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읽는 북학의 - 조선의 개혁.개방을 외친 북학 사상의 정수
박제가 지음, 안대회 엮고옮김 / 돌베개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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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러져가는 조선을 일으키기 위해 조선 후기에 등장한 실학자들이 있었다. 하나는 농업을 강조한 무리였으니, 하나는 오늘날 우리가 중농학파라고 부르는 유형원·이익·정약용이었고, 다른 하나는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를 비롯한 상공업 진흥을 강조한 중상학파였다. 이런 시대 배경 속에서 서자 신분으로 태어난 박제가는 19살에 연암 박지원의 제자가 되면서 북학파(중상학파) 학자들의 영향을 받게 된다. 29살에는 친구 이덕무와 청나라에 다녀온 후 책을 저술했으니, 바로 《북학의北學議》 다. 


나는 고전 번역으로 저명한 안대회 교수가 엮은 『쉽게 읽는 북학의』를 골랐다. ‘북학의’에서 ‘북학北學’은 당시 조선의 북쪽에 있는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배우자는 것이다. 당대의 주류 유학자들은 여전히 청나라를 오랑캐로 여겨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박제가는 조선이 경제, 국방, 문화, 기술 등 모든 분야에서 낙후되어 오직 더 발전한 국가에서 배워야 조선이 살아남고,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북학의》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해 청과 조선을 대조하며 조선의 낙후된 모습을 묘사한다.


부강한 청나라와 비교해서 참혹한 조선의 현실에, 박제가는 다음 글귀와 같은 비유로 소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소비가 경제의 윤활유 역할을 하는 것은 비단 자본주의 사회만의 일만은 아닌가 싶다. 국가의 흥망성쇠는 보통은 사치 때문이지만, 박제가는 조선이 망한다면 그건 지나친 검소함 때문이라고 보았다. 


재물은 비유하자면 우물이다. 우물에서 물을 퍼내면 물이 가득차지만 길어 내지 않으면 물이 말라 버린다. 마찬가지로 비단옷을 입지 않으므로 나라에는 비단을 짜는 사람이 없고, 그 결과로 여성의 기술이 피폐해졌다. 조잡한 그릇을 트집 잡지 않고 물건을 만드는 기교를 숭상하지 않기에 나라에는 공장工匠과 도공, 풀무장이가 할 일이 사라졌고, 그 결과 기술이 사라졌다. 나아가 농업은 황폐해져 농사짓는 방법이 형편없고, 상업을 박대하므로 상업 자체가 실종되었다. 사농공상 네 부류의 백성이 너나 할 것 없이 다 곤궁하게 살기에 서로를 구제할 길이 없다. (196쪽)


가난한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상공업을 진흥시킬 것을 외쳤던 박제가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더 나아가 그는 놀고먹는 사대부를 ‘좀벌레’라고 신랄하게 비판하며, 사대부에게도 상업을 권장해야 한다는 급진적 주장을 펼친다.


신은 수륙의 교통 요지에서 장사하고 무역하는 일을 사대부에게 허락하여 상인 명단에 올릴 것을 요청합니다. 밑천을 마련하여 빌려주기도 하고, 점포를 설치하여 장사하게 하며, 그중에서 인재를 발탁함으로써 권장합니다. 그들로 하여금 날마다 이익을 추구하게 하여 점차로 놀고먹는 추세를 줄입니다. 생업을 즐기는 마음을 갖도록 유도하며, 그들이 가진 지나치게 강력한 권한을 축소시킵니다. 이것이 현재의 사태를 바꾸는 데 일조할 것입니다. (28쪽)


하지만 그 역시 농본주의 국가인 조선의 유학자였기에 농업을 경시하지는 않았다. 이는 다음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다.


농사는 비유하자면 물과 곡식이고, 수레는 비유하자면 혈맥血脈입니다. 혈맥이 통하지 않으면 살지고 윤기가 흐를 도리가 없습니다. 『의서도인』醫書導引에 따르면, 약의 이름에 하거河車(탯줄)란 것이 있는데 이러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수레와 화폐는 농사에 직접 관련되지는 않지만 농사에 도움을 주므로 나라를 경영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급선무로 삼아야 합니다. (41쪽)


이밖에도 박제가는 《북학의》를 통해서 조선의 군사제도, 과거제도, 외국어 교육, 도로, 통상, 건축, 상업, 공업, 농업, 목축 등 조선의 총체적인 개혁을 역설한다. 


안대회 선생이 편역한 『쉽게 읽는 북학의』를 읽으며 놀라운 점은 우선 두 가지다. 하나는 박제가가 아무리 중상학파였지만 사대부들에게도 상업을 권장할 것을 언급한 급진성이고, 다른 하나는 당대 선진국이었던 청나라와 대조되는 조선의 비참한 현실이다. 특히나 전자는 지금 봐도 놀라운데, 당시로서는 얼마나 충격적인 주장이었을까. 모두 알다시피 당시는 사농공상의 신분질서가 엄존하던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사농공상의 꼭대기에 있는 사대부에게 제일 말단의 상업을 권하다니. 후자는 그래도 당시가 우리가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부르는 정조시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놀랍게 느껴진다. 


박제가는 이런 참담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뱃길을 통해 여러 나라들과 통상할 것을 간언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박제가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가 식민지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을 기회가 적어도 두 번은 있었다. 처음 한 번은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서양과학 기술에 눈을 뜬 소현세자 때였고, 마지막 한 번은 실학자들이 왕성하게 활동했던 정조 때였다. 적어도 박제가가 《북학의》를 썼을 당시에 우리가 스스로 무역의 빗장을 열었더라면, 우리의 이후 역사는 조금은 달라졌을 수도 있다.


지금은 박제가가 살던 수백 년 전의 시대와는 많은 점에서 다르다. 굉장히 폐쇄적인 무역 구조를 지녔던 당시와는 다르게, 오늘날 한국은 전 세계 수많은 나라와 교역을 하고 있다. 지금은 당시의 조선과는 정반대로 과도한 무역의존도를 걱정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다. 또한 그때의 조선이 상업을 천시했다면, 오늘날 한국은 자본가들이 사회의 중심인 완전한 자본주의 국가가 된 지 오래다. 그러나 현시대 우리 농촌의 현실은 지방 소멸의 위기에 몰려있을 정도로 위태롭다. 만일 박제가가 이 시대에 살고 있다면, 상공업보다는 농업 진흥과 농촌의 부흥을 더 강조하지 않았을까.


지금은 우리 시대에 맞는 《북학의》가 필요하다. 어쩌면 이미 있는데 우리가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개혁에는 적기(適期 : 알맞은 시기)가 있는 법이다. 다시는 개혁의 적기를 놓치고 후회하는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그것이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 중 하나이고, 우리가 《북학의》에서 읽어내야 할 메시지 중 하나가 아닐까.



※ 이 글은 브런치에서도 읽으실 수 있답니다.

https://brunch.co.kr/@lifeinreading/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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