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등학교 다닐 무렵,그러니까 6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어책에는 김유정의 <동백꽃>이 실려있었다.그러나 현재,7차 교육과정 고등국어 상에는 <봄 봄>이 실려있다 한다.

언니가 참고자료로 <동백꽃>을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다 하는데 오랜만에 나도 김유정 특유의 토속적인 언어가 듣고 싶기도 하였거니와 알싸하고 향긋한 그 무언가에 취해보고도 싶어 덩달아 그 참고자료를 언니에게 부탁했더니 흔쾌히 주었다.

극적 결말에 숨을 멎은채 읽어야 했던 지난 날을 회상하며...

 

::: 김유정, 동백꽃...중에서

...나는 다시 닭을 잡아다 가두고, 염려는 스러우나 그렇다고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지 않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소나무 삭정이를 따며 가만히 생각해보니 암만 해도 고년의 목쟁이를 돌려 놓고 싶다. 이번에 내려가면 망할 년 등줄기를 한번 되게 후려치겠다 하고 싱둥겅둥 나무를 지고는 부리나케 내려왔다.

  거지반 집에 다 내려와서 나는 호드기 소리를 듣고 발이 딱 멈추었다. 산기슭에 널려 있는 굵은 바윗돌 틈에 노란 동백꽃이 소복하니 깔리었다. 그 틈에 끼여 앉아서 점순이가 청승맞게스리 호드기를 불고 있는 것이었다. 그보다도 더 놀란 것은 그 앞에서 또 푸드덕 푸드덕 하고 들리는 닭의 횃소리다. 필연코 요 년이 나의 약을 올리느라고 또 닭을 집어내다가 내가 내려올 길목에다 쌈을 시켜놓고 저는 그 앞에 앉아서 천연스레 호드기를 불고 있음에 틀림없으리라.

  나는 약이 오를 대로 다 올라서 두 눈에서 불과 함께 눈물이 퍽 쏟아졌다. 나뭇지게도 벗어 놀 새 없이 그대로 내동댕이치고는 지게막대기를 뻗치고 허둥지둥 달려들었다. 가까이 와 보니, 과연 나의 짐작대로 우리 수탉이 피를 흘리고 거의 빈사 지경에 이르렀다. 닭도 닭이려니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눈 하나 깜짝 없이 고대로 앉아서 호드기만 부는 그 꼴에 더욱 치가 떨린다. 동네에서도 소문이 났거니와 나도 한때는 걱실걱실히 일 잘하고 얼굴 예쁜 계집애인 줄 알았더니 시방 보니까 그 눈깔이 꼭 여우새끼 같다.

  나는 대뜸 달려들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큰 수탉을 단매로 때려 엎었다. 닭은 푹 엎어진 채 다리 하나 꼼짝 못하고 그대로 죽어버렸다. 그리고 나는 멍하니 섰다가 점순이가 매섭게 눈을 흡뜨고 닥치는 바람에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이놈아! 너, 왜 남의 닭을 때려 죽이니?"

  "그럼 어때?" 하고 일어나다가,

  "뭐, 이 자식아! 누 집 닭인데?" 하고 복장을 떼미는 바람에 다시 벌렁 자빠졌다. 그러고 나서 가만히 생각을 하니 분하기도 하고 무안도 스럽고, 또 한편 일을 저질렀으니 인젠 땅이 떨어지고 집도 내쫓기고 해야 될는지 모른다.

  나는 비슬비슬 일어나며 소맷자락으로 눈을 가리고는 얼김에 엉 하고 울음을 놓았다. 그러다 점순이가 앞으로 다가와서.

  "그럼 너, 이담부턴 안 그럴 테냐?" 하고 물을 때에야 비로소 살 길을 찾은 듯싶었다. 나는 눈물을 우선 씻고 뭘 안 그러는지 명색도 모르건만,

  "그래!" 하고 무턱대고 대답하였다.

  "요담부터 또 그래 봐라, 내 자꾸 못살게 굴 테니."

  "그래 그래, 인젠 안 그럴 테야."

  "닭 죽은 건 염려 마라. 내 안 이를 테니."

  그리고 뭣에 떠다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너, 말 마라."

  "그래!"

  조금 있더니 요 아래서,

  "점순아! 점순아! 이년이 바느질을 하다 말구 어딜 갔어?" 하고 어딜 갔다 온 듯싶은 그 어머니가 역정이 대단히 났다. 점순이가 겁을 잔뜩 집어 먹고 꽃 밑을 살금살금 기어서 산 아래로 내려간 다음, 나는 바위를 끼고 엉금엉금 기어서 산 위로 치빼지 않을 수 없었다.

 

 

* 이 소설에 나오는 동백꽃은 동백나무에서 피는 붉은 동백꽃과는 전혀 다르다. 소설의 동백꽃은 생강나무에서 피는 샛노란 꽃을 말한다. 강원도 지방에서는 생강나무를 동백꽃 혹은 개동백으로 부르는데, 대개 산수유가 필 때쯤 노란 꽃이 핀다. 옛날 강원도 여인들은 이 동백꽃 열매를 따서 기름을 짜 머릿기름으로 쓰기도 했다. 나뭇가지를 꺾어 냄새를 맡으면 생강 냄새가 나는 이 나무의 어린 잎은 작설차로도 쓰인다. 모심기 전 음력 3~4월이면 김유정의 고향 실레 마을 금병산 자락에는 이 동백꽃이 알싸한 향기를 내뿜으며 지천으로 피어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