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위의 딸 펭귄클래식 29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심지은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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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답정너'라는 신조어가 유행이다. 일종의 줄임말로 풀어 말하면 "답은 정해져있으니 너는 그 답을 말해라."정도의 뜻이다. 예컨대, 친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아는 오빠가 나보고 아이돌 모모 양 닮았다고 하는데.. 기분이 좀 그렇다. 이거 무슨 뜻이야?"

 

친구가 나에게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은?

 

① 모모 양을 욕하는 거야. 신경 쓰지 마.

② 나는 미녀배우 모모 양 닮았다는데. 아 짜증나.

③ 친구야 자판이 이상해. ㅗㅗㅗㅗㅗ 

④ 모모 양 예쁘고 귀엽잖아. 너도 예쁘다는 뜻 같은데.

 

 본인이 원하는 대답을 듣기를 위해 추가 질문 공세도 마다하지 않는 노골적인 답정너들이 많아지면서 요새는 그에 대응하는 '답정너 퇴치법'이라는 글 또한 심심치 않게 올라오곤 한다. 

그런데 답정너의 유치함과 자기중심성을 떠나 넓게 생각해보면 모든 대화는 어느 정도 상대의 반응을 예상하게 마련이다. 자신이 말하는 바에 상대는 그렇다, 혹은 아니다의 대답을 하게 되는데 대개는 어느 한 쪽을 미리 짐작할 수 있고 웬만하면 동의해주길 바라지 않는가.

원하는 것만 듣겠다는 편협한 태도를 제외한다면 답정너는 결국 누구나에게 해당이 되는 얘기인 것이다.

 

 작가 또한 그렇다. 자신의 주장을 주제로 함축시켜 독자에게 이해시키고 결국은 독자가 동의하길 바라며 글을 쓰는 것이다.  답정너의 진의를 파악해야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고 일상 대화에서도 대화의 맥을 파악해야 하듯이, 소설을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선 글을 한 줄기로 관통하는 주제, 즉 작가가 말하는 답은 찾아야 한다. 그것을 내 생각을 비교하고 작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독서의 묘미이기 때문이다.  대개는 명확한 주제가 떠오르기보다 어렴풋하게나마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둥의 생각이 떠오를 수 있는데 이것 또한 작가의 주제라 할 수 있다.

간혹 느낌으로도 작가의 답을 찾기 어려운 경우가 있는데

 

1. 주제가 워낙 심오하고 난해해 독자가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

2. 작가 스스로 감당하기 힘든 모호하고 복잡한 생각을 풀어내는 경우

3. 검열과 감시로 인해 주제를 숨겨 놓는 경우가 그러하다.

 

 오늘날 고전으로 통하는 작품에선 1,2 번에 해당하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 좋은 글은 생각은 심오하더라도 주제는 단순 명료한 법이며 고전의 주제는 인류 보편적 가치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제 정치, 독재 하에서 잉태된 작품이 3번에 해당하는 경우를 발견하곤 하는데 <대위의 딸>이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닐까 싶다.

 

 <대위의 딸>은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 전제정치와 농노제도가 실시되던 러시아에서 자유시인이라 불리던 푸시킨의 작품이다. 그는 <자유>라는 시를 발표함으로써 국가로부터는 불온시인이라 낙인찍히고 시민들로부터는 자유와 진보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6년간의 유배생활, 그로 인해 결혼마저도 위태로운 상황에서 그는 한 때 황제의 정치를 옹호하는 시를 써 변절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변절자라고 모두 등을 돌리는 상황에서도 황제의 감시는 그칠 줄 몰랐고 죽을 때까지 감시와 검열 하에 있었다. 그가 죽기 전 3년 동안 쓴 이 작품, 검열을 통과해 우리에게 여전히 말을 건네고 있는 이 작품은 우리에게 어떤 답을 원하는 걸까.

 

 대강의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 그리뇨프는 대위의 딸 마샤와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러시아 전역을 공포로 몰아넣은 푸가쵸프의 난이 일어나 그는 포로가 되고 마샤는 고아가 된다. 그런데 푸가쵸프와의 우연한 인연이 도움이 되어 그리뇨프는 마샤를 무사히 구출하고 집에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곧 그는 푸가쵸프와 내통했다는 혐의로 반역 죄인이 된다. 마샤의 기지로 그리뇨프는 풀려나고 둘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산다.

 

 연애소설, 혹은 한 편의 동화 같은 이야기다. 우연의 남발과 진부한 결말, 소스라칠 정도로 뚜렷한  주제의식-권선징악- 덕분에 오늘날엔 아동용 도서로 널리 읽히고 있기도 하다.

전쟁 장면조차 우스꽝스럽게 묘사될 정도로 작품 전반에는 희극성이 주를 이루지만, 순간순간 끔찍하고 비극적인 현실 또한 여과 없이 나타난다. 그 지점에 멈춰 생각해볼 때 이 단순한 작품 속에서 왠지 마뜩치 않고 위화감이 드는 것은 선악의 구도다. 주인공인 그리뇨프, 마샤, 예카트리나 여제, 대위 등은 선한 편을 자처하고 있지만 영 탐탁치가 않으며 오히려 악역인 푸가쵸프, 시바브린에게 마음이 가는 면이 있다.

 

 우선 주인공 그리뇨프는 어떤 사람인고 하니, 젖먹이 때부터 군대의 중사로 등록되어 장성하면 바로 근위장교가 될 수 있도록 꼼수를 쓰는 집안의 외아들 철부지로 늙고 가엾은 하인에게 공연히 분풀이를 하는가 하면(그래도 반성은 한다.), 경험자의 말은 무시하고 제 고집만 부리다가 눈보라를 만나지 않나 여러모로 미숙한 젊은이다. 뒤로 갈수록 어디에서 나오는 지 모를 기지를 발휘하기도 하고 그래도 애는 착하므로 밉상은 아니지만 감정이입을 하고 무한한 애정을 주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다.

 또 그리뇨프의 연인, 대위의 딸인 마샤는 어떤 여성이냐 하면 총소리만 들어도 오금을 저리는 겁쟁이에 노처녀가 될 수도 있다는 제 어미의 말에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여리디 여린 소녀다. 이 소녀도 나중에는 뜬금없는 기지를 발휘하며 활약을 보여준다.  

 

  선하다는 장점을 빼면 민폐를 끼치기 일쑤인 두 사람에 비해 악의 축인 푸가쵸프와 시바브린은 생기가 넘친다, 호감이 가는 인상, 영민하다 등 긍정적인 표현으로 주로 묘사되고 있다. 푸가쵸프는 부하들을 민주적으로 대하고 주인공에게 입은 은혜를 곱절로 갚는 등 배포 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카리스마 넘치는 진보적 군주의 모습을 하고 있다.

주인공의 연적이자 대놓고 악역이라 공표되는 시바브린 또한 마샤를 강제로 취할 수도 있었으나 생각할 시간도 주고, 위기의 순간마다 마샤를 지키고자 주인공의 뜻에 맞춰주는 모습에서 이놈이 제대로 나쁜 놈인가 하는 의문을 던져준다.

 

 게다가 이 책에서 가장 끔찍한 대목은 엉뚱한 인물에 의해 벌어진다.

마샤의 아버지, 대위 이반 쿠즈마치는 아내에게 쥐어 사는 순박하고 무사태평한 인물로 그려지며 악인과는 거리가 한참 멀어 보인다. 그러나 그는 일흔도 넘은 노인을 반역자라는 이유로 코와 귀를 베고, 그것도 모자라 늘씬 패는 고문까지 강행하려다가 혀도 언제 베어냈는지 혀 대신 대롱거리는 나무토막을 보고는 얻을 것이 없겠다는 '실리'적인 판단으로 고문을 그만둔다.

 그리뇨프의 아버지,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그리뇨프는 가부장적인 퇴역군인으로 집안의 명예에만 전전긍긍하는 인물이다. 아들이 사형을 면했다는 소식에 안도하기보다 가문의 명예를 먹칠을 했다며 비통해하는 인물이다.

과연 누가 진정한 악인일까?

 

 악(evil)이라는 말은 살다(live)라는 말의 철자를 거꾸로 늘어놓은 거예요.

 -<거짓의 사람들>, M. 스캇 펙, p.53

 

악에 대한 탁월한 저서를 쓴 M.스캇 펙 박사는 악은 삶을 거스르는 것이라 명하고 악함의 원인으로 병적인 나르시시즘과 마땅히 치러야할 대가를 치르려하지 않는 게으름을 들며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성격장애를 지닌다고 말한다.

 

 (1) 파괴적인 행동, 희생양 찾기(책임 전가) 행동이 일관성 있게 나타나며 그 양상은 대개 아주 미묘하다.
 (2) 비난이나 그 밖의 행태의 나르시시즘적 상처들을 지나치리만큼 못 견뎌하는데 대개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3) 사람들 앞에서의 자기 이미지와 자기를 존중해주는가에 대하여 유별난 관심을 갖고 있다.
 (4) 지적인 속임수를 자주 쓰게 되면 스트레스를 받게 되어 가벼운 정신분열증적 장애와 같은 모습이  점점 많이 나타나게 된다.

 파괴적인 행동으로 희생양에 대해 끔찍한 고문을 태연히 자행하는 이반 쿠즈마치, 자신의 나르시시즘적 상처를 못 견디고 가문의 명예를 위해 필요하다면 아들도 희생시키려는 그리뇨프의 아버지, 나아가 폭력으로 일벌하고 농노제를 기반으로 한 전제정치를 펼친 예카트리나 여제까지 소설 속 선한 편으로 분류된 이들의 모습에서 악인의 면면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푸쉬킨이 푸가쵸프를 덮어놓고 옹호하거나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 것만은 아니다. 그는 그리뇨프의 입을 빌어 소설에서 가장 탁월한 비유와 대화를 통해 푸가쵸프를 반박한다. 이 대목은 직접 확인해보시라.

 

 푸쉬킨은 그리뇨프처럼 프랑스 교사로부터 역사, 철학을 배우며 프랑스 혁명과 그 안에 담긴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전제정치의 야만성을 비판하면서도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변혁보다는 시민들의 의식의 각성을 촉구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푸쉬킨은 딱 한번 소설 속에서 저자의 목소리를 직접적으로 내세우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이를 마지막으로 리뷰를 마치고자 한다.

 

젊은이들이여! 이 수기가 혹여 그대들 손에 들어가게 된다면 이 점을 기억해 주게나.

최선의 그리고 함구적인 변화는 강제와 폭력으로 얼룩진 온갖 변혁을 통해서가 아니라

풍속의 개선으로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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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의 사람들 - 인간 악의 치료에 대한 희망 보고서, 개정판
M. 스콧 펙 지음, 윤종석 옮김 / 비전과리더십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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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다우트는 용호상박과도 같은 두 걸출한 배우, 메릴 스트립과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의 열연으로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메릴 스트립이 분한 알로이시스 수녀 역에는 미묘하게 사람을 착취하고 괴롭히는, 에너지 뱀파이어라 불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겹쳐 보이며 영화가 끝날 때까지 나의 분노 게이지를 가득 채워줬다.

 

 

<거짓의 사람들>

 

 스캇 펙 박사는 거짓의 사람들을 악한 사람들이라 정의한다. 악인 하면 히틀러, 범죄자를 떠올리기 쉽다. 범죄행위나 동기를 볼 때 치가 떨리도록 용서가 안 되는 악인이 물론 있지만 인간적으로 용인되는 범죄자도 많다. 그런가 하면 범죄자라는 낙인은커녕 기득권층으로 호위호식하며 사회적 명망까지 누리는 악인도 우리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저자는 이를 일컬어 "정직한 범인인 까닭에 잡혀 들어온 것, 진짜 악한 사람들은 언제나 감옥 바깥에 있는 법"이라고 말한다. 진정한 악인은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우리 곁의 평범한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그럴 경우 그들의 범죄는 너무 미묘하고 가려져 있어서 주위로 하여금 악이나 범죄라고 쉽사리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그들이 은폐와 위장에 워낙 강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말하는 악한 사람을 가려내는 참 기준으로는 1)일관성이 있다. 하나같이 자신의 죄성을 인식하지 않으려 애쓴다. 자기 성찰의 불쾌감을 눈곱만큼도 견뎌 낼 마음이 없으며 자신은 깨끗한 존재라 믿는다.

2) 남에게 책임을 덮어씌운다. 악인들이 파괴적인 이유는 그들이 악을 퇴치하려고 마음을 먹는데 있다. 그들은 악의 소재지를 잘못 파악해 남에게 뒤집어씌움으로서 악을 처단한다. 3)그들은 선해지려는 의지는 없으면서 선해 보이려는 욕망은 불처럼 강하다. 우리가 종교 단체 안에서 꽉 막힌  데다가 인성이 파괴적인 위선자를 자주 볼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악한 사람들이 가장 흔히 발견되는 장소는 교회다. -p.100 

 

 위의 기준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부합하는 알로이시스 수녀(메릴 스트립)를 살펴보자.  

교장 수녀인 알로이시스 수녀는 공포와 징벌로서 엄격하게 학생들을 지도한다. 학생이 수녀의 손끝만 스쳐도 불호령이 떨어지고 체벌이 행해진다. 그녀에게 플린 신부(필립 세이모어 호프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인데 손톱을 길게 기르고 사탕을 좋아하며 진보적이고 학생들에게 친근히 대하는 등 자신의 교육방침에 완전히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가 더욱 꼴 보기 싫은 이유는 자기보다 상관이라는 점이다. 그녀는 우연한 기회에 플린 신부에 대해 사소한 오해를 하고 증거도 없이 그것을 완전히 믿어버린다. 신부에게 면담을 청해 추궁을 하지만 신부는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한다. 그러나 면담 과정에서 미묘한 모욕감을 느낀 수녀는 그를 나쁜 사람으로 아예 단정 지어 버린다. 그녀는 여기 저기 들쑤시고 다니며 신부가 나쁜 짓을 저질렀다는 증거를 모으기 위해 애쓴다. 아집으로 똘똘 뭉친 비뚤어진 사고는 끝을 모르고 치닫는데….

 

 

 

 

 

 저자가 예시를 드는 사례 속에는 강박증에 걸린 사내와 같이 딱한 경우도 있고, 알로이시스 수녀와 R씨 부부와 같이 미묘하고 교활한 수법으로 상대를 괴롭히는 끔찍한 악인도 있으며 주위에서 몇 번 본 듯 익숙한 사례도 있다. 거미 공포증을 앓는 빌리의 사례가 그렇다. 빌리의 어머니를 보노라면 새벽에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하고 도를 넘는 친밀함을 갈구하며 남자친구를 수도 없이 바꾸는 친구가 겹쳐 보인다. 혹은 TV의 예능 프로에 나와 자기가 조금은 구속하는 경향이 있다며 깔깔대고 연애편력을 늘어놓는 어떤 인물이 보이기도 한다. 그만큼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인 것이다.

 빌리의 어머니는 외로움을 심하게 타고 혼자 있는 것을 못 견디며 늘 두세 명의 외간 남자와 내통하는 여자다. 아버지는 평생을 은행에서 일한, 과묵하고 수줍은 성격의 사람이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정감 없는 성격이라 욕하며 자신의 외도를 합리화하고 빌리에게도 자신과 같은 삶을 부추긴다. 빌리가 커가며 자신의 문제를 심각하게 깨닫게 된 건 자신 또한 혼자라는 것을 못 견뎌하고 한 남자에게만 만족할 수 없으며 남자를 숨이 막히게 구속함에 따라 결국 남자들이 줄줄 떠나가며 그녀 또한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치료를 받으며 거미처럼 자신을 옭아매는 어머니로부터 독립을 했고 그 과정은 힘들었지만 잘 이겨나갔다. 그 과정에서 사실 아버지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어머니로부터 받은 상처에 대한 치료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지만 딱히 별 다른 차도가 보이지 않았는데 의사는 빌리가 받아들일만한 상태가 되었을 때 그녀 자신도 부분적으로 어머니처럼 거미라고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그녀는 그 말을 듣고 남은 시간 내내 흐느껴 울었다고 한다. 사실 본인이 더 잘 아는 것이다. 
 위의 사례처럼 악인의 영향력은 주로 가족에게 미치며 악인의 지배하에 놓이면 결국 자신이 죽어버리거나 악인을 죽이거나 같아지는 수 밖에 없다. 혹은 가장 최선의 방법은 독립하는 것인데 사실 이는 그리 쉬운 방법이 아니다. 특히 지배를 받으면서부터 병적인 공생관계로 서로를 끌어당기는 경우 그 사람은 악에 걸맞은 수용자가 되기 쉽다. 때리는 사람과, 맞고 사는 사람의 관계에서 맞는 사람은 충분히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그에게서 떠나지 않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지 않은가.   



  알로이시스 수녀는 영화에서 결국 승리했다. 플린 신부는 자청해 다른 곳으로 떠났다.
현실에서도 악인들은 살쾡이 같은 집념으로 승리하곤 한다. 플린 신부가 떠난 성당의 벤치에 앉아 알로이시스 수녀는 중립적인 제임스 수녀에게 자신이 과연 옳았다고 말한다. 비록 자신이 그를 쫓아내기 위해 거짓말을 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옳다고 확신한다고 했다. 제임스 수녀는 증거도 없이 의심한데다 거짓말을 했다고 당당히 말하는 그녀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이제 거의 모니터를 째려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돌연 알로이시스 수녀가 어린 애처럼 왈칵 눈물을 터뜨렸다.
“내 믿음에 의심이 들어요(Sister james, I have doubt. I have such a doubt.).”하며 우는 백발의 노인네를 보노라니 착잡해졌다. 누군들 동정심이 일지 않으리. 나도 영화를 보며 엉엉 울고 말았다. 그녀도 결국 나약한 인간일 뿐인 것을. 어찌 보면 딱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나약한 인간이라는 범주에서 나는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으며, 어떤 사안에서는 아집으로 똘똘 뭉친 악인이 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을까?  

 

 

스캇펙 박사는 말한다.

 

인간의 악의 본질을 연구하다 보면, 우리가 얼마나 우리와 그들을 뚜렷하게 분리할 수 있을는지 회의가 찾아온다. 어쩌면 우리가 연구하려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본성일지도 모르는 까닭에서다.

-p. 291

 

 그렇기에 이 책은 악의 치료에 대한 희망 보고서이다. 악을 퇴치하거나 처단하자는 내용이 아니다. 저자는 400회나 면담했지만 끝내 실패한 구제불능의 악인에게도 최소한의 인간적인 선의는 유지하였다. 그리고 그녀를 끝내 돕지 못한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그 모습이 사뭇 감동적이다.

 

 끝으로 악의 치유법은 과연 있는 것일까. 저자는 앞서 악인에게서 빠져 나오는 길은 본인이 죽거나 악인을 죽이거나 두 가지 길이 있으며 최선의 방법으로는 심리적인 독립을 선언하는 것이라 했다.

악의 치유, 그것이 과학적이든 아니든 모두가 오직 개인의 사랑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거기엔 자발적 희생이 요구된다. 치유자 개인은 자신의 영혼이 전투장이 되도록 허락해야 한다. 그는 희생적으로 악을 흡수해야 한다. (중략)

 

"결코 배반하지 않는 사람이 자발적으로 피해자가 되어 배반자 대신 죽임을 당하게 되면,

법률은 효력을 잃고 죽음마저도 방향을 반대로 돌릴 것이다."  

-p. 359

 

 언뜻 신비롭게 느껴지는 위의 방법은 성경이나 전래동화에서 익히 본 듯하다. 큰 사랑을 실천할 능력을 바로 가질 순 없겠지만 선택의 기로에서 이렇게 자문해보고 싶다.

지금 이 순간, 사랑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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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 영원히 철들지 않는 남자들의 문화심리학
김정운 지음 / 쌤앤파커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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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아버지의 친한 친구이자, 어릴 적 박치기 대결로 나의 이마를 단단하게 단련시켜주신 아저씨께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셨다. 술에 잔뜩 취해 잠이 든 후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혹자는 아무런 고통 없이 돌아가셨으니 호상이라고 애써 좋은 면을 내세워 유족을 위로하려 했다. 하지만 올해 53세, 지병도 없고 우람한 풍채를 자랑하던 아저씨의 죽음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무엇이 급해 그렇게 빨리 떠났노." 

 "아들은 이제 대학에 입학했다며.."  

 "임마. 너도 술 적당히 마시고 건강 조심하그라."

 장례식을 메운 사람들의 탄식이 이어진다. 나는 아저씨에 대한 통한의 감정과 함께, 한편으로 오랜 벗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과 과음을 일삼는 아버지의 건강이 걱정되었다. 어머니도 같은 심정이라 요즘 아버지 몸보신을 해드린다며 하루가 멀다하고 갖가지 건강식품을 사다 대령하고 있다. 그러나 술에 푹 젖어 퇴근하는 일이 잦은 아버지의 얼굴을 보노라면 건강식품만으로는 해결하기 힘든 일임을 느낀다. 하루는 얼굴빛이 부쩍 검어 보이는 아버지를 즐겁게 해드리려고 인터넷 유머를 알려드렸는데 아버지는 웃음 근육이 말을 듣지 않는지 어색한 웃음만 지어보이실 뿐이었다. 웃음 근육의 퇴화는 비단 아버지의 문제만은 아닌 것이 지하철을 타면 입 꽁지가 내려간 수많은 아저씨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무엇이 대한민국의 아버지들을 웃지 못하게 하는지 가슴이 답답할만큼 궁금하다.

 제목이 눈길을 사로잡는 이 책은 재미를 잃어버린 대한민국 남성들을 위한 심리에세이다. 저자인 김정운 교수는 문화심리학자다. 그는 거창한 프로필보다는 "팔뚝 굵은 아내가 차려준 아침밥상에 감사하며, 거리의 망사스타킹을 보면 가슴이 뛰어 낚시가게 그물만 봐도 흥분하고, 자동차 운전석에서 슈베르트의 가곡을 목 놓아 따라 부르며 주책없이 울기를 좋아하는 사십 끝줄의 대한민국 남자"라고 본인을 소개한다. 그는 같은 대한민국 남자로서 입 꽁지가 한껏 내려간 채로 밤마다 폭탄주를 들이붓는 남자들의 처지를 공감하며 산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위로와 조언을 건넨다. 이 책은 저자의 자서전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사춘기, 청년기, 결혼생활을 거치며 겪었던 다양한 사건들을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애절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경험을 주재료 삼아 대한민국 남자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심리적 불안과 그 원인을 파헤치고 적절한 처방을 제시하는 이 책은 대한민국 남자들을 위한 마음의 보약이라 할 수 있다.

 대한민국 남자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고통과 불안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사는 게 재미가 없다' 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견딜 수 없는 외로움, 사회에 대한 적개심, 정치인을 향한 분노, 타인에 대한 공격성 등의 실체를 탐구하면 제 1원인은 재미없는 삶에 대한 불안이라 할 수 있다. 입 꽁지가 축 처지고 웃음이 없는 이유는 볼 근육을 움직일 기회가 없기 때문이며 이 또한 재미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사는 게 재미없는 남자들의 증상은 크게 네 가지로 나타나는데 큰 가슴에 대한 열망, 느닷없는 마라톤 열풍, 폭탄주 문화, 안마시술소와 같은 피부 접촉 서비스의 성행이다. 일부 증상은 크거나 작게 사회적 문제로 확대된다. 퇴폐업소와 폭탄주 문화를 근절하고자 하는 정부와 사회의 노력이 계속되고 있지만 해결이 어려운 이유는 근간을 이루는 원인을 모르고 접근하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재미없는 남자들'이며 이는 개인과 사회 모두를 위해 극복해야할 과제다.

 그렇다면 삶을 재미있고 행복하게 만들어줄 처방은 무엇일까. 가장 간단하고 쉽게 실천해볼 수 있는 치유의 방법은 '걷기'다. 우선 밖으로 나가서 어디든 걸으라는 것이다. 하다못해 동네 상점의 간판이라도 구경하고 오라. 걷다보면 마음 속 고민과 생각에만 집중되어 있던 감각이 바깥세상을 향한 시각, 청각, 후각으로 분산된다. 그러다 보면 마음의 병은 어느새 여러 감각 속의 일부가 되어 작아진다. 산책을 하고나면 한결 기분이 상쾌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불안에 대한 최고의 치료제로는 감탄을 추천한다. 삶의 목적은 행복, 더 나아가 감탄이며 우리는 감탄하려고 살아가는 존재다.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이 감성과 이성을 초월한 영역에서 '장엄함'과 '숭고함'을 경험하며, 이는 인간이 추구하는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정서적 경험이라 주장했는데 '장엄함'의 구체적 반응이 바로 감탄이다. 즉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숨막히는 느낌과 "아" 하는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 순간이 삶의 궁극적인 경험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행복해지기 위해 더욱 자주 감탄할 것을 권유한다.  

   
  내가 지금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가의 기준은 아주 간단하다. 하루에 도대체 몇 번 감탄하는가다. 사회적 지위나 부의 여부와 관계 없다. 내가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다 할지라도, 하루 종일 어떠한 감탄도 나오지 않는다면 그건 내 인생이 아니다.  
   

 이 밖에도 나만의 즐거운 리추얼(일상에서 반복되며 남다른 의미를 지니는 일정한 행동패턴)개발하기, 삶의 관점을 전환하기 위한 여행, 쏜살같이 지나가는 시간을 붙잡아두기 위한 축제와 기념일 챙기기 등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줄 다양한 처방이 있다. 그중에서 나는 아버지의 리추얼을 찾아드리기로 결심했다. 약 1년 전 내가 무심코 빼앗은 아버지의 소중하고 의미 있는 일상이다.   

       

 위 사진의 식물이 아버지의 리추얼이었다. 2002년 우리집 식구가 되어 아버지의 지극한 보살핌을 받아 잘 자라고 있다. 식물에 좋은 달걀 껍질을 모아 절구로 빻아 거름으로 뿌려주고 비가 올 때면 베란다 바깥에 내놓아 비를 맞춰 주었으며 여름휴가에서 돌아오면 식물의 상태부터 확인하셨다. 그런데 1년 전, 내 딴에는 아버지를 위하는 마음에  

"아버지는 바쁘시니 제가 한번 키워볼게요. 인터넷 동호회에서 좋다고 소문난 영양제도 구입했어요." 

하며 막무가내로 내 방에 들여 관리했다. 그러라며 승낙하긴 했지만  

"정수기 물을 주지 말고 빗물을 줘라." 

"거름이 부족하다."  

며 틈날 때마다 잔소리를 하셨는데 관심을 쏟을 대상을 빼앗긴 데 대한 서운함을 드러내신 것 같다. 이제서야 나의 만행을 뒤늦게 깨닫고 귀찮아서 못 키우겠다고 너스레를 떨며 안방에 도로 가져다 드리니 기다렸다는 듯이 그동안 마구 자란 가지를 단정하게 정리하고 잎을 깨끗이 닦은 후 탁자에 올려놓으신다. 

 남들이 보기엔 대수롭지 않아 보여도 이런 사소하지만 특별한 재미를 주는 리추얼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앞으로 입꽁지가 내려간 사람을 본다면 재미있는 일상을 가꿔보라며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소소한 재미와 행복을 찾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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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당신도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하시나요?
    from 엄마는 독서중 2010-01-28 02:29 
    5회 알라딘 리뷰대회에서 사랑님이 대상을 먹은 책이다. 제목만 보곤 시류에 편승한 그저 그런 책인 거 같아 읽어볼 생각을 안했는데, 사랑님 리뷰를 보곤 읽고 싶었다. 그래도 선뜻 구매하긴 신뢰가 안 생겨 중학교 도서실에서 빌려왔는데, 읽을수록 맘에 들어서 이사 간 이웃 언니에게 선물했다. 어제 심야에 이 책을 읽다가 내가 보낸 메모를 발견했다며 문자가 왔다.  "고마워, 눈물나게~ ㅠㅠ 메모까지 챙겨주고, 재밌게 읽다가 골프 얘기 나올 때 너
 
 
2009-12-18 08: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체오페르 2009-12-18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감명깊게 잘 읽었습니다.
읽고나니 왜 제목이 이랬던 것인가 이해가 되더군요.
대상 1등 축하합니다. 자격이 충분한 리뷰, 잘 봤습니다.^^

잎싹 2009-12-19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등 당선되심 축하드립니다.
어제 읽어봤어요. 잔잔한 감동이더군요.
당선되신 글 제 서재로 모셔가도 괜찮겠지요?

좋은 글 읽으러 시간나면 가끔씩 들릴게요.~~

마구웃짜 2009-12-22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드려요! 어떤 분이, 어떤 리뷰가 과연 1등이 될까 했었는데 읽어보니 당장 책을 사야할 것 같네요 ^^

슈베르트55 2009-12-26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저자 김정운입니다. 축하합니다. 또한 감사합니다. 누가 내 블로그에 이 좋은 소식을 크리스마스 카드로 알여주셔서 왔어요. 참 잘썼네요. 아빠의 화분이야기는 참 가슴에 와 닿구요. 그 주제로 제대로 된 본인의 글을 한번 써 보세요. 남에게 감동을 주는 글을 쓸 줄 아는 분같으네요. 아빠의 친구가 그 연세였으면 무척 대학생인 것 같은데... 내 책을 읽기에는 아직 많이 젊을텐데... 좌우간 내게 주소를 멜로 알려주시면 요전에 쓴 '일본열광' 보내드릴께요. 저자로서는 '일본열광'이 더 맘에 들어해요. 추카추카.. 그리고 행복한 연말연시가 되길 바래요

her영심이 2010-01-03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1등 당첩 축하드려요.
우연히 들려 리뷰를 읽었는데 잔잔한 감동이.~~
저도 이 책 바로 사봐야겠어요.

순오기 2010-01-06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남편이 올해 쉰셋인데... 술도 좋아하고 풍채도 좋고...
오늘도 소주 한 잔 걸치고 와서 기분 좋다 하더니만 곯아떨어졌어요.
'재미없는 세상'이라도 함께 가려면 건강관리를 위한 잔소리 좀 해야겠어요.^^
다시 읽어봐도 좋으네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