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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추락
하 진 지음, 왕은철 옮김 / 시공사 / 2011년 1월
평점 :
서 있는 지점이 어디든, 그 지대의 고저가 어떻든, 설령 인생에서 가장 밑바닥에 와 있는 순간이라 확신할지라도 인간은 거듭 몇 번이라도 더 추락할 수 있는 나락이 존재하는 것 같다. 객체로써 경험하는 (당하는) 추락은, 떨어지는 그 찰나가 아닌 - 추락의 순간에는 보통 이성적일 경황이 없다 - 이후에 벌어진 고통으로 그것을 인지하기 마련. 그러니 그것은 당연 공포일 수밖에 없다. 멋진 추락, 과연 그런 게 있을까. 제목부터가 끌렸다.
하진. 1956년 중국 랴오닝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진쉐페이. 현재 활동하는 작가 중 노벨문학상에 가장 근접한 작가라 불린다. <호랑이 싸움꾼은 찾기 힘들어>로 펜 헤밍웨이 문학상을, <붉은 깃발 아래에서로 플래너리 오코너 단편문학상을, <기다림>으로 그해 전미 도서상과 펜 포크너상을, <전쟁쓰레기>로 또다시 펜 포크너상을 수상하고 퓰리처상 최종후보에도 올랐다. 현재 보스턴 대학교영문과 창작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책은 그의 단편소설집이다. 이 책의 가장 마지막 소설이 ‘멋진 추락’이다. 그러나 내용 전체가 ‘멋진 추락’으로 마무리 짓고 있다. 그래서 각 소설의 초입부터 결말에 대한 호기심이 컸다. 총 12편의 소설이 담겨있는데 모두 미국에서 살아가는 중국계 이민자들이 그 주인공이다. 배경으로는 뉴욕 플러싱이 자주 선택되었는데, 이곳은 당시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많이 지냈던 곳이라고 한다. 이민 온 중국 사람들의 불안정하고도 고단한 삶을 다루고 있는데, 심리적인 묘사에 있어서는 중국 전통문학의 느낌이 많이 든다.
구성도 좋지만 각각의 소설이 가진 연결성들이 참 좋았다. 다음 이야기로 넘어갈 때의 변화에 대한 이질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각 소설에는 작가 특유의 분위기와 통일성이 잘 발휘되고 있는 듯하다. 또 소설마다 신문의 상표가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가 펼친 문학적인 표현에 감탄하게 되는 몇 구절이 있었다.
그의 마른 몸이 땅딸막한 그림자를 비스듬하게 드리우고 있었다. (233쪽)
그녀는 몇 시간동안 깨어 남편이 코 고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크지는 않았지만 부서진 선풍기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285쪽)
보름달이 흰 빛에 적셔진 조용한 도로와 벽, 집들을 비추고 있었다. 벌레들이 숨어 칸 것처럼 희미하게 울었다. (335쪽)
멋진 추락. 추락을 할 주체가 됨으로써 추락 전에 이미 그것을 경험할 결심과 마음의 각오가 끝난 상태로 아주 천천히 추락 속으로 들어가는 그 시발점 앞. 거기에서 독자는 추락의 소지를 안고도 덤덤히 그 길을 가는 주인공들을 통해 또 다른 인생을 배운다.
매우 재미있다거나 머리가 지끈거릴 만큼의 깊이 있다거나 하지는 않지만 굉장히 인상 깊은 책이다. 이런 단편을 만났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단편치고는 굉장히 집중도가 높은 책이었다. 산만하지 않았고, 과장도 일체 없었다. 그저 다 읽고 나면 ‘멋진 추락’이라는 제목에 다시 한 번 고개 끄덕여지는 고급스러운 단편묶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