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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임레 케르테스 지음, 박종대, 모명숙 옮김 / 다른우리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가만히 앉아 운명이란게 있을까 생각해 본다. 잘 있던 건물이 허리 아프다며 무너져 내려 사람들이 떼 죽임을 당하고, 잘 날아가던 비행기가 갑자기 땅이 그립다며 곤두박질을 치고, 그런 와중에 요행히도 죽음의 손목을 뿌리치고 살아나오는 사람도 있고. 이렇게 인간의 생명을 담보로 자행되는 피눈물 나는 연극을 지켜 보고 있으면 정말 운명이란게 있는가 보다 하고 녹슨머리가 낑낑 굴러 간다. 물론, 그것이 운명의 가면을 짓눌러 쓰고 눈치만 요리조리 살피다 담을 뛰어 넘는 우연이란 놈의 소행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운명이든 뭐든 우리에게 시뻘건 눈을 치뜨고 달려와 한 방 먹여 정신이 없게 만드는데에는 우리의 무서운 눈초리를 피할 도리가 없다.
<운명>. 임레 케르테스가 소년기에 실제로 겪기도한, 운명의 펀치 위력을 여실히 느끼게 해 주었던, 독일 수용소 체험을 개인적 관점에서 아주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나치의 강제 수용소하면 그 악명이야 하늘 높은 줄도 모르고 자기가 어디까지 치솟는지도 모를 만큼 폭상하는건 익히 알고 있을게다. 15세 소년이 겪어내야만 하는, 결코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장난같은 수용소 생활. 어린 소년이 겪기에는 너무나 잔인한 운명과의 교통사고. 수용소 생활이 너무 힘들어 소년에게 염증이 하나 하나 생길라치면 내 마음은 눅진눅진 내려 앉았고, 소년이 절뚝절뚝 걷지를 못하면 내 생각도 터벅터벅 풀이 죽곤 했다. 그렇게 고생한 소년에게 누구라도 만나면 이런 말을 던지지 않을 수 없을 게다. `끔찍했지? 이젠 모두 잊어버려.`
하지만 소년은 그 잊기를 거부한다. 되려 그 지옥 같은 수용소 속에서도 일말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 있었다고 말해, 듣는 이의 턱이 내려올 수 있는 한계를 가늠해 보는 시험을 한다. 사실 소년은 그 체험이 자신의 머릿속에 걸어 들어온 이상 결코 내 보낼 수는 없는, 그 누구도 가타부타 참견할 수 없는 자기만의 것이라 여긴 것이며 바로 그 혼란스런 운명과의 한판 경기에서 스스로가 극복했기 때문에 절대 그것을 잊을 필요가 없는, 오히려 극복의 대상으로써 행복감마저 찾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거였다. 그래도 이제 괴물 `운명`을 넉다운 시키고 공주 `자유`를 구출했는데도 하필이면 그 때의 악몽을 간직하려는지 주위사람들이 이해의 손길과 닿지를 못하는 건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소년은 분명히 외친다.`만일 운명이 존재한다면 자유란 없다. 만일 자유가 존재한다면 운명은 없다. 이 말은 곧 나 자신이 곧 운명이라는 뜻이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지? 왜 나한테 이런 운명이 찾아 온거야? 아니, 소년은 운명이란게 자신에게 온 것이 아닌 매분 매초가 운명으로 향한 걸음, 자기 자신의 행동 속에서 발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었다. 나 자신이 운명이요, 나 자신을 극복하는 순간이 자유며 그 극복된 운명은 나에게서 싹을 틔운 만큼 악령적인게 아니란 말이다. 그 누구도 탓할 수 없는 자기가 직접 물주고 거름주며 길러낸 운명의 싹. 비록 잘못 커도 책임은 자기 몫이다. 비록 그 때가 지옥이라도 책임지고 간직해야만 하는 것이다.
`나 자신이 곧 운명이다`란 말로써 그 시대가 잊혀지기를 강력히 거부하는 소년, 아니 임레 케르테스는 나 자신이 운명인만큼 자신이 걸어온 나날들을 잊는다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며, 자신이 걸어온 발자취를 자기 스스로가 지워 없애는 거라 말하고 있었다. 흔히 냄비근성이라 안 좋게도 불리우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열기. 우리는 지난 날들의 일에 대해서 그냥 어쩔 수 없었다고 넘기곤 하고, 막상 부각되어도 쉽사리 잊어버리곤 한다. 하지만 그런 처사는 우리자신을 점점 잊어가고 있는 두 눈 멀쩡히 뜨고 자기자신을 소매치기 당해버리는 청맹과니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나치 수용소의 비극만을 나타낸게 아닌 숙명적 운명의 정복론을 과감히 내세운 <운명>. `운명은 없다`고 나타내는 원제로 전세계인의 동정과, 공감과 반성 모두를 얻어낸 <운명>은 `노벨 문학상`이란 대어를 낚기에는 결코 과분하지 않은 너무나 알맞게 드리워진 낚싯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