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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의 딸 ㅣ 펭귄클래식 29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심지은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4월
평점 :
'답정너'라는 신조어가 유행이다. 일종의 줄임말로 풀어 말하면 "답은 정해져있으니 너는 그 답을 말해라."정도의 뜻이다. 예컨대, 친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아는 오빠가 나보고 아이돌 모모 양 닮았다고 하는데.. 기분이 좀 그렇다. 이거 무슨 뜻이야?"
친구가 나에게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은?
① 모모 양을 욕하는 거야. 신경 쓰지 마.
② 나는 미녀배우 모모 양 닮았다는데. 아 짜증나.
③ 친구야 자판이 이상해. ㅗㅗㅗㅗㅗ
④ 모모 양 예쁘고 귀엽잖아. 너도 예쁘다는 뜻 같은데.
본인이 원하는 대답을 듣기를 위해 추가 질문 공세도 마다하지 않는 노골적인 답정너들이 많아지면서 요새는 그에 대응하는 '답정너 퇴치법'이라는 글 또한 심심치 않게 올라오곤 한다.
그런데 답정너의 유치함과 자기중심성을 떠나 넓게 생각해보면 모든 대화는 어느 정도 상대의 반응을 예상하게 마련이다. 자신이 말하는 바에 상대는 그렇다, 혹은 아니다의 대답을 하게 되는데 대개는 어느 한 쪽을 미리 짐작할 수 있고 웬만하면 동의해주길 바라지 않는가.
원하는 것만 듣겠다는 편협한 태도를 제외한다면 답정너는 결국 누구나에게 해당이 되는 얘기인 것이다.
작가 또한 그렇다. 자신의 주장을 주제로 함축시켜 독자에게 이해시키고 결국은 독자가 동의하길 바라며 글을 쓰는 것이다. 답정너의 진의를 파악해야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고 일상 대화에서도 대화의 맥을 파악해야 하듯이, 소설을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선 글을 한 줄기로 관통하는 주제, 즉 작가가 말하는 답은 찾아야 한다. 그것을 내 생각을 비교하고 작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독서의 묘미이기 때문이다. 대개는 명확한 주제가 떠오르기보다 어렴풋하게나마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둥의 생각이 떠오를 수 있는데 이것 또한 작가의 주제라 할 수 있다.
간혹 느낌으로도 작가의 답을 찾기 어려운 경우가 있는데
1. 주제가 워낙 심오하고 난해해 독자가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
2. 작가 스스로 감당하기 힘든 모호하고 복잡한 생각을 풀어내는 경우
3. 검열과 감시로 인해 주제를 숨겨 놓는 경우가 그러하다.
오늘날 고전으로 통하는 작품에선 1,2 번에 해당하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 좋은 글은 생각은 심오하더라도 주제는 단순 명료한 법이며 고전의 주제는 인류 보편적 가치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제 정치, 독재 하에서 잉태된 작품이 3번에 해당하는 경우를 발견하곤 하는데 <대위의 딸>이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닐까 싶다.
<대위의 딸>은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 전제정치와 농노제도가 실시되던 러시아에서 자유시인이라 불리던 푸시킨의 작품이다. 그는 <자유>라는 시를 발표함으로써 국가로부터는 불온시인이라 낙인찍히고 시민들로부터는 자유와 진보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6년간의 유배생활, 그로 인해 결혼마저도 위태로운 상황에서 그는 한 때 황제의 정치를 옹호하는 시를 써 변절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변절자라고 모두 등을 돌리는 상황에서도 황제의 감시는 그칠 줄 몰랐고 죽을 때까지 감시와 검열 하에 있었다. 그가 죽기 전 3년 동안 쓴 이 작품, 검열을 통과해 우리에게 여전히 말을 건네고 있는 이 작품은 우리에게 어떤 답을 원하는 걸까.
대강의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 그리뇨프는 대위의 딸 마샤와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러시아 전역을 공포로 몰아넣은 푸가쵸프의 난이 일어나 그는 포로가 되고 마샤는 고아가 된다. 그런데 푸가쵸프와의 우연한 인연이 도움이 되어 그리뇨프는 마샤를 무사히 구출하고 집에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곧 그는 푸가쵸프와 내통했다는 혐의로 반역 죄인이 된다. 마샤의 기지로 그리뇨프는 풀려나고 둘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산다.
연애소설, 혹은 한 편의 동화 같은 이야기다. 우연의 남발과 진부한 결말, 소스라칠 정도로 뚜렷한 주제의식-권선징악- 덕분에 오늘날엔 아동용 도서로 널리 읽히고 있기도 하다.
전쟁 장면조차 우스꽝스럽게 묘사될 정도로 작품 전반에는 희극성이 주를 이루지만, 순간순간 끔찍하고 비극적인 현실 또한 여과 없이 나타난다. 그 지점에 멈춰 생각해볼 때 이 단순한 작품 속에서 왠지 마뜩치 않고 위화감이 드는 것은 선악의 구도다. 주인공인 그리뇨프, 마샤, 예카트리나 여제, 대위 등은 선한 편을 자처하고 있지만 영 탐탁치가 않으며 오히려 악역인 푸가쵸프, 시바브린에게 마음이 가는 면이 있다.
우선 주인공 그리뇨프는 어떤 사람인고 하니, 젖먹이 때부터 군대의 중사로 등록되어 장성하면 바로 근위장교가 될 수 있도록 꼼수를 쓰는 집안의 외아들 철부지로 늙고 가엾은 하인에게 공연히 분풀이를 하는가 하면(그래도 반성은 한다.), 경험자의 말은 무시하고 제 고집만 부리다가 눈보라를 만나지 않나 여러모로 미숙한 젊은이다. 뒤로 갈수록 어디에서 나오는 지 모를 기지를 발휘하기도 하고 그래도 애는 착하므로 밉상은 아니지만 감정이입을 하고 무한한 애정을 주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다.
또 그리뇨프의 연인, 대위의 딸인 마샤는 어떤 여성이냐 하면 총소리만 들어도 오금을 저리는 겁쟁이에 노처녀가 될 수도 있다는 제 어미의 말에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여리디 여린 소녀다. 이 소녀도 나중에는 뜬금없는 기지를 발휘하며 활약을 보여준다.
선하다는 장점을 빼면 민폐를 끼치기 일쑤인 두 사람에 비해 악의 축인 푸가쵸프와 시바브린은 생기가 넘친다, 호감이 가는 인상, 영민하다 등 긍정적인 표현으로 주로 묘사되고 있다. 푸가쵸프는 부하들을 민주적으로 대하고 주인공에게 입은 은혜를 곱절로 갚는 등 배포 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카리스마 넘치는 진보적 군주의 모습을 하고 있다.
주인공의 연적이자 대놓고 악역이라 공표되는 시바브린 또한 마샤를 강제로 취할 수도 있었으나 생각할 시간도 주고, 위기의 순간마다 마샤를 지키고자 주인공의 뜻에 맞춰주는 모습에서 이놈이 제대로 나쁜 놈인가 하는 의문을 던져준다.
게다가 이 책에서 가장 끔찍한 대목은 엉뚱한 인물에 의해 벌어진다.
마샤의 아버지, 대위 이반 쿠즈마치는 아내에게 쥐어 사는 순박하고 무사태평한 인물로 그려지며 악인과는 거리가 한참 멀어 보인다. 그러나 그는 일흔도 넘은 노인을 반역자라는 이유로 코와 귀를 베고, 그것도 모자라 늘씬 패는 고문까지 강행하려다가 혀도 언제 베어냈는지 혀 대신 대롱거리는 나무토막을 보고는 얻을 것이 없겠다는 '실리'적인 판단으로 고문을 그만둔다.
그리뇨프의 아버지,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그리뇨프는 가부장적인 퇴역군인으로 집안의 명예에만 전전긍긍하는 인물이다. 아들이 사형을 면했다는 소식에 안도하기보다 가문의 명예를 먹칠을 했다며 비통해하는 인물이다.
과연 누가 진정한 악인일까?
악(evil)이라는 말은 살다(live)라는 말의 철자를 거꾸로 늘어놓은 거예요.
-<거짓의 사람들>, M. 스캇 펙, p.53
악에 대한 탁월한 저서를 쓴 M.스캇 펙 박사는 악은 삶을 거스르는 것이라 명하고 악함의 원인으로 병적인 나르시시즘과 마땅히 치러야할 대가를 치르려하지 않는 게으름을 들며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성격장애를 지닌다고 말한다.
(1) 파괴적인 행동, 희생양 찾기(책임 전가) 행동이 일관성 있게 나타나며 그 양상은 대개 아주 미묘하다.
(2) 비난이나 그 밖의 행태의 나르시시즘적 상처들을 지나치리만큼 못 견뎌하는데 대개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3) 사람들 앞에서의 자기 이미지와 자기를 존중해주는가에 대하여 유별난 관심을 갖고 있다.
(4) 지적인 속임수를 자주 쓰게 되면 스트레스를 받게 되어 가벼운 정신분열증적 장애와 같은 모습이 점점 많이 나타나게 된다.
파괴적인 행동으로 희생양에 대해 끔찍한 고문을 태연히 자행하는 이반 쿠즈마치, 자신의 나르시시즘적 상처를 못 견디고 가문의 명예를 위해 필요하다면 아들도 희생시키려는 그리뇨프의 아버지, 나아가 폭력으로 일벌하고 농노제를 기반으로 한 전제정치를 펼친 예카트리나 여제까지 소설 속 선한 편으로 분류된 이들의 모습에서 악인의 면면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푸쉬킨이 푸가쵸프를 덮어놓고 옹호하거나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 것만은 아니다. 그는 그리뇨프의 입을 빌어 소설에서 가장 탁월한 비유와 대화를 통해 푸가쵸프를 반박한다. 이 대목은 직접 확인해보시라.
푸쉬킨은 그리뇨프처럼 프랑스 교사로부터 역사, 철학을 배우며 프랑스 혁명과 그 안에 담긴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전제정치의 야만성을 비판하면서도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변혁보다는 시민들의 의식의 각성을 촉구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푸쉬킨은 딱 한번 소설 속에서 저자의 목소리를 직접적으로 내세우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이를 마지막으로 리뷰를 마치고자 한다.
젊은이들이여! 이 수기가 혹여 그대들 손에 들어가게 된다면 이 점을 기억해 주게나.
최선의 그리고 함구적인 변화는 강제와 폭력으로 얼룩진 온갖 변혁을 통해서가 아니라
풍속의 개선으로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p.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