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승優勝 열패劣敗의 신화 - 사회진화론과 한국 민족주의 담론의 역사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5년 4월
평점 :
절판


 우승열패의 신화

 박노자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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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이상 그를 파란눈의 귀화 한국인으로 소개안해도 될만큼 명성을 가지게 된 오슬로의 한국학 교수이다.

 

 지난 책들이 너무나 강렬해서 그의 신간이 나오길 기다려지는데 '순수토종' 한국인들보다 더 한국사와 동양사에 대해서 심도있는 연구를 진행중이며 날카로운 안목으로 과거와 오늘의 관계를 되짚으며 우리가 나아갈 미래를 그려보이는것이 전문이라고 해야할까?

 

 이 책에서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빨리빨리' 성격의 기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보는데 그리 멀지 않은 우리의 과거속에 그 이유가 있음을 밝혀낸다. 조선시대 후기 이전만해도 서양인의 눈에 비친 조선인의 모습은 사뭇 여유롭다 못해서 게을러 보일 정도였다는 점이 우리가 근 100년간의 사이에 이렇게 '급한' 민족성을 가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쉽게 생각해도 농경사회에서 '급하다'고 결실이 더 빨리 맺는 것도 아닐 것이고,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생활방식인 것을 감안해도 '급함'과 우리 민족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듯 하다. 그렇다고 현재의 '급한 성격'을 어디서 기인한다고 봐야할까? 단순히 식민사관의 하나로 '저급하고 성격 급한 민족'이라 배웠음이 영향만으로 치부하기에는 무엇인가 부족하다.

 

 이에 대한 답을 저자는 조선후기 제국 열강들의 틈새에서 한민족이 살아남을 방법에 대한 대표적인 기득권 학자, 정치가들의 '우승열패'사상에서 찾아보았다.

 

 일제가 불합리하며 불평등한 '한일합방'을 통해 강제로 침략하고, 청나라나 러시아 같은 주변 열강들의 시시탐탐 노리는 상황속에서 대한제국의 살길을 찾기란 그리 쉽지 만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지식인이나 정치인들은 단합하지 못하고 각자가 주장하는 사상에 따라 친미주의자, 친일주의자, 친러주의자, 친청주의자 등 열강의 힘을 배경으로 나뉘어지게 된다. 하지만 모두가 한소리를 내는 것은 '힘의 원리에 있어서의 우승열패 주의'다.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자신의 배경이 되는 나라의 기술이나 발전사를 배워야 하며, 이를 통해 국력을 신장하고 위기와 혼란의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물론 이러한 지도부의 혼란속에 백성의 수탈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여러 파벌들은 삼일천하를 누리고 뺏기는 속에서 나라는 끝이 없는 나락으로 빠지게 된다.

 역시나 작금의 정치나 100년전의 크게 다름이 없기에 가슴 한편이 답답하기만 하다.

 

 갈피를 못잡는 나라를 살리는 길 찾기 중에 세계전쟁을 경험하고 결국엔 자주적이지 못한 타자에 의한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이후에도 사분오열되어 자기 주장만을 고집하게 되는데. 역사는 되풀이 된다고 하지 않던가.  해방의 기쁨은 이내 사라지고 나라가 반으로 갈라지게 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이 역시 열강의 패권경쟁에 의한 분단이기도 하지만, 지도층의 무능력과 분열이 큰 원인으로 작용한 점이 이내 안타깝기만 하다.

 

 19세기 초중반 나라의 살길이 '힘을 키우고, 세계는 적자생존의 정글이다'라는 인식론속에서 우리는 '급하지 않을 수 없는' 성격을 자연스럽게 가질 수 밖에 없게 된 것이 아닌지 저자는 질문을 던진다.

 

 '속성' 이 통하던 계발시대에서는 우리는 성장하였지만, 성장에 어울리는 진정한 '국력신장'은 이루지 못한 것이 아닐까?

 독도, 간도의 영유권, 고구려 역사 등 현안 중요한 이슈들에 대해 우리는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이며 '주권수호'가 가능할 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속성의 끓어 오르는 냄비 근성으로서는 해결하기 불가하며 우리 고유의 민족성인 인내와 노력을 앞세워 당당한 대한민국인으로서 살아가야 할 것으로 믿는다.

 

 19세기 초반의 지식인들이 오류에 빠지는 큰 이유중의 하나가 근시안적이며 제국주의적 사고를 가졌었다는 것인데 이는 일본어나 중국어로 번역된 서양간행물들을 통해서 지식을 습득한 것이 큰 이유이다.

 이같이 우리 청년의 생각이 편협되거나 왜곡돼지 않으려면 다양한 독서와 실질적인 외국어 능력의 향상을 통해서 여러 사상들을 자주 그리고 많이 접해야 하는 절대절명의 이유는 이런 점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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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세된 희망
폴리 토인비 지음, 이창신 옮김 / 개마고원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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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러미 레프킨의 노동의 종말에서는 지식노동자와 육체 노동자의 지난 100년간의 임금 상승의 수배차이를 설명하며, 자본과 육체 노동의 가치 상승의 차이가 무려 10배 이상이나 된다고 설명한다.

 

 이 책의 저자는 영국의 저널리스트로 빈민 생활을 체험하며 사회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아마도 이 책이 우리 나라에 소개된 이유는 우리나라의 많은  사회복지정책 부분이 영국식을 따라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로 제시하고 있는 점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생활상과 노동현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점들 그리고 현실적인 대안을 지목하고 있다.

 

 오늘날 대다수의 기업들이 노동력의 유연성과 강성한 노조에 맞서는 정책의 일환으로 비정규직으로 채용하거나 정규직 노동자를 전환하는 일에 매우 적극적이다.

 이전 같으면 노조가 이와 같은 관이나 사측의 정책에 적극 대응하였겠지만 이제는 '국가' 와 '회사'의 경쟁력 제고를 위해서라면 그마저도 쉽지 않다. 특히 전세계적인 공황과 얼마전의 IMF 경험은 차라리 '최저임금'이라도 받는 것이 낫다는 것이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려질 수 있는 원인이 되었다.

 

저자는 현시대에서는 '교육'외에는 계층 상승의 다른 통로는 이제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는 모두 봉쇄되어버렸다. 선택의 범위가 넓을수록 삶은 더욱 풍성해지고 반대로 선택의 범위가 좁을수록, 즉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나 갈 수 있는 장소나 손을 뻗어 닿을 수 있는 기회 또는 범위가 제한적이라면 삶은 비참해진다. 부가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않지만, 풍요로움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정작 자신을 그 풍요에서 차단되어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는 사람이 삶에 만족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빈곤감은 상대적이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노동자의 '교육'이라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상대적 빈곤을 줄이기 위해서는 '교육'을 위한 시간에 노동자는 또다른 비정규직 일자리를 구해서 그 허탈감을 채워야 한다. 이런 식으로 하다보면 영국의 경우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2~3개의 일을 하루 종일 하는 경우가 극빈자 계층에서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는 극빈자 입장에서 당장에 조금 더 많은 수입을 가져오겠지만 이들이 최저임금수준이나 열악한 수준에서도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일조하는 것임을 알지는 못할 것이다.

 더욱이 교육을 통한 지식이나 기술 습득 시간 자체가 사라지게 되버려서 '가난'의 굴레를 벗기란 여간 힘들지 않다.

기업 역시 이런 노동자들의 심리를 악용하여 '노동조건개선'이나 '임금상승'에 대해서는 노동력 수급의 시장원리를 주장하며 방관하는 면이 없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을 저자는 직접10개가 넘는 비정규직 저임금의 일을 체험하면서 실랄하게 문제점을 지적하고 정부의 정책과 인력 수급의 프로세스를 비판한다.

 

 책을 통해 정리된 생각은  순환되는 경제 위축 및 물가 불안에 대해서의 대책을 최저임금의 수준과 결부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어려운 상황일수록 사회 상위 계층의 고소득자들이 더 많은 부담을 해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상 어려운 사람들의 살림살이에서 더 쪼개서 희생을 해야한다는 사고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국가주의 및 가진 자의 교묘한 논리에 '속았다'라는 생각도 들게한다.

 

 이는 우리나라의 IMF때 부자들은 저가의 '기업'이나 '부동산'을 매각할때 대다수의 중산층 이하의 국민들은 금모으기나 저축 또는 임금 동결로 희생하였다는 사실이 이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더불어 이후 경기가 회복되었을때에는 그 만큼의 임금상승이나 보상은 거의 전무한 반면, 헐값으로 부동산과 기업을 사냥하듯 집어챙겼던 이들은 수백 수천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라는 말을 굳이 꺼내지 않더라도, 있는 자는 가난한 자를 위해 '삶의 희망'을 심어줘야 한다. 그것이 어렵다면 최소한 희망을 거세해 버려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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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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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사는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지요?

 무엇이 행복하냐고?

 죽음은 무엇이냐고?

 

 

 아무리 책을 뒤지고 뒤져봐도 위에 대한 대답은 묵묵부답입니다.

 저자인 카잔차키스는 여행중 그리스인 조르바를 만나고 사업제안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둘은 의기투합하여 크레타섬으로 향합니다.

 

 하나는 책만 파며 진리를 찾는 사람이고,

 또 다른 하나는 책과는 거리가 멀지만 자신의 삶을 토대로 그에 맞장구 칩니다.

 

 누가 옳은지는 500여 페이지되는 책장을 넘겨야 알겠지만,

 우리내 인생사와 아주 맞닿뜨려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나는 예수를 비롯한 절대성인에 대해서 책을 통해 알았고 '부처'라는 시대에 찾을 수 있는 마지막 성인을 알기위해 오늘도 불경을 해독하고 있지만 도무지 무식쟁이 노동자 '조르바'의 말에 자꾸만 귀기울여지는 이유를 처음에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둘씩 자기자신에의 질문을 조르바에게 쏟아놓는 '나'는 조르바의 거침없는 직설적인 답변에 매우 놀랍니다.

 처음에는 무식쟁이 늙은 노동자의 말을 한귀로 듣고 흘리지만, 어느 순간 그것이 진리일 수 있겠다는 내면의 의심을 하게됩니다.

 그와의 대화속에 '책'이 아닌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진솔하고 정곡을 찌르는 말은 '나'를 물들이고, 조르바를 어느새 '성인'의 말씀의 반열에 올려놓게 됩니다.

 

 어디부터 시작해서 어디로 끝나는지 삶은 계속해서 질문하지만 대답할길이 막막해 '미궁'을 헤매던 '나'에게 조르바는 눈 앞의 '성인'입니다.

 

 인간의 영혼이란 기후, 침묵 , 고독, 함께 있는 사람에 따라 눈부시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이네 라며 다독이는 공자의 가르침이 어느새 '나'에게 조르바와의 관계에 대해 강요하고 있는듯합니다.

 

 진정한 행복이란 이런 것인가. 야망이 없으면서도 세상의 야망은 다 품은 듯이 말처럼 뼈가 휘도록 일하는것. 사람들에게서 멀리 떠나,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되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것,  이런 생각을 하며 '나'가 생각해온 진리와의 비교를 현재의 삶속에서 끊임 없이 되새깁니다.

 

 그리고 또, "자기 자신 안에 행복의 근원을 잃지 않은 자에게 화 있을진저!, 남을 즐겁게 하려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금생과 내생이 하나임을 깨닫지 모˜릿?자에게 화 있을진저!" 자신이 믿었던 진리에 대해 다시금 의심을 품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실로,  눈 앞의 무식쟁이 막가파 조르바가 부럽다. 그는 살과 피로 싸우고 죽이고 입을 맞추면서 내가 펜과 잉크로 배우려던 것들을 고스란히 살아온 것이다. 내가 고독 속에서 의자에 늘어붙어 풀어 보려고 하던 문제를 이 사나이는 칼 한 자루로 산속의 맑은 대기를 마시며 풀어 버린 것이었다. 라며 인정해버립니다.

 

 이전부터 깨닫기 위한 질문들을 조르바를 통해서 찾는다. 세계란 무엇일까?  세상의 목적은 무엇이며 우리 한순간의 목숨이 어떻게하여 세상의 목적을 이룰 수 있을까? 조르바에 따르면 인간이나 사람의 목적은 쾌락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혹자는 정신을 창출하는 것이라고 하겠지만 한 차원을 높여서 보면 똑같은 말에 지나지 않았다. 라며 조르바를 두둔하는 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결국 수 많은 진리탐구의 과정중 '성인'들이 아닌 한 늙은 노동자로부터 깨달음을 얻은 '나'는 자서전에서 <내 삶을 풍부하게 해준 것은 여행과 꿈이었다. 내 영혼에 깊은 골을 남긴 사람이 누구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꼽을 것이다.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 조르바 '''> 라며 말을 낸윱求?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에는 '나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이므로...>

 

 지금도 그는 그리스의 당대의 지성인으로써 영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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