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모습
미셸 투르니에 지음, 에두아르 부바 사진,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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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에 올라 밖을 한 번, 창가에 기대어 밖을 한 번 무심코 쳐다본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수많은 이들이 끊임없이 나의 시야에 뛰어든다. `웃으며 이야기하는 사람, 뛰어가는 사람, 친구를 보고 손을 흔들며 걸어오는 사람, 화를 내며 고함치는 사람...` 사람. 사람.. 사람.....

이런 사람들의 모습들을 가만히 앉아 쳐다보고 있자면 왠지 모르게 삶이 애처롭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들의 소리는 절제된체 보여지는 하나 하나의 행동들, 아련히 멀게만 느껴지는 액자소설 같이, 내 삶에서 보여지는 또 다른 그 들만의 삶. 나의 시야에서 점점이 멀어지는 하나 하나의 삶들, 또 다시 들어오는 다른 하나 하나의 삶들. 모두들 하나같이 아등바등 살아가려는 모습이 딴은 처량하게 비춰지는 때가 있는 거다. 무성영화 같은 무대 속에서 지나가는 인간의 모습들, 그 남겨논 뒤안이 처량하게 보일 때가 있는 거다.

뒷모습. 이처럼 그 뒤란 말을 입안에서 오물거리고 있자면 순수하면서도 쓸쓸한, 그리고 처량한 맛이 살포시 배여 나온다. 나에게서 등을 보이고 있는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그들만의 담담한 삶의 뒤안처. 오히려 그 담담한 뒷모습에서 더 큰, 숨겨진 외로움이 느껴진다. 되려 매너리즘으로의 퇴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뒤`라는 어감이 주는 감미롭고도 그리운 맛은 한번쯤 자기 자신을, 나아가 인간군상을 다시금 한 번 살펴보게 한다. 저기 시야에서 멀어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 오늘따라 그들의 뒷모습에 애절한 눈길을 떼지 못한다.

여기 이 책. <뒷모습>에서는 인간이 지니는 가식적인 모습을 잠시 떠나, 인간의 뒤안이 가지는 그 순수하면서 꾸밈없는 모습을 한 번 살펴보고자 한다. 한 쪽 면에는 큰 사진이, 다른 면에는 글이 자리잡고 있다. 사진은 흑백이라 그 모습이 더욱 좋고 그 자체로 무언가를 호소하고 있어 더 애절하다. 오히려 컬러사진이 뽐내며 어지러이 자리잡고 있었다면 흑백이 주는 고요하면서도 애절한 맛을 느끼지 못했을 게다.

이제 인간군상의 그 뒷모습에, 모노드라마 같은 흑백의 잔영으로 함빡 빠져들고 있노라면 자연 감상적인 내가 된다. 그 뒷모습이 인간의 모습이고, 또한 나의 모습이기에 나의 감정은 뒤얽히게 된다. 하지만 그 얽힘이 결코 불쾌하진 않다. 오히려 뜻밖의 새로움을 줄 뿐. 누가 이 얽힘에서 쉬이 벗어날턴가? 예부터 얽힌 것은 풀기가 어렵다 했다. 그것이 실이든, 감정이든 말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글이었다. 차라리 사진만 실었다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을 보며 적혀있는 작가의 글은 그 사람이 얼마나 유명하든, 중간에 가끔 인용되어 있는 시 한편이 주는 미감(美感)보다 훨 못했다. 사진을 보며 그 애틋함에 무르젖어, 분위기에 도취되고 있으면 글은 거기에 과감히 찬물을 끼얹는 꼴이었다. 감상적인 내가 아닌 분석적인 내가 되길 강요하는 글. 누구든지 이 책을 보며 사진을 분석적으로 잘 `설명`해 주길 바라진 않을게다. 하지만 <뒷모습>에서의 글은 감정이 거의 배제된 분석적 글이다. 번역의 문제일까? 아니면 동서양 정서의 차이일까...

책은 덮었지만 참으로 아쉬운 나의 마음은 덮이지를 못했다. 아직은 덮히지 못한체 그 끝만이 오기를 바라는 나의 안타까운 마음. 하지만 `뒷모습`이 우리에게 주는 여유로움은 짧으면서도 충분히 사색을 즐길 수 있었기에 안타까운 나의 마음을 조금은 누그러 뜨릴 수 있었다. 과연 나의 뒷모습은 어떠할까? 또 다른 누군가에게 나의 뒷모습은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까? 커피 한잔과 함께하는 흑백의 사진들. 나의 모습을 조용히 살펴보기에 결코 어색하지 않은 조합이 될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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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을 사랑하라 - 20세기 유럽, 야만의 기록
피터 마쓰 지음, 최정숙 옮김 / 미래의창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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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시각에도 이라크에는 전쟁의 물결이 쉼 없이 일렁이고 있다. 쏘고, 터지고, 죽고. 옥석구분도 유분수지, 전쟁에서는 성직자건 도둑이건, 부자건 거지건, 너나 할 것 없이 포탄의 머리 하나에 생명이 왔다 갔다 한다. 잘보여도 소용없고 밑보여도 상관없는, 포탄이 가지는 냉정함은 안타까울 따름. 이 의미 없는 정치논리의 연극무대,그 연극은 공포물 그 자체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기자인 피터 마쓰가 보스니아사태 때 직접 현장에서 발로 뛰며,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여과 없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한 편의 전쟁보고서이다. 겹겹이 덮여져 있는 그 보고서를 펼치면 바로 눈앞에 한 편의 비극이, 한 편의 공포물이 상영된다. 같은 나라 속에서 쏘고, 죽이는 모습. 어제는 어깨동무하며 노래부르던 이들이 오늘은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살해, 강간, 고문을 하는 모습은 아이러니 그 자체다.

또한, 그 아이러니한 무대 속에 어김없이 조연으로 등장하는 주변의 강대국들. 그들은 어제나 오늘이나 어김없이 정치논리에 의한 연기를 한다. 조금이라도 인정이 섞여 있으면 NG.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이 골육상잔의 아픔, 주변 국가들의 행위는 그 아픔과 경험을 우리 역시 가지고 있기에 그 현장이 더 비통하고 쓰라리게 비춰진다.

많은 이들이 전쟁의 무서움은 참여자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인식이 없다는데에서 기여한다곤 한다. 그저 위에서 `쏴라. 죽여라.` 하니까 `오냐, 쏘마, 죽이마.`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다던 인간의 목숨이 사라지는 총탄보다 못한 곳 전쟁터. 이런 자의식 없는 행동 속에서, 인간생명은 널부러져 있는 총탄 한 발보다 더 귀중할 게 없어지게 된다. 하지만 사실 그들은 삶의 기로에, 삶의 지옥 저편에 떨어져 있다. 내가 평화를 외치며 총을 내려놓는 순간 바로 죽음을 맞이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들에게 무엇을 바라겠는가? 그저 살기 위해 쏘는 것이다.

전쟁의 진정한 무서움은 바로 지도자에게서 비롯된다. 김일성이 그랬고 히틀러가 그랬고, 부시가 그렇다. 그들이야말로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그저 책상에서 턱이나 괴고 앉아 있는 진정한 살육잠재의 표본이다. 한쪽에서는 죽고 한쪽에서는 휴가나 보내는 그림은 언뜻 상상만 하려고 해도 힘에 부친다.

보스니아 사태 때도 매한가지다. 밀로셰비치. 그는 인간이 야수가 될 수 있음을 원 없이 보여 주었다. 우리는 그의 야수성에 몸서리를 치지만 사실 그 자신은 자기가 야수가 된 줄도 모르고 그저 웃고만 있다. 자신은 악이 아니라며, 그저 평화를 위해 노력한다던 그. 그러면서 뒤로는 사람을 마음껏 능욕하고 살육하라고, 그것이 애국이라 세뇌 시키는 그. 이 치장된 그의 말속에서, 그동안 절망하며 죽어갔던 많은 이들의 의미가 사라진다.

이런 지도자들의 웃음과 현장의 울부짖음이 가지는 아이러니를 <네 이웃을 사랑하라>에서는 잘 드러내준다. 각색되지 않은 사실 그 자체를 내보내는데에서, 우리는 그 자체에 더 경악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리는 살육명령. 복종이 곧 애국이라 세뇌된 군인의 칙살스런 행동들. 어떻게 인간이 저럴 수 있지? 주변 나라는 뭘 하는 거야?

이렇게 사실 그 자체를 보여줌으로 해서 우리는, 각색이 제한하는 사고의 폭을 벗어나, 자기가 생각하고, 자기가 스스로 느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피터 마쓰도 그냥 사실만 전달하겠다 했다. 전쟁반대서도 아니고, 정치비판도 아니고, 그냥 있는 사실 그대로만을 전달하고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사실 전달로써 할 일을 다하고 떠나는 피터 마쓰를 따를 일이 아니다.

우리의 망각 속에서 사라져갔던 수많은 이들의 울부짖음들. 그 상흔이 체 아물기도 전에 또, 지구편 저기서 다른 참상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가 깨닫지도 못한사이 세상을 떠나는 그들의 비명에, 이제는 귀기울여야 한다. 더 이상 망각의 수레에 끌려다니는 모습은 우리에게 맞질 않는다. 이제는 생각해보고, 느껴보고, 자기 스스로 각색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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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임레 케르테스 지음, 박종대, 모명숙 옮김 / 다른우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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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앉아 운명이란게 있을까 생각해 본다. 잘 있던 건물이 허리 아프다며 무너져 내려 사람들이 떼 죽임을 당하고, 잘 날아가던 비행기가 갑자기 땅이 그립다며 곤두박질을 치고, 그런 와중에 요행히도 죽음의 손목을 뿌리치고 살아나오는 사람도 있고. 이렇게 인간의 생명을 담보로 자행되는 피눈물 나는 연극을 지켜 보고 있으면 정말 운명이란게 있는가 보다 하고 녹슨머리가 낑낑 굴러 간다. 물론, 그것이 운명의 가면을 짓눌러 쓰고 눈치만 요리조리 살피다 담을 뛰어 넘는 우연이란 놈의 소행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운명이든 뭐든 우리에게 시뻘건 눈을 치뜨고 달려와 한 방 먹여 정신이 없게 만드는데에는 우리의 무서운 눈초리를 피할 도리가 없다.

<운명>. 임레 케르테스가 소년기에 실제로 겪기도한, 운명의 펀치 위력을 여실히 느끼게 해 주었던, 독일 수용소 체험을 개인적 관점에서 아주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나치의 강제 수용소하면 그 악명이야 하늘 높은 줄도 모르고 자기가 어디까지 치솟는지도 모를 만큼 폭상하는건 익히 알고 있을게다. 15세 소년이 겪어내야만 하는, 결코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장난같은 수용소 생활. 어린 소년이 겪기에는 너무나 잔인한 운명과의 교통사고. 수용소 생활이 너무 힘들어 소년에게 염증이 하나 하나 생길라치면 내 마음은 눅진눅진 내려 앉았고, 소년이 절뚝절뚝 걷지를 못하면 내 생각도 터벅터벅 풀이 죽곤 했다. 그렇게 고생한 소년에게 누구라도 만나면 이런 말을 던지지 않을 수 없을 게다. `끔찍했지? 이젠 모두 잊어버려.`

하지만 소년은 그 잊기를 거부한다. 되려 그 지옥 같은 수용소 속에서도 일말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 있었다고 말해, 듣는 이의 턱이 내려올 수 있는 한계를 가늠해 보는 시험을 한다. 사실 소년은 그 체험이 자신의 머릿속에 걸어 들어온 이상 결코 내 보낼 수는 없는, 그 누구도 가타부타 참견할 수 없는 자기만의 것이라 여긴 것이며 바로 그 혼란스런 운명과의 한판 경기에서 스스로가 극복했기 때문에 절대 그것을 잊을 필요가 없는, 오히려 극복의 대상으로써 행복감마저 찾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거였다. 그래도 이제 괴물 `운명`을 넉다운 시키고 공주 `자유`를 구출했는데도 하필이면 그 때의 악몽을 간직하려는지 주위사람들이 이해의 손길과 닿지를 못하는 건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소년은 분명히 외친다.`만일 운명이 존재한다면 자유란 없다. 만일 자유가 존재한다면 운명은 없다. 이 말은 곧 나 자신이 곧 운명이라는 뜻이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지? 왜 나한테 이런 운명이 찾아 온거야? 아니, 소년은 운명이란게 자신에게 온 것이 아닌 매분 매초가 운명으로 향한 걸음, 자기 자신의 행동 속에서 발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었다. 나 자신이 운명이요, 나 자신을 극복하는 순간이 자유며 그 극복된 운명은 나에게서 싹을 틔운 만큼 악령적인게 아니란 말이다. 그 누구도 탓할 수 없는 자기가 직접 물주고 거름주며 길러낸 운명의 싹. 비록 잘못 커도 책임은 자기 몫이다. 비록 그 때가 지옥이라도 책임지고 간직해야만 하는 것이다.

`나 자신이 곧 운명이다`란 말로써 그 시대가 잊혀지기를 강력히 거부하는 소년, 아니 임레 케르테스는 나 자신이 운명인만큼 자신이 걸어온 나날들을 잊는다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며, 자신이 걸어온 발자취를 자기 스스로가 지워 없애는 거라 말하고 있었다. 흔히 냄비근성이라 안 좋게도 불리우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열기. 우리는 지난 날들의 일에 대해서 그냥 어쩔 수 없었다고 넘기곤 하고, 막상 부각되어도 쉽사리 잊어버리곤 한다. 하지만 그런 처사는 우리자신을 점점 잊어가고 있는 두 눈 멀쩡히 뜨고 자기자신을 소매치기 당해버리는 청맹과니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나치 수용소의 비극만을 나타낸게 아닌 숙명적 운명의 정복론을 과감히 내세운 <운명>. `운명은 없다`고 나타내는 원제로 전세계인의 동정과, 공감과 반성 모두를 얻어낸 <운명>은 `노벨 문학상`이란 대어를 낚기에는 결코 과분하지 않은 너무나 알맞게 드리워진 낚싯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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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 곡예사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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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 곡예사>. `내가 물위를 처음 걸었던 것은 열두 살 때였다.`라는 환상적이고 도발적인 문장으로써 그 거대한 문을 화려히 연다. 하지만 써커스 같은 현란한 분위기로 치장된 그 말은 자칫 현실에서는 있을 법 하지 않은 그저 허무맹랑스럽게만 보일 위험이 있다. 그렇게 요리에는 위험해 보이는 재료에도 불구하고 폴 오스터의 구수한 입담에 버무려지게 되니 나 자신도 푹 매료되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를 않는, 아주 적당한 맛으로 간이 맞추어 진다. `물위를 걷는다.` 이제는 바로 다음 문장에 서서히 구미가 당기기 시작한다.

<공중 곡예사>는 월트란 한 아이가 예후디란 사부를 만나 공중을 나는 법을 익히고 그 뒤의 파란만장한 삶을, 판타지 같은 비현실적 소재를 아주 현실적으로, 너무 현실적이라 마치 공중으로 나는게 실제 가능한거라 느껴지게끔 그려낸 작품이다. 슈퍼맨처럼 훨훨 나는게 아닌, 조금만이라도 떠오르기 위해 온갖 고통을 감내하는 월트의 모습은 마치 누구라도 연습하면 가능할것 처럼, 전혀 유치하지도 불가해하지도 않게 보이는 멋지고 교묘한 모습이었다.

이런 환상적 분위기 속에서 월트와 예후디 사부가 함께 그려내는 그 굴곡있는 삶을 보고 있자면 저자가 말한 `그러나 나는 아무 대가도 없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는 없으며, 원하는 것이 크면 클수록 그에 따르는 대가도 더 크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란 말을 실감나게 해준다. 언제나 우연으로써 삶의 전환기를 맞닥들이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들이지만 사실은 그게 우연을 가장한 세상의 마땅한 법칙이란 것을.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토해 낼 줄 알아야 한다는, 공짜란 없다는 법. 이제 그 물위를 걷는다는 것도 처음처럼 간단해 보이지는 않는다.

온갖 굴곡있는 삶 - 공중곡예사에서부터 마피아의 실력있는 똘마니에 이르기까지 - 을 힘들게 달려왔던 월트도 마침내는 시간의 위력에 무릎을 꿇으며 말년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다 마침 자신의 재능을 사부가 발견한것처럼 그 자신도 한 아이의 재능을 우연히 발견하게 된다. `그래, 이제 제2의 월트가 탄생하는 거야.` 하지만 `이제는 예후디 사부 같은 사람도 없고 또 나처럼 멍청하고 완고하게 고통을 감내하는 아이도 없다.`는 생각이 든 순간 자조하며 자신의 설레이는 마음을 한숨으로 누그러 뜨려 버린다. 그랬다. 월트도 이제는 고통을 감내하는 것은 멍청한 짓으로 간주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었다.

월트는 정말이지 그게 안타까운 것이다. 변치않을 것만 같던 시공간의 급속한 발전은 인간정신을 잃어버린지도 모른체 앞만 보며 달려 왔고 정신을 몽땅 잃어버린 이제는 그 누구도 대가를 치루면서까지 자기것을 희생하려 하질 않는다. 그저 요행을 바라며 천재일우만을 언제 오시나 목 빠져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월트의 뼈를 깎는 고통을 통한 자기 발전에는 그저 냉냉한 시선을 보낼 뿐이다. 모두들 자기를 조금씩 조금씩 증발시킨다면 하늘을 나는 위업조차도 누구나가 달성할 수 있는 것인데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만 속속들이 갇혀 있는 모습이 누구보다 못내 안타까운 월트.

`당신은 자신이기를 멈출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출발점이고 그 밖의 모든 것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자기자신이기를 멈추기보다는 남들도 자신처럼이기를 바라는 지금의 우리들에게 향한 월트의 소리없는 외침. 우리 곁을 휑하니 지나쳐 저 멀리 솟구친 <공중 곡예사>는 스피디하고 흥미스런 그 질주의 마지막에 피할 수 없는 하나의 파장을 일으켜 놓는다. 이제 그 파장에 고통받을 줄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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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치의 부리 - 갈라파고스에서 보내온 '생명과 진화에 대한 보고서'
조너던 와이너 지음, 이한음 옮김, 최재천 추천 / 이끌리오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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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 진화론. 아직까지도 특정 종교와의 지루한 전쟁을 끝내지 못하고 서로 가타부타 참견만으로 언성을 높이고 있다. 누가 옳든 그르든, 언제 그 논쟁이 끝나든 간에 서로의 사상이 담긴 하나의 이론으로 보는 것이 다원주의 사회의 도리인듯 하고 그것이 서로에게 큰 상처를 입히지 않는 유일한 방편 일 것이라 본다. 물론 결국에는 한쪽은 승리의 미소를, 한쪽은 패배의 피눈물을 흘리겠지만... 결과야 어떻든 간에 그런 생각의 기류에 편승하고 보니 나는 그 쪽, 진화에 눈길이 간다.

갈라파고스 군도. 그 옛날 다윈이 <종의 기원>을 펴낼 수 있게끔 모체가 되었던 그 곳. 이제 그 곳은 다윈이 아닌 그의 추종자들이 못다한 다윈의 연구를 되물림 받아 이뤄내고 있는 장소로 변모했고, 그 성과들은 다윈이 대만족의 미소를 지을만큼 확고한 것들이다. 특히나 이 <핀치의 부리>는 그 중에서도 대단한 것으로, 그랜트란 성을 가진 한 부부가 근 20년을 이 섬에 거의 눌러 살다 싶이 하며 `핀치`라는 새 하나로만 연구를 한, 결코 범상치 않은 보고서 일기다.

거의 20년이라는 세월을 무인도인 그 좁은 섬에서 짓눌려 지낼 수 있을까? 그것도 연구라는 하나의 열정만으로. 집안에서 편히 앉아 담배나 뻐끔뻐끔 피며(사실 담배는 안핀다.) 한가로이 책장이나 넘기고 있는 나에게는 경악 그 자체다. 이제 조용히 그 분들의 성과에 깊이 머리 조아리며 탐독을 준비한다.

우리는 사실, 어릴 때 배워서라도 갈라파고스 군도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리고 각 섬마다의 생물들이 조금씩 차이가 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하지만 막연한 이미지만을 가지고 있을 뿐, 실제로 그 섬에서는 무엇이 일어나며 무엇이 어떻게 변하는지는 정말 궁금한 미스테리 일 수 밖에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가볼 수가 없으니. 하지만 드디어 <핀치의 부리>에서 우리의 그 궁금의 갈증을 말끔히, 아주 깨끗이 해소해 줄 지식의 냉수를 마련했다. 자, 모두 자기의 잔을 준비하시라.

1mm의 부리의 길이 변화만으로도 전체 생물의 장래가 달리고 몇 g의 체중차이로도 자연이라는 생태에서는 밀고 밀리는 작용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울 수 밖에 없다. 사실 나처럼 일반적인 지식만을 가진 사람은 참으로 믿기 힘든 광경이라고 토로 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었고 그 사실은 그랜트 부부가 몸소 실천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 거짓없는 자연의 연극. 편한 집에서 두다리 쭉 뻗고 관람 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람들의 지적 갈망에 또 하나의 큰 기여를 하는 것이다. 지적 갈망의 향유. 그 매력적인 잔치인 <핀치의 부리>.

<핀치의 부리>에서는 알 듯 모를 듯, 쉬울 듯 어려운 진화에 대해, 그저 이론 전개가 아닌, 실제 관찰과 연구의 결과로써 유추를 하는 방식이라, 과학쪽에는 별반 지식이 없는 나에게도 큰 무리없이 다가왔다. 오히려 실제 현장에 와 있는 듯한 생동감에 들떠있었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비록 진화에 대한 완벽한 이해의 체계는 갖추지를 못했지만 실제의 관찰과 연구를 통한 그 과정에 나름의 틀을 확고히 세울 수 있었던것은 크나큰 수확이었다.

이제 그 크나큰 진화란 이론에 그저 멍하니 겁만 쥐어먹고 있던 분들에게도 그 문이 활짝 열렸다. 우리는 그 문을 열게끔 이제껏 노력해온 분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당당히 걸어들어가기만 하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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