뇌가 과잉 반응하고 과민해져서 오랜 시간이 지난 후까지 감정, 행동 및 인지 장애를 야기한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로 인한 수많은 증상은 사실상 외상을 입힌 기억에 대한 해리나 과각성 반응과 관련되어 있다. 이 반응들은 외상이 가해지는 당시에는 우리를 보호해주지만 이것이 지속되면 삶의 다른 영역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여 일탈을 조장한다.
... 안타깝게도 일반 교실의 학습 환경에서는 해리나 과각성 반응의 증상이 집중력장애, 과잉행동 또는 반항성 장애와 대단히 유사하게 나타난다. 해리 반응이 심각한 아동은 주위 상황에 전혀 집중하지 못한다. 마치 백일몽을 꾸거나 '정신을 놓은' 듯하며 수업은 물론 주위 세상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하다. 과각성을 보이는 아동은 수업 내용 자체가 아닌 선생님이 내는 소리의 미묘한 음정이나 다른 학생의 몸짓 등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과잉행동이나 집중력결핍 진단을 받곤 한다.
싸우거나 달아나는 반응이 야기하는 공격성과 충동성도 반항이나 적대감으로 오인된다. 사실 이것은 아이가 계속해서 되새기는 과거 트라우마 상황에 대한 반응의 잔존물이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사슴에게 갑자기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비추었을 때처럼 순간 동작을 멈추는 '동결freezing' 반응도 반항적 거부로 오해하는 교사가 많다. 해리 반응을 보일 때는 아이에게 어떤 명령을 해도 전혀 응답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ADD가 과잉 행동이나 반항성을 보이는 것은 아니고 모든 반항성 장애가 트라우마와 관련된 것은아니지만, 트라우마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이런 진단을 받게 된 증상의 원인이 트라우마로 밝혀지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p. 91~
... 스트레스를 통제할 수 있는 쥐의 경우 건강한 변화가 관찰되지만 스트레스를 통제할 수 없는 쥐는 조절기능이 약화되고 저하되었다. 전기충격을 조절할 수 없는 쥐는 대부분 궤양이 생기고 몸무게가 줄며 면역체계가 손상되어 여러 질병에 노출되었다. 조건을 바꾸어 전기충격을 통제할 수 있게 해줘도 스트레스를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쥐는 공포감에 휩싸여 어떻게 해야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알아낼 용기도 내지 못했다.
낙담한 사람에게서도 비슷한 사기저하와 체념현상을 볼 수 있다. 유년기에 통제할 수 없는 스트레스상황을 너무 많이 경험하면 우울증에 시달릴 위험이 높다. 당연히 우울증에 외상후스트레사장애가 동반되는 경우도 많다.
이런 통제와 습관, 통제 부족과 감작사이의 연결고리로 인해, 트라우마로부터 회복되려면 희생자가 예측 가능하고 안전한 상황으로 돌아와야만 한다. 뇌는 기본적으로 트라우마를 확인하고 이해해서 내성이 생기도록 한다. 심적으로 완전히 무기력한 트라우마 기억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는 기억으로 바꾸는 것이다.
..... 아이의 뇌는 이런 재연을 통해 트라우마를 예측가능하고 희망적인 것으로 대체해나가며 궁극적으로 뇌를 지루해지게 만든다. 핵심은
패턴과 반복이다. 패턴화한 반복 자극을 받으면 내성이 생기는 반면 혼란스러운 무작위 신호에 시달리면 극도로 과민해진다.
사람의 뇌는 마음의 평정을 되찾기 위해 작은 '용량'의 회상을 끝없이 반복하여 과민해진 트라우마 관련 기억을 달래고 진정시킨다. 그러면 감작되었던 뇌에 내성이 생긴다. 많은 경우 이 방법은 아주 효과적이다. 사람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거나 트라우마 상황을 겪은 직후에는 계속해서 당시 상황을 회상한다. 어떤 일이 벌어진 건지 계속 생각하고 의도하지 않아도 자꾸만 불현듯 회상하게 되며 꿈에까지 트라우마 사건이 재연된다. 또한 주변의 친구나 연인에게 그 사건에 대해 반복하여 하소연한다. 아이는 놀이, 그림이나 일상의 관계에서 트라우마 상황을 반복적으로 재연한다. 하지만 경험이 너무나 강렬하고 압도적이면 트라우마 관련 기억을 모두 둔감하게 만들기는 어려워진다.
p. 111~
뇌는 순차적으로 생애 첫 몇 년 동안 대단히 급격하게 발달하기 때문에 특히 유아의 뇌가 트라우마에 영구적으로 손상될 가능성이 크다. 뇌가 아직 발달단계이기 때문이다. 미성숙한 뇌는 사랑의 감정이나 언어 등의 습득에 기적과도 같은 적응력을 보이지만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경험에 대해서도 대단히 쉽게 영향을 받는다. 3개월된 태아가 특정 독서에 매우 취약한 것처럼 아동기에 겪은 트라우마는 영구적 손상을 남길 가능성이 높다. 즉 트라우마를 경험한 시기가 언제냐에 따라 나타나는 증상이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아직 말을 배우지 못한 유아가 고통스러운 성적 학대를 반복적으로 당하면 이후 모든 종류의 신체 접촉을 혐오하고 인간관계와 친밀감 형성에 광범위한 문제를 겪으며 지속적인 불안감에 시달린다. 하지만 동일한 학대라도 열 살짜리 아이가 겪으면 당시의 구체적 상황에 대한 공포감이 형성되며 특히 학대와 관련된 장소, 살마, 방법을 고의적으로 피하는 행동을 보인다. 이 경우 어떤 암시로 인해 괴로웠던 기억이 되살아나면 불안감이 마구 증폭되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약해진다. 좀 더 연령대가 높아지면 대뇌 피질에서 중재하는 수치심이나 죄책감이 뒤섞인 가정을 경험한다. 유아기에는 이 영역이 미성숙 상태기 때문에 이 시기에 학대를 경험하고 더 자라기 전에 중단되면 이런 감정과 관련된 증상은 줄어든다.
하지만 어떤 연령대라도 공포에 질리는 상황에 맞닥뜨리면 대뇌피질의 제일 위쪽 영역이 가장 먼저 기능을 중단한다. 먼저 계획하는 능력을 잃고 배고픔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두 가지 다 즉각적인 생존에는 크게 상관없기 때문이다. 극심한 위협을 당하면 생각을 못하게 되거나 심지어 언어구사력을 상실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그저 본능에 따라 반응한다. 공포감이 오래 지속되면 뇌 자체가 만성적이거나 심지어 영구적으로 변형된다. 지속적인 공포로 뇌에 변형이 일어나면 특히 아기처럼 피해자의 나이가 어릴수록 세상에 대해 더 충동적, 공격적이면서 사려 깊지 못하고 배려가 없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다.
이는 뇌의 체계가 사용의존적 방식으로 변화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근육과 마찬가지로 뇌 체계 역시 스트레스 반응이 자꾸 활성화할 수록 더 많이 변형되고 기능 장애의 위험도 더 높아진다. 따라서 스트레스를 통제하고 조절하는 피질부가 적게 사용될수록 변형되는 정도도 경감된다. 만성적 공포와 스트레스에 노출된 사람은 마치 제동 장치가 약해진 차에 더 강력한 엔진을 추가 장착한 것과 비슷한 상태가 된다. '기계'의 위험한 폭주를 막아 줄 안전장치를 풀어 버린 것과 같은 상태가 되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기억으로 형성되는 뇌의 사용 의존적 탬플릿처럼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큰 변형은 인간 행동을 심각하게 제한한다. ....
p. 149~
아기는 처음부터 스트레스에 반응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를 지닌 채 태어나며 이것은 뇌의 가장 원시적인 부분인 기저부에 자리 잡고 있다. 영아의 뇌는 올바르지 못한 신체 내부의 신호나 외부 자극을 스트레스 요인으로 받아들인다. 영양분이 필요할 경우에는 '배고픔', 탈수 상태에서는 '목마름', 외부의 위협을 인지하면 '두려움' 이 스트레스 요인이다. 이 요인이 해결되면 영아는 즐거움을 느낀다. 바로 이것이 신경 생물학에서 스트레스 반응이 뇌의 즐거움과 보상 영역은 물론 고통, 불편함, 두려움을 대표하는 영역과도 상호 연관된다고 하는 이유다. 즉 스트레스 요인이 줄어들어 생존 능력이 향상되면 즐거움을 경험하게 되고 위험이 커지는 경험은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영아는 즉시 누군가가 먹여 주고 안아 주고 쓰다듬어 주고 부드럽게 흔들어주는 것이 즐겁다는 것을 깨닫는다. 주의 깊게 양육되어 배가 고프거나 두려울 때마다 누군가가 일관성 있게 돌봐 준다면 아기는 금방 먹이거나 달래줌으로 얻는 즐거움과 위안을 사람의 관계와 연관시키게 된다. 그러므로 이런 평범한 유아기를 보내면 돌봐 주는 보호자와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고 그 관계에서 큰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즉 아기의 건강이 증진되고 이후 인간관계에서 즐거움을 느끼게 하려면 아기가 울 때마다 반복하여 적절하게 요구를 들어주어야 한다.
관계나 쾌락을 중재하는 뇌 신경계는 모두 스트레스 반응 기전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의 상호 작용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스트레스 조절 매커니즘이다. 처음에는 보호자가 아기를 먹여 줌으로써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다는 두려움과 공포를 다스려 주지만 시간이 지나면 아이 스스로 이런 심리적 스트레스를 다스릴 수 있게 된다. 즉 보호자로부터 감정과 요구에 반응하는 방법을 배운다. 배고프면 먹여 주고 무서우면 달래 주며 감정적, 육체적으로 필요한 것을 지속적으로 적절하게 채워 주면 아기는 점차 스스로 감정을 조절하고 위로할 수 있게 되어 이후 일상의 부침에 대처할 힘을 키워나간다.
서너살 꼬마가 넘어져 무릎이 까지면 반사적으로 엄마를 쳐다본다. 엄마가 걱정하는 기색이 없으면 아이도 울지 않지만 엄마의 얼굴에 두려움이 떠오르면 아이도 당장 울음을 터뜨리기 마련이다. 보호자가 아이에게 감정적 자기 조절을 가르치는 복잡한 과정의 한 예다. 물론 아이마다 유전적으로 스트레스 요인이나 자극에 대한 민감도는 다르지만 이런 유전적 강점이나 취약성은 아이가 갖는 첫 인간관계를 좀 더 부각시키거나 무디게 만드는 정도에 그친다. 성인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친밀한 사람이 함께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와 얼굴을 보고 들으면 스트레스 반응 신경계의 활동이 실질적으로 조절되어 스트레스 호르몬을 제어하고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기만 해도 어떤 스트레스 조절 약을 먹은 것보다 더 큰 효과가 있다.
p. 188~
처음 마리아가 산책에 나서면 레온은 아기 침대에 누워 엄마를 찾으며 울었다. 하지만 울어도 오는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닫자 곧 울음을 멈추었다. 아기는 돌보는 손길도 말을 걸어주는 사람도, 뒤집거나 기어도 칭찬하는 목소리 하나 없이 침대에 홀로 누워 시간을 보냈다. 당연히 세상을 탐색할 만한 공간도 거의 허용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언어를 배울 수도 없었고 새로운 볼거리도 관심도 받지 못했다. 레온의 경우도 사람과의 관계에서 스트레스를 조절하고 즐거움과 만족감을 느끼는 뇌 영역 발달에 꼭 필요한 자극이 박탈되었다는 면에서 로라와 버지니아의 사례와 유사하다. 아무리 울어도 응답이 없었고 따뜻한 사랑과 육체적 접촉도 전무했다. 하지만 버지니아의 경우 자주 옮겨 다녀야 했지만 어쨌든 위탁 가정의 지속적인 보호를 받았고, 로라는 충분한 신체적 자극을 받지는 못했지만 엄마가 옆에서 항상 지키고 있었다. 이에 반해 레온의 아기 시절은 잔인할 정도로 변덕스러웠다. 마리아가 집에 있을 때는 아기를 충실하게 돌보았지만 평일 낮이 되면 집에 버려두고 온종일 돌아오지 않았다. 앨런이 집에 있을 때에는 아기와 놀아주었지만 늦게까지 퇴근하지 못할 때가 많았고 많은 경우 집에 돌아온 후에도 너무 지쳐 아기와 놀아줄 수 없었다. 이런 식의 전면적인 유기를 포함한 일관성 없는 육아 환경은 아이에게 가장 나쁜 영향을 미친다. 뇌가 적절하게 발달하려면 패턴화할 수 있는 반복적인 자극이 꼭 필요하다. 공포나 외로움, 불편함, 배고픔 같은 욕구가 언제 해결될지 예측할 수 없으면 아기의 스트레스 체계는 뇌성 마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높은 수준으로 유지된다. 공포나 욕구에 대해 일관성 있게 애정어린 응답을 받지 못하자 레온은 인간관계와 스트레스 해소 사이에 정상적인 연결 고리를 만들어내지 못했고 믿을 사람은 자기 자신뿐이라는 것을 배웠다.
이런 어린 시절의 결핍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끝없이 떼를 쓰거나 공격적이거나 냉담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절실히 필요했던 유아기에 아무리 노력해도 사랑이나 관심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제는 사람을 후려치거나 때리거나 물건을 훔치고 때려 부쉈다. 벌을 받아도 분노만 더 키울 뿐이었다. 벌을 받은 후에는 더욱 나쁘게 행동하여 자신이 '못된 사람'이며 동정할 가치가 없음을 주변에 확인시켰다. 이런 악순환으로 인해 시간이 갈수록 레온의 비행은 단순한 친구 괴롭히기에서 중범죄로 급속도로 발전했다.
...
레온도 대뇌 피질의 인식 기능은 정상적으로 발달되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고 기억했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필요할 경우 적절한 행동을 흉내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다른 사람을 마음대로 조종하여 원하는 것을 얻어냈다. 하지만 대뇌 변연계와 상호 관계 신경망이 미성숙했기 때문에 그의 인간관계는 언제나 얕고 얄팍했다. 그에게 다른 사람이란 그저 자기를 방해하거나, 원하는 것을 제공해주는 개체일 뿐이었다. 그는 유전적 소인 없이 전적으로 환경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소시오패스의 전형이었다. 정신의학적 진단으로는 반사회적인격장애ASPD, antisocial personality disorder라 한다. 형 프랭크와 같은 방식으로 양육되었다면 그도 분명 정상적으로 자라나서 살인이나 강간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p. 358~
피터 가족을 진료하던 당시 우리는 피학대 아동에 대한 신경 순차법neurosequential 연구에서 큰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유아 트라우마와 방임의 피해자는 실제 나이가 아닌 손상이나 결핍을 경험했던 연령에 맞는 자극이 필요하다. 즉 실제 나이는 일곱 살이라도 아기일 때처럼 안아 주거나 부드럽게 흔들어 달래야 할 수 있다. 보호자나 의료인은 끝없는 존중과 배려 속에서 이런 발달 관계에 적합한 강화와 치료 자극을 반복적이고 지속적으로 제공해야 한다. 징벌과 강제를 동원한 고압적인 치료는 상태를 더 악화시킬 뿐이다. 여기에 음악, 춤, 마사지 치료를 병행하여 스트레스 반응 통제에 필요한 뇌 기저부의 주요 신경 전달 물질계를 자극하고 조직화했다. 이 영역은 영아기에 급속도로 중요한 발달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유년기 트라우마에 더 영향을 받는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해리나 과각성 반응을 보이는 경우에는 약물 치료도 함께 했다.
하지만 치료에 관계의 지속성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은 깨달았으면서도 아이의 성장에 또래 집단에서의 관계가 얼마냐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잘 알지 못했다.
피터의 과거 이력은 나에게 두뇌 발달에 인간관게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지 깨닫게 해주었다. 피터는 세 살까지 어른의 관심을 전혀 받지 못했다. 고아원은 아기 창고나 다름 없었다. 크고 밝은 방에는 완벽하게 깨끗한 요람 60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보호 두 명이 요령 있게 침대를 오가며 60명의 아이들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었다. 아기가 어른을 접하는 시간은 대략 8시간당 15분 정도에 불과했던 셈이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아기에게 말을 걸거나 안아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실제로 직원들은 바쁘게 우유를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 주었을 뿐, 요람을 흔들거나 안아서 달래 줄 시간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걸음마를 하는 아이들조차 밤낮으로 요람에 갇혀 있어야 했다.
p. 401~
뇌는 지속적인 반복과 노출을 통해 오랜 시간을 두고 천천히 발달하며 각 순간마다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패턴을 강화한다. 일단 패턴이 시작되면 홈이나 자국처럼 남아 유사한 행동을 더 쉽게 만들어주고 반복될수록 이런 경향을 더 강해진다. 사회적 뇌의 거울 시스템은 행동 전염을 일으킨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스포츠나 피아노, 친절 등을 연습할 때는 멋진 기능이지만 반복되는 것이 위협에 대한 충동성이나 공격적 반응이라면 문제가 된다. 나는 레온을 다시 생각한다. 그는 처음에는 반복적으로 방임되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이후 그 자신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작은 의사 결정을 거듭하여 나쁜 행동이 쉽게 늘어나고 좋은 선택은 점점 더 멀어져 갔다.
이런 뇌의 특성으로 인해 거의 대부분의 경우 개입 시기가 빠를수록 좋다. 물론 이 경우 올바른 개입이어야 한다. 레온의 경우 그를 도우려는 시도 대부분이 실제로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아이들이 비행을 저지르면 처음에는 이들을 벌주고 권리를 빼앗으려는 충동에 사로잡히곤 한다. 우리는 아이들을 '버릇이 없거나' '제멋대로' 행동하는 짜증나고 부담스러우며 공격적인 존재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런 형태는 보통 아이가 너무 풍족하거나 기분이 좋아서가 아니라 요구가 충족되지 않고 잠재력이 사장될 때 발현된다. 아이를 친절하고 너그러우며 배려심 깊은 사람으로 키우고 싶으면 같은 방식으로 대우해 주어야 한다. 처벌은 이런 자질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물론 행동의 한계를 정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아이가 처신을 잘하기를 바란다면 먼저 예의 바르게 대해 주어야 한다. 사랑받으며 자란 아이는 자기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한다. 자신이 행복하면 주위 사람들도 즐거워진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단지 처벌을 피하기 위해 규칙에 따르는 것이 아니다. 이런 긍정적인 피드백의 순환 고리는 부정적 피드백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하지만 그러려면 나쁜 짓을 한 아이에게 즉각 반응하지 말고 먼저 나쁜 짓을 하게 만든 원인을 판단해서 그것부터 해결해야 한다. 레온이 아동기 초기에 도움을 받았다면 엄마로부터 방임을 경험했다 해도 분명 내가 만났던 냉혈 살인마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
문제 아동은 일종의 고통을 겪고 있는 상태나 마찬가지다. 고통은 사람을 짜증스럽고 불안하며 공격적으로 만들기 마련이다. 이들은 인내심과 사랑으로 꾸준히 치료해야 하며 짧은 시간에 효과를 볼 수 있는 마법의 약은 존재하지 않는다. 서너살 아이는 물론 10대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나이가 많아진다 해서 처벌을 통한 접근이 더 적절하거나 효과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 체제는 이런 사실을 잘 깨닫지 못하며 그저 미봉책을 내놓은 다음 이것이 실패하면 처벌적 방법에만 매달린다. 이런 아이들에게 처벌이나, 박탈, 강요는 또 다른 트라우마로 다가오며 이들의 문제를 더 악화시킬 뿐이다.
아이들을 치료하며 알게 된 가장 큰 교훈은 어떤 치료를 하더라도 우선 시간을 들여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뇌가 가진 모방이라는 신경 생리학적 특성 때문에 누군가를 진정시키고 집중하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나 자신이 먼저 진정하고 집중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