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때 동맹휴학이 이렇게 많이 일어났는지 몰랐다. 이때의 정신이 광복 후 이승만 ― 박정희 ―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정권기의 동맹휴학으로 이어졌을 테다. 우리는 '독립운동'이라고 하면 윤봉길 의사의 의거나,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대첩 같은 독립전쟁 중심으로 막연히 떠올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독립운동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모든 계층에서 일어났다.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과, 원산총파업, 그리고 내가 학창시절에 배웠던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일제가 세운 삼림조합에 저항한 단천농민조합사건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기억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그 폭이 넓다. 모든 독립운동은 숭고하지만, 이제는 학생·농민·노동자가 주체가 돼서 일으킨 항일운동도 영화로 많이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1921년부터 1928년까지 발생한 동맹휴학 건수는 공식적으로 집계된 수치만 해도 404건이나 된다. 평균적으로 한 해에 50건의 동맹휴학이 일어났던 셈이다. 숫자상으로 볼 때 고등보통학교가 200건으로 가장 많았고, 보통학교가 192건으로 뒤를 이었다. 그런데 200건과 192건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보통학교는 일제의 ‘3면 1교‘ 정책에 따라 증설되어 1800여 개가 세워졌지만(1930년 기준), 고등보통학교는 기껏해야 42개밖에 없었기 때문이다(1930년 말 기준). 보통학교는 고등보통학교에 비해 30배 이상 많았던 것이다. 따라서 고등보통학교의 동맹휴학은 보통학교와 비교할 때 학교 수에 비해 상당한 양을 차지했다고 볼 수 있다. 조금 과장하자면, 거의 모든 고등보통학교가 동맹휴학을 한 번 이상씩 경험했다고 볼 수 있다. - P214

중요한 사실은 동맹휴학이 6·10만세운동을 기점으로 기조가 바뀌었다는 점이다. 6·10만세운동이란 1926년 6월 10일에 치러진 순종의 장례일을 기해 일어난 만세시위를 말한다. 6·10만세운동 이전의 동맹휴학이 주로 학내 문제에 불만을 제기하는 수준이었다면, 6·10만세운동을 거치면서는 식민지 교육 자체에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6·10만세운동이 ‘조선인 본위의 교육‘을 환기함으로써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인 본위의 교육이란 조선인을 위한, 조선인에 의한 교육을 말한다. 다시 말해 식민지 교육의 차별을 없애달라는 요구였다. - P215

동맹휴학의 변화는 저항의 양상이 조직적으로 전개되는 것과 맞물리면서 이루어졌다. 192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 동맹휴학은 양적으로 증가할 뿐만 아니라 동맹휴학 투쟁본부를 설치하는 등 이전에 비해 한층 조직적이고 장기적인 투쟁으로 펼쳐졌기 때문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곳이 6·10만세운동의 추진 세력 중 하나였던 조선학생과학연구회였다.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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