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서 공부하는 할머니 - 인생이라는 장거리 레이스를 완주하기 위한 매일매일의 기록
심혜경 지음 / 더퀘스트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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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카공족이라는 제목과 김혼비 작가의 추천이란 글을 보고 선택한 책이다. 10년 전쯤 종로의 파리바게뜨에서 커피 한 잔 시켜두고 신문을 읽고 계시는 할머니를 본 적 있다. 지방에서 올라간 내게는 그 모습이 낯설면서도 너무 매력적이었다. 외국의 카페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지만 한국에서 그런 할머니를 본 것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래서 나도 늙어서도 카페에서 책 읽고 글 쓰며 살아야지 하고 결심했었다. 나의 작은 소망과 닮은 삶을 살고 있는 작가 심혜경씨는 사서로 일하다가 은퇴했다. 글을 보면 할머니는 아닌 것 같다. 할머니가 되어도 카페에서 공부하며 살고 싶다는 소망을 표현한 제목인 듯하다.

 

 

 

그녀는 정말 쉼 없이 공부를 했다. 국어 국문과를 나오고 사서가 된 이후에도 영어, 일본어, 중국어, 프랑스어, 베트남어, 에스페란토를 배웠다. 이렇게 많은 언어를 배울 시도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놀랐다. 그냥 배운 정도가 아니라 스터디 그룹도 하고, 방통대에 편입하여 진지하게 공부하여 학사 학위를 몇 개나 가지고 있다. 듣고 읽는 언어로 집중해서 공부하여 원서로 책을 읽고,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통해 영화를 원어로 시청한다. 어학뿐만 아니라 바느질이며 악기며 기회가 되는대로 배우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의 언어에 대한 진심과 노력이 번역가라는 제2의 직업도 갖게 했다. 성공적인 이직에 성공한 할머니라고 책 제목을 달아도 될 정도로 번역가로서도 안정적인 자리를 잡았다.

 

작가는 스스로를 호기심 많은 사람이라고 했다. 나도 호기심 하면 상당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녀의 실행력을 따르기는 힘들 것 같다. 여러개의 언어를 공부한다고 실생활에서 다 써먹을 수도 없고, 나이로 인해 언어 공부의 아웃풋도 저조할텐에 왜 이렇게 열심히 언어를 배우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그녀는 '공부의 삼투압 효과' 를 믿는다고 말할 것이다. 가랑비에 옷이 젖기도 하듯이 조금씩 자주 하는 공부에 실력이 쌓인다고 그녀는 믿는다.


 

"다소 산만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여러 가지를 공부하는 과정을 거치고 나서 얻은 결론이자 희망사항은 하나다. 시작은 미미해도 일주일에 1 시간이라도 계속해 나가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는 경지에 도달하리라는 것. 이른바 공부에 스며드는 삼투압 효과를 기대해 보자는 이야기다. 취미생활로 공부만 한 것도 없다. 그리고 언어의 세계는 끝이 없다. 공부의 최전선에 나서보기에 충분할 만큼. " p151

 


 



처음 책을 받고 사이즈가 작아서 살짝 실망했다. 어쨌든 할머니란 단어가 나왔으니 글씨가 큼직할 것이라 기대했는데, 깨알 같은 크기로 적혀진 글자때문이었다. 반면에 카페의 밝은 조명 아래에 한 손으로 읽기는 좋았다. 왼 손에는 책, 오른 손에는 커피잔을 잡으며 읽을 수 있는 책 사이즈도 나름 괜찮은 것 같긴 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책의 내용인데, 글씨가 너무 작다고 불만을 품는 것을 보니 눈의 노화가 이제는 부정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책에 대한 그녀의 애정을 써놓은 부분이 상당히 매력적이다. 외출을 할 때면 항상 하루에 세 권의 책을 가지고 가는데, 그중에 한 권은 꼭 두꺼운 책이어야 한다. 혹시라도 얇은 책을 다 읽어버려 읽을 종이 책이 없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 때문이란다. 그녀는 스스로를 '어비블리오포비아 (abibliophobia)읽을거리가 줄어들다 못해 떨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공포증'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나도 항상 책을 들고 나가는 경향이 있지만, 나는 종이책은 한 권만 들고 다닌다. 대신에 전자책이 가득 들어있는 크레마를 꼭 챙긴다. 그것도 혹시 잊으면 안되니 핸드폰에도 전자책을 몇 개 다운받아 둔다. 아직은 경증의 어비블리포비아 증상이지만,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심하든 약하든 대부분 작가나 나와 같은 증상을 겪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카페에서 책 읽는 노년을 가끔씩 보게 된다. 공부는 평생의 일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기 때문인 것 같다. 공부하며 노년을 보내면 삶이 우아해진다.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고집과 편견이 굳은살처럼 박히지 않고, 생각이 유연해지기 때문이다. 정보처리 능력과 커뮤니케이션 능력도 유지할 수 있다. 조금 젊은 사람들과도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젊은 날 했던 목적과 결과가 있는 공부가 아니라 과정을 즐기는 공부, 자아가 성장하고 행복해질 수 있는 공부의 가치를 즐긴다면 인생은 지루할 틈이 없을 것이다.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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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는 내맹쿠로 살지 마래이 - 최종렬 사회학 소설
최종렬 지음 / 피엔에이월드(PNA World)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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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 소설이 아닌 '사회학 소설'이라는 장르는 처음으로 접해 보았다. 문화사회학자이며 사회학과 교수인 이 책의 저자는 경북에 사는 여성들을 인터뷰하고 논문을 쓰려다가 새로운 형태의 '사회학 소설'로 자료들을 정리하여 발표했다.

 

"사회학이 전문가들의 '가두리 잔치'가 되어선 안 된다. 오히려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일상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동행'이어야 한다." (여는글 13쪽에서)

 

한국 여성 3대의 삶이라는 주제는 이제 더 이상 신선한 주제로 다가오지 않지만, 사회학 소설이라는 형식의 독특함이 궁금증을 일으켜 이 책을 선택했고, 실제로도 색다른 책 읽기 경험을 했다. 독자들에게 친밀성을 주기 위해 소설 형식으로 글을 썼으나 사회학적인 언어 사용을 위해 학술대회 형식으로 글을 나열했기 때문이다. 이런 작가의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밥, 일, 사랑이라는 세 개의 주제로 세 개의 세션을 진행하는 학술 대회로 1세션마다 주제의 소개와 인터뷰했던 내용을 토대로 한 소설 그리고 주제 발표에 대한 토론의 형식으로 책을 구성했다. 소설도 인터뷰를 통한 실제 이야기를 토대로 한 것이라 현실적이었고, 울화통이 터지는 이야기지만 읽기에 재미있었다., 그 이후 진행되는 토론 파트도 상당히 흥미로왔다. 소설로 주제 발표를 한 사람의 사회학적 설명에 대해 반론하는 형태의 토론을 진행하는데, 주고받는 대화의 긴장감이 상당하여 마치 진짜 토론에 참여하는 듯했다.


 

밥, 일, 사랑은 한국 여성들이 할머니- 어머니- 딸이라는 3대로 이어지는 삶을 관통하는 주제다. 사랑으로 결혼했든 아니든, 부계 가족의 대를 잇기 위해 출산의 고통을 감당하고, 시댁 식구들을 온전히 돌보느라 몸 고생 마음고생하고, 돌봄 노동뿐 아니라 제대로 가장 역할을 못했던 남편을 대신하여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며 노동의 역할까지 담당했던 할머니와 어머니의 삶. 그런 어머니를 숭고하게 만들고 자신은 편안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아들. 그런 아들을 오빠나 남동생으로 두고 그들의 밥을 차려주며 살아온 딸, 그런 딸에게 "니는 내 맹쿠로 살지 마래이."라고 하면서도 결국 또 아들을 위해 딸을 희생시키는 엄마. 돌고 도는 여성 3대의 복제한 듯한 삶의 연결 고리를 끊어낼 방법에 대한 토론은 가부장적인 한국에서 여성의 삶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주제 발표자는 남자 사회학 교수, 토론 참여자는 여성 페미니스트나 여성학 전문가들. 이들의 관점은 내가 생각해 보지 못했던 시각까지 바라보고 문제를 제기하여 책을 읽으며 많은 것을 배웠다,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는 효는 낮은 노동가치를 지니기 때문에 여성에게 떠맡겨진 것이라고 했고, 집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여성에게 이런 돌봄 노동을 요구하고 있다고 했다. 요양보호사나 아이 돌보미와 같은 직업도 결국 그런 맥락에서 과도한 노동을 요구하고 있으며, 저임금의 돌봄 노동에 처한 여성들의 노동 환경 변화를 적극적으로 변화시키려 신경 쓰지 않는 것도 결국은 가부장적인 가치관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그냥 소설로만 끝났다면 마음만 아팠을 이야기들을 토론이라는 형식으로 사회학적 언어들을 가르쳐주고, 각자의 대립하는 다른 관점들을 보여주어 생각을 하게 했다는 점에서 참으로 괜찮은 시도의 책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토론 파트는 사회학의 학술 대회이다 보니 약간 어려운 부분도 있다.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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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가 들려주는 우아하게 나이 드는 법
우에키 리에 지음, 김슬기 옮김 / 유노북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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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Anti-aging보다는 '성공적인 나이 듦 ( successful aging)'이 훨씬 더 매력적이다. 노화 방지를 위해 갖은 노력을 하는 것은 어찌 보면 인간의 본능이지만, 과도한 노력은 오히려 젊어 보이기 보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비치기도 한다. 나이 들면서 점점 볼품 없어지는 사람도 있고, 만날수록 우아하게 늙어가며 빛을 내는 사람도 있다.


나이든 사람의 인상에서 그 사람의 성격이 어느 정도 보인다. 한 눈에도 심술 맞은 인상을 가진 사람은 사람을 질리게 하는 성격을 가진 경우가 많다. 온화한 얼굴을 한 어르신을 가까이서 살펴보면 성품이 좋다. 이러한 것은 바로 각자의 사고 습관이나 감정을 다루는 방식, 생활습관 등의 차이에서 비롯되어진다.


일본의 심리학자 '우에키 리에'는 오랜 기간의 상담을 통해 발견한 우아하게 나이 드는 여섯 가지 방법을 소개한다.


1. A=B라는 단순한 사고에서 졸업하기

'남자면 정규직을 가져야 한다'. '여자면 아이를 낳아야 한다.'와 같은 사고가 바로 A=B라는 사고다. 이러한 사고는 가능한 한 빨리 졸업해야 한다. 단순한 사고는 충동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다. 오랜 기간 이런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심각한 편견의 세상에 빠지게 된다. 모든 사람이 나처럼 이렇게 생각할 것이라는 관점을 바꾸고,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다양성'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연습은 우아하게 늙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2. 정체성을 찾고 자기 확신을 갖기

'자기애'를 가져야만 한다. 자기애란 자기 멋대로 생각하는 '자만'이 아니다. "나는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살아갈 가치가 있어.","나는 타인에게 인정받고 있어.","나도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구나"와 같이 주위로부터 '인정받고 있다는 감각'이다.


'자기애'를 가지기 위해서는 세 명의 친구가 있어야 한다. 나의 말과 행동을 비춰주는 거울 같은 친구- 나의 이야기를 듣고 비판하거나 질투하지 않고 나의 감정을 미러링 해줄 수 있는 친구. 실패했을 때 위로해 주고 성공했을 때 배 아파하지 않고 진정으로 기쁨을 같이 해 줄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하다.

더 나은 내가 되도록 '야심'을 자극하는 친구-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라이벌과 같은 존재이거나 존경하여 닮고 싶은 스승이나 아버지 같은 존재로 동기부여를 통해 나를 더 성장하게 하는 친구.

무엇이든 공유할 수 있는 '쌍둥이'같은 친구- 나는 혼자가 아니라고 느끼게 하며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존재가 있다는 동질감을 가져다주는 친구도 곁에 두어야 한다.

이런 세 친구를 사귀어 흔들림 없는 자기의 가치, 자기애를 느끼는 경험을 해야 노년의 삶이 행복하다.



3. 단정 짓지 말고 유연하게 생각하기

성인이 되어 겪게 되는 금전문제나 인간관계, 가족 관계, 건강 문제, 사회적 불황처럼 외부적인 환경에 의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 All or Nothing의 사고는 위험하다. '모든 게 저 인간 때문이야.' 또는 '틀림없이 내가 능력 없어서 해고당하는 것이야'라며 한 가지 원인으로 몰아가는 사고의 습관은 쉽게 절망하고, 푸념하게 하며 다른 길을 볼 수 없어 마음의 병을 얻게 된다. 아무리 마음 쓰이는 일이 있어도 하나의 가능성만 생각하지 말고, 4~5개의 가능성을 생각해 내고, '~일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을 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4. 폭넓은 인간관계를 추구하기

사회적 역할이나 지위, 또는 나이라는 카테고리에 자신을 가두지 말고, 나를 자유롭게 표현해야 한다. 60세가 된다고 갑자기 노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내면에 여성으로 남성으로 자신의 매력을 잃고 싶지 않은 욕구가 있다면 받아들여야 한다. ' 이 나이 먹고 뭐 하는 짓이야?'라며 자신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 우정, 동경, 친밀감, 그리움, 사랑하는 마음 등 다른 사람과의 관계로 생성되는 감정도 풍부히 누리며 살아가도 된다.



5. 아무런 보답도 기대하지 않기

나이 들어 덕을 쌓는 일을 자신의 기쁨으로 삼는 것이 좋다. 다른 사람에게 선한 참견을 하거나 덕을 쌓는 생활을 하는 노인들은 밝고 행복감이 높은 반면, 자기 것을 꼭 쥐고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마음의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 노년 시절에 정말로 나약함을 느낄 때, 가족이나 친지가 그리 도움이 되지 못함을 실망하거나 분노를 느껴서도 안된다. 시대가 바뀌어 자녀가 부모를 무조건 돌보아야 한다는 생각도 변했으니, '그런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구나'라고 생각하거나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겨야 한다.



6. 현재에 충실하기, 기회를 붙잡기

나이 듦이란 바뀌는 것이 아니고 바꾸는 것이다. 건망증이 심해지면 머리에 기억하던 습관을 바꾸어 메모를 하면 된다. 하이힐이 불편하면 내가 스스로 편안하고 예쁜 로퍼 스타일로 바꾸면 된다. 나이에 관계없이 주도적으로 스스로를 바꾸는 의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에 연연하여 자신의 현재를 한탄하기보다는 현재를 받아들이고 자신을 바꾸어 나가는 연습을 하면 된다. 나이 들어도 자신의 다양한 캐릭터를 만들어 가는 것도 재미있다. 가족뿐 아니라 주변 사람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완전히 연소된다는 생각으로 최후까지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은 우아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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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남자, 이대남은 지금 불편하다 -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20대 남성들의 현타 보고서
정여근 지음 / 애플북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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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만 키우는 나는 이십 대 남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런데 젊은 세대에서 점점 페미니즘에 대한 시각이 과도할 정도로 부정적으로 변해가는 것을 보며 무언가 문제가 있음을 감지했다.


이십 대 남성들의 현타보고서라는  <이대남은 지금 불편하다>를 읽으며 저자가 상당히 화가 나 있다고 느꼈다. 그의 주장을 읽으며 상당 부분 수긍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이십 대 남이 느끼는 분노도 남성 중심적인 가정이라는 전통이 가져온 폐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 부모들은 아들을 중시하여 어린 시절 많은 특혜를 주지만 나이가 들면 그에 대한 보답으로 아들에게 무거운 책임을 부과했다. 하지만 요즘의 시대는 아들이라고 특별한 혜택을 주지도 않으면서 그 의무만은 여전히 남겨두고 요구한다. 네가 아들이니 나 죽기 전에 네가 결혼하여 손주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하는 아버지가 계신다면 여전히 가부장적인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취업도 힘들고, 집은 살 수도 없어 결혼은 꿈도 꾸지 못하는데 여전히 아들 손자 타령하는 부모의 말을 듣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이대남은 이럴 경우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결혼하지 말고 버틸거라고 했다.


이대남의 분노는 여성에게만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기성세대에게 더 많이 분노하고 동시에 비상식적인 성범죄자들과 같은 사람들에게도 분노한다. 솔직히 세상에는 미친놈보다 정상적인 남자들이 더 많지만 N번방이나 스토커와 같은 소수의 미친놈들 때문에 정상 남자까지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된다. 이대남은 자신들을 '잠재적 강간범'으로 대하는 눈빛에 절망한다. 그러니 화가 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쓰레기 같은 20대 남자 하나가 일으킨 일에 뭔가 부정적인 이야기를 쏟아내며 이대남을 일반화하려는 세상이 야속하다. 제대 후 자신만 뒤처졌다는 불안함에 매일 밤잠을 설치는 이대남에게 세상은 조용한 학살을 자행하고 있다. 이대남이 자신에게 주는 박한 점수도 모자라 세상이 보내는 따가운 시선까지 ... 이대남은 안팎에서 조여 우는 숨통에 질식하기 일보 직전이다. p180"



그들의 가장 큰 분노의 근원은 군대인듯했다. 내가 봐도 억울할 것 같다. 창창한 이십 대 초반에 군에 끌려가서 장기간 육체 쓰는 일을 하고 오면 뇌가 리셋될 것이다. 다시 공부를 시작하려면 공부의 가속도를 내어야 하니 집중이 힘들다.


겨우 직장에 들어가면 또래의 여자들이 벌써 직장 상사가 되어있다. 그런 상황 자체에 스트레스 받는데, '남적남(남자의 적은 남자)'이라고 남자 상사들까지 합세하여 이대남을 못살게 군다. 넌 남자니까 힘 좀 써라며 고된 일을 다 맡기고, 힘들다고 말하면 약해빠져서 어떻게 사냐며 구박한다. 여성과 남성을 대하는 기성 세대의 태도에 이대남은 한마디로 빡친다.


" 세상에 대항하는 이대 남의 분노는 정확하게는 여자를 향한 것이 아니다. 그건 바로 사회에서 선배로 만나는 삼사 십 대 남자들에게 향해 있다. 참고로 50대 남자는 아예 기대조차 하지 않기에 화조차 나지 않는다."


남녀평등은 우리 중년 여성이 느끼는 가장 큰 절망감이었고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한다. 시대가 바뀌고 있지만 여전히 고통 속에 사는 여성이 많다. 나도 이 나이에 아직도 시댁과 갑과 을로써 전쟁 중이니까.


이십 대의 성으로 나뉜 싸움은 우리 세대가 잘못된 전통을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닌 건 시원하게 버리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은 이어나가면서 변화를 이루어 나가야 했는데, 전통적 관념 아래 감정을 누르고 살다가 어느 순간 폭발하며 살다 보니 자녀 세대는 남자고 여자고 다 힘들어진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며 이대남의 행동에 대한 의문이 많이 해소되었고 그들이 왜 저렇게 싸늘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알게 되었다. 서로의 목소리를 들어주고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것, 그것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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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왈츠 - 세대를 초월한 두 친구, 문학의 숲에서 인생을 만나다
황광수.정여울 지음 / CRETA(크레타)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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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평론가로 유명한 고 황광수 선생님과 정여울 작가는 서른 살 정도 나이 차이가 난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를 절친이라 부른다. 두 명이 합심하여 책을 쓰던 중 황 작가님은 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정 작가는 홀로 이 책을 마무리하여 선생님과 그 가족들에게 바친 애틋한 사연을 가진 책이다.


황광수 선생님과 정여울 작가 사이에 가장 부러웠던 점은 서로를 성장하게 하는 둘만의 독서 만남을 가졌다는 것이다. 정여울 작가는 인간에게는 가족의 사랑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결핍이 있어 타인의 사랑과 우정이 절실히 필요할 때가 있다고 했다. 언제나 곁에서 응원해 주며 아무런 기대 없이 베풀어주고 어여뻐해주던 선생님은 스승이며 친구였었다고. 그들이 서로 절친이 될 수 있었던 공통의 분모는 바로 문학이었다. 다른 사람의 가치에 흔들리지 않는 문학의 가치를 추구하며 프리랜서로 살아왔다는 점이 그들이 서로 통하게 되는 계기였다.


그들은 문학의 발원지인 유럽을 함께 여행했었고. 둘만의 북클럽 활동으로 대면 모임도 하고, 편지도 주고받았다. <마지막 왈츠>에서 그들이 공유했던 편지, 인터뷰, 에세이가 실려있다.

문학의 대가인 황광수작가님은 편지를 통해 암을 마주하며 살게 된 삶을 글로 표현했다. 생명 없는 물질계가 생명 있는 존재를 살아가게 하는 산실임을 느끼게 되었고 이제껏 미미했던 자연에 관한 관심이 생겨나서 자연친화적인 사람으로 바뀌었다.


오랫동안 편집자로 일하다가 문학평론을 했다는 황 작가님은 문학평론가는 추천해 주기 좋은 직업이 아니고 보람도 적으며 남들에게 좋은 소리를 듣기도 어렵다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해 마음껏 글을 쓸 수 있는 자유는, 나도 모르게 누리고 있는 너무 커다란 축복이라고 했다. 처음부터 엄청난 자유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주어지지 않은 자유의 울타리를 스스로 조금씩 넓혀갈 때 기쁨이 나타나고, 자신 안의 민주주의가 확장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고 했다. 그 자유를 위해 크고 작은 싸움을 하고 그것이 오늘날의 글쟁이들이 기꺼이 견뎌야 할 행복의 고통이라고 강조했다.


비평을 누가 읽겠냐고 절망하는 것은 문제를 외부에 다 두는 것이지. 모든 글쓰기는 누군가 내 글을 읽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시작되니까. 그 순간 잠재 독자가 생기는 거지. 글을 쓴다는 행위 자체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글쓰기는 타인의 읽기를 통해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더욱 성실하게 글을 써야 하고 이 지구상에 아직 예술가가 존재하는 것 자체에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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