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무 7조 - 정치 격동의 시대, 조은산이 국민 앞에 바치는 충직한 격서
조은산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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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청원 게시판에 어떤 글이 하나 올라왔다고 한다.

현대판 상소문이라 불리며 많은 이들이 그의 간언에 무릎을 쳤다고 한다.

혼군에게는 분에 넘치는 충언이거늘 망조가 든 나라는 반대편 쪽 임금이 나오기 전에는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들 수근 거렸다.

아이고야. 헬조선은 곧 망한다. 대한민국은 어디로 가고 있나요.



시무7조. 신라 시대 최치원이 진성여왕에게 올린 '시무십여조'를 패러디한 글로 국민청원게시판에 올라와 공개 하루 만에 20만 명 이상의 동의를 이끌었고 열렬한 지지와 반박글이 수없이 이어졌다고 한다.


내가 자꾸 이렇다고 한다. 로 주워들은 이야기인 것을 강조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처음 이 '시무7조'에 대해 들었던 것은 의외의 인물. 나의 어머니. 우리 엄마!

못난 자식들이 부모가 될 때까지도 뒷바라지해 주시며 팍팍한 집안 살림을 윤기나게 가꾸어 가시는 엄마는 정치에 큰 관심은 없으셨다. 다행히 나의 가족은 강한 정치색이 없었고 각자의 정치적 입장을 상대방에게 강요하거나 명절날 정치 얘기가 나와 집안싸움이 나는 경우도 전혀 없었다. 한데 어느 날 갑자기 '시무 7조'를 보았느냐 물어보셨다. 현대판 상소문이 올라왔단다. 너는 젊은 애가 왜 그 내용을 모르니. 지금 그 얘기로 세상이 얼마나 들썩이고 있는 줄 아니. 내가 무관심한 사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그래서 찾아봤다. '시무7조'를?? 아니 '시무7조'에 대한 이야기를.

말장난이겠거니 했다. 글 꽤나 쓰는 사람이 나타났나 보네. 극좌든 극우든 어딘가의 끝에 계신 분이겠거니.

구독자 수를 늘리기 위해 자극적인 말을 쏟아내는 유튜버와 같은 사람이 아닐까. 상소문이라니.

대충 몇 개의 짤막한 기사를 보고는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때 그 '시무7조'가 책으로 나왔다고 해서 없는 시간을 쪼개서 읽었다. 회사 업무의 이슈와 잦은 야근으로 잠이 부족한 때였다. 그래도 책으로까지 나온 이 얘기가 정말 궁금했다. 지하철에서 10분, 버스에서 5분 등등 책을 펴고 한 페이지를 미처 읽지 못한 때도 있었다. 여러 가지 의미로 흥미로웠다.




내용을 말하기 전에, 나에게 있어서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글이 화려하다는 것이다.

이런 나는 길가의 돌멩이나 토끼풀처럼 흔한 30대 가장이다.

>>> page 13 시대 단상 - 그러지 않을 수 있었다. 중에서


세상이 그를 지켜주었듯 그 역시 세상 모든 이를 지켜줄 수 있도록. 그리고 그런 날에는, 내 힘든 글도 더는 덜덜거리며 울고 있지 않으리라.

>>> page 20 시대 단상 - 그러지 않을 수 있었다. 중에서


청천이 바래어 황천이 되었음에 백로는 날아올라 궤적 속에 명확했고, 보름달은 빛을 잃어 기울었는데, 별은 깊어 그 자리에 형형했다.

>>> page 103 월하백서 - 달에 베인 세상 중에서


봄은 다가온 듯 멀었고 따스한 듯 시렸다. 의식처럼, 근정전 앞 품계석이 하나둘씩 뽑혀 멀리 내던져졌다. 봄날의 기운은 덥지 않거나 혹은 춥지 않거나 했는데, 정랑의 기세는 이미 죽였거나 혹은 죽이려 하거나 했다. 도성 전체에 검붉은 꽃잎이 흩날렸고 진한 봄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 page 115 월하백서 - 달에 베인 세상 중에서



무협 소설 같기도 하고 어느 시인의 시 같기도 하고 수필집 같기도 하다.

글의 겉만 보면 정치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이다.




내용은 예상했듯이 굉장히 호불호가 갈릴 것 같다.

결론적으로 나는 불호이다. 나와 정치적 견해가 달라서라기보다는 이 화려한 글들의 내용을 잘 따라잡을 수가 없어서이다.

아마도 나의 무식함 때문이겠지만 변명을 하자면 너무나도 화려한 비유에 그가 하고자 하는 얘기를 정확하게 알아듣지 못했다.

저자의 개인사와 현 시국에 대한 이야기가 내 속에서 잘 버무려지지가 않았다.


어렴풋이 ... 현재 잘못된 정치/정책으로 국민들이 고통받고 있으니 대통령과 정치인들과 국민 모두 변화해야 한다.라는 것인가 싶지만 그보다는 심오한 내용 일 텐데 무릎을 치며 동의할 수도 없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고 비난할 수도 없다.

뉴스에서 내내 나오는 부동산 정책의 실패, 대선을 앞두고 싸움의 씨앗이 되고 있는 기본소득이나 기본 주택, 영원한 숙제로 남을 것 같은 뻔뻔한 일본과의 실리외교, 불공정, 내로남불 그리고 실망.


책에 대해서 쓰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실망.

나도 몇 년 전 추운 겨울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었을 때 어떠한 희망에 들떠 있었다.

지금은 이렇게 춥지만, 들고 있던 촛불이 꺼지고 롱패딩을 입고 버스가 끊긴 길을 걸어 멀고 먼 집으로 걸어가면서도 이 시기만 지나면 새로운 세상이 올 것 같은 희망, 세상을 바꾸는 그 현장에 나도 촛불 하나를 들고 있었다는 뿌듯함.

어떤 세상일지 눈앞에 그려지지는 않았지만 분명 올 것이다. 내 옆의 사람도 내 뒤의 사람도 저 멀리 보이는 아빠 어깨 위에 앉은 저 아이도 우리 하나하나는 약하지만 우리가 저 위로 외치고 있었다. 똑바로 하라고. 그러니 세상이 바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지는 않았다.

나의 삶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나이를 더 먹었고 더 취약계층이 되었으며 저 위도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실망했다. 분노, 슬픔, 절망, 체념 등이 버무려진 '실망'의 눈길로 보면 저자가 맞다.

현대판 상소문이라도 올려 이 실망감이 나아진다면 나는 그를 열렬히 지지하겠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힘들게 깨달았으니 그저 덜 실망하기만 한다면.


이 글이 현재의 청와대만을 저격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저자가 꿈꾸는 '상식이 지배하는 세상'이 이번에도 틀려먹었다는 사실이 그에게 키보드를 두드리게 한 것이 아닐까.

헬조선의 윗분들이 이 상소문을 제대로 읽었는지 모르겠다.


촛불의 힘밖에 없던 나는 어차피 이도 저도 없기 때문에 공정이든, 공짜밥이든, 미래든 알게 뭐냐라고 치부할 수 있지만 손에 쥔 권력과 돈을 절대로 놓을 수 없는 수많은 윗분들은 이 글을 읽었을까.



어느 분들은 마치 자신의 비호 글인 양 읽었고 어느 분들은 이 글이야말로 우리당의 나팔수라고 생각했는지 몰라도

나의 바람은, 이 글이 어느 한편에 서서 반대편을 손가락질을 하는 글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 누구든 그 손가락의 주인이 될 수도 있고 그 손가락 끝에 서 있을 수도 있다. 서로의 반대편에 서 있는 이 그림이 없어지고 저자의 상소문이 나비효과가 되어 역사에 남을 존경할만한 대통령이 나타나기를 바래본다. 지금 깨어지고 부서진 이 상황이 지나고 나면 삼삼오오 모여서 적당히 윗분들 욕을 하며 막걸리를 마시는 정도의 평화로운 나라가 되기를 바래본다. 그리고 더 나은 세상이라 피부로 느낄 때까지 내가 깨어있기를 바래본다.


저자가 극으로 빠지지 않고, 나와는 다른 방향을 보더라도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바라는 그 끝에서 기분 좋게 만날 수 있기를 바래본다.



** 내 집이든 남의 집이든 내가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곳이라면 깔끔하게 치우고 사는 것이 맞다. 세를 살아 짐승처럼 살았다는 내용은 없었으면 좋았겠다. 내 집의 소중함은 이삿짐 박스를 다 풀기도 전에 다시 그 박스를 트럭에 실어야 하는 비극에서 나온다 생각하는 나니까.


** 다주택자에 대한 생각을 하다 보니 '꼬리에꼬리를무는그날이야기' 중에서 박흥숙 사건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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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 미제라블 - 인간의 잔혹함으로 지옥을 만든 소설
빅토르 위고 지음, 서상원 옮김 / 스타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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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레 미제라블 (Les Misérables) 이란? 장발장, 훔친 빵, 탈옥수, 뮤지컬!

 

책이나 뮤지컬을 못 봤어도 아주 익숙한 그 이름 장발장. 너무 익숙한 나머지 '흥덕 장씨' 의 장발장씨 같은 느낌.

 

그 장씨 아저씨가 가난으로 인해 빵을 훔쳐 징역살이를 하게 되었고 억울한 옥살이에 탈옥을 시도하다가 ..

 

아... 시도하다가.. 까지 밖에는 모르겠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어디선가 들어본 것도 같고 다른 책에서 읽어본 내용인 것도 같다.

 

 

그러고 보니 이 소설을 읽어보지 못했구나.

 

장발장님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갔는가. 그 빵은 대체 무엇이었나. 그는 결국 어떻게 되었나.

 

 

 

 

책의 제목인 레 미제라블. 왜 장발장이 아니고 레 미제라블일까.

 

장발장의 이야기임에 틀림없으니 장발장이라고 하면 됐을 텐데.

 

책을 받고 책의 표지와 제목을 보고 나니 혹시 내가 아는, 예상하는 내용과는 다른가 싶어서 제목부터 찾아봤다.

 

 

레미제라블, 레미제라블 하고 불러서 하나의 단어인 줄 알았는데 '레 v 미제라블' 이다.

 

레 미제라블 (Les Misérables) : 불쌍한 사람들. 이라고 검색되는데

 

단어 자체로 사전을 찾아보면 Misérable은 매우 가난한, 극빈의, 비참한, 비루한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책을 읽고 나니 알겠다.

 

불쌍한 장발장, 가련한 코제트, 비참한 팡틴 그리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많은 불쌍한 사람들.

 

그리고 2021년을 살아가고 있는 많은 레 미제라블.

 

 

 

 

차례로 보면 시작은 '팡틴' 이지만 어쩐지 허름한 차림의 남자와 성인과 같은 주교의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장발장의 이야기다.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가난한 누나와 누나의 일곱 아이들을 위해서 빵을 훔친 장 발장.

 

소설 속에서도 나오듯 닥치는 대로 일했으나 입에 풀칠하기에도 바빴던 그들의 삶.

 

어린 일곱 조카를 위해서 빵을 훔쳤고 감옥에 가게 되었으며 누나와 어린아이들이 뿔뿔이 흩어져 버린 것을 알게 된 후 탈옥을 시도한다.

 

 

 

이 소설 속에서 가장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2군데 있는데

 

하나는 장발장이 빵을 훔쳐서 5년의 징역형을 받은 것은 너무나도 억울하지만 계속 탈옥을 시도해서 14년이라 가중처벌을 받게 되어 결국은 빵 하나로 19년의 징역살이를 했다는 것이다.

 

너무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어도 탈옥을 하지만 않았더라면 누나도 조카들도 더 빨리 도울 수 있었을 테고 극악무도한 흉악범이라 불리지도 않았을 텐데 잡힐 것을 알면서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그래야만 했을까. 탈옥을 하지 않았어야 했는데 말이다.

 

둘째로는 소설 속의 모두에게 곰팡이 같은 존재인 '테나르디에'를 왜 살려두어야 했을까. 좀 더 비참한 꼴이 되었어야만 했다. '레 미제라블' 처럼 죽음보다 삶이 더 고통스러울 때도 있다. 그러니 만일 작가가 그를 살려두어야 했다면,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비참하도고 비참한 꼴이 되었어야 했다.

 

 

그래. 권선징악이란 현실과는 먼 얘기인 것은 맞다.

 

 

우리가 흔히 알듯이 빵 하나로 19년을 살고 나온 장발장은 또다시 절도를 한다.

 

굶주림과 추위에서 구해준 주교님의 은식기를 훔친 것이다.

 

주교님이 재워준 대가로 돈을 요구한 것도 아니고 그 은식기로 갑자기 엄청난 부자가 될 것도 아닌데 장발장은 그 식기를 훔쳐 달아났고 형사에 잡혀 주교님 앞에 끌려온다. 그때 주교님은 '내가 주었다'라고 하시며 은촛대까지 주신다.

 

 

 

 

그 일이 모든 것을 변화 시켰다.

 

 

책이 무척 두껍고 많은 인물이 나오고 여러 사건이 얽혀 있음에도 내가 이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첫 장 위주로 말하는 것은 이 일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전과자라고 모두가 손가락질하며 잠도 재워주지 않고 따뜻한 수프 한 접시 주지도 않았을 때

 

비앵브뉘 주교만이 그를 도왔고 그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장발장이 더 이상 장발장이 아닌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날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장발장으로 책이 끝나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과거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래도 만일 어떠한 기회가 있다면 바뀔 수도 있는 게 사람이기도 하다.

 

물론 일하다 보면 자주 듣는 얘기가 '사람 안변해.' 라는 말이기도 하고 실제 겪은 바로도 사람이란 참 변하지 않더라.

 

그래도 어떠한 기회?계기?상황? 들을 만났을 때 변할 수도 있다. 장발장이 만난 그 주교님이 그를 변화시킨 것처럼.

 

 

아니 어쩌면 변한 것이 아니겠다.

 

장발장은 악인이 아니었다. 실제 빵을 훔쳤고 절도죄로 처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조카들을 위해서였고 누나와 조카들의 삶이 부서진 것을 알고는 탈옥을 감행했다. 그는 그 누구도 일부러 해하지 않았다. 주교의 은식기를 훔친 도둑임에는 맞지만 악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새벽에 주교님의 집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던 것은 그의 내면에는 또 다른 장발장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지.

 

 

책을 읽는 내내 장발장을 응원하게 된다.

 

선과 악, 죄와 벌 이렇게 구분 짓지 않고 그 어떠한 어려움과 비참함, 고통이 있더라도 인간의 고결함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라게 된다. 행복해지지는 못하더라도 불행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아 장발장. 빵을 훔치던 장발장은 지금도 어디에나 있지만 우리들을 감싸주는 비앵브뉘 주교님을 어디에 계실까.

 

'현실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잔혹함으로 지옥을 만든 소설' 이라고 설명되어 있지만 우리의 현실이 더욱 팍팍해서인지 지금보다 더한 지옥이었다라고 까지는 느껴지지 않는다. 슬픈 얘기지만 많은 사람들이 '팡틴'과 같이 죽어가고 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옳은 방향으로 간다면 그로 인한 영향은 여러 사람에게 미치게 된다. 우리 각자가 변화된 장발장이 되면 좋을 텐데. 작가가 말고자 했던 것이 지옥 속에서도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하는 그것이 아닐까 싶다. 어느 시대에 살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왜 자꾸 탈옥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더럽고 추악한 손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은데 말이지.

 

 

 

** 최근에 '꼬리에꼬리를무는 그날이야기'라는 프로는 보는데 그런 말이 나온다. "내가 스스로 변하는 모습을 보여야 변하는 거죠.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느냐는 그 사람이 떠날 때 보면 알아요."

 

 

** 이제는 영화를 보아야겠다. 장발장 역에 휴 잭맨이 어울릴지 너무 궁금하다.

 

 

 

 

 

※ 위의 글은 도서리뷰단에 선정되어 해당 출판사가 무상으로 제공한 책을 읽고 쓴 개인적인 소감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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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진달래꽃 (1925년 애문사) - 1925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 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김소월 지음 / 더스토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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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 어느 작은 회사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퇴사를 결심하고 사직서를 내며 앞으로 직장인이 아닌 시인으로 살 거라고 했었다.

그때 사장님께서는 몹시 당황해하시며 전혀 이해를 못 하셨지만 결국엔 "그래.. 자네에게 어울릴 것도 같군."이라고 말씀하셨다.


왜 하필 시인이 된다고 했을까. 그냥 공무원 시험공부를 하겠다거나 몸이 아프다거나 집에 일이 생겼다고 해도 됐을 텐데 말이다.


나의 솔직한 바람은,

정말로 시인이 정말 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김소월'과 같은 시인 말이다. 막연하지만 간절하게.


[진달래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으로 시작하는 이 시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시를 몰라도, 시를 싫어하거나 비웃는 사람이라도 이 시의 첫 구절은 알 것이라 확신한다.


20년 전쯤 (찾아보니 2003년도) '마야'라는 가수가 [진달래꽃] 이 시를 노래로 불렀었다. 개인적으로는 록 음악으로 불린 '진달래꽃'은 시가 가지고 있는 그 특유의 한이 서린 슬픔과 처절한 안타까움을 담아내지는 못했다고 생각한다. 내지르는 그런 슬픔이 아니거든요.


하지만 그 노래를 들은 청소년들이 '진달래꽃'을 알게 되고 그로 인해 김소월 시인에 대해 좀 더 알게 되었을 테니 장점도 있는 건가.


책의 소개처럼 한국인이 사랑하는 대표 시인의 시집.


이 많은 시 중 노래로 만들어진 시가 하나 더 있다. 내가 아는 바로는.

바로 '개여울'이다.


노래로 먼저 알았던 '개여울'이 김소월 시인의 시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가수 심수봉이 부른 노래인데 가사가 너무 아프고 노랫말과 가수의 목소리가 너무 잘 어울려서 참 좋아하는 노래인데 그 가사가 바로 김소월 시인의 작품이었다.


[진달래꽃]에서 '개여울'을 보았을 때 어찌나 반갑던지.


어쩐지!! 라고 생각했다.

어쩐지. 이렇게나 아프도록 처연하지만 결코 질척거리지 않는 그 미묘한 감정의 표현이라니.

요즘 말로 하자면 결코 힙하지 않은 이야기다.

쿨하지 못하고 답답하게 속앓이 하는 이별.

하지만 세상이 아무리 백번천번 변해도 어디에나 그런 이별이 있다. 모두가 헐리웃 스타들처럼 살 수는 없다.

만일 허구를 논한다면, 속앓이 하는 이별보다는 쿨한 이별이 더 가까울 것이다.


그래서 이 시집의 사랑과 이별은 옛날 옛날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순애보 가득한 여인을 연상시킨다. 익숙한 감정에 나도 모르게 동화돼 버린다.

한국인의 정서에 딱 맞는 시를 아주 적절한 우리말을 사용하여 빚어내는 시라니. 금세 마음이 젖어든다.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고등학교 때 수업 시간에서 들었던 해석이 전혀 생각나질 않는다. 그저 시로 다가온다. 나의 마음을 굉장히 흔들어놓는다.


이런 시인에게 이러한 시집이 1권뿐이라니 너무 안타깝다.


책의 마지막에 짧게 김소월 시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진달래꽃] 1권을 남기고 끝내 음독자살로 생을 맞이한 김소월 시인.



이렇게나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시로 남게 된 것을 안다면 슬픔 속에 생을 마감한 이 시인도 조금은 기뻐할까.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슬픔과 한을 노래했다고 하지만

이 시집을 읽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는 그저 자신의 슬픔을 노래한 것이다.'


나는 [진달래꽃] 같은 시를 쓰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그건 진심이었다.



** 책 표지가 아주 마음에 든다! 1925년 초판본 디자인이라 시집과도 잘 어울리고 무엇보다 표지 질감이 천이라 좀 더 '진짜 시집'을 읽는 기분이다.


** 내가 좋아하는 시는 '먼 후일' 이다..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 page 10 '먼 후일' 중에서


** 마야의 '진달래꽃'을 부르던 청소년들 중에는 진달래꽃=노래 가사=마야의 노래 로만 기억해서 국어 시험에서 '진달래꽃을 쓴 시인의 이름은...?에 '마야'라고 적어서 틀리기도 했다나 뭐라나.





※ 위의 글은 도서리뷰단에 선정되어 해당 출판사가 무상으로 제공한 책을 읽고 쓴 개인적인 소감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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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새움 세계문학
조지 오웰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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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

- '동물농장' 양들의 외침.

2019년 어느 밤 반쯤 깨어 있고 반쯤 잠이 든 상태로 팟캐스트에서 흘러나오는 [동물농장]의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저 귀가 심심해서 틀어 놓은 팟캐스트라 내용은 거의 기억이 나질 않지만 공산당, 소련, 영국 그리고 돼지 책의 내용에 관한 이야기 가 잡담에 섞여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도 난 왜 오래오래 이 책의 제목을 기억하고 있었을까.

잠결에도 '나중에 꼭 읽어봐야지..' 했었다.

1984의 저자 조지 오웰이 쓴 책이라서 그런가.

[동물농장]이라는 제목이 흥미롭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 책을 읽고 이렇게나 슬프고 안타깝고.. 절망에 빠지게 될 줄 미리 알았던 걸까.



[동물농장] 말 그대로 동물농장이다. 동물들만이 존재하고 그들에 의해서 운영되는 농장.

줄거리를 적어야 할까 고민이 된다.

책을 읽고 난 후의 나의 감정은 슬픔과 옅은 분노였는데 책의 내용이 일반적인 의미와는 다르게 '생생'했기 때문이었다.

이건 책을 실제로 읽어야만 알 수 있는 느낌이고 미리 내용을 다 알아버리면 재미가 반감될 수도 있기 때문에 등장인물과 그들의 특성 그리고 그들이 했던 모든 일들을 내가 읽은 대로 써버려도 될지 모르겠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이 거의 없을 거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렇지만 조금은 얘기해도 괜찮겠지..?



[동물농장]의 첫 문장에는 "장원 농장" 과 " 존스 씨"가 나온다.

제목이 동물농장인데 장원 농장이라는 단어가 나오니 의외였다. 존스 씨라니..? 동물들은 어디로 갔고...?

게다가 장원 농장이라니 이건 무슨 뜻이지?

책을 펴자마자 읽게 되는 옮긴이의 '일러두기'를 보면 '장원 농장'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별 뜻이 없는 Manor 농장인 줄 알았더니 의외로 중요한 뜻이 담겨 있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장원 농장-동물농장'이라고 부르는 이 호칭 안에 담긴 뜻이 결국은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한마디로 표현해 주는 것과도 같다. 존스 씨가 운영했던 'Manor 농장과 동물들이 운영했던 동물 농장'

이 얘기만으로도 알게 되는 사실. 본래 인간에 의해 운영되었던 농장이 인간이 없이 동물로만 운영되게 된 것이다.

그렇다. 존스 씨는 자신의 농장으로부터 쫓겨났다. 그가 관리하던 동물들에 의해서.

반란. 동물들은 존스 씨를 몰아내고 농장을 차지했다. Manor 농장에서 동물농장이 되었다.



드디어 새로운 세상인 자신들의 농장에서 행복하고 편안한 날들을 꿈꾸며 7계명을 적었다.

리뷰의 맨 첫 줄, 양들이 끊임없이 외치던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 가 이 7계명으로부터 나왔다.

농장에는 많은 동물들이 있었다.

당나귀, 말, 소, 양, 개, 닭, 오리, 비둘기, 까마귀 등등 각 동물들이 바라는 세상은 조금씩 달랐지만 그들 모두 두 다리로 살아가는 '인간'의 가축으로 혹사당하면서 사는 것을 벗어나고 하는 열망은 같았다. 이제 그들은 자유의 몸이었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농장을 꾸려갈 수 있었다.

동물들 중 가장 똑똑한 돼지들이 머리를 맞댔고

말과 당나귀가 힘이 필요한 궂은일을 했다.

닭, 오리, 암소들에게서 얻은 알과 우유로 돈을 벌었다.

비둘기들이 주변의 농장들과의 연락책이 되었고

개들이 사납게 짖어대며 호위를 맡았다.

각자가 할 일들을 했다. 할 수 있는 것들을 했다.

그러나 존스 씨가 관리하던 농장에서 살던 때보다 나아진 것은 없었다.

변한 것은, 자유를 얻었고 스스로 일했으므로 전보다 상황이 나아졌다고 믿는 마음뿐이었다.

영국의 짐승들이여, 아일랜드의 짐승들이여,

온 나라와 지역의 짐승들이여,

황금빛 미래에 대한

즐거운 소식에 귀 기울여라.

조만간 그날이 오리니,

폭군 인간은 허물어지고,

영국의 비옥한 들판은

짐승들만 홀로 디딜 수 있을 테니.

고리가 우리의 코에서,

마구가 우리의 등에서 사라지고,

재갈과 박차는 영원히 녹슬고

잔인한 채찍은 더 이상 철썩이지 않을 테니.

마음속에 그릴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부가,

밀과 보리, 귀리와 건초,

클로버, 콩과 사탕무들이

그날 우리의 소유가 될 테니.

빛이 영국의 들판에 비추고,

물들은 더 맑고

산들바람은 더 달콤히 불어올 테니,

우리가 자유로워질 그날에.

그날을 위해 우리 모두는 노력해야만 하네,

비록 그것을 이루기 전에 우리가 죽는다 해도,

소와 말, 거위와 칠면조들,

모두가 자유를 위해 힘써 일해야만 하네.

영국의 짐승들이여, 아일랜드의 짐승들이여,

온 나라와 지역의 짐승들이여,

황금빛 미래에 대한 즐거운 소식에 귀 기울여라.

>>> page 20-21 <영국의 짐승들>

힘들 때면 <영국의 짐승들> 노래를 몇 번씩이나 부르며

그래도 우리는 자유롭다고, 우리의 힘으로 농장을 일구고 있다고, 좀 더 열심히, 좀 더 수용적으로.

그러나 존스 씨가 떠난 자리에는 돼지들이 앉았다.

시작은 함께였으나 곧 계급이 생겼다. 동물농장이 되었을 때 7계명을 쓰고 혁명의 노래를 부르고 희망찬 미래를 꿈꿨었는데 어느새 조금씩 조금씩 두 다리 인간이 지배하던 시절과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인간의 자리는 돼지가 차지했다.

<영국의 짐승들>을 부르는 것도 결국 금지되었다.

결말을 말하고 싶다.

동물들의 죽음에 대해 말해주고 싶다. 어느 구절에서 실제 죽음을 목격한 듯 울었던 것을 말해주고 싶다.

나는 책을 읽으며 마치 그 안의 동물들 중 한 마리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말이 되어 돌더리를 날랐다가 닭이 되어 시장에 내다 팔 알을 낳고 있다가 책에 한 줄 자리 차리도 못하고 사라져버린 오리가 된 것 같기도 했다. 나 또한 그곳에서 정직하게 낱알 하나까지 수확해서 창고에 쌓이는 것을 보며 뿌듯해했을 것이다.

어느 세상이든 '돼지'는 존재할 테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반란도 끊임이 없다.

그래서 슬펐다.

태어나면서부터 어느 정도 정해져있는 것 같은 보이지 않는 계급이 항상 존재하고 있고 그것은 세상이 앞뒤로 뒤집어져도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비슷한 모습으로 돌아간다.

말이 돼지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양들이 돼지들을 배신하지 않는 것처럼.

돼지가 될 수 없는 대신 어떻게든지 이해해 보려고 한다. 이 상황을 살아내야 하니까.

굶주리고 피곤해도 그래서 늘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아도 어쩔 수 없다.라고 되뇌며 불행을 이해하려고 애쓴다.

지금의 내가 그렇고 과거의 내가 그랬고 미래의 내가 여전히 그럴 것이다.

돼지와 나는 다르다. 이 다름을 메꿀 방법은 없다. 그러니 돼지들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행복의 세계로 가고 있으니.

이 시대의 국회의원들이, 과거 양반들이, 어느 국가의 어느 왕족들이, 지도자들이 다 그렇다.

그런 게 정말 슬픈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들만을 손가락질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 깨어있어야만 하는데. 그래야만 하는데.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겠지만 그래야 하는데. 양들의 외침처럼 무조건 외칠 수만은 없다.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 맞고 틀리다. 네 다리든 두 다리든 언제든지 좋아질 수도 나빠질 수도 있다. 그걸 알아차리려면 깨어 있어야만 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아마도 [동물농장]의 복서나 양들이나 암탉이나 혹은 개들일 것이다.

깨어있지 않으면 언젠가 7계명이 조용히 교묘하게 바뀌어도 제대로 알아차릴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고는 누군가 이렇게 말하겠지.

"이해할 수가 없어. 이런 일이 우리 농장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는 게 믿지기 않아. 틀림없이 우리가 잘못해서일 거야. 해결책은, 내가 보기엔, 더 열심히 일하는 거야. 이제 앞으로 나는 아침에 한 시간을 꽉 채워 일찍 일어나야겠어."

>>> page 97 중에서

이 책은 소련의 사회주의를 비판, 풍자한다고 설명된다. 동물들의 대사, 동물농장에서의 전투들, 농장이 경영되는 방식, 결국은 부패와 공포만이 존재하는 동물농장의 상황 등 모든 것이 당시의 소련의 상황을 비꼬며 저격하고 있다.

하지만 넓게 보면 민주주의, 자본주의, 부족사회라 할지라도. 어디에 적용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책의 내용이 가볍고 대중적이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가 한없이 무겁다.

책의 분량도 생각보다 많지 않다.

분량에 관한 이 책의 특징은, 옮긴이가 '이정서'라는 분이다.

예전에 이 분이 번역한 [이방인]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유명한 고전 중 오역이 된 것이 너무 많다며 이것을 조목조목 짚어주셨는데 [동물농장]도 '일러두기'를 보자마자 '어...? 혹시 그분...?'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1/4에 해당하는 분량이 '역자노트'이다. 앞서 번역되었던 [동물농장]의 오역이 꽤 많은 듯하다.

사실 해외 작품들을 보다 보면 매끄럽지 않은 문장들이 꽤 있긴 하다. 그래서 책을 좋아하는 분들 중에는 좀 더 나은 번역본을 찾아서 출판사별로 책을 찾아보거나 어느 번역이 더 매끄러운지에 대해 비교한 글을 올리기도 한다. 나도 가끔 그런 글들을 찾아본다.

그래서 자칫 지나칠 수도 있는 타 출판사/타 번역가의 오역에 대한 지적이 나로서는 반갑다.

더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음에 틀림이 없으니.



** 장원 : 유럽의 중세기에 귀족이나 사원에 딸린 넓은 토지. 봉건 제도에서의 토지 소유의 한 형태이다.옮긴이의 말처럼 단순히 '매너 농장'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정원 농장'으로 부르는 것이 좋은 듯하지만 장원 농장이라는 단어 자체가 좀 생소하니 각주를 달아주면 좋을 듯. 아니면 '매너 농장(장원 농장)'으로 표기하던지.

내가 들었던 팟캐스트에서도 그냥 '매너 농장'이라고 불렀었다.

** 영어 외의 언어로 번역된 최초의 국가는 '남한' 이었다고 당시에는 반공 소설로 읽혔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희한한 데서 1등 하더라..

** 옮긴이 이정서님을 응원한다. 좋은 작품들이 좋은 번역본으로 더더 많이 발간되었으면 좋겠다.

※ 위의 글은 도서리뷰단에 선정되어 해당 출판사가 무상으로 제공한 책을 읽고 쓴 개인적인 소감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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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님의 침묵 (양장) - 1950년 한성도서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한용운 지음 / 더스토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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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 page 9 님의 침묵 중에서


고등학교 교과서에 이 시가 실려 있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었고 '수능용 해설'로 한 구절 한 구절 뜯어가며 배웠었다.

교실의 공기는 졸린 아이들의 침묵으로 무거웠고 이 시에 대한 그 어떤 감정도 싣지 않은 채 교탁 앞에서 시를 읊어 내려가던 선생님, 항일시, 님=조국 이라는 공식, 이 시의 해석으로 올바른 것은..?이 쓰인 문제집 등이 기억난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제대로 읽어보는 [님의 침묵]



1950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 디자인이 고풍스럽다. 이 책을 소장하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이다.

[님의 침묵] 책을 처음 가져보는데도 오래전부터 나에게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시가 쓰인 그때 그 시절을 좀 더 가까이 느낀다면 지나친 얘기일까.



'님의 침묵'으로 시작해서 '독자에게'까지 총 88편의 시가 실려있다.


이 많은 시들 중에 고작 '님의 침묵' 한 편 밖에 알지 못하다니.

대학을 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들추던 교과서에 실려있었지만 '님의 침묵'은 첫 소절부터 나의 마음을 두드렸었다. 그런데도 한용운 님의 다른 시들을 찾아볼 생각은 이제까지 해보지 못했다. 시를 좋아한다고 말해왔지만 아직도 옛날 교과서로부터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제라도 [님의 침묵] 책을 읽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겠다. 늦었지만 더 늦지 않았으니.


이 책의 제목이자 한용운 님의 대표 시가 된 '님의 침묵'



성인이 되어 여러 인연들을 만나고 헤어진 후에 읽게 된 '님의 침묵'은 정말 좋았다.

항일, 독립운동, 은유법, 상징, 불교 등의 해석들을 빼고 읽고 나니 담담하지만 애절하고 슬프지만 슬픔만은 아니었다.

그 당시 시인은 조국 위한 시를 지었다고 모두가 말하지만 그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시라고 해도 충분하다.

현대의 누군가가 썼다면 사랑하는 사람에 관한 아름다운 시로 평가받았을 것이다.


스님이자 독립운동가의 시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섬세하다.


그러고 보니 이 시집은 몇 편을 제외하고는 '님'에 대한 시들로 가득하다.

사랑, 이별, 그리움, 기다림 등에 관한 이야기다.

시의 구조도 사랑하는 님에게 보내는 짧은 편지 같다. 사랑 때문에 밤새 잠들지 못하고 써 내려간 일기 같다.

시의 구조를 잘 알지 못하지만 오래전 배운 기억을 끄집어 내보니 아마 이러한 시들이 '산문시'였던 것 같다.

노래하듯 읊을 수 있는 시는 아니지만 시 안의 담긴 마음은 금세 느낄 수 있다.



이렇게 다소곳하고 구구절절한 시들이 어떻게 항일 시집이 된 것일까. 분명 사랑 이야기였다.

아무리 빗대어 썼다 해도 이 많은 시들에 '님'을 담아서 항일시를 쓸 이유가 있었을까 싶다. 한용운 님이라면 수많은 것에 비유법을 적용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마치 여성의 마음인 듯이 표현했을 필요가 있었을까 궁금해졌다.


해석을 살짝 찾아보다가 어느 블로그 글에서 답을 찾았다. 시에 대한 나의 감상이 희석될까 봐 자세히 읽지는 않았지만 궁금해했던 부분은 천천히 읽어보았다.

일제의 눈을 피해 독립운동가인 자신의 모습을 지운 것도 맞지만 아마도 [님의 침묵] 시집은 항일의 뜻을 품고 묶음으로 펴내려고 기획된 것이 아닐까 하는 글이었다. 그렇기에 들쑥날쑥한 비유가 아니라 일관성 있게 '님'이라는 소재로 시를 쓴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었다. 나도 동감한다.

'님의 침묵' 한 편이 아니라 [님의 침묵] 한 권에 독립에 대한 의지와 희망을 꾹꾹 눌러 담아 쓴 거라면, '님'에 대해 써 내려간 모든 글이 '조국'에 대한 이야기라면, 그렇다면 이해가 간다. 왜 이 시집 한 권을 읽는 동안 각각의 시들이 다른 듯 낯설지 않았는지 말이다.


그런 님을 보냈지만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던 한용운 시인이 이 시집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씀은,


여러분이 나의 시를 읽을 때에 나를 슬퍼하고 스스로 슬퍼할 줄을 압니다.

나는 나의 시를 독자의 자손에게까지 읽히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님에 대한 사랑 이야기와 그 안에 담긴 뜨거운 독립운동가의 마음이 담긴 시집.

이 이중성이야말로 진정한 시의 아름다움이다.

이런 분들이 계셨기에 지금의 나는 그의 바람대로 아무런 슬픔도 없이 교과서 속의 '시 한 편'으로 이 시를 배웠다.

몸과 마음을 바쳐 미래의 우리들을 지키고자 했던 분들에게 이제 정말 좋은 세상이 왔노라 말할 수 없는 것이 가슴 아프지만 무한한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한용운 님께서 지키고자 했던 조국과 사람에 대한 그 마음이 [님의 침묵]으로 남겨져서 다행이다.

결코 잊힐 리 없을 것이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 page 10 님의 침묵 중에서



** 한용운 님이 출가한 스님으로, 법명이 '용운'인 것, 독립군 후보생들에게 총을 맞아 총알이 머리에 박힌 채 살아가셨다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됐다.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음에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을 반성 중이다. 알면 알수록 그의 생애와 그의 시 모두 위대함으로 다가온다.





※ 위의 글은 도서리뷰단에 선정되어 해당 출판사가 무상으로 제공한 책을 읽고 쓴 개인적인 소감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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