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리 스피넬리의 작품 세개
[스타걸]은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인 리오.
제목인 스타걸은 새로 전학온 여학생 이름이다. 스스로를 스타걸이라고 부르고, 보통의 고등학생들과는 전혀 다르다. 무엇이 다른지는 직접 읽어보시길. 이야기의 전개는 리오가 스타걸과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다. 15년이 지난 후의 에필로그도 나온다.
[하늘을 달리는 아이]는 삼인칭 전지적 작가시점, 주인공은 제프리로 매니악이라고 불린다. 11살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백인과 흑인 거주 지역이 서로 다르고 소통도 하지 않는 어느 도시에 머물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책읽기를 좋아하고, 달리기도 잘하고, 매듭도 잘 풀고, 아이들한테 잘해주고, 축구, 농구도 잘하는 매니악은 두 거주 지역의 사람들이 서로 모르면서 갖는 편견이라는 틀을 깨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읽으면서 미국의 흑백간의 갈등이란 참 뿌리도 깊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해보지 않고 전해 내려오는 관습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쉽게 생각하며 지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속한 동류 사회에만 동질감을 느끼고 충성을 다하면서 사는 것.
[문제아]삼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 징코프라는 주인공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중학교에 입학할 때까지의 이야기이다. 왜 문제아라고 번역을 했을까? 대부분의 아이들이 징코프 같은 것은 아닐까? 학교란 잘하는 아이들만을 위해서 있는 곳이 아닌데, 미국이나 우리나라나 학교가 학생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일등을 요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일등이란 하나밖에 없는 것일진대. 이론적으로 어느 기준만 달성하면 되는데, 그 기준이 너무 높거나, 아니면 기준 자체를 믿지 않거나 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아이들이든, 어른이든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제일 중요한 것 같다.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며 좌절하지 않는 것이 세상을 살아갈 때 가장 큰 힘이 되는 것 같다. 왜 내가 남에게 내 존재의 유용성을 증명하기 위해 불행해야 하는가? 그런 면에서 내 아이들에게 스스로의 기준에서 자신을 받아들이라고 알려주기는 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꼬마 사업가 그레그] 삼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 주인공은 그레그로 5학년이다.
주요 등장인물은 그레그, 마우라, 제트 선생님, 데이븐퍼트 교장선생님.
사업가적인 자질을 타고난 그레그가 새로 시작한 사업인 만화책 판매 사업과 경쟁자였던 마우라와 동업자가 되고, 공식적으로 학교에서 판매 허가를 받기까지의 과정을 유머스럽게 서술한 내용이다. 물론 이 작가의 공통된 관점이기는 하지만 아이들을 도와주는 훌륭한 선생님도 나온다. 그리고 아이들은 멀게만 느껴지는 교장선생님조차 학교와 학생을 위해서 나름대로 노력하는 분이라는 긍정적인 생각도 갖게 해준다. 돈을 왜 벌어야 하면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해주는 참으로 교육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교육적인 내용이 이야기의 전면에서 끌어가지는 않는다. 그레그와 마우라가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도 이야기의 큰 틀이다. 열린 마음으로 상대를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모두가 끊임없이 배워야 하고 익혀야 하는 기술이라는 생각이 든다.
[잘난 척쟁이 경시대회]는 일인칭 주인공 시점. 주인공은 제이크로 4학년인데, 이야기는 3학년때의 일이다. 과학경시대회의 상품이 최신형 컴퓨터여서 주인공도 여기에 참가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연구의 즐거움도 알게 되고 협력의 가치, 우정을 배운다.
[보이지 않는 바비] 일인칭 주인공 시점. 15살 소년 바비가 주인공인데, 어느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스스로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물론 이야기야 보이지 않게 된 바비가 다시 보이게 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들, 느낌, 감정, 사건들이다.
무엇보다 바비가 부모에게 화를 내는 부분에서 나를 돌아보게 되더라. 어른의 입장에서 가장 좋다고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것이 과연 잘하는 일인지, 확신을 갖을 수 있는지, 아이의 의견도 들으려는 자세조차 없었던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
바비는 앨리시아라는 소녀와 서로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클레멘츠의 소설의 주인공들은 정말 평안한 가정에서 자란다. 부모인 내 입장에서 볼 때 좋은 부모와 살고 있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미국이라는 사회의 좋은 점 또는 튼실함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 같다.

기억이 80분밖에 지속되지 못하는 병에 걸린 수학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일인칭 관찰자 시점이라고 해야 하나? 화자인 가정부는 주인공이 아니던가? 수학 공식이 많이 나오기도 해서 이해 못하는 부분도 있기는 했지만 뭐, 수학공식 때문에 어려운 책은 아니었다. 재미있었고, 잔잔하게 읽기는 좋은 책이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 이야기가 무엇을 전하려고 하는 것인지 기를 쓰면서 찾으려고 애쓸 필요는 없는 것인데, 왜 그렇게 읽고 있는지 모르겠다.
라디오의 책 소개 프로그램에서 듣고 한번 읽어보고 싶었다. 치료용 아이라는 광고문구 때문에 더 보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그 문제보다는 의료행위에 대한 자기결정권이 더 중요한 문제인 듯 하다.
책이 엄청 두꺼운데, 각 장의 제목이 등장인물의 이름이고 그 장은 그 인물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기술한다. 물론 과거와 현재를 번갈아가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주요 인물은 주인공인 안나(안드로메다의 애칭이란다.), 엄마인 사라, 아빠인 브라이언, 오빠 제시, 변호사 캠벨, 안나의 법정 후견인 줄리아, 언니 케이트 이다.
아픈 아이가 있으면 다른 아이한테 신경을 덜 쓰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 사정을 이해하기 어렵다. 아마 시간이 지나서 자기 아이를 키우게 되면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떻든, 부모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더 많은 성찰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이에게 강요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아이는 강요라고 생각하니, 어떻게 하여야 할지를 끊임없이 고민하면 살아야 하는.


읽었다고 말하기는 어렵고 훑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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