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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 영원히 철들지 않는 남자들의 문화심리학
김정운 지음 / 쌤앤파커스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 전 아버지의 친한 친구이자, 어릴 적 박치기 대결로 나의 이마를 단단하게 단련시켜주신 아저씨께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셨다. 술에 잔뜩 취해 잠이 든 후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혹자는 아무런 고통 없이 돌아가셨으니 호상이라고 애써 좋은 면을 내세워 유족을 위로하려 했다. 하지만 올해 53세, 지병도 없고 우람한 풍채를 자랑하던 아저씨의 죽음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무엇이 급해 그렇게 빨리 떠났노."
"아들은 이제 대학에 입학했다며.."
"임마. 너도 술 적당히 마시고 건강 조심하그라."
장례식을 메운 사람들의 탄식이 이어진다. 나는 아저씨에 대한 통한의 감정과 함께, 한편으로 오랜 벗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과 과음을 일삼는 아버지의 건강이 걱정되었다. 어머니도 같은 심정이라 요즘 아버지 몸보신을 해드린다며 하루가 멀다하고 갖가지 건강식품을 사다 대령하고 있다. 그러나 술에 푹 젖어 퇴근하는 일이 잦은 아버지의 얼굴을 보노라면 건강식품만으로는 해결하기 힘든 일임을 느낀다. 하루는 얼굴빛이 부쩍 검어 보이는 아버지를 즐겁게 해드리려고 인터넷 유머를 알려드렸는데 아버지는 웃음 근육이 말을 듣지 않는지 어색한 웃음만 지어보이실 뿐이었다. 웃음 근육의 퇴화는 비단 아버지의 문제만은 아닌 것이 지하철을 타면 입 꽁지가 내려간 수많은 아저씨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무엇이 대한민국의 아버지들을 웃지 못하게 하는지 가슴이 답답할만큼 궁금하다.
제목이 눈길을 사로잡는 이 책은 재미를 잃어버린 대한민국 남성들을 위한 심리에세이다. 저자인 김정운 교수는 문화심리학자다. 그는 거창한 프로필보다는 "팔뚝 굵은 아내가 차려준 아침밥상에 감사하며, 거리의 망사스타킹을 보면 가슴이 뛰어 낚시가게 그물만 봐도 흥분하고, 자동차 운전석에서 슈베르트의 가곡을 목 놓아 따라 부르며 주책없이 울기를 좋아하는 사십 끝줄의 대한민국 남자"라고 본인을 소개한다. 그는 같은 대한민국 남자로서 입 꽁지가 한껏 내려간 채로 밤마다 폭탄주를 들이붓는 남자들의 처지를 공감하며 산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위로와 조언을 건넨다. 이 책은 저자의 자서전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사춘기, 청년기, 결혼생활을 거치며 겪었던 다양한 사건들을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애절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경험을 주재료 삼아 대한민국 남자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심리적 불안과 그 원인을 파헤치고 적절한 처방을 제시하는 이 책은 대한민국 남자들을 위한 마음의 보약이라 할 수 있다.
대한민국 남자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고통과 불안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사는 게 재미가 없다' 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견딜 수 없는 외로움, 사회에 대한 적개심, 정치인을 향한 분노, 타인에 대한 공격성 등의 실체를 탐구하면 제 1원인은 재미없는 삶에 대한 불안이라 할 수 있다. 입 꽁지가 축 처지고 웃음이 없는 이유는 볼 근육을 움직일 기회가 없기 때문이며 이 또한 재미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사는 게 재미없는 남자들의 증상은 크게 네 가지로 나타나는데 큰 가슴에 대한 열망, 느닷없는 마라톤 열풍, 폭탄주 문화, 안마시술소와 같은 피부 접촉 서비스의 성행이다. 일부 증상은 크거나 작게 사회적 문제로 확대된다. 퇴폐업소와 폭탄주 문화를 근절하고자 하는 정부와 사회의 노력이 계속되고 있지만 해결이 어려운 이유는 근간을 이루는 원인을 모르고 접근하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재미없는 남자들'이며 이는 개인과 사회 모두를 위해 극복해야할 과제다.
그렇다면 삶을 재미있고 행복하게 만들어줄 처방은 무엇일까. 가장 간단하고 쉽게 실천해볼 수 있는 치유의 방법은 '걷기'다. 우선 밖으로 나가서 어디든 걸으라는 것이다. 하다못해 동네 상점의 간판이라도 구경하고 오라. 걷다보면 마음 속 고민과 생각에만 집중되어 있던 감각이 바깥세상을 향한 시각, 청각, 후각으로 분산된다. 그러다 보면 마음의 병은 어느새 여러 감각 속의 일부가 되어 작아진다. 산책을 하고나면 한결 기분이 상쾌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불안에 대한 최고의 치료제로는 감탄을 추천한다. 삶의 목적은 행복, 더 나아가 감탄이며 우리는 감탄하려고 살아가는 존재다.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이 감성과 이성을 초월한 영역에서 '장엄함'과 '숭고함'을 경험하며, 이는 인간이 추구하는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정서적 경험이라 주장했는데 '장엄함'의 구체적 반응이 바로 감탄이다. 즉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숨막히는 느낌과 "아" 하는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 순간이 삶의 궁극적인 경험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행복해지기 위해 더욱 자주 감탄할 것을 권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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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가의 기준은 아주 간단하다. 하루에 도대체 몇 번 감탄하는가다. 사회적 지위나 부의 여부와 관계 없다. 내가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다 할지라도, 하루 종일 어떠한 감탄도 나오지 않는다면 그건 내 인생이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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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도 나만의 즐거운 리추얼(일상에서 반복되며 남다른 의미를 지니는 일정한 행동패턴)개발하기, 삶의 관점을 전환하기 위한 여행, 쏜살같이 지나가는 시간을 붙잡아두기 위한 축제와 기념일 챙기기 등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줄 다양한 처방이 있다. 그중에서 나는 아버지의 리추얼을 찾아드리기로 결심했다. 약 1년 전 내가 무심코 빼앗은 아버지의 소중하고 의미 있는 일상이다.
위 사진의 식물이 아버지의 리추얼이었다. 2002년 우리집 식구가 되어 아버지의 지극한 보살핌을 받아 잘 자라고 있다. 식물에 좋은 달걀 껍질을 모아 절구로 빻아 거름으로 뿌려주고 비가 올 때면 베란다 바깥에 내놓아 비를 맞춰 주었으며 여름휴가에서 돌아오면 식물의 상태부터 확인하셨다. 그런데 1년 전, 내 딴에는 아버지를 위하는 마음에
"아버지는 바쁘시니 제가 한번 키워볼게요. 인터넷 동호회에서 좋다고 소문난 영양제도 구입했어요."
하며 막무가내로 내 방에 들여 관리했다. 그러라며 승낙하긴 했지만
"정수기 물을 주지 말고 빗물을 줘라."
"거름이 부족하다."
며 틈날 때마다 잔소리를 하셨는데 관심을 쏟을 대상을 빼앗긴 데 대한 서운함을 드러내신 것 같다. 이제서야 나의 만행을 뒤늦게 깨닫고 귀찮아서 못 키우겠다고 너스레를 떨며 안방에 도로 가져다 드리니 기다렸다는 듯이 그동안 마구 자란 가지를 단정하게 정리하고 잎을 깨끗이 닦은 후 탁자에 올려놓으신다.
남들이 보기엔 대수롭지 않아 보여도 이런 사소하지만 특별한 재미를 주는 리추얼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앞으로 입꽁지가 내려간 사람을 본다면 재미있는 일상을 가꿔보라며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소소한 재미와 행복을 찾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