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번이라도 뜨거웠을까?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9
베벌리 나이두 지음, 고은옥 옮김 / 내인생의책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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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역사를 처음 배울 때 ‘사실로서의 역사’와 ‘기록으로서의 역사’로 분리된 두 측면을 동시에 배운다. 랑케가 주장한 객관적 사건의 집합체, 카가 주장한 주관적 선정과 연구로서 한정된 기록. 그러나 분명한 것은 후대가 만날 수 있는 역사는 주관적 기록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주관적이라는 실체는 무엇일까? 강자의 포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만약 전쟁을 한다면, 둘 이상의 국가가 대립을 한다. 그 전쟁을 기록으로 남겨 역사가 된다면, 전쟁 당국은 자국의 입장으로서만 기록하고, 타국은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사실로서의 역사만을 기록한다. 가령, 북한에서 6.25 전쟁, 한미연합해상훈련을 북침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자국의 이익에 부합한 주관적 해석이고, 그렇게 북한만의 역사교육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역사는 당국의 이익을 위해 존재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조작된 역사가 강대국의 손에서 힘을 받으면 ‘사실로서의 역사’는 아무 의미가 없어지기도 한다. 일본이 독도를 우격다짐으로 자국의 본토라고 설파하고 교과서에 실어버리는 것은, 사실로서의 역사를 짓밟고 왜곡이라도 해서 자국의 영토를 한 자라도 넓힌 조상의 추잡한 공로를 자신들의 후대에게 사죄하게 만들 역사를 쓰고 있는 꼴이라고밖에 해석할 수 있다.

이 책은 그 시절이 기록한 강대국의 역사해설을 거부하는, 약소국의 입장에서의 역사가 어떠했는가를 기록한 책이다. 1950년대, 전후에 있었던 영국의 국제적 범법행위를 다루고 있다. 영국을 위해 세계2차대전에 전장으로 나가 싸웠고, 많은 수탈과 희생을 강요당했지만 모든 자유를 거부당한 케냐인의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에는, 우리나라의 피맺힌 역사와 공통점이 많이 발견된다.

저자는 베벌리 나이두. 인종차별정책 정권 치하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나고 자랐다. 그래서 비열하고 무식한 정책이 자행되는 결과를 알게 되었다. 21살 때 재판 없이 수감되었다가, 영국으로 망명했다. 저서에서 <요하네스버그 가는 길><고난의 사슬><돌아갈 수 없다><남아프리카공화국 이야기>등을 썼다. <둘려요? 나이지리아>로 카네기상과 네슬 스마티 은상을 받았다.

케냐의 식민시대 역사는 이렇다. 1885년 독일이 케냐해안영토에 보호령을 설치했다. 1888년 영국 동아프리카 회사가 들어왔고, 독일이 해안 영토를 1890년에 영국에게 넘겨주었다. 1952년 10월부터 1959년 12월까지 케냐는 영국의 지배에 대한 반란(마우마우 반란)으로 비상사태 하에 있었다.

이 소설은 실제사건에 비해 소설 자체가 전달하는 경악스러움은 많이 퇴색되어있다. 아이들의 심리를 다루어 성장소설이라는 분류아래 들려주는 이야기는 배경만 취하여 소재는 허구이기에 읽을 때에 거시적인 역사적 관점이기 보다 두 주인공의 심리를 따라가며 읽을 수 있다.

매슈네 가정은 영국인으로 케냐에서 농장을 하며 살고, 무고네 가족은 매슈네 집에서 신임을 받고 일을 하며 지낸다. 사회는 ‘마우마우’라는 저항세력의 출몰로 인해 불안정세를 이어가고, 케냐인들은 밤중에 몰래 잡혀서 마우마우의 일원이 되는 강제맹세를 하게 된다. 그런 와중에 매슈가 친구 랜스랑 ‘도가머리뻐꾸기’라는 영물을 잡아다가 구워먹는다. 영물 잡은 대가로 불행한 사건이 터지는데, 그 불씨가 밤중에 매슈네 농장을 태웠고 이 사건으로 매슈네서 일하던 모든 케냐인이 임시수용소로 가서 고문을 겪는다. 매슈가 자백했음에도 무고의 아버지는 마우마우맹세를 했다는 이유로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고 무고의 가족은 흑인전용거주지로 쫓겨난다.

메시지가 분명하고 명확한 소설이다. 케냐인 모두가 온전한 불행의 희생양이 되어 끝나고 있기 때문일까. 중요한 것은 이 소설을 읽은 후 마땅히 가져야 할 ‘관심의 대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저자는 말하고 있다. 이제야 이 역사가 진정한 시선을 가지고 고찰의 대상이 되고 있고, 영국의 변호사들이 나서서 그들에게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고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이 일에 작은 목소리를 내는 소설책이 한국에까지 출간되었고, 읽는 이는 많은 감동을 받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면서 나아가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은, ‘우리나라는 뭐하고 있는가’이다. 영국의 변호사들이 나서서 60년 전 일에 대해 살아있는 피해자에게 보상하라고 자국 정부에 호소하는 이 일은, 우리나라 위안부 할머니들의 외롭고 처절한 투쟁시위를 연상하게 한다. 아주 오랜 기간 동안 ‘피해보상’를 논하였고, 이 일은 자국의 정부에 대한 일도 아니고 타국의 범법행위에 대한 역사적 보상요구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일본의 보상은커녕 사과조차 받지 못했다.

그들의 지진소식에 추모시위도 해야 하는 할머니들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그리고 몇 분 살아계시지도 않는 이때까지 이 보상하나 해결하지 못하고 끌고 온 정부의 안일한 태도에도 염증을 느낀다.

소설은 소설 자체보다 역사적 감각을 되살려준다. 그들의 역사를 통해 우리나라 역사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같은 식민지배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일까. 그들의 역사도 안타깝지만, 아직까지 이러고 있는 우리나라의 안일한 역사의식도 비통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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