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불편한 용서
스베냐 플라스푈러 지음, 장혜경 옮김 / 나무생각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알게 되었을 때 친구와 한창 사이가 좋지 않았다.

싸운 것은 아니었는데 오히려 싸웠다면 좀 더 화해가 수월했을 것 같은 미묘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친구는 나에게 섭섭한 마음을 솔직하게 말하지 않은 채로 툴툴거렸고 나는 대화의 기회는 갖지 않은 채 친구가 툴툴대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우리가 삐걱거렸던 이유는 아주 사소하면서도 본질적인 것이었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친구는 코로나 시대가 너무 답답하다며 계속해서 어딘가로 놀러 가기를 원했고 나는 대부분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대화 없이 시작된 신경전은 결국 어떠한 실수로 이어지고 그 실수가 분노를 일으켜 도저히 화가 누그러지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그녀의 고의가 다분한 그 실수를 용서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조금 불편한 용서.

친구와의 다툼 정도로 거창하게 용서를 운운할 수 있겠느냐고 누군가는 비웃을지라도 '용서' 라는 단어에 너무 잘 어울리는 '조금 불편한' 이라는 수식어가 마음에 들었다. 용서를 해야 하는 순간은 어떠한 형태로든 상처가 되는 순간이다. 그 순간을 넘어서는 용서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제목을 '조금 불편한' 용서로 받아들였다. 용서 그 자체가 불편한 것이다. 나는 아마도 결국에는 친구의 사과를 받아들이겠지만 우리의 사이가 그전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틀림없다. 그러나 화해를 하는 것도 화해를 하지 않는 것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책에 답이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기대로 책장을 넘겼다.





저자는 프롤로그에 엄마의 이야기를 적었다.


저자가 14살 때 그녀의 엄마가 새로운 남자와의 출발을 위해서 갑자기 떠나버렸고 그 뒤로 연락도 끊어졌다. 저자는 갑자기 버려졌고 불행한 시간을 보냈지만 엄마는 그 일에 대해 한 번도 사과나 변명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엄마와의 불편한 관계는 계속해서 저자를 괴롭혔다. 저자는 그런 엄마를 영원히 떠날 수도 없고 잊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둘은 시간이 지난 뒤 종종 연락을 주고받으며 지냈지만 과거의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이러한 엄마와의 관계가 이 책의 곳곳에서 이어진다. 저자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엄마를 어떻게 용서해야 하는가 이지 않을까 싶다.


"그럼 엄마를 용서했어?"

여동생은 그 질문을 별 뜻 없이 지나가는 투로 내뱉으려고 노력한다.

무엇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용서... 거창한 말이다.

>>> page 13, 프롤로그 중에서


이런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도 용서라는 단어는 자주 등장한다.

거창하고 거룩한 단어 같지만 소중한 관계가 누구에 의해서든 망가질 때 반드시 등장해야 하는 단어이니 저자가 용서에 관해 탐구를 시작하게 된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지도 모르겠다.


한데 서론을 읽자마자 당황했다.

용서란 복수와 보상의 포기이다! 라고 시작하는 데서 용서란 과연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용서의 길을 제대로 갈 수 있는지 알고자 책장을 넘기는데 저자는 갑자기 조언 대신 질문을 던지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실제로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용서는 이해한다는 뜻일까? 하지만 이해할 수 있다고 해서 반드시 용서할 수도 있을까?

스스로가 결정해서 저지른 죄와 단순한 광기나 심리적 결함 등과 같은 죄는 같은 선상에 있는 것일까?

- 살인범에게 딸을 잃은 어머니와의 인터뷰 : 범인은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총기를 난사해서 15명을 죽이고 자살했다. 피해자 중의 한 사람이 그녀의 딸이었다. 그녀는 범인이 어떻게 인간으로서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었는지 이해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것으로 비로소 용서의 한 걸음을 떼어놓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말한다.


"나는 그 행위를 용서하지 않아요. 이해하려 노력하면서 그것을 정당화하지도 않아요. 용서란 정당화한다는 뜻이 아니에요"

>>> page 83, 용서는 이해한다는 뜻일까 중에서


용서는 사랑한다는 뜻일까? 상대방의 참회가 없이도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용서는 가능할까?

아무 대가도 없이 용서해버린다면 굳이 용서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무리 용서가 복수와 보상의 포기라고 해도 가해자에게서 감사나 참회의 말도 없이 피해자가 용서를 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것은 종교의 죄 사함인가? 신의 영역인가?

- 교도소 성경 공부 모임에서의 인터뷰 : 각각의 죄를 짓고 교도소에 들어온 몇몇 사람들과 용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중 사랑하는 여인을 죽이고 복역 중인 한 노인이 있다. 그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참회하여 신이 그를 용서했고 그를 사랑하는 그의 형이 그를 용서했고 그를 괴롭혔던 그의 아버지를 그가 용서했지만 결코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라고 노인은 나지막히 덧붙였다. 아무도 그의 죄를 덜어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는 그 죄가 너무 컸다.

>>> page 133, 용서는 사랑한다는 뜻일까 중에서


용서는 망각한다는 뜻일까? 망각은 용서의 전제 조건인가?

- 홀로코스트 : 유대인 철학자 블라디미르 얀켈레비치는 독일에서 나고 자랐지만 독일어나 그들의 문화와는 영원히 결별했다. 독일 땅에 발도 들이지 않을 것이라 맹세했다. 어느 날 나치와는 아무 관련 없는 독일인이 그에게 용서를 구하는 편지를 쓴다. 그러나 얀켈레비치는 죽는 순간까지 독일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에바 모제스 코르는 유대인 생체 실험 대상이었으나 살아남았고 나치들을 용서했다고 선언했다. 많은 유대인들은 그녀가 희생자들을 대신해 그럴 자격이 없다고 비난했다.

레기나와 츠비 노부부는 나치로 인해 수용소에서 부모님과 형제를 잃었고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한다. 그들은 여전히 그날들을 잊지 않기 위해 책을 쓰고 기억을 곱씹지만 그들의 자식과 손자 손녀들에게 기억을 강요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죄책감을 갖고 사는 사람들은 많은 일을 하지 못합니다. 그것에 짓눌려 살지요. 자식들에게 그 죄책감을 물려줘서는 안됩니다."

"우리도 우리 아이들을 보호하고 싶었답니다. 우리 과거는 우리끼리 간직하고 싶었어요"

>>> page 226, 용서는 망각한다는 뜻일까 중에서


용서에 관한 3가지 질문은 끝났다. 그래서 과연 용서란 무엇인지 혼란스럽다. 의문만이 가득 남는다.


저자는 에필로그를 통해서 저자의 생일날 가족 모두가 모여 - 친아버지와 새아버지 그리고 그들의 새로운 아내들까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엄마까지 방문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리하여 그것이 용서로 마무리가 되었는지 화해가 이루어진 것인지는 모르겠다.


책이 두껍지 않은데도 읽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책의 내용을 정리하면서도 사실 내가 이 책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알 수가 없다.


책을 읽으며 심각한 2가지 문제에 직면했다.


첫째)

중간중간 나오는 저자와 엄마의 이야기. 저자가 이 책을 쓰기 위해 했던 인터뷰들, 용서에 관한 3가지 물음에 대한 대답을 위해 가지고 온 수많은 '정보들'. 그 어떤 것도 어우러지지 않았다. 개인적인 이야기와 그 모든 학문적인 서술이 뒤섞여서 오히려 혼란스럽다.


용서라는 거창한 단어를 탐구하려는 시도는 좋았을지 모르지만 이 책의 그 많은 질문들로 인해 저자가 엄마에게 용서의 첫걸음을 뗐는지조차도 알 수가 없다. 저자와 엄마의 이야기만 놓고 본다면 저자의 용서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화해의 칼자루는 엄마 쪽이 쥐고 있다. 엄마가 참회하는가, 사과할 것인가, 최소한 꾸준하고 따뜻한 연락으로 저자의 마음을 풀어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저자가 용서를 하고 말고는 엄마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정말로 저자에게 용서라는 단어가 왜 필요한가? 그저 저자의 마음이 편안해지고 더 이상 엄마를 원망하지 않기 위한 구실뿐인가. 그렇다면 '용서'가 아니라 '솔직함'만이어도 되지 않는가. 엄마와 아직 지난날들에 대해서 솔직하게 대화하지 않았던 것으로 나오는데 용서 보다 솔직한 대화가 먼저 아닐까.


용서와 망각 그리고 홀로코스트의 얘기를 풀자면 이야기는 끝도 없어진다. 단지 저자의 질문 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은 여전히 기억이 생생하다며 독일에 끊임없이 각인시키지만 정작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어느 날 팔레스타인 땅에 들어가서 그들을 죽이고 핍박하며 자리를 차지해버렸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건국하고 아우슈비츠에 대해서 말하지만 지금도 자신들의 땅을 잃고 헤매며 죽어가는 팔레스타인들이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그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총질을 하는 유대인들이 절대로 독일을 용서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피해자인 그들은 결코 역사를 잊어서는 안된다고 하지만 가해자인 그들은 지금 만들어가는 역사는 망각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들이 독일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또한 나에게는 어떠한 인터뷰도 깊이감이 느껴지질 않았다. 피해자의 큰 고통도 가해자의 깊은 참회도 느껴지지 않는다. 짧은 인터뷰 내용을 실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각각의 질문에 대한 공감이 형성되질 않았다.

딸에게 총을 쏜 남자는 자살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아무리 그를 이해하려고 해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그는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그가 살아 있어서 그녀의 어머니와 대화라도 할 수 있었다면, 아니 그렇게 잔혹한 일을 저지른 후의 그의 얼굴을 보기라도 했다면 단지 살인범이 살아온 몇 줄의 글들로 그의 삶을 상상하는 것보다 그를 이해하기 쉬웠을 것이다. 반대로 그를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죽었다. 그의 상황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의 악행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그를 이해하려는 시도만으로 용서는 시작되었다. 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라면 그 이상은 그를 이해할만한 미래가 없는데 어떻게 용서가 진행이 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용서는 가해자와는 상관없이 내 식으로 그를 이해하면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해라는 것은 논리적인 사고방식에서 오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 자체로의 사랑에서 나오는 것인가? 희생자를 위한 기념비가 세워져서 그게 용서나 이해와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누구를 위한 기념비인가. 이 비극이 중요한 정치적 사건으로 확장된다면 가해자를 이해하고 용서하기 더 쉬워지는 건가? 오히려 그런 가해자를 만들어낸 사회에 더 큰 분노를 가지게 되지 않을까?


둘째)

이 책을 읽으며 나에게 난독증이 있는 것이 아닌지 고민했던 순간이 있다.

요즘 너무 책을 읽지 않았나. 너무 가볍고 짧은 글들에 익숙해져 있나.


저자가 철학을 전공해서 그런지 많은 철학자들의 논문이나 책의 내용이 등장하고 그것을 토대로 글이 진행이 되는데 번역이 어렵게 된 것인지 애당초 그렇게 쓰인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글이 어려워서 책을 읽는 속도가 나질 않으니 흐름이 자꾸 끊겨서 어느 부분은 관심 없는 전단지를 읽듯이 후루룩 읽어버렸다. 모든 단어의 뜻을 다 알고 있는데 어째서 바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일까.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겠는데 마치 수능 영어 지문을 읽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문장이 어색하다는 느껴지는 것은 번역의 문제가 아닐까


임상적인 이해는 어떤 행위를 다시금 합리성의 영역으로 데려가며 범죄자와의 안정적인 거리를 조성한다.

>>> page 46 중에서


이렇게 특히 소수자들에게서 일체의 책임을 벗기고 금치산 선고를 내리는 경향을 스스로 대중적이라고 착각하는 서양 사회 지식인의 전형적인 증상으로 본 것이다.

>>> page 57 중에서


"한 사람을 악하다고(······) 부르는 이유는 그가 악한 (법을 어기는) 행위를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행위들이 그의 마음속에 있는 악한 준칙들을 불러올 수 있게 하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 page 63 중에서


슬로터다이크의 '다른 경제학'은 '선물을 받은 사람의 의무가 없는' 선물이다. 혹은 부채 탕감과 비슷한, "폭력적인 대출 상환 독촉의 포기"다. 이 지점에서 슬로터다이크는 경제학에서 도덕으로 이어지는 다리를 놓는다.

>>> page 114 중에서



이 책에 집중하느라 친구와의 다툼은 잠시 잊고 있었으니 어느 정도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용서에 관한 어떠한 새로운 사실도 얻질 못해 아쉽다. 개인적인 감정으로 인해서 너무 큰 기대를 하지 않았나 싶다.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 했던 저자의 욕심이었는지 너무 쉽게 답을 얻으려고 했던 나의 욕심이었는지.


책을 읽는 내내 영화 '밀양' 생각이 났다.

전도연이 그 범죄자를 용서하려고 찾아갔던 교도소 앞에서 쓰러지던 장면 말이다. 

이제보니 저자의 질문들과 닮아있었다. 


나와 나의 친구는.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은 또는 내가 상처 주었던 사람들은, 우리나라에 절대 사죄하지 않는 일본은, 억울하게 죽어간 민주투사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범죄들은.

아직 그 어디에도 용서는 없다. 진정한 용서를 본 기억이 없다.

때론 이해했고 때론 사랑했고 때론 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하지도 용서를 받지도 못했다. 그 누구도.


용서라는 것이 인간이 진정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인지부터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 위의 글은 서평 이벤트에 당첨되어 해당 출판사가 제공한 책을 읽고 쓴 개인적인 소감문입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