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일단 입을 열어 말을 하기 시작하며 몸 안에 갇혀 있던 에너지가 밖으로 나온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치료가 된다. 아니, 더 중요한 것은 나의 발설을 다른 누구보다 나 자신이 듣게 된다는 사실이다. 욕구가 몸안에 쌓여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잘 알아채지 못한다. 그것이 언어화 되어 입밖으로 나왔을 때 비로소 내가 하고 싶은 말과 직면하게 된다. 내가 몰랐던 나의 얘기를 듣는 순간,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하는지 알게 되는 것이다.
비밀이나 고민의 발설은 마음뿐 아니라 몸에도 영향을 미친다. 심리학자이며 글쓰기 치료 연구자인 제임스 페니베이커 박사는 저서 [글쓰기 치료]에서 .... 그가 실험한 바에 따르면, 심리적 외상 즉 트라우마의 경험을 혼자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타인에게 털어놓은 사람보다 병에 걸릴 확률이 더 높다고 한다



32.
사람들은 자기 치유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이미 알고 있다. 발설의 욕망을 느낀다는 사실이 바로 그 증거다. 그러니 말하고자 하는 욕구가 치밀어오를 때는 스스로를 치유하고자 하는 본능에 맡겨야 한다.
다시 판도라의 상자로 돌아가보자. 상자 속에서 불행과 재앙이 쏟아져나오는 걸 보고 깜짝 놀란 판도라가 상자의 문을 닫았을 때, 그곳엔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게 한 가지 있었다. 가장 밑바닥에 깔려 있던 '희망'이었다. 만약 판도라가 겁에 질려 상자를 닫아버리지 않았다면 그 상자의 마지막 메시지인 희망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상자에서 쏟아져 나오는 추한 것들을 끈기 있게 지켜보면서 빛과 그림자를 통합해냈을 때 비로소 인간이 느끼게 되는 감정이다.


55.
이처럼 생각과 감정을 글로 옮기게 되면 생각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으면서도 문제 해결을 위한 집중적인 고민을 할 수 있게 된다. 다음 단계로 생각이 발전하는 것이다. '자, 그래서 내 고민의 핵심이 뭐지? 뭐가 제일 근본적인 문제인 거야?' 그걸 찾아내고 나면 아마도 '그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거지?' 라고 묻는 단계가 올 것이다.


56.
글쓰기의 네 번째 치유 기능은 바로 거리두기이다. 참 희한하게도, 직면하게 되면 오히려 담대해진다. 피하고 외면할 때는 한없이 두려웠는데, 돌리고 있던 고개를 들어 똑바로 쳐다보면 오히려 견딜 만해지는 것읻.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던 일들도 글로 써서 다시 읽어 보라. 이미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다. 그저 종이 위에 기록된 사건일 뿐이다. 그게 견딜만해지면 조금 더 세밀하게 묘사해보라. 같은 내용을 두 배의 분량으로 기록해보는 것이다. 두 밴에서 네 배, 네 배에서 여덟 배.... 그렇게 늘려 쓰기를 하다보면 처음엔 고통스럽지만 쓰고 읽기를 반복하는 사이에 점점 초연해진다.



58.
몇년전 MBSR이라는 심신치유 프로그램에 참가한 적이 있다. 이는 '마음챙김에 기반한 스트레스 완화 프로그램 Mindfulness Based Cognitive Therapy'으로 명상과 요가를 의료 과정에 도입한 것이다. 이 프로그램의 기본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아무런 판단 없이 순순하게 지켜보는 것이다. 이를 바디스캔body scan이라고 한다. 바디 스캔은 자신의 발바닥부터 다리, 복부, 가슴, 머리에 이르기까지 세밀하게 관찰하고 그 느낌을 천천히 체험하도록 안내한다.
총8주 프로그램중 몇 주째였을까? 아주 편안하게 누워서 천천히 내 몸을 바라보던 나는 따뜻한 사랑의 느낌을 선명하게 경험했다. 나의 온몸이 누군가로부터 가장 온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아, '본다'는 것은 '사랑'의 행위구나, 라는 직관적인 앎이 찾아왔다.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고 따뜻한 눈물이 흘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 조금 논리적으로 설명하자면, 내 몸에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눈에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파동이 가 닿았고, 내가 그것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후 현실의 인간관계에서도 '봄=사랑'의 공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장면을 상상해보자.
누군가 말을 하고 있다. 눈물을 흘리며, 한숨을 내쉬며, 또는 눈을 반짝이면서 신나게 수다를 떨 수도 있다. 그의 앞에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상대가 앉아 있다. 상대는 말하는 이의 부모일 수도 있고, 연인일 수도 있고, 친구나 형제자매, 내담자의 얘기를 듣고 있는 상담자일 수도 있겠다. 그들을ㄴ 너무 앞으로 당겨 앉지도 않았고, 뒤로 빠져 있지도 않았다. 적당한 거리에서 상대에게 관심을 집중시킨 채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듣고 있다. 상대가 호들갑을 떨면서 공감을 표시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 관계가 호의와 사랑에 기반한 관게임을 직감할 수 있다.
판단이나 편견 없이 누군가를 지켜보는 것은 사랑의 행위다. 부모가 어떤 기대나 집착 없이 아이를 주의 깊게 지켜봐주는 것, 사랑하는 사람이 상대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 것, 동료나 친구가 살아가는 모습을 어떤 훈계나 간섭도 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봐주는 것은 칭찬이나 격려보다 더 온전하다.




63.
우리는 삶과 직면하지 않기 위한 방어기제를 100가지쯤 구사하며 살아간다. 대충 보고, 왜곡하고, 발뺌하고, 화내거나 울면서, 또는 모호한 환상의 장막을 드리운 채 세상을 본다. 어린 시절에는 그것이 생존의 방법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단순한 습관 혹은 게으른 회피의 한 방편이다.



204.

작은 문제부터 떠나보내는 것이 좋다. 오랫동안 끈질기게 나를 괴롭혀온 문제, 근본적인 문제들은 쉽게 떠나보낼 수 없다. 그것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해결해야 물러간다.
작은 문제를 정리하다보면 마음의 여유가 생겨 중요한 이슈를 다루는 데 훨신 도움이 된다.
골치 아픈 문제를 떠나보내는 대신 정반대의 반전을 시도해보는 것도 좋다. 우리는 고치고 달라지려고 쉼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문제투성이인 자신에 대해 안절부절못한다.
난 말을 너무 많이 해서 문제야, 난 너무 내성적이어서 문제야, 물건을 정리하지 않아, 게을러, 우유부단해.... 그럴 때 문제들을 떠나보낼 것이 아니라 자신을 문제투성이라 야단치는 그 사고방식을 떠나보내는 것이다.


207
마지막으로 떠나보내기가 인상적이었던 카자흐족 이야기를 하고 싶다. 몽골벌판에서 살아가는 카자흐족은 독수리를 길들여 늑대나 여우 등의 맹수를 사냥하도록 훈련시킨다. 이 독수리 사냥을 하면서 살아가는 이들을 베르쿠치라고 한다. 베르쿠치가 한 마리의 독수리를 길들이고 훈련시키는 기간은 근 6개월이며, 10여년을 그 독소리와 살아가다가 시간이 흐르면 떠나보낸다.
떠나보낼 때 베르쿠치는 자기들만의 의식을 거행한다. 가장 좋은 옷을 차려입고 높은 산에 올라가 자기 손 위에 앉은 독수리에게 몇 번씩 반복해서 말한다. 그동안 너로 인해 잘 살아왔으며, 이제 우리가 헤어질 때가 왔다고. 그리고 눈물을 닦으며 오랜 친구인 독수리를 떠나보낸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떠나보낼 때 충분히 슬퍼하고 정성을 들인다면 그리 오래 미련이 남거나 괴롭지는 않을 것이라고.


256-7
과학자이면서 신비체험가인 조셉 칠턴 피어스는 인간의 지성이 어떻게 발달하는지 연구했고 그에 대한 흥미로운 결론을 얻게 됐다. 즉 우리 인간에게는 머리두뇌head breain: intellect와 심장두뇌 heart brain: intelligence라는 두 개의 두뇌가 있으며, 이 둘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인간의 정신적인 성장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그가 이런 사실을 유추해낼 수 있었던 데는 분자생물학의 공포가 컸다. 분자생물학은 심장이 두뇌와 여러 모루 유사하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해낸 바 있다. 즉 심장을 구성하는 세포의 60퍼센트 이상이 두뇌와 똑같은 신경세포로 이루어졌으며, 두뇌와 마찬가지로 신경전달물질을 통해서 작용한다. 게다가 심장세포도 인간의 온몸과 연결되어 신체가 조화롭게 기능하도록 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뇌와 유사하다. 그 심장의 절반은 이른바 감정두뇌라고 하는 뇌의 변연계에 연결돼 있고 나머지는 신체 모든 장기와 근육들에 연결되어 신체와 정서, 감정 등이 상호작용하도록 돕게 된다.
그 뿐이 아니다. 그는 50여년 전, 생리학 시간에 쥐의 심장세포를 연구하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목격했다. 심장세포 한 개를 떼어놓으면 규칙적으로 박동하다가 서서히 약해지면서 죽어갔는데, 죽어가는 세포 옆에 또 다른 심장 세포를 가져다놓으면 둘은 다시 규칙적으로 박동하기 시작했다. 서로 붙여놓은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이렇게 두 세포가 서로 조응할 수 있는 것은 심장세포가 만들어내는 강력한 전자기장 때문이다. 심장박동은 작은 전구를 밝힐 수 있을 만큼의 전자기장을 인간의 몸 바깥 3.5미터에서 4.5미터까지 방사하며, 이때의 파장은 두뇌가 가진 전기 파동의 40~60배에 이른다고 한다.
따라서 조셉 칠턴 피어스는 인간의 두뇌, 그중에서도 감정이나 정서를 관장하는 부분이 심장의 영향력 아래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한편으로는 심장에서 뇌로 흘러드는 호르몬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는 심장이 방사하는 전자기장에 의해서다.



270.
또 하나는 균형감각을 갖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이성과 감성을 두루 사용하는 글쓰기를 말한다. 페니베이커 박사는 [털어놓기와 건강]에서 이와 관련해 아주 재미있는 글쓰기 실험을 했다. 글쓰기 집단을 셋으로 나눈 뒤 첫 집단은 자신의 심리적 상처를 감정적인 측면에서만 쓰도록 했고, 두 번째 집단은 심리적 상처에 대한 사실만 기록하게 했으며, 세 번째 집단은 사실에 대해 쓰고 감정적인 측면도 고백하게 했다. 실험 결과 첫 번째와 두 번째 집단은 나흘 동안 글을 쓴 뒤 더 우울해졌지만, 세번째 집단은 기분도 훨씬 좋아졌을 뿐 아니라 이후 6개월 동안 건강상태도 다른 집단에 비해 훨씬 좋았다.
치유하는 글쓰기를 진행해보면 주로 감성적인 측면에 대해서만 글을 쓰는 참가자들이 있다. 그들은 우울한 상태, 외롭고 공허한 심경을 누구보다 문학적으로 잘 표현한다. 하지만 그렇게 글을 쓸 경우 상처와의 직면은 불가능하며,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 또한 어려워진다. 그럴 때 나는 참가자에게 상처가 된 사건을 좀더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도 기록해보라고 요구한다. 반대로 감정 표현은 전혀 하지 않은 채 당시의 상황만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에게는 반대의 제안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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