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삶의 많은 부위는 실체가 아니고 생각의 영역입니다. 어머니와 나 사이에서 벌어지는 여러 상황들은 지나간 과거와 오지 않은 미래의 생각이 빚어내는 가상의 세계입니다. 생각 속에서 생각이 만들어낸 삶을 살면서 얼토당토않은 괴로움과 좌절과 미움을 재생산하는 것이라는 것을 어머니와 살면서 다시금 알게 됩니다.
생각을 잘 하되 그 생각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자유는 없을 것입니다.

(46)

이것이 이른바 첫 번째 요벙인 [앞장서서 방향 돌리기 요법]이었다. 치매 노인의 엉뚱한 요구나 주장에 대해 최고의 대응법인 이 요법은 아주 간단하다. 어머니가 뭘 요구하시면 무조건 수용하고 그대로 따르면 되는 것이다.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는데 그걸 어떻게 수용하느냐고?
지레 겁먹을 필요가 없다. 해보면 된다. 해 보면 신기하게도 해결책을 어머니가 다 가르쳐주신다. 단 한 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될까 안 될까 의심하면서 어설프게 하면 실패한다는 것이다.
온 정성을 다해서 하늘에 있는 별이라도 따 드리겠다는 심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상황을 완전히 주도해 버려야 한다. 뒤에서 투덜대며 끌려 다니지 말고 한 발 앞서 가라는 얘기다.
치매 부모의 터무니없이 강경한 주장은 그동안 아무도 귀 기울여주는 사람이 없었던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면 된다.
... 감자밭 사건이 있고나서 어머니는 상황에 맞지 않는 주장을 거의 안 하셨다. 며칠 동안 계속된 평화를 조마조마하게 지켜봤는데 확실하게 한 고비를 넘기신 게 분명해 보였다. 가끔 엉뚱한 주장을 하시기는 해도 예전처럼 집요하거나 공격적이지가 않았다. 어떤 주장도 귀 기울여 들어주고 맞대응하지 않고 가볍게 추임새를 넣어가며 수긍해주니까 어머니 스스로 주장을 접거나 아예 잊어 버렸다.
자기 주장을 지나치게 강변하지 않아도 누가 당신을 무시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오랜 세월 내재되어 있던 긴장과 마음의 상처가 해소되지 않았나 싶다.


(53)
감기몸살이 나서 콧물이 흐른다고 콧구멍을 탓할 수 없듯이 수십년전에 돌아가신 구두 수선쟁이 '백운역 할아버지'가 난데없이 서울 여동생네 뒷집에 침쟁이가 되어 나타났다는 어머니의 주장을 판단력과 기억력의 잘못으로 문제 삼을 일이 아닌 것이다.
판단력과 기억력 이전에 원 뿌리는 걷고 싶다는 데 있었다. 남들처럼 벌떡 서서 걸어보고 싶은 것이다. 걷지 못한다는 이유로 갇혀 살기 싫다는 것이고, 바깥구경 좀 하자는 것이다. 걷고 싶은 것뿐이었는데 오줌싸개가 되어야 했고, 집안의 천덕꾸러기기 되어야 했다. 아무도 어머니가 하시는 얘기를 귀담아 듣는 이가 없다는 데서 증세는 악화되어 갔던 것이다. 이것을 어찌 어머니 탓이라 하겠는가.

(60)
백운역 할아버지가 등장하는 기재를 정확히 알게 된 것이 큰 소득이었다. 불안이 커지고 최소한의 욕망이 허물어 졌을 때 바로 그럴 때 백운역 할아버지는 벼락처럼 어머니에게 오시는 것이다.
백운역 할아버지가 아니라 더한 요구가 있더라도 뒤처져서 수습하는 데 급급하지 않고 한 발 앞서서 어머니보다 더 설치면서 상황을 이끌어 가면 어느새 어머니는 수동적인 입장이 되고, 상황의 전개를 주도하게 된 나는 자연스레 사태를 수습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 수 있었다.


(90)
사람이 건강을 잃고 병드는 것은 대개 사람관계에서 비롯된 것이고 사람 사이의 이해관계가 빗나가는 데서 시작된다. 그러나 동물은 이해관계가 아주 단순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다. 행동의 유형도 몇 가지로 정해져 있어서 관계 맺기와 풀기가 참 쉽다.
단순하게 생각하고 단순하게 먹고 단순하게 살아가는 것이 깨어 있는 사람들이 너나없이 추구하는 삶이다.


(108)
어느 날 우연히 읽게 된 '인천시민문예당선작'에 소개된 글은 충격이었다.
노인 시설에서 노래강사로 활동하는 저자가 한 노인의 유품을 정리하다 발견한 일기였다.
'... 나를 볼 때 무엇을 보십니까? 당신이 하는 일을 눈치도 못 채는 듯 보이고 항상 벗겨지는 양말, 별로 영리하지 못한 움츠러든 늙은 노인, 먼 곳을 보는 듯한 눈과 변덕스런 습관, 대답을 잘 못하고 음식은 흘리고, 당신이 하라는 대로 움직이고 당신이 먹이는 대로 받아먹지만 나는 말하리라.
열여섯 살 소녀 때에는 발에 날개를 달고 사랑하는 사람을 곧 만나리라 꿈을 꾸었고, 뛰는 가슴을 안고 스무 살 신부가 되어 기쁜 가정을 이루었다고. 내 어린 자식들은 무럭무럭 자라고 쉰 살에 내 무릎 밑에는 손자들이 놀았다고.
나는 기억하오. 즐거웠던 순간들과 쓰라렸던 시간들을. 그리고 아무것도 오래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자 쭈그러진 노인으로만 보지 말고 가까이서 나를 봐 주시오....'
노인의 일기에서 보듯 늙고 병들면 노인의 느낌과 판단은 무시된다. 관리의 대상으로 전락하여 관계자들의 편의를 중심으로 일들은 진행된다.


(127)
사실 치매는 자신을 제압하는 환경으로부터의 도피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으로부터 소외되었다면 그 사람이 찾을 수 있는 도피처가 망각이 될 수 있다. 대응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알아채고는 외면과 저항, 과도한 공포감과 무시, 의심, 외고집을 통해 분열적 자아를 되찾고자 발버둥치는 것이다.
친근한 환경과 익숙한 사람은 치매 노인들을 안정시킨다.
열살 남짓해서 이사를 간 후 환갑 나이에 만났으니 근 50여년 만에 보는 '분이' 아주머니인데도 어머니가 대뜸 알아보신 것은 고향나들이에서 얻은 좋은 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지매, 우리 어머니 택호가 뭔지 기억하세요?"
분이 아주머니가 물었다.
"찌랄 하고 있다. 내가 그거 모르까이? 서당띠기 아이가?"



(157)
군청에 근무하는 복지 담당 공무원은 의외의 이야기를 했다. 나라가 중심이 되는 서구형 복지 모델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했던 것이다. 독일과 일본을 뒤쫓는 우리의 노인 복지정책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 했다.
"개인의 삶에 국가의 개입 영역이 커질수록 사람의 자주성은 상실된다. 과대하게 설계된 요양비용이 가족간의 애정과 부양을 대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놀란 요양사는 현실을 외면한 의견이지 않느냐고 했다. 노인성 질병을 앓는 부모를 돌볼 사람이 누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한 사람이 전적으로 달라붙어도 모자랄 판에 식구 중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작은 논쟁을 거치면서 복지란 이름으로 인간의 기본이 되는 늙은 부모를 모시는 일마저도 팽개치도록 만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가 주도하는 복지는 노동시장에 다량의 노동력이 유입되도록 하기 위한 장치로 요약된다.
산업노동시장 뿐 아니라 부부 맞벌이를 통해 자녀들의 교육시장도 공교육과 사교육을 막론하고 확장되는 것이다. 그럼으로 해서 산업예비군(실업자)을 일정수준 이상 유지하게 하는 효과가 있을 텐데 이는 자본의 의도와 일치한다.
일본에서 새롭게 시도되는 가정형 복지모델을 소개한 사람은 무주에서 시설을 운영하는 분이었다. 부모를 부양하는 가족에게 상당액의 보조금을 지급하는 제도인데 처음에는 직접 부양 자녀에게만 지급을 하다가 지금은 부모가 사시는 마을 8킬로미터 이내로 이주한 모든 자녀들에게 차등을 둔 보조금을 지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우리 모임에서는 지역 현장에서 제기되는 노인요양 문제들을 검토하고 분석했다. 우리는 제도나 기반시설의 문제에 우리 스스로를 가두지 않기로 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뭐든지 검토하고 실천해 나가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 요양사와 시설 기관은 물론이고 요양사와 수혜자의 이해는 충돌되는 때가 더 많았다.


(209)
사소한 이해의 차이가 발화점이 되어 번지는 감정대립과 알력은 다 자기 생각을 고수하는데서 비롯된다.
자기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만큼 큰 자유가 어디 있으랴 싶었다. 카페에서 어머니 사진에 모자이크 처리를 하면서 내 생각의 모진 부위를 부드럽게 라운딩처리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230)

몸이 부실해지는 것이 악화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을 비관하거나 원망하는 상태가 진짜 악화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어머니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미움과 원망의 마음이 일지 않기를 바랐다. 어머니가 누구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는 순간을 살기를 바랐다.
아는 목사님에게 전화로 물어봤다. 이런 원한 섞인 푸념을 잘 들어주고 풀어내게 하는 게 좋은지, 분위기를 바꿔서 그런 기분에서 빨리 벗어나게 하는 게 좋은지를.
목사님은 그랬다. 기도하라고.
나는 내 식으로 기도를 했다. 그것은 동학수련에서 배운 심고心告였다. 심고는'내가 지금 이러이러 합니다'라고 하늘에 알리는 것이다. 뭘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내 상태를 살펴서 하늘님께 알리는 것이다.
내 식의 기도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간다.
지금의 내 상태에 온전히 감사하는 것이다. 감사 이유를 찾기 어려우면 그냥 내 몸과 내 마음 상태가 살펴지는 대로 하나하나 무작정 '감사합니다'를 덧붙이는 기도다. 그럼으로 해서 나 자신의 '지금 여기'를 파악하는 것이고 하늘에 감응하는 것이다. 알고 있는 여러 기도 방법이 있지만 심고야말로 기도 중에서는 최고의 기도라고 여겨오던 터였다.
기도를 통하여 고요가 찾아왔다. 마음의 움직임이 느려지더니 이윽고 멈추었다. 마음이 멈춘 자리에 한 송이 연꽃이 피었다. 마음의 분주함과 혼탁함은 원인이 대상에 있지 않고 나 자신에게 있었다. 내가 다다른 고요는 그대로 어머니에게 전해졌내 보다. 기복이 심하던 어머니의 상태가 점차 안정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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