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대에 스웨덴에 유학을 간 것도, 그 당시 스웨덴에서 이미 최저임금 제도라는 게 있었다는 것도 놀랍다. 이 정도로 초엘리트인 사람이 고국에서 아무런 대접을 받지 못하고 쓸쓸히 죽어갔다는 점도 서글프고... 스웨덴에 있던 시절 황태자의 총애도 받았다는데, 차라리 스웨덴에 정착해서 계속 살았더라면, 스웨덴에서 간접적으로 한국을 도울 방법을 찾았더라면 어땠을까.

경기도 여주군 출신인 최영숙은 1926년 7월 13일 밤 하얼빈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멀리 스웨덴을 향하여 떠났다. 지난 9일에 배를 타고 상하이를 떠나 다롄에 상륙했을 때, 최영숙은 일본 경찰에게 잡혀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는 일어와 중국어, 그리고 영어에 정통하다. 경찰에게 체포된 이유는 사회주의에 관한 책을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P186

최영숙은 노동시간이 제한되어 있고 최저임금을 보장해주는 스웨덴의 노동조건에 주목했다. 생활비를 쓰고도 남는 임금에 놀라기도 했다. 최영숙은 스웨덴의 선진적인 노동시스템을 식민지 조선에 도입해보려고 했던 것 같다. - P186

문제는 집으로 돌아온 뒤에 벌어졌다. 스웨덴까지 유학을 갔다 왔으니 그의 귀국은 큰 주목을 받고도 남았다. 그런데 어렵게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음에도 그를 불러주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어느 인터뷰에서 최영숙은 한 1년 동안만 신문기자 노릇을 해보았으면 하는 바람을 비추었으나 결국 헛된 희망이었다. 이화학교 은사인 김활란의 의뢰로 공민독본을 편찬하는 일을 맡은 게 전부였다. 5개 언어를 구사할 수 있고 스웨덴에서 경제학 학사학위를 딴 엘리트였으나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그가 귀국한 해인 1931년은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모두가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시기이긴 했지만, 그의 실업은 이상할 만큼 견고했다.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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