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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베이커 자서전 : 성장
러셀 베이커 지음, 송제훈 옮김 / 연암서가 / 2010년 10월
평점 :
이 책이 가진 홍보문구 중 하나, ‘그는 가공되지 않은 쓰라린 기억을 재료로 너무나 따뜻하고 놀라울 정도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는 뉴욕 타임즈의 평은 이 자서전에 대한 기대감을 심어줬다. 블랙코미디라는 것인가. 비극적 상황을 희극으로 해석하는 그 냉소적인 발언들을 과연 자기 인생에다 대고 거침없이 쏘았을까. 표지부터 뭔가 새로웠다. 그러나 상상은 과했다.
출생 이전부터 결혼을 하기까지, 저자의 성장기가 담겨있다. 역사에 맞물린 그의 인생, 더불어 그 시대의 평범한 일상들을 엿볼 수 있다. 글쎄, 줄거리를 대강 요약해 혼자서 뇌까려보니 사실 ‘아 그렇구나~’하고 넘어갈 법한 이야기다. 영웅담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고통의 끝자락에서 경험한 시대적인 이야기도 아니고, 전쟁이 담겨있다고 해서 주인공이 참전병으로서 겪은 잔학무도한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 땐 그랬지’사상으로 입각하여 볼 때, 충분히 평범한 한 인물의 이야기다.
저자는 1925년 버지니아의 모리슨빌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병이 깊어 돌아가셨다. 시어머니와 원만하지 못했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친동생의 집에 더부살이를 시작한다. 가정 형편이 많이 힘든 러셀은 어렸을 때부터 새벽에 일어나 신문을 파는, 지긋지긋한 생활에 들어선다. 공황이었다. 그러나 외삼촌댁에 있는 작은 소년은 경기를 체감하지 못했다. 그 시기 어머니는 올루프 아저씨와 교제를 시작한다. 이 대목에서 덴마크계열로 영어에 서툰 백인 아저씨가 어머니와 나누는 편지 부분은 흡사 우리나라 외국인 노동자들의 언어를 연상케 한다.
(…)당신 생각은 어떠습니까? 제가 당신을 보러갈까요, 아니면 당신이 저를 보러올까요? 경기가 나쁨니다.(…) [p.124]
결국 끈질긴 공황의 터널을 빌미로 어머니와 울루프는 정리된다. 삼촌댁에 객식구가 늘어나자 어머니는 그동안 모아둔 돈을 가지고 볼티모어로 떠난다. 그곳에서도 지독한 가난은 계속되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어머니는 러셀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그는 어머니의 하나뿐인 미래였다. 이와 더불어 러셀은 학교에서 우등생으로 자리매김하며 장학생으로 존스홉킨스 대학에 들어간다. 그즈음 어머니는 새로운 남자 허브아저씨를 만나고, 결혼에 이른다. 가장이란 자리에서 퇴출 된 그가 무식한 허브아저씨를 가족 안에서 제외시키는 방법으로서 그는 그답지 않은 아주 졸렬하고 비열한 방법을 쓴다.
내 목표는, 아저씨가 자신의 무식함을 스스로 느끼게 만드는 것이었고 그러므로 당신이 내게는 관심거리조차 될 수 없음을 깨우쳐주는 것이었다. 직접적으로 모욕을 주지 않으면서도 은근히 아저씨를 괴롭힐 수 있었던 데에 내 교활함이 있었다. [p.279]
개그콘서트에 신설 된 코너 ‘착한 척 하지 마’의 대사, ‘나만 그래? 나만 쓰레긴가?’가 떠오른다. 이런 그의 진실 된 고백 속에서 난 나의 교만스런 모습을 투영해본다. 때문에 상당히 찌르는 구절이다.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발휘하며 대학을 누비던 그, 세계 제2차 대전이 한창중인 1943년 해병비행단에 들어간다. 살만 찌고 유럽남부를 순회하다 돌아온 군 생활도 그에게 동정남의 딱지를 떼 줄 수는 없었고, 그는 성(性)적 열등감에 사로잡혀 쏘다닌다. 그리고 만나게 된 미미. 한 신문사에 가까스로 취직한 그는 ‘우리가 들고 있는 카드에 그런 패는 없다’며 결혼에 대해선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미미의 화려한 밀당 작전에 넘어가 러셀은 결혼하게 된다.
이야기는 평범하나 무지하게 재밌다. 러셀의 원문도 이러할까 싶을 정도로 번역이 잘 되어있고, 번역자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가가 곳곳에 묻어난다. 일독이지만 양장본답게 400페이지 안에서 오탈자 하나 찾아볼 수 없다. 그저 푹 빠져서 깊게 읽게 되는 그런 이야기, 그 시절 그 때를 잘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이야기다. 워낙 재밌기 때문에 퓰리처상 수상에 대한 이해와 수긍을 가져다주는 책이다.
장사치가 이런 말을 한다. ‘일단 써봐! 후회 하면 장을 지진다니까!’ 이 책이 그렇다. 그 시절을 살았던지, 그 세대를 배웠던지 간에 누구에게나 권할 법한 이 책은 일단 한번 읽어보기를 권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