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의 추방



나는 당신에게 유대인이라는 것의 어려움에 대해 말했는데,
그 어려움은 글쓰기의 어려움과 똑같은 것이다.
유대인이라는 것과 글쓰기는 똑같은 기다림이며,
똑같은 희망이며, 똑같은 지쳐버림이다.
-에드몽 자베스


1. 추방된 작가

몇 년 전 자베스의 저 말을 읽었을 때 난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유대인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유대인으로 태어나 유대인으로 살아보아야만 알 수 있는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그 몇 년의 세월이 나에게 '유대인'에 관한 앎을 키워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 어렴풋이 깨닫게 된 것은 그것이 어떤 '추방'의 상태를 가리킨다는 것이고, 다시 그 추방이란 어떤 정치적이거나 지리적인 개념이 아니라 인간이 갖는, 혹은 인간에게 주어진 내면의 한 상태라는 것이다. 하지만 '추방'은 그를 괴롭히고 상실감을 갖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존재에 당위라는 양분을 공급해주는 뿌리와 같은 것이다. '그곳'에 다다르기 위해 계속 걸어야 하고, 그 걸음은 그에게는 생명의 박동과 같은 것이어서 멈출 수도 없다. 결코 다다를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 걸음이 향하는 (향할 수밖에 없는) 곳은 '그곳'이고, '그곳'에 대한 꿈만이 그를 걷게 만든다. 기꺼이, 주위를 돌아보며 한숨짓는 우를 범하지 않고, 자신을 추방한 그 세계를 넘어서지 않으면서, 또한 그 세계로의 불가능한 틈입을 시도하지도 않으면서 끝없이 그는 걸어야 한다.
그렇다면 추방의 상태는 어떻게 글쓰기와 연결되는가. 글을 쓴다는 것은 하나의, 또는 여러 개의 겹치고 분리되는 세계를 구축하는 일이다. 세계 속의 존재가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원래 존재했던 세계를 지워버려야 한다. 그 속에 존재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포함하고 있는 세계를 부정한다는 것은 이곳에 존재하면서 동시에 다른 곳에 존재해야 하는 일인데, 그 다른 곳은 아직 다다르지 못한 '그곳'이다. 이 세계에서도 또 다른 세계에서도 온전히 존재할 수 없는 그가 경험하는 '추방'은 그래서 이중의 추방이 된다. 그러나 다른 세상을 만들기 때문에 그들이 추방되는 것은 아니다. 추방이라는 생래의 조건을 글쓰기로 풀어낼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추방된 자들의 운명이다.
유대인인 폴 오스터가 유대인 시인인 찰스 레즈니코프와 에드몽 자베스를 다룬 각각의 글에는 '이중의 추방'이라는 말이 반복되어 사용된다. 그것은 그가 즐겨 사용하는 표현이기 때문이 아니라, 유대인이면서 동시에 작가인 그들의 존재를 무엇보다 정확하게 표현해주는 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끌리는 것은 그런 동일성의 감각 때문일테니까. 자베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모든 작가가 어느 면에선가는 유대인과 같은 조건을 체험한다고 느끼는데,
왜냐하면 모든 작가, 모든 창조자는 일종의 귀양살이를 하니까요.

세계-그것이 무엇이었든-를 창조한다는 것이 현재 나를 담고 있는 세계을 부정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그러나 먼저 세계로부터 부정당했다는 인식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이 세상이 강요하는 방식에 맞출 수 없고, '그들의 길' 위에 발을 내딛을 수 없다. 그들은 다수이고 강하며 그러므로 억압적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정당성에 대한 주저 없는 확신이 억압을 만든다. 그것은 내 뜻과는 상관없이 이 세상에 던져졌다는 식의 실존주의적인 탄식과는 다르다. 태어난 것을 저주하면서 삶을 포기 혹은 방기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소극적인 부정, 아니 그보다는 패배에 가깝다. 부정이란, 옳지 않다고 강력히 말하는 것이며, 그렇게 말할 수 있기 이전에, 그 옳지 않음에 대한 확신과 대안이 있어야 하고, 그 옳음, 당위를 밀고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세계 속에서 안온한 자리를 찾은 사람은 담 너머의 세계로 눈길을 돌리지 않으며 담의 존재도 인식하지 않는다. 그러나 담 안쪽에 있으면서 담 너머를 꿈꾸는 자는 담 너머 세상을 만들려고 한다. 그의 꿈꾸기는 창조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나 그들을 추방한 세계의 눈에 그들은 단지 추방된 자일 뿐이다.
작가는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결코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그러나 결코 그만둘 수도 없다. 그것은 그의 운명이다. 살아 있는 동안 그 운명은 그를 저주하며 죽음만이 그 운명을 완성시킨다. 조용히 관뚜껑을 덮어주며 이젠 쉬어도 좋다고 말한다.


2. 추방된 삶

나는 어디에 있는 건지,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다. 답이 없음을 알면서 질문을 버릴 수 없다. 이편의 삶과 저편의 삶의 의무 사이에서 끝없이 방황했던 카프카처럼, 나는 이 삶 속으로 굳건히 들어서지도 그렇다고 여기서 완전히 나가지도 못한다. 나는 "여기 있다"고 말한다. 함부로 눈을 굴리지도 않고, 주위에 낯선 공기를 뿌리지도 않는다. 하지만 보이는가. 여기, 살아 있는, 내가 보이는가. 그러나 의심하지 말지어다.

길은 있다. 여기에도 없고 거기에도 없지만, 그 사이 어딘가 비밀의 통로처럼 숨어 있는 그 길은 있다. 인간의 육체와 정신으로부터 흘러나온 오수가 흐르는 하수도를 따라 파란 눈의 검은 고양이가 살고 있는 뒷골목. 잠든 동안 나는 그리로 흘러든다. 나는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 안에 들어와 있다. 빛은 없고 눈을 뜰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두렵지 않다. 습기와 악취도 편안하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은 생존의 감각을 내 몸은 갖고 있다. 아무런 생각도 필요 없다. 그 길위에서 구를 뿐이다.

그것이 나의 삶일까. '세상' 속에 내 삶은 없는 걸까.
난 이미 보아버렸다. 그 삶이 '환영'임을, 나의 거짓말 속에서만 나는 그 안에 살아갈 수 있음을... 그러나 역시 그 세상을 버리는 일은 죽음만이 완성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탈출을 꿈꾸지 않는다. 탈출하려면 나를 가두고 있는 여섯 개의 벽이 필요하다. 난 그 벽이 거짓말임을 안다. 없는 것을 애써 제거할 필요는 없다. 어느 예기치 못한 잠결에 나는 또 흘러들 것이다. 그 비밀통로가 나인지,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나인지, 내 속의 나인지, 내 밖의 길인지, 그것은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 답은 없고, 답을 찾아야 할 이유도 없다. 애초에 '답'이란 거짓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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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
안토니오 스쿠라티 지음, 이현경 옮김 / 낭기열라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생존자를 처음 읽기 시작하자 호흡이 가빠지면서 단숨에 읽어버리고 싶어 마음이 급해졌다. '도대체 왜?' 라는 계속되는 질문에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리무중에서 뭔가 명료한 것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 같다.

돌이켜 보면 그 시절 나 역시 거의 살의까지 치닫는 적의를 '그들'에 대해 느꼈던 적이 많았으므로... 비탈리아노가 한번은 나타나 마레스칼키 선생에게 자기 행동의 의미를, 이유를 말해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비탈리아노는 선생의 일기장에 담긴 과거의 모습과 텅 빈 엽서 한 장을 제외하고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사건에 대한 정치가, 형사와 검사, 범죄심리학자, 피해자, 그 도시의 주민들, 등등 각각의 입장들과, 그 사건까지 치닫게 한 원인이 자신과 비탈리아노 사이의 관계에 있다는 마레스칼키 선생의 생각이 씨실과 날실로 교차하며 소설을 구성하고 있지만, 그리하여 사회적인 관점과 개인적인 관점이 적절히 배합되어 있지만, 책장을 덮고 나서는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졌고, 정말 마레스칼키의 말대로 그 사건은 오로지 자신과 비탈리아노 둘 사이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닌가 싶어졌다.

'학생이 선생을, 젊은 세대가 앞선 세대를, 미성숙한 자가 성숙한 자를, 공격하고 파괴하는 사건들 전체의 집합'에 대한 사회적인 분석이 아니라, 그야말로 인간 대 인간의, 결코 불완전하고 미성숙할 수밖에 없는, 성찰없이 타락해가는 인간들과, 그런 인간들의 집합 속에서 그런 세상속에서 자신을 찾으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 그 속에서 길을 잃고 마는 인간들의 초상은 아니었을까.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런 잔학한 범죄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 말세로구나" 하는 판에 박힌 한탄은 어쩌면 빗나간 시선일 수도 있겠다 싶다.

작가가 말하고자 한 것도 결국은 그런 병적인 사회현상에 대한 진단이 아니었던 게 아닐까, 그 자극적인 소재를 통해 오히려 인간 사이의 사랑을, 그 어긋나고 비틀어지기 쉬운 사랑을 말하려했던 건 아닐까 그런 의심을 품게 된다. 아니 어쩌면 안드레아는 비탈리아노를 과거의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으므로 20년이란 세월을 뛰어넘은 자기애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었을까...

그래서, 비탈리아노와 마레스칼키 선생의 관계에 초점을 맞춰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그 모든 사건의 혼란이 한편의 악몽처럼 지나가버렸다는 생각도 든다. 장담하건대 그런 사건은 어느날 갑자기 생겨난 현대의 괴물이 아니다. 인간의 역사는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잔혹함으로 점철되어 있지 않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경악스러운 잔인함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자살을 결심했다가 생각을 바꾸고 다시 교사 생활을 이어가는 마레스칼키(솔직히 난 그가 죽길 바랐다, 죽어서 그 끔찍한 현실에서 달아날 수 있기를 바랐다)는 악몽의 기억을 아무도 보지 못하는 무의식 속에(텅 빈 엽서 한 장에 담긴 머나먼 땅 멕시코에) 묻어둔 채, 세상의 '이러함'을 묵인하고 그저 나날을 살아가는 것일 터이다. 우리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이렇게 또 다시, 삶 자체가 악몽이라는 뒤틀린 결론으로 치닫고 마는 건... 결국 생존자가 아니라 그 속에서 나 자신의 생각을 찾아내려한 지극히 개인적인 독서의 결과가 아닌가 또 다시 자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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