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말 - 한계를 뛰어넘어 자유롭고 새롭게 보는 눈
천인츠 지음, 문현선 옮김 / 미래문화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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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에 돋보였던 경세가들 중에 ‘도가’가 있었다. 도가를 먼저 연 인물은 노자였고, 장자가 이를 계승했다. 장자는 노자를 참다운 인간, 즉 ‘진인(眞人)’이라 생각했으나 노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도(道)를 이야기한다. 《도덕경》에 보이는 노자의 방식이 간결하고 압축적이라면, 《장자》에서는 장자만의 비유와 상상력을 맛보는 재미가 있다. 장자는 《장자》의 글머리에서 아래와 같이 말한다.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는데, 이름을 곤이라고 한다. 곤의 크기는 무척이나 커서 몇천 리가 되는지 모른다. 곤은 새로 변하는데, 그 새의 이름이 붕이다. 붕의 등도 너무 넓어서 몇천 리가 되는지 알지 못한다. 붕이 날개를 떨치며 날아오를 때, 그 날개는 마치 하늘 끝까지 닿아 있는 구름처럼 그림자를 드리운다. 곤이 변하여 된 붕은 바다에 너울이 이는 때를 노려 남쪽 바다까지 날아간다. 남쪽 바다는 그야말로 하늘 끝까지 닿아 있는 크나큰 물이다. 『제해』라는 제목의 책에는 이상한 일들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그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붕이 남쪽 바다로 가는데 물을 삼천 리나 쳐 내면서 핑그르르 돌아 몸을 솟구쳐 구만 리를 날아오른다. 하늘에 올라 바람을 타면 여섯 달 동안이나 바람을 타고 간다.” 

-「소요유」


우리의 조력자인 『장자의 말』의 편역자 천인츠 교수는 위 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곤붕과 같이 우주까지 높이 날아올라 인간 세상을 바라보면 인류의 행위들이 가소로워 보이지 않겠느냐고. 천리까지 내다보는 눈을 가지고 한층 더 높이 올라 탁 트인 마음으로 더 넓고 밝게 보자고.


장자가 복수 강가에서 낚시를 했다. 초나라 왕은 대부 두 사람을 먼저 보내서 이렇게 말했다. “바라건대 초나라로 와서 힘써 주시오!” 장자는 낚싯대를 들고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내가 듣기로 초나라에는 신성한 거북이 있는데, 죽은 지 이미 삼천 년이 되었다고 하더이다. 초나라 임금께서는 천으로 고이 싸서 그것을 사당 위에 모셨다고 하고요. 그 거북이가 죽어서 뼈를 남겨 귀해지고 싶었겠습니까? 아니면 살아서 진흙탕 속으로 꼬리를 끌고 다니고 싶었겠습니까?” 두 대부가 말했다. “그거야 살아서 진흙탕 속으로 꼬리를 끌고 다니고 싶었겠지요.” 장자가 말했다. “가십시오! 저는 진흙탕 속으로 꼬리를 끌고 다니렵니다.

- 「추수」


장자는 자신에게 벼슬자리를 제안하는 초나라 왕의 제안을 위와 같은 말로 사양한다. 장자 자신을 거북이에 빗댄 특유의 비유법이 재밌다. 이미 대붕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장자에게 인간 세상의 벼슬자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장자는 생명을 가진 존재가 본성대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 인물이다. 당대를 난세라고 생각했던 장자는 잠깐의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귀중한 생명을 해치기보다는, 본성대로 살아갈 수 있는 자유로운 삶이 소중하다고 생각했으리라. 거북이가 죽은 후에 귀하게 대접받기보다는 살아서 꼬리를 끌고 다니길 원했던 것처럼 말이다.


수나라 군주의 보배로 천 길 떨어진 참새를 쏘았다고 하면, 세상은 틀림없이 그를 비웃을 것이다. 어찌 된 일인가? 그가 쓴 보배는 귀중한 것이요, 그가 원한 것은 하찮은 것이기 때문이다.

-「양왕」


세상 어떤 귀중한 것들보다 생명과 본성을 소중히 여겼던 장자의 생각은 위 대목에서도 드러난다. 이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귀중한 보배를 총알로 삼아 참새를 쏘는 것이 어리석은 것처럼 부와 명예 같은 하찮은 것들에 자신의 생명을 내걸지 말라는 뜻이라고. 그런데 군주의 보배가 아무리 귀하다 한들 참새의 생명보다 더 귀중할까. 여기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려우나 ‘장자’가 전하고 싶어하는 바는 알겠다.


이처럼 다양한 비유와 고사로 자신의 사상을 설명하는 장자였으나, 장자는 기본적으로 언어를 통해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장자의 말』에도 실린 《장자》 속 고사를 요약하여 소개하자면 대략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제나라의 군주인 환공이 성현들의 말이 적힌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수레바퀴를 만들던 윤편이라는 이름의 장인이 그를 보고, 환공이 읽고 있는 것은 옛사람이 남긴 얼의 쭉정이와 찌꺼기를 읽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화가 난 환공이 이유를 묻자 윤편은 대답했다. 자신이 만들고 있는 수레바퀴를 만드는 기술은 구멍을 깎을 때 너무 많거나 너무 적게 깎아서는 안 되는데 그 오묘함을 자식에게 도저히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환공이 읽고 있는 책 또한 성현이 문자로는 미처 전달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 테니 ‘쭉정이와 찌꺼기’라는 것이다. 장자는 이와 같은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언어가 지닌 한계를 지적한다. 그렇게 보면 사실 고전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책은 작가가 남긴 ‘찌꺼기’라고 할 수 있지 않나. 물론 《장자》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찌꺼기'라고 해서 그걸 무시할 수는 없다. 옛사람이 찌꺼기라도 남겨놓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성현이 남긴 지혜를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다만 ‘장자’가 말하는 바는, 책을 읽되 ‘책’ 그 자체에 너무 얽매이지 말라는 것이다. 그 책이 《장자》라 할지라도 말이다. 자유로운 이야기꾼이었던 장자는 그것을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비단 성현만이 아니라, 지금 존재하는 아무리 유명한 사람들이 쓴 책이라도 거기에 얽매임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들이 남긴 찌꺼기에, 뼈에 어떻게 살을 붙이는지는 읽는 사람 각자의 몫이다.


※이 글은 저의 브런치에서도 읽으실 수 있습니다.

https://brunch.co.kr/@lifeinreading/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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