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부르는 숲
빌 브라이슨 지음, 홍은택 옮김 / 동아일보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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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기행이라는 놈과 대하고 있자면 그 속에 장황히 펼쳐지는 -오솔길하나, 잠시 앉았던 돌덩이 하나- 그 모든 것이 동경의 대상이 되어버리고 동시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아도 변함없는 나의 고정불변한 위치에 안타까움이 치밀어 오른다. 무료한 일상에서 문득 어디론가 떠나고픈 욕구를 울컥 솟게 만드는, 시덥잖은 구석에서 드러누워 책장을 넘기는 나에게,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게 싶게 하는, 도발적이지만 유쾌한 매력의 솜덩어리 기행. 그 매력은 나의 모든 정신을 스멀스멀 흡수해 버린다.

<나를 부르는 숲>은 나의 그런 도벽적 충동심을 유발하기에 기가막힌 재치를 지니고 있다. 저기 멀리도 있는 -요즘은 비행기란 문명의 이기로 금방 가기도 한다만- 미국의 애팔래치아에 대한 막연한 동경의 이미지를 그리게 만드는, 등산이란, 자연이란 바로 저런거야라는 생각을 명징하게 그리고 유쾌하게 그려내는 재주를 지니고 있다.

사실 브라이슨과 떠나는 그 길은 첫걸음부터가 한바탕의 유쾌한 소동이다. 어느날 결심한 산악행. 그 산행을 위해 투덜거리면서도, 직원의 귀찮은 설명을 들어가면서도, 장비를 잔뜩, 푸짐하게도 산다. 그러다 우연히 접하는 숲속의 귀염둥이 곰의 안부.

나무로 도망쳤는데도 따라와서 사람을 죽였다더라, 총을 여러방 맞았는데도 사람한테 돌진하더라. 죽은 척하는건 소용없다더라. 텐트속에 누워 있는데도 곰이 들이 닥친다더라. 특히 요즘의 곰들은 좀더 포악해졌다, 그의 침대 위 엷은 램프에서 눈이 접시만해지며 곰의 안부와 조우하고 있을때, 독자들을 향해 봉긋 솟아 있는 표지의 곰의 얼굴모습은 보고있는 이를 키득거리게 만든다.

이 책의 매력은 그런 유쾌함과 키득거릴 수 있는 여유를 누릴 수 있다는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여기에는 일단 숲을 향한, 나도 한번쯤 이 기회에 산과 만남을 가져야겠다는 충동심의 묘한 매력과, 절대 사람을 부추기거나 강요하지않는 소박함이 있다.

아마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잡으며 그들은 등반을 완벽히 끝내는 영웅적인, 초월적인 의지를 지니는 인간일거라 머릿속에 뭉실뭉실 그려냈을게다. 하지만 그 뭉실거리는 이미지는 그들과 대면하는 순간부터 처참하게 뭉그려져 버린다. 빌 브라이슨과 그의 동료 카츠는 아주 평범한, 너무나 평범해, 건너편 인상좋은 이웃집 아저씨 같이 소박해만 보이는 인물들일 뿐이다. `에이~ 브라이슨과 카츠가 애팔래치아 트레일에 나선다고? 핫 농담하지마~` 특별히 유달은 성격도 아니고 몸이 날쌘것도 아닌 그들. 그들은 모험에 설레는 공포심을 지닌다. 그리고 그들이 느끼는 설레는 공포심을 우리도 공유하게 된다.

너무 힘들어서 `우리 트럭을 타고 바로 다른 곳으로 가버릴까?` 결국 중간지점을 새초롬 빼먹고, 힘들다고 `이봐, 카츠. 우리 식량 어딨어? 설마 커피 걸리는 필터도?` 필수적인 짐을 냉팡냉팡 내동댕이 치는 둘의 익살극, 그리고 우리가 공포와 친근한 만큼 그들도 딱 그만큼 공포를 대하는 모습. 그리고 종종 겪는 좌절.

이것은 영웅심리에 도취되어 `여러분, 대단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절대 여러분이 할 수 없는 대단한 산악을 성공했답니다.`라는 산악인과는 달리 우리의 마음에 너무 와닿게 된다, 심지어 그들이 불쌍해 보이기도 하니..

`누가 뭐래도 나는 개의치 않는다. 우린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걸었다.`며 그들의 행로에 뿌듯한 자신감을 가지는 그들에게서 도전이란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다는 말이 떠오른다. 전문인이 아닌 우리도 떠날 수 있다는 자신감, 하지만 그러면서도 결코 부담을 떠 넘기지 않는 그들의 모습에 우리는 들뜨게 되며 그 붕붕뜬 기분속에서 일순간의 웃음을 벗어난 그 무엇과 대면하게 된다.

우리의 쉼없이 돌아가는 톱니바퀴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동행해 주었던 <나를 부르는 숲>은 그 동행의 끝에 남겨두는 `부담`이란 부담스러운 존재가 없어 더욱 솔직하며 담백하다. 빌 브라이슨, 카츠와 떠나는 유쾌한 산행. 그들만의 투덜거림에서 키득거리는 재미를 얻을게다. 그 키득거리는 재미 속에서 푸르른 숲의 상쾌한 뒷맛을 음미할 수 있을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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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1 이외수 장편소설 컬렉션 6
이외수 지음 / 해냄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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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각에도 인간이란 족속의 발이 닿는 모든 곳에서 살육과 전쟁이 자행되고 있다. 생존본능을 위한 마지막 수단이 아닌 욕구본능과 짝짜꿍 손잡고 저지르는 동족상잔의 기가막힌 논픽션 드라마. 문득 어떤 영화에서 본 대사가 생각난다. 기계가 인간에게 한 소리다. `인간의 본능은 인간 스스로를 파괴하는 것이다.` 이렇게 죽고 죽이는 괴물같은 구조 속에 얽혀 있는 우리. 우리는 그 구조를 사회라 부르고 있다.

그 사회라는 어쩔수 없는 무대 속에서 상연되는 <괴물>에는 제법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부끄럼없이 마구마구 등장하는 그 인물들을 보고 있자면 관객들 머리 속이 쉴새없이 산만해 진다. 하지만 그 산만한 분위기 속에도, 그 인물들이 서로 얽혀 있음을 서서히 알아차리게 된다면 당황스러워진다. 사회 각계각층의 인물들이 - 살인마에서 경찰, 전직 심리학자까지- 산만해 보이는 분위기 가운데에서 나름의 질서를 가지고 끈을 잇고 있다는 것이다. 그 끈을 따라가다보면 복잡성에 지루함을 느낄때도 있지만 도처에 널려있는 인물의 매듭을 알아보며 즐거움을 느낄때도 있다.

하지만 <괴물>이 뿜어내는 연극의 내용은 크게 놀랄 게 없다. 한 살인마가 등장하고 살인마가 등장하면 당연히 나와야 할 살인마를 뒤 쫓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주변 인물들의 에피소드들. 사실 범인을 잡는 과정을 보면 추리도 아니고, 액션도 아니다. 연애도 아니고 댄스소설도 아니다. 이렇게 어중간해 보이는 구조를 쳐다보는 관객들은 저마다 평이 갈린다.

`너무 멋졌다. 복잡한 가운데 굴러가는 사건의 진행에 찬사를 보낸다.`
`너무 산만했다. 뭘 나타내고자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실패작이다.`

이 유명한 연극의 평은 이렇게 극과 극으로 갈린다. 복잡한 구조 속에서도 빈틈없는 이야기의 전개에는 전자의 손을 들어주지만 또한 전체적 분위기를 살피면 후자의 손을 들어 줄법하다. 이렇게 밖에서 서로의 의견에 가타부타 참견하고 있을 때 소설 속에서도 그 시선이 극과 극으로 갈리고 있다. `바이오필리아`와 `네크로필리아`. 그 둘은 결코 화해 할래야 할 수 없는 극과 극의 존재다. 그 존재들이 자기의 존재를 합리화하기 위한 전쟁, 그 전쟁의 뒤안이 바로 <괴물>이 흘러가는 나루터다.

바이오필리아의 눈에서는 당연히 네크로필리아가 괴물로 밖에 보일 수 없을게다. 어떻게 인간으로 저럴 수 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네크로필리아의 시선또한 곱지 않다. 저런 미개한 것들. 죽음의 참된 의미를 모르는 너희 미개인들이야 말로 괴물 그 자체다. 이렇게 괴물 뒤집어 씌우기 작전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작전이 벌어지는 전쟁터는 합의를 보고 있으니, 바로 사회다. 작가는 사람들을 주목한게 아니라 이런 사람들을 이토록 미치게 만드는 사회란 괴물을 주목한게다.

소설은 당연히 바이오필리아의 행로를 따랐다. 그리고 네크로필리아에겐 용서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는다. 사회란 공간 속에서 이질적 한 존재는 괴물로 치부될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괴물> 속의 윤현부만이 유일하게 그 이질적 존재를 포용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는 사회에서 벗어나 자연에 머무르고 살고 있는, 유일하게 사회에 독립된 인물이었다. 이외수. 그는 우리가 사회를 그저 사회라 부르는 동안 또 다시 그 만의 시선으로 쫓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작가의 눈에 비친 바이오필리아의 승리는 결코 승리로 비춰지지 않았을 터다. 그 괴물 사회를 독식한 또 다른 괴물의 한 모습...

흔히 이외수 작가를 언어의 연금술사라 한다. 나도 그의 연금술법을 익히기 위해 항상 그의 강의에는 노트를 끼고 다닌 기억이 난다. 내가 이렇게 떠들고 있는 사이에도 책 속에서는 그만의 연금술이 쉼 없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연금술은 결코 호락하지가 않다. 그동안 이외수급 연금술을 즐겼던 분들에겐, 이제 입문을 벗어나 중급의 단계에 다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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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기이한 옛이야기
완서 지음, 박희병 옮김 / 돌베개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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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용궁부연록, 남염부주지. 나열하면 다소 낯설어 보여도 사실 우리의 고막이 꽉 붙들고 있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친숙한 금오신화의 개별 이름이다. 시대가 변해 바다가 육지가 되는 세상에도, 시대가 변해 사람이 날아다니는 세상에도 여전히 우리의 정서를 자극하는. 만화로 봐도, 영화로 봐도, 책으로 봐도 너무나 친숙한 금오신화. 한국인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 주는, 우리나라만의 골계 원천이다.

이런 금오신화가 베트남에도 보란 듯이 있다는 사실에는 나의 눈이 한없이 휘둥그레진다. 물론, 우리나라 금오신화도 중국의 그것에 영향을 받아 창작되었다고는 하지만, 베트남에도 우리의 금오신화 같은 것이 있다는 점은 선뜻 떠올리기가 힘이 든다. 우리나라의 그것이 너무 돋보여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도 아쉬운 지금, 저기 베트남에서도 베트남 판 금오신화가 있다는 사실은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기 싫어 아망을 부려 서인지도 모르겠다.

비록 금오신화가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나, 그것은 우리의 정서에 더욱 알맞게 각색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기에 우리에겐 더욱 소중하고 더욱 우리의 정서에 부합하는 게다. 그렇다면 베트남의 그것도 마찬가지일터이기에, 우리의 궁금증은 더욱 무럭무럭 발하게 된다. 베트남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는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전기만록>. 이것이 완서가 지었다는 베트남 판 금오신화로, 그 역시 옛날의 신비한 이야기를, 소박한 이야기를 앙증맞게 배에 품고있는, 우리나라의 금오신화와 그 맥을 같이 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여기, 앙증맞게 품고 있던 이야기 꾸러미를 조심스레 한국으로 옮겨 놓은 것이 바로 <베트남의 기이한 옛 이야기>이다.

우리가 베트남에 대해, 지리는 물론 환경, 역사, 인물까지 상당히 낯설다고는 하지만, 이 <베트남의 기이한 옛 이야기>는 전혀 낯설지 않은, 오히려 너무나 친숙한 우리의 글을, 우리의 정서를 보는 듯하다. 지명과 인물만이 조금 다를 뿐. 권선징악적 구조하며, 허무맹랑하지만 왠지 인정해주고 싶은, 그 소박한 소설의 상황구조는 우리나라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우리가 중국의 고전문학을 보며 거의 이질감을 느끼지 않듯, 베트남의 <전기만록>도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지를 않는다. 베트남의 기이한 옛 이야기, 사실은 우리의 이야기라 해도 큰 손색이 없는 터였다.

하지만 베트남의 기이한 옛 이야기에 실린 작품들은 그 하나 하나가 좀 짧다는, 뭔가 좀 모자라다는 느낌이 들었다. 분량만으로써가 아닌, 독자가 몰입해 사다리를 타고 내려갈 수 있는 그 깊이가 우리나라의 그것과 비교했을 때는 좀 떨어진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런 생각은 곧 흥미에 전염이 된다. 우리나라처럼 전해져 내려오며 조금씩 각색되고, 좀 더 흥미로워 지고, 그래서 한 부분 한 부분이 더욱 흥미롭고 궁금함을 자아내는 상황은 별반 연출되지를 않았다. 다분히 교훈적인 내용인 것은 매한가지지만 깊이와 흥미에서는 그 차이가 컸다.

비록 우리나라의 금오신화와 비교했을 때는 그 흥미가 떨어지지만, 베트남이라는, 문학적으로는 다소 생소한 나라의 작품이 이렇게 우리의 정서와 들어맞는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경험이긴 했다. 저기 저 멀리 살던 그 때 그 사람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소박한 즐거움을 즐길 줄 알았구나. 저기 저 멀리 살던 그 때 그 사람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소망을 가지고 살고 있었구나는 애절한 느낌.

그 시대 고전을 읽으면 그 시대 사람들의 마음가짐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소박하던 민중들의 애환과 기쁨을 읽어내듯 여기 <베트남의 기이한 옛 이야기>에서도 베트남, 그 들만의 심중을 들여다 볼 수 있을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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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소설 속 역사 여행
신병주. 노대환 지음 / 돌베개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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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전, 심청전, 춘향전, 홍길동전. 이름만 들어도 우리의 머릿속에 망설임 없는 한편의 연극이 상영되는, 너무나 친숙한 우리만의 이야기, 우리의 고전이다. 그 시대 민중들에게 폭발적인 사랑을 받아온 고전들은, 시대가 흐르고 세대가 변해도, 아직도 나름의 빛을 발하며 우리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 주고 있다.

고전을 읽다보면 사실, 그 소설 속 상황이 실제 그 시대의 생활모습인양 착각하기 쉽다. 소설은 시대를 반영한다고 하지 않는가. 아무런 생각 없이 받아들이다 보면 그저 그대로, 주면 주는 데로 받아먹는 수동아가 되어 버릴터다. 하지만 능동적으로 탐구하면 사실이 아님을 알고, 아니라면 과연 이 소설이 창작되던 시기에 그 시대 상황은 어떠하였을 것인지 의문이 자연 생기기 마련이다.

이 의문은 소위 역사, 국사시간에 `외움`을 통해서 그나마 해소되었었다. 아니 외워버림으로써 차단되었다고 보는게 낫겠다. 허생전하면 실학자들의 정치적 입지와 상황, 홍길동전하면 서얼의 차별이 심하던 조선의 생활상 등이 바로바로 튀어나올 수 있게끔, 우리는 그런 의문들을, 탐구해온 것이 아니라 무작정 외워 왔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의문만이 가질 수 있는 지적 궁금증에 대해 강박관념을 가지게 되었고, 이제 고전 소설 속의 시대 상황에는 무관심의 행로를 걷게 되어버린 것이다.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그렇게 외웠는데 또 그 시대를 살펴보자고? 지긋지긋해 보인다. 아니, 여기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은 기존의 고리타분한 이론중심이 아닌 독자의 흥미를 충분히 유발할 수 있게끔, 시대 상황을 반드시 작품과 연관시켜 소개시켜 놓는다. 가령, 심청전에서 등장하는 심봉사를 예시로 하여 그 시대 맹인들은 어떠한 삶을 누렸는가,

만약, 심청이가 인당수에 뛰어들어 소생하지 못하고 그대로 죽어버렸으면 어떠할 것인가 하는 등, 고전을 읽다보면 자연적으로 발생 할법한, 사소해 보이지만 생각할수록 궁금한 의문들을 담백하게 실어놓는다. 그동안 차단당한체 막혀만 왔던 의문들이 비로소 풀려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재미만을 위한 공소(空疎)적 의문만 제시하는건 아니다. 계축일기에 소개된 광해군은 정말 패륜아인가란 문제로 시대상황과 정치적 논리등의 미묘한 관계를 서술하거나, 옹고집전의 불교배척이 과연 옹고집만의 고집이였던가하는 물음들은 기존의 강압적 주입상황이 아닌, 자연적으로 독자의 관심을 끌게하는, 지적참여를 유도하는 수준있는 장치인거다. 이렇게 재미와 어우러진 지적유도는 고전소설과 그다지 친숙하지 않은 이들에게도 부담없이 대할 수 있는 기회로 다가온다.

자칫 지루의 일변도를 달릴뻔한 고전 살펴보기.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에서 그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놓았다. 이제 고전소설 속 역사적 모순점을 조목조목 찾는데에서 지적 갈망을 충족 시킬터다. 이제 고전소설 속 궁금증을 조목조목 찾는데에서 더없는 흥미를 느낄터다. 마구 쏟아지는 지적호기심의 화살들. 그 과녁을 이제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에 맞춰도 손색이 없을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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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오금학도
이외수 지음 / 동문선 / 199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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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이제껏 거침없이 흐르고 흘러왔다. 아무리 애원하며 발목을 잡아도, 울며불며 매달려 보아도, 시간은 그렇게 냉정히 흐르기만 했다. 그 냉정의 흐름속에 휩쓸려 있던 인간들은 그 속에서 우주의 진정한 섭리를 깨달은 것이 아니라 시간의 냉정함에 원망하는 법만 배워왔다. 자연을 고상히 여기며 더불어 살던 인간의 순수한 모습은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원망스런 눈에 비춰지지 않는, 멸족의 리스트에 올라버렸다. 썩어버린 세상. 서서히 구린내가 난다.

하지만 `세상 만물이 썩지 않는다면 창조의 숲이 어떻게 생겨 나겠는가?` <벽오금학도>의 한 인물이 했던 목가적 말처럼, 오히려 이 속에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그런 웅크림의 시대인지도 모른다. 이제 새롭고 순수한 또 다른 세상의 맹아를 위해 지금 이 시대는 썩어 거름이 되어주고 있는, 새 싹을 위한 처절한 자기희생을 치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혼란스런 마음 속에서 진행되는 <벽오금학도>. 전원의 향토적 분위기 속에 우리 민족 고유의 신선사상을 절묘히 배합시켜 놓은 작품이다. 시골의 청취함에서 시나브로 묻어나오는 그윽한 배경의 향기는 신선사상의 신비함과 더불어 작품이 주는 이미지를 한층 격상시켜 준다. 그 절묘한 궁합으로 인해, 오히려 현 도시로의 배경전환은 심적 거부감을 일으킨다.

`붓 끝에 먹을 한 번 찍어 숨도 쉬지 않고 일필로 순식간에 피워내는 난이었다. 낙관을 찍고 나면 언제나 화선지에서 은은한 난초향기가 맡아져 왔다. 때로는 화선지 속에서 쏴아 하는 솔바람 소리도 들려왔다.` 우리 고유 민족의 내면과 그 이면을 나타내 주는 듯한, 시대를 거스르는 탈과학적 그 이미지. 진정 우리민족의 가슴에 와 닿는 은은한 묵향이 배겨나오는 박진스런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우리의 심적눈을 자극한 작가는 이제 주인공 `강은백`을 통해 더 이상 마음의 눈과 영적인 눈을 뜨지 못하는 현대인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오학동. 한 때는 이 세상 역시 오학동과 다름없었지만 이제는 차원의 벽에 의해 철저히 단절되어 버린 세상. 지금 이 세상이 못내 안타까운 작가의 조용한 절규가 들려온다. 이제는 동경의 대상이 되어버린 그 곳, 율도국처럼 이상적인 그 곳, 그 시절 그 곳에 대한 작가의 울부짖는 소망이 들려온다.

`그래. 짐작했던 대로야. 이쪽 세상은 막혀 있는 세상이야. 막혀 있기 때문에 그림속의 새는 움직일 수가 없어. 아무도 모르고 있을거야. 아무리 말해 주어도 나만 바보 취급을 하겠지.` 작가의 생각이 가득 뭉쳐 있는 이 문장은 이제 결코 가벼이 맘에 닿지를 않는다. 저쪽은 은유의 세상, 여기는 직유의 세상이라 불리는 만큼 처절히 찢겨져 있는 여기. 조야한 우리는 아직도 우리주변의 진정한 벽오금학도를 바라볼 눈을 갖지를 못한다.

이상 추구? 필요없다. 양심의 가치? 필요없다. 물질의 허우대에 온 정신을 빼앗겨 아망을 부리는 우리들, 그런 우리들을 쳐다보는 벽오금학도 인물들의 눈은 애처로워 보인다. 모든 것은 언제나 시작이 현대문명이었다. 그 해석도 마무리도 현대 문명이었다. 이제는 현대문명에서 벗어난 그 무언가를 찾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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