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 상담을 공부하는 지인들이 좀 있어서 노골적으로 드러낸 적은 별로 없지만, 각종 심리 또는 성격검사들에 대해서 사실 속으로는 조금 우습게 여겨 왔습니다. 그렇다고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반대할만큼 특별한 지식이 있어서는 아니고, 단지 이 많고도 많은 사람들을 특정 유형으로 구분하다 보면, MBTI도 그렇고 애니어그램도 그렇고, ISTJ네, ISBN이네, ADSL이네 하는, 많아봐야 여나믄 개의 타입으로 환원시키는 것으로 끝날 게 뻔하니까요. 이렇게 해서야 한 고유한 인간의 진면목이라는 게 드러날까 싶은 거죠. '한 인간의 진면목'이라니, 애초에 그런 검사가 이걸 이해하려고 하는 것도 아닐텐데, 말도 안되는 기대겠죠? 그래도 최근엔 가까운 사람들이 심리나 관계의 문제로 고통을 겪는 경우들을 경우들을 보면서 조금은 이해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런 문제에 도움을 주려면 일단은 파악을 해야 하니 아무리 환원주의의 위험은 있다해도 어쩔 수 없는 면이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드는 거죠. 어쨌든, 이해는 한다 해도 그다지 신뢰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 솔직한 생각일 겁니다.
요즘 아도르노의 책을 읽고 있습니다. 사실 어려워서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은데,일단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나 가보자는 심정으로 읽어가고 있어요. 잘은 모르지만, 현대 문명이랄까 정신사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있는 듯합니다. 이건 아도르노를 연구해온 사람들의 말이기도 하죠. 여튼, 이런 평가에 깊이 동감하게 만드는 대목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미니마 모랄리아> 를 읽어보면, 이 사람의 문체도 정말 뛰어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전반적인 문맥을 모른다 해도 번뜩이는 아포리즘들 앞에서 아, 하고 탄식이 나올 때가 많아요. 그건 그렇고, 심리검사 이야기를 한 이유는 아도르노가 정신분석에 대해 언급하는 대목에서 정말 공감이 되서입니다. 기본적으로 아도르노는 '정신분석'에 대한 관심이 궁극적으로는 상처에 대한 공포, 그리고 그것으로부터의 도피로 이어지는 자기 포기 내지 자기 체념과 연관된다고 보는 것 같아요.
정신분석에는 과장 이외에는아무런 진실성이 없다. (73면)
인식과 권력 사이에는 노예 근성의 연관성뿐만 아니라 진리의 연관성도 존재한다. 대부분의 인식은, 형식적인 면에서는 맞을지라도, 힘의 분배에서 균형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어떤 이민 온 의사가 "내가 볼 때 히틀러는 병적인 사례에 불과하다"고 말했다면 임상학적인 전거를 토대로 그의 진술이 결국에는 확인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편집광의 이름으로 세상에 새겨진 객관적 불행을 담아내기에는 부적절한 것으로서 그 때문에 그의 진단은 진단자의 우쭐대는 호기로만 들릴뿐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다. 히틀러는 즉자적으로는 병적인 사례일지 모르지만 '그에 대해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 파시즘에 대항한 망명객들의 수많은 선언이 공허하고 초라하게 보이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자유롭고, 거리를 두며, 이해관계를 초월한 듯한 판단 형식 속에서 사유하는 사람들은 그런 형식으로는 폭력의 경험을 담아낼 수가 없다. 폭력은 그런 사유를 실질적으로 무력화하고 있는 것이나. 거의 풀수 없는 과제겠지만 중요한 것은 타인의 권력에 의해서든 자신의 무력감에 의해서든 자신을 어리석게 만들지 않는 것이다. (83면)
어떤 사람의 생각은, 정신분석의 훈련을받은 사람이 그 사람은 강압적 성격인가, 구강기형인가, 아니면 히스테릭한 사람인가를 결정하기 위한 소재를 이룰 뿐이다. 반성, 즉 오성의 통제와 분리되는 데서 비롯된 책임성의 완화 때문에 사변은 학문의 객체로 떨어지며, 학문과 주체와의 연결 고리 또한 사변과 함께 떨어져나간다. 사유는 정신분석의 관리 도식에 의해 자신의 무의식적인 원천이 상기됨에 따라 사유가 되는 것을 잊어버린다. 사유는 진실된 판단보다는 중립적 소재가 되는 것이다. 자신을 제어하기 위해 개념화하는 노동을 행하기보다,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의사의 처방에 자신을 무기력하게 내맡기게 된다. 그리하여 사변은 결국 분쇄되고,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는 분류 목록 속에 하나의 '사실'로서 삽입된다. (98-99면)
물론 심리검사 이야기는 아도르노가 정신분석에 대해 하고 있는 이 날카로운 지적에 비하면, 아주 소소한 문제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심리 안에서는 인간이 타인과 맺게 되는 관계 내에서는 상처와 고통은 단순히 내가 어떤 방식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유형인지를 확인하는 데서 극복되는 게 아닌 것은 분명하죠. 제가 해 본 검사도 그랬지만, 대개는 나는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행동하는 인간이니, 이런 방식의 갈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니 유의할 것! 이 정도였던 게 사실입니다. 아도르노는 고통이라는 객관적 상황에 대해서 끝까지 사유하지 못하게 하는, 사유중지의 부작용이랄까 이런 걸 지적하는 게 아닌 게 싶은데, 참 철저하게 생각하는 사람인 것만은 분명하죠.
에리히 프롬이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끝까지 같이 가지는 않았다고 하던데, 잘은 모르지만 아도르노의 이런 면을 보면 함께 갔다 해도 이상해 보입니다. 여튼, 아도르노의 글은 힘이 있습니다. 몇 구절 인용하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죠. 그나저나 어렵다고 읽다가 포기하지는 말아야 할텐데, 그게 걱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