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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지 ㅣ 에디션 D(desire) 1
조세핀 하트 지음, 공경희 옮김 / 그책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무미건조의 독(毒), 흘러가는 세월이 그저 호수같이 잔잔하기만 한 인생의 독. 거칠고 험하게, 눈을 뜨면 바로 헐떡거리기 시작하여 평생 목구멍에 풀칠하기 바쁜 인생들에게는 그런 독의 유혹이 자리 잡을 여유가 없다. 이 독은 ‘내가 가만있으면 세상도 가만히 있어주는 삶’으로 기어들어가 순식간에 급작스러운 영혼의 파멸을 이끌어낸다. 그런 소설의 전형이다. 데미지.
저자는 조세핀 하트. 아일랜드 태싱으로 런던 헤이마켓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근무했고,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여러 편의 연극을 제작했다. 영국광고업계의 거물이자 마거릿 대처 총리 공보 담당이었던 모리스 사치와 결혼, 두 자녀를 두었다. 이 소설에서도 똑똑한 부인과 두 자녀가 나온다. 그냥 그렇다는 얘기다. <데미지>는 그녀의 처녀작으로, 1994년 영화화하여 당시 논란과 함께 화제가 되었다. 저서로는 <죄><가장 고요한 날><망각><사랑에 관한 진실>등이 있다. 그의 다른 저서들의 제목도 범상치 않은 듯, 머리복잡한 날 읽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제목들이다.
주인공과 그 아버지의 관계로부터 소설은 시작된다. 자기의 신념과 사상을 주입시키며 아들을 대하는 아버지에게서 주인공은 늘 떨어져나가고 싶어 안달이었고, 반대로 가고 싶어 했다. 부자관계 이면의 부자연스러움과 부적응. 그에게서 아버지란 정떨어지는 기억들뿐이 없었다. 좋은 부인과 나쁘지 않은 결혼 -가장 중요한 게 결여된-을 한다. 자녀를 원했을까? 그러나 슬하에 아들과 딸을 두었다.
의사와 정치가로서의 평화와 안정, 그것이 50이 될 때까지 누리던 그의 삶이었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를 찍고 있었다. 그는 평탄한 가정에서 그의 영혼을 이방인이라고 인식한다. 결핍과 부재, 어쩔 수 없는 그것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터져주기만을 기다린다는 듯이.
아들이 좋아하는 여자를 우연히 한 파티에서 만나게 되고, 불꽃은 일어난다. 그렇게 그 여자, 안나에게 붙어버린 그의 영혼, 중년이냐 싶게, 20대인 아들보다 더 열정적으로 그녀의 노예가 되고자 한다. 아니, 완전히 종속되었다.
차를 몰고 런던으로 가면서 모든 게 나를 휙휙 지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체념하고 피해자라는 것을 지켜보면서 아파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 나는 서글펐다. 그래도 이게 전보다 더 사는 것 같은 것을. (p. 172)
아들과의 약혼식 전날 밤, 그들은 따로 정한 아파트에서 만나 정사를 벌이고 이를 본 아들은 충격에 아파트 난간에 떨어져 죽는다. 안나는 떠나고 모든 사실을 들은 아내는 충격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수건으로 피가 터질 때까지 자기의 뺨을 내려친다. 그것을 보는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이 부분이 재밌다.
그녀는 다시 수건을 들고 뺨을 후려갈겼다. 피가 탁자의 유리 상판에 튀었다. 안나의 어떤 이미지가 외설스럽게 내게 다가 왔다. 그녀의 얼굴이 늘 살짝 부어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게 그 열쇠일까? 안나는 생명을 구하는 거친 키스를 얼굴선이 바뀔 만큼 살이 여리지 않았다. (p. 212)
아들이 자신의 천인공노한 만행을 보고 그 자리에서 죽었고, 믿었던 남편의 배신과 그로 인한 아들의 죽음이라는 사실 앞에 미친 듯이 자학하는 아내가 앞에 있는데, 그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는가. ‘외설스러운 이미지’ 확실히 정상이 아니다. 독기운에 완전히 빨려 들어간 인간의 모습일 뿐.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잃었다. 하나도 남김없이, 죽을 날을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시간을 걷는 인생을 두 부류로 나눈다면, 살아가는 인간이 있고, 죽어가는 인간이 있다. 그가 삼킨 달콤한 유혹은 살아있는 듯한 ‘발작’을 일으키게 도와주었을 뿐, 그 또한 죽어가는 과정이었다. 늘 그렇듯 독성의 착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외국소설을 읽을 때 역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주목도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과연 낯설지 않은 이름, 공경희 씨의 번역이다. 그의 이력까지 밝힐 필요는 없겠지만, 일단 번역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읽었고 책 전반에 걸친 그녀의 필력은 독자를 꽉! 사로잡는다.
매끄럽지만 얇지 않은 종이의 질감이 좋다. 요즘 책값에 비해 좋은 종이를 써서 제지회사 이름도 확인하게 될 정도다. 표지는 별로다. 꼭 외설에 초점을 맞춘 듯한 이상스러운 디자인은 책의 내용이 지닌 깊이를 격하시키는 듯하다. 영화와 같은 구성, 그런 장치가 들어있다. 그래서 영화로 만들기는 더 쉬웠으리라. 장면간의 흐름이 지루하지 않는다. 삭제가 적절하다. 초반부터 지루하지 않게끔 잘 잘려져 있다.
나는 이 책을 머리나 식힐 겸 읽고 싶었다. 경영분야의 서적을 읽고 있다가 집중력도 떨어지고, 잡념도 많아져서 들게 된 책이다. 허나 머리를 식힐 수는 없었다. 이 책은 독자에게 계속적인 생각의 깊이를 만든다. 삶에 대한, 인간 본성에 대한, 욕망과 그 끝없는 욕심에 대한 독자만의 생각을 이끌어낸다. 주인공의 인생을 만화 보듯 간단하게 인식할 수가 없다. 너무나 본질적인 이야기를 파고들기 때문이다. 대신 몰입을 준다. 이 책이 주는 집중력은 온전히 주인공의 심리로 훅 들어가게 만든다.
사실 제대로 된 사랑을 해 본 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사랑과 그 욕망에 미쳐버린 남자의 이야기이다. 여자로서 나는 잉그리드 - 주인공의 부인 -에게 더 큰 연민을 느끼고, 그의 삶을 더 동정해야 마땅할까. 그런데 나는 주인공의 사랑에도 그에 못지않은 동정심을 갖게 되는 것 같다. 사랑은 진정, 사람을 비참하게도 불쌍하게도 만들어버리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