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한 일상과 대비되는 시간들
그 다른 세상이 계속됐다면 지난주에 너는 중간고사를 봤을 거다. 시험 끝의 일요일이니 오늘은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마당에서정대와 배드민턴을 쳤을 거다. 지난 일주일이 실감되지 않는 것만큼이나, 그 다른 세상의 시간이 더이상 실감되지 않는다. - P25
사람이 죽으면 빠져나가는 어린 새는, 살았을 땐 몸 어디에 있을까. 찌푸린 저 미간에, 후광처럼 정수리 뒤에, 아니면 심장 어디에 있을까. - P27
폐지줍는 노인식물을 잘 키워내는 사람오래전의 한 사람을 생각하며 적는 꽃 목록
비가 계속 와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니 그의 머릿속에는 그가 살아왔던 지난 세월의 일들이 두서없이 떠올랐다.어린 시절 무작정 집을 떠나 처음 도시에 왔던 일, 중국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팔뚝에 화상을 입었던 일, 그를 버리고간 사람들과 그가 버린 사람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일은 집세를 내지 못하고 쫓겨나 몇 년간 묵었던 여인숙에서 그곳을 청소하던 여자를 만나 함께 살았던 것이다. 여자는 오래오래 가난했고, 늘 남은 밥을 얻어먹어 갓 지은 밥을 먹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이 같이 살기 시작했을 때 그는 밥솥을 샀다. 김이 나는 하얀 밥을 보고 여자가 울었다. 노인은 힘들게 자리에서 일어나 장롱다리 밑에 접어 괴어둔 종이를 꺼냈다. 내년에 심을 꽃목록 맨 아래에 여자가 좋아했던 금잔화를 적었고, 다시 접어 원래 자리에 두었다. - P159
남편과 단절되는 대화 _소희
"희경 씨가 너무 힘들어해."남편이 무슨 말인가 하는 얼굴로 소희를 흘깃 보더니 말했다."아, 등교 거부한다던 거 때문에? 아직도 그런대?""웅, 다시 그러나 봐. 얼마나 힘들겠어.""그거 그냥 토끼 하나 더 사주면 해결될 일 아니야?"남편이 말했다."애당초 토끼는 잘 죽는데 그걸 왜 사줘서 그 사달인지." - P163
"무슨 일 있었어? 얼굴이 안 좋아 보여"남편이 물어서 소희는 노인의 빈집에 대해 이야기를 할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고 나면 끈질기게 괴롭히는 상념들로부터 자유로워질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하지만 잠시후 소희는 남편에게 토끼 이야기를 했을 때를 기억해냈고,마음을 바꿨다."아니, 아무 일도 없어." - P171
서로에게 완벽한 존재였던 때가 있는데지금은 남보다도 못하게 서먹한 거리를 둔 부녀
그런밤이면 그는 얼마나 누군가를 붙잡고 사죄를 하고 싶었던가. 그리고 이불장 안에 숨어 있던 아이처럼, 자신의 존재를점점 더 작은 조각으로 구깃구깃 접어 어둠 속에 숨겨놓고싶어지는 그런 밤마다 그의 앞에 불쑥 나타나 부라보콘을건네며 "아빠, 오늘도 피곤하구나!" 하고는 그를 다시 빛의세계로 데려가주던 딸. - P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