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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1 ㅣ 이외수 장편소설 컬렉션 6
이외수 지음 / 해냄 / 200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시각에도 인간이란 족속의 발이 닿는 모든 곳에서 살육과 전쟁이 자행되고 있다. 생존본능을 위한 마지막 수단이 아닌 욕구본능과 짝짜꿍 손잡고 저지르는 동족상잔의 기가막힌 논픽션 드라마. 문득 어떤 영화에서 본 대사가 생각난다. 기계가 인간에게 한 소리다. `인간의 본능은 인간 스스로를 파괴하는 것이다.` 이렇게 죽고 죽이는 괴물같은 구조 속에 얽혀 있는 우리. 우리는 그 구조를 사회라 부르고 있다.
그 사회라는 어쩔수 없는 무대 속에서 상연되는 <괴물>에는 제법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부끄럼없이 마구마구 등장하는 그 인물들을 보고 있자면 관객들 머리 속이 쉴새없이 산만해 진다. 하지만 그 산만한 분위기 속에도, 그 인물들이 서로 얽혀 있음을 서서히 알아차리게 된다면 당황스러워진다. 사회 각계각층의 인물들이 - 살인마에서 경찰, 전직 심리학자까지- 산만해 보이는 분위기 가운데에서 나름의 질서를 가지고 끈을 잇고 있다는 것이다. 그 끈을 따라가다보면 복잡성에 지루함을 느낄때도 있지만 도처에 널려있는 인물의 매듭을 알아보며 즐거움을 느낄때도 있다.
하지만 <괴물>이 뿜어내는 연극의 내용은 크게 놀랄 게 없다. 한 살인마가 등장하고 살인마가 등장하면 당연히 나와야 할 살인마를 뒤 쫓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주변 인물들의 에피소드들. 사실 범인을 잡는 과정을 보면 추리도 아니고, 액션도 아니다. 연애도 아니고 댄스소설도 아니다. 이렇게 어중간해 보이는 구조를 쳐다보는 관객들은 저마다 평이 갈린다.
`너무 멋졌다. 복잡한 가운데 굴러가는 사건의 진행에 찬사를 보낸다.`
`너무 산만했다. 뭘 나타내고자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실패작이다.`
이 유명한 연극의 평은 이렇게 극과 극으로 갈린다. 복잡한 구조 속에서도 빈틈없는 이야기의 전개에는 전자의 손을 들어주지만 또한 전체적 분위기를 살피면 후자의 손을 들어 줄법하다. 이렇게 밖에서 서로의 의견에 가타부타 참견하고 있을 때 소설 속에서도 그 시선이 극과 극으로 갈리고 있다. `바이오필리아`와 `네크로필리아`. 그 둘은 결코 화해 할래야 할 수 없는 극과 극의 존재다. 그 존재들이 자기의 존재를 합리화하기 위한 전쟁, 그 전쟁의 뒤안이 바로 <괴물>이 흘러가는 나루터다.
바이오필리아의 눈에서는 당연히 네크로필리아가 괴물로 밖에 보일 수 없을게다. 어떻게 인간으로 저럴 수 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네크로필리아의 시선또한 곱지 않다. 저런 미개한 것들. 죽음의 참된 의미를 모르는 너희 미개인들이야 말로 괴물 그 자체다. 이렇게 괴물 뒤집어 씌우기 작전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작전이 벌어지는 전쟁터는 합의를 보고 있으니, 바로 사회다. 작가는 사람들을 주목한게 아니라 이런 사람들을 이토록 미치게 만드는 사회란 괴물을 주목한게다.
소설은 당연히 바이오필리아의 행로를 따랐다. 그리고 네크로필리아에겐 용서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는다. 사회란 공간 속에서 이질적 한 존재는 괴물로 치부될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괴물> 속의 윤현부만이 유일하게 그 이질적 존재를 포용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는 사회에서 벗어나 자연에 머무르고 살고 있는, 유일하게 사회에 독립된 인물이었다. 이외수. 그는 우리가 사회를 그저 사회라 부르는 동안 또 다시 그 만의 시선으로 쫓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작가의 눈에 비친 바이오필리아의 승리는 결코 승리로 비춰지지 않았을 터다. 그 괴물 사회를 독식한 또 다른 괴물의 한 모습...
흔히 이외수 작가를 언어의 연금술사라 한다. 나도 그의 연금술법을 익히기 위해 항상 그의 강의에는 노트를 끼고 다닌 기억이 난다. 내가 이렇게 떠들고 있는 사이에도 책 속에서는 그만의 연금술이 쉼 없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연금술은 결코 호락하지가 않다. 그동안 이외수급 연금술을 즐겼던 분들에겐, 이제 입문을 벗어나 중급의 단계에 다다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