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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 이야기 ㅣ 환상문학전집 4
마가렛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7월
평점 :
품절
나에게 어느날 갑자기 제한된 공간, 제한된 자유속에서 구속당하며 살아야 되는 순간이 닥친다면 어떨까? `잔다르크`처럼 `내 한 목숨 바쳐` 그 상황을 때려 부술까? 아니면 `나 돌아갈래` 외치며 철로 위에서 자살이라도 할까? `설레 설레` 역시 어느쪽도 아니다. 시대가 아니꼬와도 나는 묵묵히 참으며 눌려 지낼게다. 아니면 나 자신도 아니꼽게 만들던지.
여기 나처럼 평범한 노선의 철마를 타고있는 사람이 있다. 오브프레드. 그녀는 자기의 모든 자유를 박탈 당한채, 심지어 자기의 이름마저 빼앗긴채, 이른바 `씨받이` 운명을 선고 받은 길리아드 제국의 평범한 여자다. 핵전쟁후 방사능 잔치에 휩쓸린 인간들. 그 잔치가 너무 흥에 겨운 나머지 팔, 다리, 눈 한짝씩 떼놓고 태어나는 풍류아(兒)들이 아닌 정상아들을 위해 씨받이가 필요하다나?
상황을 봐서는 `평범한`이란 단어가 낄 자리가 아닌듯 싶다. 철저한 계급구조하며 되돌아온 그, `남녀칠세 부동석`. 모든 언행들은 공자님이 봐도 삐질, 땀 한방울. 내가 들먹인 평범함이란 것은 상황이 상전벽해라도 그 속에서 묵묵히 순종하는 것을 가르킨다. 물론, 상황에 묵묵히 적응하는 것을 평범함으로 본다면 말이다.
누가 그랬더라? 아, 정신분석학자들이 그랬을 게다. `모든 사람은 잠재적으로 미칠 가능성이 있다.` 맞는 말이다. 가끔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에 대해 나도 깜짝 놀라곤 하니까. `어머~ 나 미쳤나봐~.` 오브프레드도 인간인 이상 마찬가지. 아, 물론 그녀가 미쳤다거나 미칠것이라는건 아니다.
미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졌다는 것은 보편적 평범함을 벗어 날 수 있는, 일탈의 힘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게 외적으로 표출되었을때에 우리는 의심의 눈길을 힐끗힐끗 주지만 이 시각 현재에도 모든 사람의 내부에는 일탈의 화산이 터질려고 부글거리고 있다. 일탈을 꿈꾸는 개적 자아들. 꿈은 이루어 진다나?
<시녀 이야기>는 그런 일탈과 존속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하는 사람의 심리묘사가 참으로 탁월하다. 마음을 졸이는 스릴러 영화를 볼때의 긴장감을 기억하는가? 그런 긴장감이 여기에도 전혀 독하지 않게 스물스물 배여있다. 절묘히 녹아든 그 긴장감 속에서 독자는 자기자신과 긴장감의 조화를 느낄 것이다. 아, 그렇다고 `내 다리내놔~`하는 귀신 공포물은 아니니 걱정은 붙들어 매시라.
`후다닥~` 영화의 주인공이 탈옥을 시도하는 순간, 그 곳을 마침 걸어오는 교도관. `터벅터벅`. 동시에 호응하는 나의 몸. 심장은 콩닥콩닥 땀은 삐질삐질 `어떡해~ 못 보겠어.` 주거법을 무시하고 밤에 자기방을 슬그머니 나와 돌아다니는 오브프레드. 주인과 몰래 주거도시를 빠져나오는 오브프레드. 다시한번 콩닥콩닥, 삐질삐질. 동시에 땀에 절은 페이지들, 쭈글쭈글.
침소봉대, 과장? 솔직히 소설에서의 긴장감을 이토록 맛있게 접해 본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였다. 더군다나 환상문학 SF 식당에서 이런 맛난 음식을 준다는데에서는 당혹감마저 일게 했던 것이 나의 경험이요, 상황이었다. 그러니 `과장`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로 나의 경험을 일축해버린다면 섭섭할터다.
<시녀 이야기>, 페미니즘의 대가 `마가렛 애트우드`의 작품이란다. 하지만 나로서는 페미니즘을 느낄만한 냄새는 맡지 못했다. 나는 다만 그런 사상을 잠시 벗어나 오랜만에 집안에 걸터앉아 괜찮은 간식하나 즐겼다는 느낌 뿐이었다. 딱 거기까지였고 그것으로 난 큰 만족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