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솝 우화 전집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32
이솝 지음, 아서 래컴 그림,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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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와 거북이의 달리기 시합, 누가 나그네의 옷을 먼저 벗기는지 내기를 한 바람과 태양, 열심히 일하는 개미와 노래만 부르는 베짱이, 늑대가 나타났다!!! 를 외치는 양치기 소년, 황금 알을 낳는 암탉.. 

이렇게만 말해도 모두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는지 바로 알 수 있는 이솝 우화.

언제 어떤 책을 읽었었는지 내가 읽은 것인지 누가 읽어준 것인지 또는 TV에서 보았는지, 누가 말해 주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는 것은 없지만 왜인지 너무나도 당연하게 알고 있는 이야기들이다.


나도 주변의 친구들도 모두 어릴 때부터 이솝 우화를 알고 있었다. 어떤 이야기들은 교과서에서 본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이솝 우화란 동화책처럼 어린이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재미있고 유익한 이야기보따리인 줄만 알았고 나는 당연히 이솝 우화의 대부분을 알고 있다고 착각했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책을 받고서 몇 가지 놀란 점.

1. 나는 지은이 이솝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2. 이솝 우화가 358편이나 되는 줄 몰랐다.

3. 우화이긴 하지만 어린이를 위한 글들이 아니었다.

** 우화의 사전적 의미 : '인격화한 동식물이나 기타 사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들의 행동 속에 풍자와 교훈의 뜻을 나타내는 이야기.'


  

책을 펴면 지은이 이솝에 대해서 간략한 설명이 나오고 책의 마지막 부분에 좀 더 자세히 그를 소개한다. 

 

이솝은 기원전 6세기 그리스 사람으로 원래 이름은 '아이소포스' 이나 우리에겐 영어로 번역되고 각색된 이야기들로 소개되어 영어식 이름인 '이솝'이 친숙하다. 그는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살았으며 독보적인 우화 작가이자 연설가로 통했다. 사모스 섬에서 노예였으나 그의 주인을 변호해 준 공로로 자유민이 되어 외교사절로도 활동했고 델포이에서 협상을 하다가 델포이 사람들의 노여움을 사서 살해당했다고 한다. 이는 그리스 역사가인 헤로도토스와 아리스토텔레스 등 초기 그리스 자료들에 의해 알려졌으나 그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사실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책에 이솝의 초상화가 실려 있는데 지독하게 못생겼었다고 전해지는 이솝의 모습을 벨라스케스의 상상력으로 그려낸 것이다. 추남으로까지 느껴지지는 않지만 고대 그리스인의 복장을 보니 비로소 그가 기원전 6세기에 많은 우화들을 남긴 사람으로 상상된다. 

 

 

 

현대지성의 이솝 우화 전집에는 총 358편의 이솝 우화가 실려 있는데

이솝이 직접 쓴 우화 책은 존재하지 않고 오랫동안 구전으로 전해오던 것을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이솝과 그의 우화를 좋아한 사람들에 의해서 수집되기 시작하여 책으로 펴냈기 때문에 사람들에 의해 이야기가 덧붙여지거나 각색되어 정확한 이솝 우화의 편수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전승 과정에서 원래 이솝이 말한 우화가 아닌 것들도 이솝 우화인 양 회자된 경우가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솝 우화는 그 수가 확정되어 있지 않고, 적게는 몇십 개에서 많게는 600개로 추정된다.

>>> page 434 '해제' 4. 이솝 우화의 특징 중에서

  

그렇기 때문에 이솝 우화를 다시 읽는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워낙 유명한 책이라 N포털에 이솝 우화로 검색하니 2,000개가 넘는 책이 나오는데 주로 영어 번역본이 기본이고 특히 어린이들을 위한 이야기가 꽤 많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리스어 완역이라는 매력을 놓치지 마시길!


현대지성 클래식의 『이솝 우화 전집』은 서양인의 입맛에 맞게 많이 각색되고 분칠된 영어 판본이 아닌, 그리스어 원전에서 직접 옮겼으며, 국내 최초로 19세기 유명 삽화가인 아서 래컴, 월터 크레인, 어니스트 그리셋, 에드워드 데트몰드 등이 그린 일러스트 88장을 소개했다.

이솝 시대부터 구전을 통해 수집되면서 원형이 대체로 잘 보존된 이야기 중에서 정선된 그리스어 원전 358편을 완연하여...

>>> 표지 뒤편 이솝 우화 전집 소개 글 중에서


 소개된 대로 유명 삽화가들이 그린 일러스트를 보는 즐거움도 있다.

각 삽화가만의 매력은 다르지만 모두 클래식한 느낌이라 그리스어 완역본에 딱 어울린다.



자, 그럼 내가 읽은 진짜 이솝 우화를 둘러보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들은 어린이들에게 교훈을 주는 친근한 내용으로 많이 각색되어 그런지 내용이 친절했었다.  주로 동,식물들이 등장하고 쉬운 단어들로 구어체나 대화체로 많이 쓰였다. 확실한 결말로 알기 쉬운 교훈 결말을 주었다.

옮긴이의 '해제' 부분에 적혀있듯이 말이다.

  

따라서 어린이를 위한 이솝 우화의 대부분은 원래의 이솝 우화를 거의 완전히 개작하다시피 한 것으로 그 뼈대만 겨우 남아 있을 뿐이다. 이솝 우화 중에서 좀 더 기괴하고 신화적인 편에 속하는 100여 개에 달하는 우화들은 단 한 번도 영어로 번역된 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 page 433 '해제' 4. 이솝 우화의 특징 중에서


 하지만 이 책에 있는 실제 그의 우화들은 그 당시 그리스인의 생활 모습을 바탕으로 그들을 향해 이솝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생생하게 담겨 있어서 잔인하고 잔혹한 현실에 대한 거칠고 직설적인 표현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현실의 모습을 깨우쳐 주고 좀 더 현명하게 살아가도록 재촉하는 것이다. 아둔한 사람들의 모습을 동물에 빗대어 조롱하거나 사람의 세상도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약육강식일 뿐이라는 사실 또한 잊지 말라고 말한다.

  

그래서 많은 이야기들이 후회와 한탄, 비웃음으로 끝맺음 된다.

잔인하게 느껴질 만큼 자업자득自業自得, 자승자박自繩自縛의 교훈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꼼짝없이 죽게 된 사슴이 중얼거렸다.

"정말 한심하구나! 못 미더워했던 다리 덕분에 살았는데, 믿었던 뿔 때문에 죽게 되다니."

>>> page 136 '샘가의 사슴과 사자' 중에서


...사슴은 죽어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를 구해 준 포도나무에게 못된 짓을 해서 화나게 했으니, 이렇게 당해도 싸지."

>>> page 137 '사슴과 포도나무' 중에서

  

...늑대는 이렇게 거만해져 있다가, 힘센 사자에게 잡아먹히고 말았다. 늑대는 후회하면서 소리쳤다.

"불행의 화근은 바로 자만이로구나."

>>> page 269 '자기 그림자를 보고 거만해진 늑대와 사자' 중에서

  

...어느 날 이 당나귀가 혹사당하다가 기력이 다해 죽자, 제관들은 당나귀의 가죽을 벗겨 그 가죽으로 여러 개의 북을 만들어 마구 두드리고 다녔다.

... 그러자 그들은, 당나귀는 죽었지만 살아 있을 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매를 맞고 있다고 말했다.

>>> page 290 '키벨레 여신의 걸식 제관들' 중에서

  

 

그리고 전체적으로 이야기들이 간결하다. 우리가 알던 이야기와 교훈은 같지만 상황은 좀 더 단순하다.

이솝이 당시 뛰어난 연설가였기 때문에 연설에 우화를 사용함으로써 짧지만 강렬한 이야기로 만들었거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기 때문에 기억하기 편하도록 간결하게 다듬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단지 그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해서 였을지도.

특히나 토끼와 거북이는 이솝 우화 중에서도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라 그런지 오히려 덧붙여진 이야기들과 각종 해석들이 넘쳐나서 그리스어 완역본으로 보게 된 짧은 이야기가 새롭기까지 했다.


예를 들어,

  

어느 날 연못에 살던 개구리가 모든 동물을 향해 외쳤다. "나는 약에 대해 잘 아는 의사요." 이 말을 들은 여우가 말했다. "절름발이인 네 자신도 고치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들을 고치겠다는 것이냐?"

>>> page 99 '개구리 의사와 여우'

  

여우가 암사자에게 새끼를 고작 한 마리밖에 못 낳는다며 면박을 주자, 암사자가 말했다.

"한 마리이긴 하지. 하지만 사자야."

>>> page 236 '암사자와 여우'

  

토끼와 거북이 - 내 기억 속에서는 토끼가 거북이 보고 느리다며 놀리는 부분도 있고 거북이가 결승점에 다다를 때쯤 토끼가 깨어나 거북이가 자신을 앞지른 것을 보고는 놀라서 힘껏 달렸지만 결국은 졌다는 부분도 있지만 이 책에서는 시합 후 토끼는 금세 잠이 들고 그 사이 거북이가 결승점에 도착해 승리하는 단 몇 줄로 이야기는 끝난다.

>>> page 417 '토끼와 거북이'

  

그리스 시대의 우화답게 그리스 신화 속 인물들도 많이 등장한다. 

첫 장부터 제우스의 이야기가 나와서 당황했을 정도다.

대부분 동,식물들이 등장하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그들을 꾸짖거나 깨우치는 역할, 세상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설명하는 역할 등으로 많은 신들이 등장하고 마치 그리스 신화의 한 장면과 같은 이야기들도 종종 나온다.

이솝 우화에 신화적인 요소가 이렇게 많은 줄은 몰랐지만 그리스인인 이솝에게 신화는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세상 만물에 신들이 함께 하고 있다고 믿었을 것이고 신화적인 요소를 넣은 우화로 연설을 했다면 훨씬 효과적으로 대중을 설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우화가 널리 퍼지고 여러 시대를 지나면서 공감대 형성이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 신화적인 요소는 점차 설자리를 잃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동,식물들의 이야기 위주로 알려지지 않았을까 싶다.

  

예를 들어,

  

...헤르메스는 자신의 신상을 보면서 얼마냐고 물었다. ... 조각가는 대답했다. "앞서 물어보신 신상들을 사시면, 이것은 덤으로 드리겠소."

>>> page 143 '헤르메스와 조각가' 중에서

  

어떤 사람이 한 영웅의 신상을 자기 집에 모셔놓고는 그 앞에 많은 재물을 바쳤다. 그 사람이 영웅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제물들을 마련하는 데 돈을 물 쓰듯 하는 일이 계속되자, ...

>>> page 166 '영웅' 중에서

  

..., 다른 사람들의 것에 눈독을 들이다가 이웃의 수확물을 계속 훔치곤 했다. 제우스는 그의 탐욕에 격노해서 그를 오늘날 개미라고 불리는 동물로 바꾸어버렸다. ...

>>> page 293 '개미' 중에서

  

어떤 이야기들은, 내용을 알고는 있지만 이솝 우화인지는 몰랐던 것들이다.

이솝 우화가 아닌 다른 책에서 읽었거나 우리의 전래 동화가 아닐까 했었는데 이제 보니 그 이야기는 이솝 우화 중 하나였던 것이다.

이솝 우화가 이렇게나 오랜 시간 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것을 보면 그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여전히 시대를 관통하는 교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을 그가 만들어냈다는 것을 믿기 힘들 정도이다.

 

특히나 금도끼 은도끼는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이야기인 줄 알았다. 조금의 의심도 없었다.

분명히 나무꾼과 산신령이 나오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어린이 TV 프로그램 등에서도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는 우리의 전래 동화로 소개되었던 기억이 있다.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다.

헤르메스는 어쩌다가 산신령이 되었던 걸까. 우리 정서와 너무도 잘 맞는 이야기라서 어느샌가 스며들게 된 것일까.

이렇듯 그리스로부터 먼 나라에까지 이야기가 전해지며 각색이 되다 못해 현지화(?)까지 되어버릴 수도 있는데 여전히 몇 백 개의 이솝 우화가 그대로 전해져 오다니. 긴 세월을 생각해보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예를 들어,

 

한 천문학자가 있었다. ... 그만 우물 속으로 떨어졌다. ... 자초지종을 알게 된 행인은 천문학자에게 말했다.

"이보시오, 당신은 하늘에 있는 것들을 보다가 땅에 있는 것들은 보지 못했구려."

>>> page 93 '천문학자' 중에서

  

...어머니가 아들의 패륜을 꾸짖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내가 서판을 훔쳐서 가져다드렸을 때 어머니가 나를 꾸짖고 회초리로 때렸다면, 내가 지금 이 지경이 되어 사형장으로 끌려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 page 356 '도둑 아들과 어머니' 중에서  


..., 헤르메스는 세 번째로 물속으로 들어가서 그가 사용했던 도끼를 가지고 나왔다. 그게 바로 자기가 잃어버린 도끼라고 하자, 헤르메스는 그의 정직함을 가상히 여겨 세 자루의 도끼를 모두 그에게 주었다. ...

>>> page 311 '금도끼 은도끼 (원제 : 나무꾼과 헤르메스)' 중에서


하지만 우리나라의 전래 동화로 알고 있던 '금도끼 은도끼'는 이솝 우화인데 반해 '여우와 두루미(또는 학)' 과 '아기염소와 늑대' 이야기가 이 책에는 없다. 여우가 두루미를 초대해서 접시에 음식을 내어주며 심술을 부리던 여우의 이야기와 엄마 염소로 변장해서 아기 염소들을 잡아먹으러 온 늑대 이야기도 없다. 분명 이솝 우화로 알고 있었는데 그 이야기들은 어디에서 왔길래 이 책에 실리지 못한 것일까. 그리고 어떤 책에는 이솝 우화로 실려 있고 인터넷상에서는 여전히 이솝 우화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어찌 된 일일까.


게다가 안타깝게도 돌이킬 수 없게 각색이 되어버린 이야기도 있다. 



개미와 베짱이로 알려진 우화가 이 책에서는 개미와 쇠똥구리, 매미와 개미들로 두 편이 실려 있다. 

실제로 이솝이 두 편을 각각 별도의 이야기로 말했는지는 알 수 없고 어느 시점에서 어떤 이유로 베짱이로 각색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편 모두 교훈은 같다. 근면 성실함과 미래를 대비해야 함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우리에게 쇠똥구리는 생소한 등장일뿐더러 매미와 개미들에서는 여름 이야기는 빠져있고 겨울이 다가와 매미가 위험에 처한 이야기부터 나온다.

  

내 기억 속의 개미와 베짱이는, 여름철에 개미들은 열심히 일을 하고 베짱이는 바이올린을 켜며 놀고 있는 모습이고 겨울이 찾아와 베짱이가 개미를 찾아갔지만 거절당하는 내용이다. 아마도 누군가가 개미와 쇠똥구리와 매미와 개미들을 합쳐서 개미와 베짱이로 탄생시킨 듯하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이야기에는 여름철의 땀 흘려 일하는 개미가 나오고 노래를 부르는 베짱이가 나온다. 그리스어 원전에서는 매미의 울음소리를 피리로 묘사했기 때문에 각색한 그 누군가는 베짱이에게 바이올린을 켜고 있다고 덧붙여 놓았나 보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이 알고 있는 '개미와 베짱이'는 또 다른 내용이라고 한다.

겨울이 되자 굶어 죽게 생긴 베짱이는 개미를 찾아가고 개미는 그런 베짱이를 집안으로 들이며 도움을 준다. 여름 내내 바이올린을 켜며 노래 부르던 베짱이는 개미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며 모두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끝이 난다고 한다.

  

나에게 '개미와 베짱이'는 주로 엄마들이 아이들이 공부하지 않고 딴짓을 할 때 교훈으로 주시는 내용이었다. 너 그렇게 베짱이처럼 놀기만 할래?!?! 베짱이가 나중에 어떻게 되는 줄 알아?!?! 라고 말이다. 하지만 먼 훗날의 '개미와 베짱이'의 내용이 너무 달라져버려서 각자의 장점을 가지고 공생하면 닥쳐올 어떤 위험이라도 함께 이겨낼 수 있다. 로 교훈도 바뀌게 될지 모를 일이다.

  

이솝 우화는 어떠한 교훈이든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해주지만 사실 이야기 그 자체로도 충분히 재미있다.

아마도 이솝이 재미와 교훈을 동시에 주는 우화가 아니라 교훈만을 주는 이야기를 남겼다면 그가 아무리 대단한 연설가라도 그의 이야기는 모두 잊혀버렸을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 사이에서 그의 우화가 특별하게 여겨지는 것은 단순하고 재미있는 우화 속에서 누구나 알 수 있는 큰 가르침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이솝 우화를 수집한 사람들이 덧붙인 "교훈"들이 각 우화에 달려있지만 반드시 그 교훈만에 얽매일 필요는 없어 보인다.

어떤 교훈은 내가 이야기를 제대로 읽은 것이 맞나 싶게 나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 왜 그 교훈이 이 우화에 적용되는 것인지 우화의 자체로 그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있다. 이대로 이야기가 끝났나? 싶게 결말이라 볼 수 없는 내용으로 우화가 끝나버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고대 그리스를 배경으로 한 오래된 이야기라서 현대에는 적용되지 않는 교훈도 있다.

뱀, 낙타, 붉은 부리 까마귀, 아랍인 등을 묘사하는 일부 이야기들에는 그 시대에만 통하던 편견이 들어있기도 하다.

 

그래도 이 책은 현대에 사는 우리가 최대한 이해하기 쉽도록 많은 도움을 준다.


해당 동물이나 지역, 신들의 이름 등에 대한 풀이를 옮긴이가 각주로 달아놓아 그 당시의 말장난이나 상황을 알게 되어 우화의 숨어있는 재미를 놓치지 않을 수 있도록 해주며 각색된 부분이나 우화가 가지고 있는 뒷배경 등도 알 수 있도록 해준다.


 

이야기-교훈-각주를 읽으며 358편의 우화들이 끝났다.

이솝 우화를 다시 읽게 되어 기쁘다. 아니, 정정해야겠다. 이솝 우화를 '처음으로' 읽게 되어 기쁘다.

기원전 6세기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올 만한 이야기들이고 이 책은 기대했던 대로 소장할 만한 책이다.


이솝이 말하고자 했던 것을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네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고 있어라.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말아라."

그래서 "너 자신을 알라" 라고 말했던 소크라테스가 죽기 직전까지도 탐독했던 이야기인가 보다.


읽는 사람마다 깨닫는 부분은 다를 수 있다. 시대가 바뀌면서 다른 시각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다.

현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계속해서 구전되며 계속해서 덧붙여지고 삭제되는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의 우화들이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고

그런 이유로 어떤 해석을 하든 앞으로 어느 시대가 오든 어떻게 각색이 되든 변함없이 이솝 우화일 것이다.

천년이 지나도 토끼와 거북이는 달리기 시합을 할 것이고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것은 태양일 것이다.

혹시 단 하나의 우화만 남겨지게 되더라도 '이솝 우화'에 재미와 교훈이 함께 담겨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위의 글은 서평 이벤트에 당첨되어 해당 출판사가 제공한 책을 읽고 쓴 개인적인 소감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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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나에게 살라고 한다
나태주 엮음 / &(앤드)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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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받자마자 하얀 바탕에 풀 한 포기와 띠지가 눈에 들어왔다.

시인 나태주가 뽑은 국내 명시 114편의 눈부신 위로.

침몰 직전의 청춘, 시가 나를 잡아 주었다.


제목도 띠지의 문구도 너무나도 시인다움이 느껴져서

책을 펴기도 전에 위로받을 준비가 되어버렸다.

누군가에게 그토록 위로가 되었다면 나도 114편 중 어딘가에서 분명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책을 펴자마자 보이는 나태주 시인의 인쇄된 손글씨도 마치 나를 위해서 나에게만 적어준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개인적인 일들과 2020년을 삼켜버린 코로나의 습격 그로 인한 많은 변화들.

확실히 전 세계적으로 우울하고 위태로운 시대다. 나 역시 우울하고 위태롭게 겨울을 맞는다.

이런 이유인지 한동안 서점가에는 힘내! 할 수 있어! 괜찮아! 넌 혼자가 아니야! 를 외치는 많은 책들이 등장했었는데 마음에 크게 와닿는 책이 아직 없었다. 그들의 말은 모두 맞는 말이었겠지만 왜인지 책을 열어 볼 기분이 아니었다.

나에게 어떠한 위로가 필요한지 알 수 없었는데

이 책 제목과 띠지 문구 그리고 작가의 말까지 마음에 드는 것을 보니 조금은 힘을 뺀 위로가 필요했었던가 싶다.

나도 살았으니 너도 살아. 가 아니라 '나를 살린 시들이 이제 너를 지켜주기를' 이라고 말이다.

추운 밤 어느 술집에서 친구와 말없이 마시는 소주 한 잔처럼.

 

책을 받아 들고는 엮은이가 나태주 시인이고 그가 좋아했던 시인들과 그들의 시가 담겨 있다는 것은 알게 되었는데 정작 나태주 시인이 누구인지 몰랐다. 시는 좋아하지만 시와의 거리는 한참 멀구나. 어휴 그래. 어디 가서 좋아한다고는 말하지 말아야겠다. 풀꽃 시인 나태주를 모르고도 시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망신을 당하게 될 거다. 이렇게나 유명한 시인을 모르고 시를 말하다니.

작가 소개에서 본 '풀꽃 시인 나태주' 를 검색하고서야 알게 됐다.

광화문 글판에 쓰여 지금까지 사랑받는 그 시.

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광화문 글판이라고 한다.

나도 그랬다. 보자마자 너무 예쁘고 사랑스럽고 따뜻한 글이라고 생각했다.

나태주 <풀꽃>

이 책의 page 66-67에 <대숲 아래서> 라는 그의 초기 작품도 있다. 1971년 신춘문예에 당선된 작품이라 <풀꽃> 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지만 그의 말처럼 그의 청춘이 담긴 글이다. 책을 읽고는 그의 다른 시들도 궁금해졌다.



이 책은 114편의 시들이 5개의 큰 묶음으로 나뉘어 있지만

시는 각자의 마음으로 읽어서 그런지 계절, 주제, 형식 등의 큰 틀이 아니고는 각각의 시들을 한데 묶는 것이 어려워 보이고 나태주 시인이 좋아하는 시들을 실었기 때문에 그의 감상에 따라 나눈 것이라 우리들은 잠시 쉬어가는 정도로만 생각하면 될 것 같다.


1. 너무 힘들어하지 마라

내가 네 옆에 있다


: 사평역에서 - 곽재구, 너에게 묻는다 - 안도현, 저 거리의 암자 - 신달자, 장미와 가시 - 김승희, 감처럼 - 권달웅, 갈등 - 김광림, 꽃씨 - 최계락, 비망록 - 문정희, 산이 날 에워싸고 - 박목월, 아버지의 등을 밀며 - 손택수, 차부에서 - 이시영, 내 마음의 지도 - 이병률, 국수가 먹고 싶다 - 이상국, 목계장터 - 신경림, 별을 보며 - 이성선, 파랑새 - 한하운,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 함형수, 우리가 물이 되어 - 강은교, 구부러진 길 - 이준관, 마흔 살 되는 해는 - 천양희, 목숨 - 신동집, 담쟁이 - 도종환, 대추 한 알 - 장석주


2.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 편지 - 김남조, 물망초 - 김춘수, 대숲 아래서 - 나태주, 한 잎의 여자 - 오규원, 내 소녀 - 오일도, 석류 - 이가림, 내 마음을 아실 이 - 김영랑, 연서 - 프란체스카 도너 리, 사랑 - 김수영, 작은 짐승 - 신석정, 동백꽃 - 이수복, 민들레의 영토 - 이해인, 우울한 샹송 - 이수익,낙화 - 이형기,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 최승자, 봄길 - 정호승, 선운사에서 - 최영미, 봄, 무량사 - 김경미, 보내놓고 - 황금찬, 초혼招魂 - 김소월, 세월이 가면 - 박인환

 

3. 인생의 한낮이

지나갈 때


: 방문객 - 정현종, 9월도 저녁이면 - 강연호, 도봉道峰 - 박두진, 감 - 허영자, 바람 부는 날 - 박성룡, 남으로 창을 내겠소 - 김상용, 빈집 - 박형준, 그냥 - 문삼석, 산에 언덕에 - 신동엽, 봄 - 이성부, 봄은 고양이로다 - 이장희, 한낮에 - 이철균, 달,포도,잎사귀 - 장만영,

시월에 - 문태준, 의자 - 이정록, 항아리 - 임강빈, 먼 길 - 윤석중, 해마다 봄이 되면 - 조병화, 꽃씨와 도둑 - 피천득, 시월 - 황동규, 나룻배와 행인 - 한용운, 떠나가는 배 - 박용철,

울음이 타는 가을강 - 박재삼

 

4. 눈물겹지만

세상은 아름답다


: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 정채봉, 아비 - 오봉옥, 30년 전 - 서정춘, 아버지의 마음 - 김현승, 길 - 김기림, 엄마 걱정 - 기형도, 소주병 - 공광규, 길 - 정희성, 어린것 - 나희덕,

소녀상小女像 - 송영택, 어머니의 그륵 - 정일근, 어머니 - 오세영, 밤하늘 - 차창룡,

가을의 노래 - 박용래, 성선설 - 함민복, 귀천歸天 - 천상병, 파초우芭蕉雨 - 조지훈,

청솔 푸른 그늘에 앉아 - 이제하, 비옷을 빌어 입고 - 김종삼, 설야雪夜 - 김광균, 송년 - 김규동, 백설부白雪賦 - 김동명, 고고孤高 - 김종길, 밤하늘에 쓴다 - 유안진

 

5. 오늘이

너의 강물이다


: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적막한 바닷가 - 송수권, 그 겨울의 시 - 박노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그리움 - 이용악, 국화 옆에서 - 서정주, 별 헤는 밤 - 윤동주, 시월의 소녀 - 전봉건, 청포도 - 이육사, 따뜻한 봄날 - 김형영, 강물이 될 때까지 - 신대철, 딸을 위한 시 - 마종하, 섬집 아기 - 한인현, 옛이야기 구절 - 정지용, 주막에서 - 김용호, 별 - 이병기, 그 사람을 가졌는가 - 함석헌, 저녁에 - 김광섭, 우화의 강 - 마종기, 행복 - 유치환,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 김용택, 꽃자리 - 구상, 강 - 구광본

 

차례를 보면 한 시인의 시가 여러 작품 실리는 것이 아니라 114편 모두 다른 시인의 시가

실려있다.

많은 시인들을 만날 수 있고 그들의 대표작이 아닌 나태주 시인이 좋아하는 시들로 구성되어 시를 다양하게 접할 좋은 기회다.

나태주 시인은 현재 한국시인협회장을 맡고 있고 시와 관련된 많은 일들을 하고 있어서 많은 시인들을 알고 친한 시인들도 많을 것이다. 그가 특별히 좋아하는 시인들도 많을 텐데 한 시인에게서 단 하나의 시만을 이 책에 실을 때에는 많은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각각의 시들은 그가 좋다는 이유로 책에 실리기만 한 것이 아니다. 각 시마다 나태주 시인의 설명이나 감상이 적혀져 있다.

그 시인을 만났을 때의 이야기, 시인과의 친분이나 성격 등과 같은 개인적인 이야기, 그 시를 읽었을 당시 나태주 시인의 추억 등등. 이 점이 유익하며 재미있기도 하고 시만 읽을 때와는 다른 감상에 들게 한다. 이런 구성일 거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해서 신기했다.

 

나태주 시인의 설명 부분을 읽으면,


내가 모르는 시인의 시를 읽을 때 나태주 시인의 설명을 보고는 그 시를 더 이해할 수 있게 되기도 하고 시만 읽었을 때는 보이지 않던 시인의 마음이 보이기도 한다. 다시 한번 들여다보게 하고 각 시구들을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한다.


예를 들어 이성선 시인의 <별을 보며> 를 읽고 나태주 시인의 설명까지 읽으면 그가 왜 이 시인을 식물성 인간이라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성선 시인의 시는 확실히 그를 닮아 있어서 그에 관한 이야기로 인해 그가 쓴 시구를 더 잘 느낄 수 있었다. <별을 보며>를 시만 읽었을 때는 절망인가 했는데 나태주 시인의 이야기를 읽고 다시 보니 연민이자 위로였기 때문이었다.


page 43 - 이성선 <별을 보며> 중에서

하지만 때로는 나태주 시인의 덧붙임으로 인해 편견이 생겨 버려 시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기도 하고 바로 이해하기 어려운 시를 만나게 되면 스스로 생각해보는 것이 아니라 나태주 시인의 감상을 나도 모르게 따라가버리게 됐다.


예를 들어 <연서>라는 시를 읽고 헌신적인 사랑이네. 라고 느꼈는데 하단에 시인의 이름을 보고는 '어라..? 혹시..?' 라고 생각했었는데 역시나 젊은 시절의 이승만 박사와 그의 부인인 프란체스카 도너 리가 주고받은 편지의 내용이라고 하니 갑자기 너무 현실적으로 다가와서는 'TV 프로그램 서프라이즈' 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버렸다.

시가 시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분명한 편견이었다.

누구든, 어느 자리에 있든 시를 쓸 수 있는 데 말이다.

 page 77 - 프란체스카 도너 리 <연서> 중에서


그래서 초반에 몇 편의 시를 읽고는 이 책을 읽는 방식을 바꿨다.

책을 두 번 읽자. 한 번 읽고 바로 다시 읽자.


처음에는 시만 읽는 것이다. 누구의 시인지 그 시인이 배경이 어떠한지는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내 감정대로 읽었다. 천천히.

두 번째에는 시를 빠르게 읽고 나태주 시인의 설명을 읽었다. 그 시인이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그 시를 읽고 나태주 시인이 무엇을 느꼈는지, 그가 느끼기에 아까 그 시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것이었는지 등을 읽어보는 것이다.


그렇게 두 번을 읽고 나니 시를 향한 내 마음과 나태주 시인의 이야기 속에서 비로소 균형을 찾을 수 있었다.


어떤 시들은 시인에 대한 배경지식이나 시인의 의도는 아무 상관도 없이 나의 마음을 두드렸다.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서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 page 216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중에서


어떤 시들은 나에게도 나태주 시인에게도 오랫동안 생각할 시간을 갖게 하기도 했다.


시를 읽으며 오랫동안 생각해 본 일이 있다. 고고孤高란 말. 왜 고고일까? 외로울 고孤에 높을 고高. 외로우면 누구나 높아지는 것일까? 반대로 높아지면 외로워지는 것일까?

- page 205 <고고孤高> 김종길 편에서


어떤 시들은 노래로도 불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인현 시인의 <섬집 아기>처럼.


다만 나는 <섬집 아기>를 동요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 책에 시인의 작품으로 실려 있어 놀랐다. 다들 알고 있을까.

<섬집 아기> 괴담이 생길 정도로 구슬픈 동요가 되었지만 그 특유의 정서가 너무나도 우리에게 잘 맞아서 여전히 2020년 아기들의 자장가로도 불리고 있고 아마도 다음 세대에도 이 노래는 동요로, 자장가로 불리고 있을 것이다. 구슬프게.


나태주 시인의 덧붙임은 이럴 때 놀라운 시각을 제시한다. <섬집 아기>를 노래로 부를 때는 반드시 2절까지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나도 이 노래를 1절만 불러서 이 책에서 시로 읽었을 때 두 번째 단락에서 의외의 생소함을 느꼈고 구슬프다는 감상이었는데 나태주 시인은 2절까지 불러야만 엄마가 아기와 만난다는 것이다.

아! 맞는 말이다. 아기를 두고 굴을 따야 하는 엄마는 구슬프지만 모랫길을 달려온 엄마는 결국 아기와 만났을 것이다. 기쁨이다.

엄마와 아기가 만나는 장면을 상상해보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굴 바구니를 내려놓기도 전에 아기는 엄마를 부르며 신이 났을 것이고 엄마는 아기 얼굴을 보자마자 안도감을 느꼈을 것이다. 밤에는 엄마 팔베개를 하고 아기는 잠이 들었겠지.

섬집 아기 괴담에 떨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필히 추천해 주고 싶다.

 page 237 - 한인현 <섬집 아기> 중에서

한데 김형영 시인의 <따뜻한 봄날 - 꽃구경>은 끝까지 듣지 못했다. 판소리처럼 느껴지는 노래가 더욱 슬픈 것도 있지만 시를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울림은 충분했다. 나 또한 제목만 보고는 봄날의 소풍인 줄만 알았는데 시를 읽고 나태주 시인의 이야기에 노래까지 더하고 나니 슬픔을 넘어선 그 어떤 감정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 뻔했기 때문이다.

 page 231 - 김형영 <따뜻한 봄날 - 꽃구경> 중에서

시로 만든 노래들은 대체로 구슬프다. 시로 읽는 것만으로는 그 슬픔을 나눌 수가 없어서 노래로 부르는 것일까. 노래가 되어 누구에게라도 그 슬픔을 함께 나누자고 하는 것일까.


어떤 시들은 너무나도 유명해서 다시 보아도 감탄을 자아내기도 했다.

윤동주 시인, 김소월 시인, 천상병 시인, 이육사 시인 등등 시인의 이름만 들어도 최소 그의 시 한 구절, 아니 제목이라도 기억해 낼 수 있는 그런 시인들의 시 말이다. 영원히 기억되는 시를 쓴다는 것은 어떤 마음일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좋은 시는 모름지기 좋은 영혼에서 나온 문장이다. 나이를 불문하고 모든 세대에게 통한다. 구차한 설명 없이, 징검다리 없이 곧바로 가슴과 가슴을 연결한다.

- page 249 김광섭 <저녁에> 중에서


난 여전히 김소월 시인의 초혼招魂이 좋더라.

절대 잊히지 않을 시다. 누구에게라도 말이다.

page 104 - 김소월 <초혼招魂> 중에서


114편의 시들을 모두 소개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나의 깊이는 그 정도가 되지 못해서 말이다.

게다가 이 책을 읽을 누군가를 위해서 어느 작품이든 여기에 온전하게 적어놓고 싶지는 않다. 그 시의 첫 단어부터 마지막 단어까지 읽고서 느끼고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은 온전히 그 시를 읽는 사람의 몫이기 때문이다. 한 편의 시는 그 자체로 스포일러일 테니 말이다.


어떤 시는 위로가 되었고 어떤 시는 의문으로 남았다.

어떤 시는 내 마음을 울렸고 어떤 시는 그 시인을 위해 손을 내밀고 싶었다.

어떤 시는 아름다웠고 어떤 시는 외면하고 싶었다.

어떤 시는 노래로 남았다.

그렇게 114편 모두 다른 감상으로 남았다.


나태주 시인의 간절한 주문처럼 그와 같이 우리들도 살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바람으로 인해 충분히 따뜻한 책이 되었다.

이 시기, 이 계절에 읽는다면 그 누군가에게도 이 따스함과 위로의 말이 반드시 전달될 거라 믿는다.


20년 전쯤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지금 표현으로는 '오글거리는' 글을 쓰는 것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나도 그때 그런 글들을 꽤 여러 번 끄적거렸던 기억이 난다.

내가 좋아하던 노래 가사에 나태주 시인처럼 덧붙이는 이야기를 썼었던 기억도 난다.

오래전의 나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가끔 그 싸이월드 감성이 그리울 때가 있다.

나이가 드는 탓일까.


책을 덮으며 이 계절만큼 내 마음도 춥다는 것을 깨달았다.

온기를 느끼고 나서야 깨닫는다.

우리들은 무엇을 잃어버린 것일까.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로부터 무엇을 버리고 온 걸까.

앞으로 그 어떤 말에도 오글거린다는 표현은 쓰지 않기로 했다.


주위에 한가득 시가 있다.

그 시를 읽지 않는 내가 있을 뿐이다.



덧붙임 - 책의 표지와 띠지가 하얘서 깨끗하고 예쁜데 책을 읽다 보니 금세 때가 타고

띠지 글자는 지워져간다.

혹시라도 첫 느낌 그대로 간직하고 싶은 분들은

책을 사자마자 비닐로 씌우기를 권장함!

그런 사람 바로 나여서 서평 적다 말고 후다닥 비닐 씌웠음.

 

 

 

 

※ 위의 글은 서평 이벤트에 당첨되어 해당 출판사가 제공한 책을 읽고 쓴 개인적인 소감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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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커스 보카 어원편 + 미니 암기장 & 워크북 세트 - 어원으로 줄줄이 쉽게 외워지는 영단어│수능·내신 문제 술술 풀리는 기출 어휘 총정리│단어의 뜻이 단 번에 이해되는 그림설명
해커스어학연구소 지음 / 해커스어학연구소(Hackers)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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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와 결별한지 어언 십수 년. 거창하게 결별이라고 할 수도 없다. 우린 친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친하게 지내야만 했었던 학창 시절을 제외하고는 영어로부터 도망 다니기 바빴다.

수능 영어학원, 토익학원, 기초회화학원 등을 다녀봤지만 영어 실력은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한 해 두 해 시간이 지날수록 영어울렁증이 심해져 갔다. 아! 제발 나에게 다가오지 마요 거기 외국인분.

하지만 피할 수가 없다. 회사를 다닐 때도 많은 서류들이 영어로 되어 있었고, 해외여행을 간다면 영어는 기본이다. 이제는 엄마와 함께 보던 주말 드라마보다 익숙해져 버린 미드, 알음알음을 통하거나 우연히 만나게 되는 한국에 사는 외국인 친구들, 글로벌 게임상에서 알게 된 세계 각국의 외국인 친구들, 아니 어쩌면 이제는 영어를 잘하고자 하는 열망에 별다른 이유도 없는 것 같다. 어찌 되었건 영어는 잘해야 하니까. 영어 공부해야만 해. 다들 그러니까.

이렇다 보니 매년 영어 공부를 시작은 하는데 도무지 작심삼일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 유명하다는 책도 보고 인강도 들어봤는데 정확히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늘 헤매게 된다. 문법, 단어, 회화가 동시에 부족한 만년 초보일 때는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역시 여행을 위해서 회화가 먼저일까. 귀를 뚫기 위해서 미드와 CNN을 계속 보는 건 어떨까. 왕초보를 위한 인강 결제가 답일까?

쓸데없이 고민만 하고 있을 때 만난 것이 해커스 보카 어원편!!




해커스는 아주 오래전부터 토익 교재로 굉장히 유명해서 해커스 교재라서 믿음이 간다는 말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다. 그런 해커스에서 나온 '보카' 책 만으로도 반가운데 '어원편' 이라니 영어 교재인데도 제목부터 흥미진진하다.

나에게 보카 책이 반가운 것은, 이번 겨울에 영어 공부를 또!다시 해볼까라고 생각했을 때 '영어 단어 외우기'로 시작해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백지에서 새롭게 시작한다면 역시 단어 외우기부터니까. 아기들이 처음 말을 배울 때처럼 말이다. 그렇게 단어 공부를 결심하고서는 이렇게 딱 맞게 보카 책을 발견한 것이 신기할 정도인데 한국어조차 어원이 궁금한 나에게 보카 어원편이라니 지금 나에게 이보다 더 잘 맞는 교재는 없을 것이다.




교재는 어원을 중심으로

핵심 어원 - 그에 따른 핵심 단어들 - 해당 단어의 어원 설명 - 예문으로 되어 있고 굉장히 정리가 잘 되어 있다. 간단하지만 핵심만 딱 볼 수 있게 되어 있고 가독성이 좋아서 특히나 수험생들이 자투리 시간에 보면 피로도 없이 공부할 수 있을 듯하다.


사진에서 보듯이 단어마다 그림으로 간단하게 어원이 설명돼 있다. 아무래도 글자만 달달달 외우게 되면 금세 잊어버리기 쉬운데 그림으로 다시 한번 보고 단어의 구성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알게 되면 뜻을 이해하기도 굉장히 쉬워져서 기억에도 오래 남는다.

개인적으로 그림 설명 나오는 캐릭터가 귀여워서 집중하기가 좋았다. :)

아주 사소해 보이지만 이러한 디테일이 영어 단어와 조금 더 친해지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요.


목차를 보면 DAY 01 부터 DAY 60 까지 써져있는데 '스스로 학습 플랜'을 세워서 매일매일 외운 단어량을 확인하도록 되어있다. 단어를 외우려고 책을 폈다가 목차 1만 30번 보고는 덮어버리고 다른 영어 교재들과 함께 책장 구석에 세워두지 말고 하루 3장씩만 외우라고 말이다. 이런 적당한 압박도 마음에 든다. 그냥 읽어내려가다 보면 금세 딴짓을 하기 쉬운 나와 같은 사람을 위한 격려. 어느샌가 나에게 쌓인 단어가 스스로 뿌듯하게 느껴질 수 있도록 구성된 점이 좋다.

이 '스스로 학습 플랜' 에 따라 WORKBOOK 이 별도로 제공되는데

DAILY CHECKUP 이 DAY 01 ~ 60까지 구성되어 있어서 어린 시절 학습지 푸는 느낌으로 복습 가능하다.



단어를 외우다 보면 이미 외우고 있는 단어라도 새롭게 뜻을 보게 되어 유용하고

어원(접두사, 어근, 접미사)을 가진 단어들을 외우다 보면 새로운 단어를 외우게 될 때도 적용하여 뜻을 파악하기가 쉬워진다.


또한 헷갈리기 쉬운 단어들을 어원을 토대로 정리하여 쉽게 구분하여 외울 수 있도록 되어 있다.

PART2 부분이 분량이 제일 많기도 하지만 다양한 어근이 있어서 공부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알찬 구성과 재미로 열심히 읽기 시작했는데 60일을 꽉 채우지 못해서 아직도 진행 중이다.

시간은 좀 더 걸리겠지만 이번에는 포기하지 않고 이 한 권에 들어있는 단어들을 다 외울 수 있을 것 같다.

그동안 나와 영어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은 순전히 나의 탓이다. 말만 하고는 노력은 하지 않은 탓이다.

그래도 영어는 잘하고 싶으니까 교재만 잔뜩 사 모으면서 비법만 찾아 헤맨 탓이다.

갑자기 잘하게 되지 않으리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래서 무조건 남들이 좋다는 교재만 사서 모았었던 것 같다.

나에게 잘 맞는 교재를 찾았어야 했는데.

해커스 보카 어원편이 나에게 잘 맞는가 보다.

지루하지 않고 외우는 재미가 있다. 이번에야말로 이 한 권을 모두 외울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수험생은 아니지만 독파의 목표를 이루는 것도 좋겠지.

** 들으면서 외울 수 있도록 MP3를 다운로드하는 QR코드가 있다.

한꺼번에 다운로드하려고 홈페이지 접속했지만 왜인지 계속 실패했다.

MP3는 QR코드로 이용하자.

※ 위의 글은 서평 이벤트에 당첨되어 해당 출판사가 제공한 책을 읽고 쓴 개인적인 소감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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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불편한 용서
스베냐 플라스푈러 지음, 장혜경 옮김 / 나무생각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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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알게 되었을 때 친구와 한창 사이가 좋지 않았다.

싸운 것은 아니었는데 오히려 싸웠다면 좀 더 화해가 수월했을 것 같은 미묘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친구는 나에게 섭섭한 마음을 솔직하게 말하지 않은 채로 툴툴거렸고 나는 대화의 기회는 갖지 않은 채 친구가 툴툴대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우리가 삐걱거렸던 이유는 아주 사소하면서도 본질적인 것이었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친구는 코로나 시대가 너무 답답하다며 계속해서 어딘가로 놀러 가기를 원했고 나는 대부분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대화 없이 시작된 신경전은 결국 어떠한 실수로 이어지고 그 실수가 분노를 일으켜 도저히 화가 누그러지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그녀의 고의가 다분한 그 실수를 용서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조금 불편한 용서.

친구와의 다툼 정도로 거창하게 용서를 운운할 수 있겠느냐고 누군가는 비웃을지라도 '용서' 라는 단어에 너무 잘 어울리는 '조금 불편한' 이라는 수식어가 마음에 들었다. 용서를 해야 하는 순간은 어떠한 형태로든 상처가 되는 순간이다. 그 순간을 넘어서는 용서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제목을 '조금 불편한' 용서로 받아들였다. 용서 그 자체가 불편한 것이다. 나는 아마도 결국에는 친구의 사과를 받아들이겠지만 우리의 사이가 그전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틀림없다. 그러나 화해를 하는 것도 화해를 하지 않는 것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책에 답이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기대로 책장을 넘겼다.





저자는 프롤로그에 엄마의 이야기를 적었다.


저자가 14살 때 그녀의 엄마가 새로운 남자와의 출발을 위해서 갑자기 떠나버렸고 그 뒤로 연락도 끊어졌다. 저자는 갑자기 버려졌고 불행한 시간을 보냈지만 엄마는 그 일에 대해 한 번도 사과나 변명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엄마와의 불편한 관계는 계속해서 저자를 괴롭혔다. 저자는 그런 엄마를 영원히 떠날 수도 없고 잊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둘은 시간이 지난 뒤 종종 연락을 주고받으며 지냈지만 과거의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이러한 엄마와의 관계가 이 책의 곳곳에서 이어진다. 저자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엄마를 어떻게 용서해야 하는가 이지 않을까 싶다.


"그럼 엄마를 용서했어?"

여동생은 그 질문을 별 뜻 없이 지나가는 투로 내뱉으려고 노력한다.

무엇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용서... 거창한 말이다.

>>> page 13, 프롤로그 중에서


이런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도 용서라는 단어는 자주 등장한다.

거창하고 거룩한 단어 같지만 소중한 관계가 누구에 의해서든 망가질 때 반드시 등장해야 하는 단어이니 저자가 용서에 관해 탐구를 시작하게 된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지도 모르겠다.


한데 서론을 읽자마자 당황했다.

용서란 복수와 보상의 포기이다! 라고 시작하는 데서 용서란 과연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용서의 길을 제대로 갈 수 있는지 알고자 책장을 넘기는데 저자는 갑자기 조언 대신 질문을 던지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실제로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용서는 이해한다는 뜻일까? 하지만 이해할 수 있다고 해서 반드시 용서할 수도 있을까?

스스로가 결정해서 저지른 죄와 단순한 광기나 심리적 결함 등과 같은 죄는 같은 선상에 있는 것일까?

- 살인범에게 딸을 잃은 어머니와의 인터뷰 : 범인은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총기를 난사해서 15명을 죽이고 자살했다. 피해자 중의 한 사람이 그녀의 딸이었다. 그녀는 범인이 어떻게 인간으로서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었는지 이해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것으로 비로소 용서의 한 걸음을 떼어놓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말한다.


"나는 그 행위를 용서하지 않아요. 이해하려 노력하면서 그것을 정당화하지도 않아요. 용서란 정당화한다는 뜻이 아니에요"

>>> page 83, 용서는 이해한다는 뜻일까 중에서


용서는 사랑한다는 뜻일까? 상대방의 참회가 없이도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용서는 가능할까?

아무 대가도 없이 용서해버린다면 굳이 용서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무리 용서가 복수와 보상의 포기라고 해도 가해자에게서 감사나 참회의 말도 없이 피해자가 용서를 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것은 종교의 죄 사함인가? 신의 영역인가?

- 교도소 성경 공부 모임에서의 인터뷰 : 각각의 죄를 짓고 교도소에 들어온 몇몇 사람들과 용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중 사랑하는 여인을 죽이고 복역 중인 한 노인이 있다. 그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참회하여 신이 그를 용서했고 그를 사랑하는 그의 형이 그를 용서했고 그를 괴롭혔던 그의 아버지를 그가 용서했지만 결코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라고 노인은 나지막히 덧붙였다. 아무도 그의 죄를 덜어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는 그 죄가 너무 컸다.

>>> page 133, 용서는 사랑한다는 뜻일까 중에서


용서는 망각한다는 뜻일까? 망각은 용서의 전제 조건인가?

- 홀로코스트 : 유대인 철학자 블라디미르 얀켈레비치는 독일에서 나고 자랐지만 독일어나 그들의 문화와는 영원히 결별했다. 독일 땅에 발도 들이지 않을 것이라 맹세했다. 어느 날 나치와는 아무 관련 없는 독일인이 그에게 용서를 구하는 편지를 쓴다. 그러나 얀켈레비치는 죽는 순간까지 독일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에바 모제스 코르는 유대인 생체 실험 대상이었으나 살아남았고 나치들을 용서했다고 선언했다. 많은 유대인들은 그녀가 희생자들을 대신해 그럴 자격이 없다고 비난했다.

레기나와 츠비 노부부는 나치로 인해 수용소에서 부모님과 형제를 잃었고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한다. 그들은 여전히 그날들을 잊지 않기 위해 책을 쓰고 기억을 곱씹지만 그들의 자식과 손자 손녀들에게 기억을 강요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죄책감을 갖고 사는 사람들은 많은 일을 하지 못합니다. 그것에 짓눌려 살지요. 자식들에게 그 죄책감을 물려줘서는 안됩니다."

"우리도 우리 아이들을 보호하고 싶었답니다. 우리 과거는 우리끼리 간직하고 싶었어요"

>>> page 226, 용서는 망각한다는 뜻일까 중에서


용서에 관한 3가지 질문은 끝났다. 그래서 과연 용서란 무엇인지 혼란스럽다. 의문만이 가득 남는다.


저자는 에필로그를 통해서 저자의 생일날 가족 모두가 모여 - 친아버지와 새아버지 그리고 그들의 새로운 아내들까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엄마까지 방문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리하여 그것이 용서로 마무리가 되었는지 화해가 이루어진 것인지는 모르겠다.


책이 두껍지 않은데도 읽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책의 내용을 정리하면서도 사실 내가 이 책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알 수가 없다.


책을 읽으며 심각한 2가지 문제에 직면했다.


첫째)

중간중간 나오는 저자와 엄마의 이야기. 저자가 이 책을 쓰기 위해 했던 인터뷰들, 용서에 관한 3가지 물음에 대한 대답을 위해 가지고 온 수많은 '정보들'. 그 어떤 것도 어우러지지 않았다. 개인적인 이야기와 그 모든 학문적인 서술이 뒤섞여서 오히려 혼란스럽다.


용서라는 거창한 단어를 탐구하려는 시도는 좋았을지 모르지만 이 책의 그 많은 질문들로 인해 저자가 엄마에게 용서의 첫걸음을 뗐는지조차도 알 수가 없다. 저자와 엄마의 이야기만 놓고 본다면 저자의 용서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화해의 칼자루는 엄마 쪽이 쥐고 있다. 엄마가 참회하는가, 사과할 것인가, 최소한 꾸준하고 따뜻한 연락으로 저자의 마음을 풀어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저자가 용서를 하고 말고는 엄마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정말로 저자에게 용서라는 단어가 왜 필요한가? 그저 저자의 마음이 편안해지고 더 이상 엄마를 원망하지 않기 위한 구실뿐인가. 그렇다면 '용서'가 아니라 '솔직함'만이어도 되지 않는가. 엄마와 아직 지난날들에 대해서 솔직하게 대화하지 않았던 것으로 나오는데 용서 보다 솔직한 대화가 먼저 아닐까.


용서와 망각 그리고 홀로코스트의 얘기를 풀자면 이야기는 끝도 없어진다. 단지 저자의 질문 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은 여전히 기억이 생생하다며 독일에 끊임없이 각인시키지만 정작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어느 날 팔레스타인 땅에 들어가서 그들을 죽이고 핍박하며 자리를 차지해버렸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건국하고 아우슈비츠에 대해서 말하지만 지금도 자신들의 땅을 잃고 헤매며 죽어가는 팔레스타인들이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그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총질을 하는 유대인들이 절대로 독일을 용서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피해자인 그들은 결코 역사를 잊어서는 안된다고 하지만 가해자인 그들은 지금 만들어가는 역사는 망각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들이 독일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또한 나에게는 어떠한 인터뷰도 깊이감이 느껴지질 않았다. 피해자의 큰 고통도 가해자의 깊은 참회도 느껴지지 않는다. 짧은 인터뷰 내용을 실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각각의 질문에 대한 공감이 형성되질 않았다.

딸에게 총을 쏜 남자는 자살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아무리 그를 이해하려고 해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그는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그가 살아 있어서 그녀의 어머니와 대화라도 할 수 있었다면, 아니 그렇게 잔혹한 일을 저지른 후의 그의 얼굴을 보기라도 했다면 단지 살인범이 살아온 몇 줄의 글들로 그의 삶을 상상하는 것보다 그를 이해하기 쉬웠을 것이다. 반대로 그를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죽었다. 그의 상황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의 악행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그를 이해하려는 시도만으로 용서는 시작되었다. 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라면 그 이상은 그를 이해할만한 미래가 없는데 어떻게 용서가 진행이 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용서는 가해자와는 상관없이 내 식으로 그를 이해하면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해라는 것은 논리적인 사고방식에서 오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 자체로의 사랑에서 나오는 것인가? 희생자를 위한 기념비가 세워져서 그게 용서나 이해와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누구를 위한 기념비인가. 이 비극이 중요한 정치적 사건으로 확장된다면 가해자를 이해하고 용서하기 더 쉬워지는 건가? 오히려 그런 가해자를 만들어낸 사회에 더 큰 분노를 가지게 되지 않을까?


둘째)

이 책을 읽으며 나에게 난독증이 있는 것이 아닌지 고민했던 순간이 있다.

요즘 너무 책을 읽지 않았나. 너무 가볍고 짧은 글들에 익숙해져 있나.


저자가 철학을 전공해서 그런지 많은 철학자들의 논문이나 책의 내용이 등장하고 그것을 토대로 글이 진행이 되는데 번역이 어렵게 된 것인지 애당초 그렇게 쓰인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글이 어려워서 책을 읽는 속도가 나질 않으니 흐름이 자꾸 끊겨서 어느 부분은 관심 없는 전단지를 읽듯이 후루룩 읽어버렸다. 모든 단어의 뜻을 다 알고 있는데 어째서 바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일까.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겠는데 마치 수능 영어 지문을 읽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문장이 어색하다는 느껴지는 것은 번역의 문제가 아닐까


임상적인 이해는 어떤 행위를 다시금 합리성의 영역으로 데려가며 범죄자와의 안정적인 거리를 조성한다.

>>> page 46 중에서


이렇게 특히 소수자들에게서 일체의 책임을 벗기고 금치산 선고를 내리는 경향을 스스로 대중적이라고 착각하는 서양 사회 지식인의 전형적인 증상으로 본 것이다.

>>> page 57 중에서


"한 사람을 악하다고(······) 부르는 이유는 그가 악한 (법을 어기는) 행위를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행위들이 그의 마음속에 있는 악한 준칙들을 불러올 수 있게 하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 page 63 중에서


슬로터다이크의 '다른 경제학'은 '선물을 받은 사람의 의무가 없는' 선물이다. 혹은 부채 탕감과 비슷한, "폭력적인 대출 상환 독촉의 포기"다. 이 지점에서 슬로터다이크는 경제학에서 도덕으로 이어지는 다리를 놓는다.

>>> page 114 중에서



이 책에 집중하느라 친구와의 다툼은 잠시 잊고 있었으니 어느 정도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용서에 관한 어떠한 새로운 사실도 얻질 못해 아쉽다. 개인적인 감정으로 인해서 너무 큰 기대를 하지 않았나 싶다.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 했던 저자의 욕심이었는지 너무 쉽게 답을 얻으려고 했던 나의 욕심이었는지.


책을 읽는 내내 영화 '밀양' 생각이 났다.

전도연이 그 범죄자를 용서하려고 찾아갔던 교도소 앞에서 쓰러지던 장면 말이다. 

이제보니 저자의 질문들과 닮아있었다. 


나와 나의 친구는.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은 또는 내가 상처 주었던 사람들은, 우리나라에 절대 사죄하지 않는 일본은, 억울하게 죽어간 민주투사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범죄들은.

아직 그 어디에도 용서는 없다. 진정한 용서를 본 기억이 없다.

때론 이해했고 때론 사랑했고 때론 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하지도 용서를 받지도 못했다. 그 누구도.


용서라는 것이 인간이 진정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인지부터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 위의 글은 서평 이벤트에 당첨되어 해당 출판사가 제공한 책을 읽고 쓴 개인적인 소감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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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스테이크라니
고요한 지음 / &(앤드)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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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소설을 얼마 만에 읽는지 모르겠다.

일부러 한국 소설을 외면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책을 받고서 생각해보니 한동안 한국 소설은 찾아 읽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에 한국 소설이 빅히트를 치던 때가 있었다. 책 소개 프로그램에서 나왔거나 책의 내용만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어 마치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 이야기를 하듯이 해당 책의 이야기를 친구들과 하던 때가 있었다. 아마도 그 즈음부터였던 것 같다.

그 즈음에 고작 몇 권의 책을 읽고는 한국 소설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정서가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아주 자주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빠지는 편협함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을 봤을 때는 한국 소설인지 몰랐다. 스테이크라는 단어는 아무래도 한국 소설의 제목에는 어울리지 않으니까.

읽어볼까 라는 생각을 했을 때도 책 소개는 자세히 읽어보지는 않았다. 아마도 사랑이 제목에 있으니 사랑 이야기겠지.

한국 현대 소설도 사랑도 내가 원하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무섭도록 아름답고 잔인하게 슬픈 소설이다" 라는 띠지 문구만큼은 결코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원하던 이야기였으니까 말이다.


책을 받아 작가의 말을 천천히 읽었다. 문체가 마음에 들었다. 이 책을 놓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작가의 말을 읽고 눈물이 조금 났다. 짧은 글인데도 말도 안 되게 쓸쓸하고 슬퍼졌다.

엄마 라는 단어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마도 나 또한 그의 단편들에서 담배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책은 총 8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왜 발표된 순서대로 구성하지 않았는지 궁금하긴 한데 '사랑이 스테이크라니' 를 시작으로 각 단편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글의 분위기는 하나의 단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치유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니 치유를 바라는 SOS 신호에 더 가깝겠다.


띠지 문구처럼 잔인하고 슬픈 소설이다.

아름다움에 공감하지는 않지만 분명 사랑이 있고 치유가 있으니 그 자체로 아름다운 건지도 모르겠다.

영화 '쓰리, 몬스터'가 생각나기도 하고 '노르웨이의 숲'이 생각나기도 한다. 가요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라든가, 시 '뼈아픈 후회'가 생각나기도 한다. 그동안 들었던, 봐왔던 것들에서 느꼈던 온갖 쓸쓸한 장면들은 한 번씩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 보면 막장드라마처럼 자극적인데 어떻게 보면 모든 일이 꿈을 꾸는 듯 모호하다.


각 단편은 모두 어떤 남자의 이야기이다.

비슷한 나이대에 비슷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8명의 남자들. 한 남자가 8번의 환생을 겪는 느낌이랄까.

맞서 싸우는 쪽보다는 뒤로 물러서는 쪽을 택해서 마냥 약한가 싶지만 어느 면에서는 광기가 느껴질 만큼 집요하고 거칠다.

보통의 사람들 만큼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다. 자신보다 상대방을 비난하는 것에 능숙한 것도 그렇다.

겉으로 드러내는 것보다 훨씬 많은 말들이 안에 있지만 대부분 삼켜버리고 만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데 실제로는 소설 속에서나 존재할 만한 사람 같기도 하다.


그 남자들은 모두 누군가를 잃어버렸다. 그렇지만 그들이 떠나온 것도 아니고 버려진 것도 아니라서 눈물이 넘쳐나는 이별의 장면은 없다. 모든 상실과 상처는 담담하게 그려지고 지독한 그리움, 외로움, 자책, 후회, 원망 등으로 범벅이 되어있다. 사랑을 갈구하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상대방으로부터의 사랑이었는지 그저 사랑 그 자체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치유를 말하는 소설은 아닌 것 같다. 동화처럼 "그리하여 왕자와 공주는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상실과 상처만이 가득하다. 각 단편의 주인공은 작가가 글을 쓰며 입에 문 담배처럼 희미한 불빛으로 타들어가서 뿌옇게 연기로 사라져버린다.


각 이야기의 줄거리를 쓸까 하다가 단편 소설이라서 쓰지 않기로 했다. 줄거리가 곧 그 이야기의 전부이기 때문에 느낀 점 위주로만 적다 보니 굉장히 우울하고 복잡한 심리 묘사 위주의 소설인가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상실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들이라 정적인 것은 맞지만 문체와 흐름에 군더더기가 없어서 쉽게 잘 읽힌다. 어려운 단어가 남발되거나 꼬이고 꼬인 문장도 없다. 충분히 감정이입을 해서 읽어도 담담하게 쓰인 이야기 대로 따라가면 읽는 사람을 지치게 하지도 않는다.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단 숨에 읽어내게 하는 힘도 있다. 분명 읽는 재미가 있는 소설이다.


마지막 책장을 덮자 작가의 담뱃불도 꺼졌다.

그리고 나도 이 책의 주인공들과 다를 바 없이 메마른 것 같다. 어느덧 그들에게 스며든 것인지 아니면 이미 쓸쓸한 내가 그들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오래전에 나도 그들처럼 그 누구를 잃어버린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에게 SOS를 보내야 하는 걸까. 누구를 찾아야 하는 걸까.

나도 오랜만에 종이비행기를 접어봐야겠다. 어디로 날릴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지만.





※ 위의 글은 서평 이벤트에 당첨되어 해당 출판사가 제공한 책을 읽고 쓴 개인적인 소감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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