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남아선호사상이 만연해 있던 옛 시대에 비하면 세상이 느리게나마 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적어도 30대 젊은 부부 세대에서 "여자가 이래야지" 하고 권위를 세우는 남편들은 많지 않다. 함께 집안일을 나눠 하고, 육아에 동참하고, 시댁과 아내 사이에서 중간 역할을 잘 하려고 노력하는 남편들도 많다. 문제는 여전히 그것이 ‘고맙고 특별한‘ 풍경처럼 여겨진다는 점이다. 자기 집에서는 귀하게 자랐던 며느리들이 시댁에서 요리와 설거지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라서 아무도 칭찬하지 않는데, 남자들은 조금만 움직여도 좋은 남편, 자상한 남편이 된다. 그 가운데서 며느리는 ‘남편 잘 만나고‘ ‘시집 잘 온‘ 여자가 되는 것이 또 우스운 일이다. 집안일을 나눠 하는 것은 복덩이 남편을 만난 덕분에 얻은 혜택이 아니라, 공정하고 당연한 일인데. - P49
약자에게 딱지를 붙이는 것은 쉬운 일이다. 운전 못하는 여자를 ‘김여사‘라고 하고, 명품을 소비하는 여성을 ‘된장녀‘라고 지칭하는 것이 사회 전반에서 통용되고 있지만 같은 상황의 남성을 지칭하는 명칭은 없었다. 여성의 어떤 행동 양식을 남성의 시선에서 가늠하여 그에 대한 꼬리표를 붙이면 그 말에는 권력이 생긴다. 남성이라는 것만으로도 여성을 분류하거나 판단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 P70
나는 아직도 왜 며느리가 결혼 후 시부모님 생신상을 차리거나 시댁식구들을 초대해 집들이 음식을 한 상씩 차려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남편은 처가댁 제사에 참여하지 않는데, 며느리에게는 시댁 제사나 가족 행사 날짜를 일일이 가르쳐주는 이유도. - P193
아이가 자라 맞벌이를 해도 어린이집에 간 아이가 아프면 엄마에게 전화가 온다. 힘들겠지만 어쩔 수 없는 야근은 주로 아빠가 해야 하고, 회사에 아쉬운 소리를 하며 "이래서 여자들은 책임감이 없어" 라는 말을 듣는 건 대부분 엄마다. 잘못한 사람은 없고 다들 최선을 다하고 있더라도 어쩐지 모두 힘들어진다. - P199
남편이 "애 보러 가야 해서 회식은 빠지겠다"고 말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그가 회사에서 제 업무를 해내는 것처럼 가정에서의 당연한 몫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여겨줄까? 아내의 강요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이래서 유부남은 힘들다고 머쓱하게 변명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지는 않을까? - P200
아이를 키우기 시작하면 돈을 벌고 있는 남성은 일을 그만두기 어렵다. 보다 강도 높은 노동과 야근을 강요받고, 혹시나 육아휴직을 쓰려고 해도 여성보다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사회에서 남성은 경제적으로 가정을 책임지는 역할이며, 가사 노동을 분담하는 것은 불필요한 행위로 본다. 어찌 보면 남성 역시 아기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고 함께할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는 셈이다. - P207
그런데 문제는 역할이 바뀌어 여성이 경제력을 책임진다한들 그에 따라오는 가부장제의 혜택까지 누리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여전히 여성은 양가 부모님의 집안 행사를 챙기거나 아이가 아플 때 달려가는 일을 의무의 바깥으로 밀어내기 어렵다. 심지어 마음으로는 남편과 같이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도 몸은 먼저 움직인다. 남들이 강요하지 않아도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엄마로서의 의무를 스스로도 떨쳐 내기 어렵다. 맞벌이 가구의 남성 가사 노동 시간이 이전에 비해 늘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여성에게 4배 가량 치우처져 있다고 한다. 세상은 똑같이 일을 해도 여자는 집안일을 더 해야 하고, 며느리 노릇을 해야 하고, 주 양육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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