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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베토벤 : 교향곡 전곡 [5CD]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작곡, 블롬슈테트 (Herbert Blom / Brilliant Classics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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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부 씨디에서 탁탁거리며 음악이 끊기는 불량이 나왔는데, 알라딘에서는 두 번이나 교환해도 소용이 없더군요. 결국 수입사에 전화해서 추가로 배송 받았습니다. 싸다고 다 좋은 건 아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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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고독 - 토리노 하늘 아래의 두 고아, 니체와 파베세
프레데릭 파작 지음, 이재룡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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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구성이랄까, 아이디어랄까, 참 독특한 책이다. 저자가 서문에서 말한 것처럼, 니체와 파베세라는 위대한 작가를 다루지만, 두 사람의 '전기'는 아니며, 파작 자신의 이야기이지만, 파작의 '자서전'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또 토리노라는 특정 장소에 주의를 기울이지만 지리책도 아닌 데다, 그림책이지만 '만화'는 전혀 아니다.

  읽는 내내 감탄을 한 것은 니체와 파베세라는 인물에 대해서보다는, 이 둘을 이런 방식으로 엮고, 풀어낸 작가 파작에 대해서였다. 그렇다고 저자가 니체와 파베세에 대해서 소홀히 이야기했다고는 할 수 없다. 구체적인 사실로는 아니라 해도, 니체와 파베세에 대해 전기를 한권씩 읽은 것 만큼 그 둘을 알게 되었다는 느낌이 드니까. 

  특징적인 것은 니체와 파베세를 파작 자신의 '공감'을 통해 그려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니체와 파베세라는 이 둘과 저자 파작을 묶어준 공감대가 바로 '고독'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역설적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암컷이 우글대는 곳에서 홀로 수컷으로' 지냈으며, 무엇보다 토리노라는 공간을 서로 다른 시기에 공유했다는 세 사람의 유사한 경험만으로 이런 수준의 공감이 가능했을까. 니체의 고독, 파베세의 고독, 그리고 이 둘을 음미하고 풀어내는 저자의 '고독'마저 더해져서, 읽다보면 나마저 '토리노 하늘 아래 고아'인 듯한 기분이 든다. 

  정말 파베세와 니체의 마음 속을 엿본 듯한 파작의 '공감'은 탁월하게 --글은 물론 그림으로도-- 표현되었다. 서로 만난 적도 없는 이 세 사람이 공감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읽다보니, 이런 공감을 가능하게 했을 '장소'의 힘이 느껴진다. 사람은 나고 죽고 지나가고, 건물은 사라지고 새로운 풍경이 들어선다 해도 누군가가 있었다는 흔적을, 장소는 지니고 있을 것이다. 아주 잠시 토리노라는 곳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파베세의 글을 읽고 내 상상으로 남겨야겠다고, 곧 포기하긴 했지만.

 

너의 마음에 드는 장소(붉은 겨울 구름이 낀 토리노, 시골, 공원 등)는 네가 젊은 시절 그러했듯이 정열적으로 묘사하면 안 되고 간결하고 명확하게 묘사해야 한다. 그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 곳이 바로 삶의 현장이고 삶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 그렇게 함으로써 이 장소는 아련하게 독자의 상상 속에 남을 것이다. (139쪽)

 

 

  다시 생각하니 장소 자체보다, 그 '장소'에 대한 두 사람의 경험을 저자 파작에게 남겨준 책과 기록의 힘, 결국 내게까지 전해진 그 글의 힘을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면 어떤 '책'을 통해 나와 상관 없는 저 옛날 사람이 나에게 말을 하고, 내 말을 들어주고, 나를 이해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경험은 보편적인 것 같다. 파작은 아마도 글을 통해 자신의 '고독'을 이해해준 누군가를 찾은게 아닐지. 물론 '토리노 하늘 아래 고아인 듯'한 느낌을 이해해 줄 누군가가 있으리라는 기대로 니체와 파베세가 글을 남겼는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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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국민은 없다 - 촘스키의 신자유주의 비판
노암 촘스키 지음, 강주헌 옮김 / 모색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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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간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더니, 비준안 통과 전에 타협하자고 내놓았던 투자자-국가 제소제(ISD) 재논의에 대해서 우리 가카께서 '국격'까지 운운해 가며 없는 일로 하셨다지요? 저 타협안이 나올 때 저는 저 제안에 진정성이란 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새삼 실망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격'이라는 단어를 저렇게 쓸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경악을 했습니다. '국격'은, 그런 게 있었다면, 참여정부부터 현 정권까지 굴욕적인 태도로 이어진 협상와, 그 결과로 탄생한 불평등한 협정문에 의해 일찌감치 내던져진 것이 아니었나요?

 

  물론 ISD가 한미 FTA를 반드시 막아야할 유일한 이유는 아닙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합니다. 한미 FTA가 단순히 경제협정이나 관세철폐 수준에서 이해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이기 때문이죠. 한미 FTA 발효후 ISD가 사법주권, 영토주권을 침해할 수 있는 가능성, 나아가 사회 전반에 가져올 수 있는 급격한 변화에 대해서는 한미 FTA에 대해서 우려를 표명해온 많은 이들이 지적했었죠. 특히 이 협정이 오랜 세월 농업 국가로서 그 근간을 형성해온 공동체적인 가치, 그리고 거기에 기반한 우리의 헌법 자체를 흔든다는 것은 송기호, 최재천 두분 변호사님의 책만 보아도 분명히 알게 됩니다.

 

    촘스키의 <그들에게 국민은 없다>도 같은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책은 97년 전후로 촘스키가 주로 인터넷 매체에 기고한 글을 모아 펴낸 것이기 때문에 정확히 말해 한미 FTA 사례는 아직 촘스키의 분석을 뒷받침 해줄 근거가 아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미 발효된 이후였던 NAFTA는 강력한 증거였죠. 특히 한미 FTA 비준이 된 우리 상황에서 NAFTA의 본질에 대해서 미국의 양심세력을 대표하는 학자인 촘스키가 일갈한 것을 깊이 새겨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NAFTA의 실제목적은 멕시코를 개혁의 올가미에 몰아넣어 경제기적, 정확히 말해서 멕시코 국민을 도탄에 빠뜨리더라도 미국 투자자와 멕시코의 부자를 위한 경제기적을 이루려는 것이었다. (163면) 

 

 

    이번에 <그들에게 국민은...>을 읽으면서 새삼 중요하게 와 닿았던 것은, 협정 당사자인 양국의 투자자, 기업, 부자들은 이득을 얻지만, 대다수의 국민들은 그야말로 도탄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그 점이었습니다. 이 점은 당연히 한미 FTA를 비판하는 이들도 하는 이야기지만, 촘스키가 강조하는 "위험의 사회화"가 유난히 크게 다가왔습니다. 거의 모든 이득은 투자자와 거대 기업이 '사유화'하지만, 그로 인해 생기는 모든 위험과 비용은 '사회화', 즉 대다수 국민들이 떠맡게 된다는 것이죠. 이 책의 원제는 "Profit over People"입니다. 이것은 한미 FTA로 인해 거대기업들이 얻게 될 이득이라는 것이 자국과 상대국의 민중들을 희생시킨 댓가로 창출된 것이라는 사실을 역설하는 게 아닐까요?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촘스키가 이 책에 실린 글들을 쓸 당시에 한미 FTA는 누군가의 머리 속에는 들어있을지언정, 현실화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신자유주의의 역사적 전개와 그 흐름에서 출현한 WTO와 투자 및 경제협정들에 대한 촘스키의 비판을 귀담아 듣는다면, 한미 FTA가 촘스키의 분석을 뒷받침할 가장 분명한, 그리고 가장 극악한 사례가 될 것이라는 염려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린 뭘 할 수 있을까요? 민주주의가 기업의 이익창출로 환원되어 버린 신자유시대, 민주주의을 진정 대중의 손으로 되돌려놓기 위해서 뭘 해야 할까, 라고 묻는 질문에 촘스키는 이렇게 답합니다. 정확히 알되, 근본적으로 문제삼아야 한다! 양심적인 학자들의 정직한 판단이 '음모'가 되고 시민들의 진실한 우려가 '반미'가 되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여기서 출발하지 않으면 희망이 없기 때문이겠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일을 정확히 아는 것이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 세계화의 진면목을 알지 못한다면, 지금과 같은 세계화를 반대할 근거가 없다. (...) 따라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조치는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국민 전체를 위해서 커뮤니케이션 체제, 상호부조체제를 갖추는 것이다. (...) [기업의] 독점방지와 같은 작은 문제에 집착하기보다는, 왜 기업이 인간과 같은 권리를 지녀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 (258-25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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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학의 탄생 - 철학, 종교와 충돌하다
미셀 옹프레 지음, 강주헌 옮김 / 모티브북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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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여럿이 모인 자리에 꼭 피해야 할 이야기가 종교와 정치 이야기라고 한다. 그만큼 종교와 정치 이야기는 논쟁으로 되기 쉽고, 곧 주먹질이 되기도 하고 급기야는 피를 봐야 끝이 나기 쉽상이라는 뜻일 거다. 특히 종교의 경우 논쟁은 더욱 거세지기 일쑤다. 그래서 역으로 이런 논쟁을 잘 활용하면 한몫 잡기도 쉬울 것인데, 최근 상영금지 논쟁이 있었던 <다빈치코드>도 이런 경우라고 생각된다. 사실 나는 <다빈치코드>를 가지고 기독교도들이 날뛰는 이유 자체에 전혀 동감을 하지 못했다. 그다지 훌륭할 것 같지도 않은 픽션을 두고 바르르 하는 기독교도들 때문에 괜히 책만 더 잘 팔릴테니, 그게 싫으면 조용히 있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여튼 상황은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반대의 순풍"을 타고 책이며 영화는 인기를 끌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또 기독교인들이 들고 일어날 책이구먼"이었다. 예전에 동아일보사에서 낸 <예수는 신화다>도 그랬고, 현암사에서 나온 오강남 교수의 <예수는 없다> 때도 기독교 보수 세력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고, 서명운동인가 뭔가까지 해서는 결국 이 둘 중 어느 책인가는 절판까지 되었었다.(물론 팔릴만큼 팔린 다음이었지만.) 미셀 옹프레가 쓴 이 책, <무신학의 탄생> 또한 기독교도들이 들고 일어나기에 충분할 만큼 자극적인 책이다. -물론 이 책은 기독교만이 아니라 이슬람교와 유대교까지 포함하여 유일신교를 다루고 있다. - 이러한 "자극성"은 독자들을 끄는 매력이 될 수 있다. 게다가 번역이 깔끔하고 문장이 매끄러워서 술술 읽히고, 원저자의 능력이겠지만 문장이 발랄하고 톡톡 튀기 때문에 쉽게 완독할 수 있다는 것도 이 책의 강점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책에 "자극적"인 것 이상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이 하고 있는 비판은 사실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는 비판이다. 기독교의 발생과 관련해서 예수나 예수에 대해 기록한 신약성서를 뒷받침해줄 사료들이나 사본들이 없다는 것, 그리고 대개 예수의 실존을 입증한다고 하는 사료들 또한 후대 기독 교인들의 첨가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등 이 책이 제기하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들은 이미 무수하게 다루어진 것들이다. 그리고 기독교가 공인되고 그 전통을 확고히 해 가면서 무수한 폐해를 남긴 사실도 새로울 것이 없다. 기독교가 인류 역사에 얼마나 심각한 "죄악"들을 저질렀느냐는 <기독교 죄악사> (조찬선 지음, 평단문화사, 상하 두권짜리)만 보아도 이 책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새롭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이 책의 허점이라는 뜻은 아니다. 해 아래 무슨 새로운 이야기가 있을 수 있겠으며, 더욱이 아무리 목청껏 이야기해봐야 도저히 개선의 여지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이 종교의 무법지대를 비판하기에는 "하늘을 두루마리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모자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판으로 이야기하자면 기독교는 아직도 욕먹어 싼 부분이 많다.

   그런데 내가 아쉬운 것은 그 비판의 수준과 정당성 면에 있다. 바울을 비판하는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들은 상당히 거슬린다.

   "바울의 증세를 보면 어렵지 않게 의학적 처방을 내릴 수 있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는 듯 하다. 그밖에도 낙상, 히스테리성 실명 또는 일시적 흑내장, 감각기능의 일시적 중지로 인한 사흘 동안의 청각과 후각의 상실, 거짓말을 늘어놓는 과장증, 감동을 과장해서 표현하는 연극증이나 도덕적 과시증 등등. 이런 발작 증세들은 정신분석학 입문서에서 신경증과 관련한 내용 중 히스테리를 설명한 부분과 비슷하다." (188쪽)

   " 성생활을 원만하게 해나갈 수 없었던 바울은 성과 관련된 모든 것이 덧없다고 선언했다. 이런 선언을 자신에게만 적용시키지 않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도 강요했다. 세상 사람들에게 성욕을 죽이라고 강요해서라도 세상 사람들과 같아지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192쪽)

바울이 금욕적인 설교들을 했었고, 때로 여성 비하적인 발언을 한 것은 물론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바울이 금욕적 설교를 한 것은 "바울이 성불구이기 때문이다" 식의 비판이 과연 정당할까? 저자에게 조금 더 정당하고 "품위 있는" 비판을 요구한다면 나의 과욕일까? 바울이 어떠한 상황에서 여성에 대해 비하적인 발언을 하고, 인간의 몸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고, 그것이 기독교 전통 속에 여성과 몸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뿌리내리게 한 역사적 과정이 어떠했는지, 좀더 진지한 평가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을까?

   바울도 바울이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거슬린 부분은 9.11 이후, 아니 그 전에도 물론이지만 이슬람 국가들과 기독교 국가들 간의 반목, 전쟁, 이어지는 테러들에 대한 저자의 분석이다.

   "일신교는(기독교는 물론 유대교, 이슬람교도 포함함) 죽음으로 사람들을 위협한다. 유대인은 가나안 사람들의 피로 칼을 적셨고, 무슬림들은 민간항공기를 폭탄 삼아 뉴욕을 때렸고, 기독교인들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행되었고, 하느님에게 축복받은 행위였다. 특히 하느님의 이름을 빙자한 사람들이 앞장서서 그런 행위를 감싸고 나섰다." (243쪽)

테러를 벌이는 이슬람 세력들도, 테러를 예방한답시고 전쟁을 벌이는 미국도 다들 종교를 내걸고 하나님을 들먹이고는 있지만, 그 꿍꿍이들 뒤에 숨겨진 속셈은 사실 종교도 하나님도 경전도 아니라는 것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비판을 하면서 내놓은 "이토록 몹쓸 폐해만을 낳는 종교, 기독교에 맞서 전투적인 무신론자가 되자"는 저자의 주장은 등가려운데 옷위를 긁는 것 같이 감질난다.

   이 책이 이래저래 아쉬운 점이 있다고 투덜거리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소위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에게 읽혔으면 좋겠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정말 아직도 지 밥그릇 싸움을 하면서도 하나님 핑계대고 성경을 핑계대는, 딱 이 책의 저자에게 욕먹어 싼 기독교가 주를 이루고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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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와 산과의사
미셀 오당 지음, 김태언 옮김 / 녹색평론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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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주 차를 타고 오고 가는 길에 읽은 책이다.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책을 읽는 습관을 들이면서 언젠가부터 무게도 가볍고 부피도 작은 책을 선호하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녹색평론사의 책들은 맞춤이다. 물론 서방이 아름다운 가게에서 1,000원을 주고 사왔다며 꽂아 둔 책을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고 맘을 먹었다가 드디어 실행에 옮긴 것이 이 책을 읽은 주된 이유이겠지만 말이다. 외과 의사 겸 산과 의사이자, "초기 건강"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미셀 오당은 산업화 시대의 농업과 출산이 "생명역동적 태도"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보다는 기계나 자본, 의료에 의해 각각 과잉통제되는 현실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또한 이에 대해 불필요한 개입에 이루어지는 출산을 "치유하여" 지구를 치유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도록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아직 출산 경험은 없지만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이 아이를 갖고 낳는 과정들을 지켜 보면서, 그들이 겪게 되는 물리적, 정신적 변화, 혹은 고충을 알기에 차마 입밖에 내지는 못했던 불합리하고 이해되지 않는 측면들이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 왜 그런 현상들이 생겨나고 지속되는지에 대해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가령 다음과 같은 구절은 상당히 날카로운 지적이다.

<< 많은 나라에서 대부분의 여성들이 출산전에 열번 병원에 가는데, 다시 말해서 이것은 잠재적인 위험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열번 있다는 것이다. 현대의 임신한 여성들은 기쁨에 차 있을 수 없다. 그들은 모두 적어도 모두 한가지는 걱정할 일이 있다. 혈압이 너무 높거나 낮다든가, 체중증가 속도가 너무 빠르다거나 너무 느리다거나, 빈혈이라거나, 혈소판 수치가 낮으므로 출혈의 가능성이 있다거나, 임신성 당뇨가 있다거나, 태아가 너무 작거나 너무 크다거나, 태반이 처졌다거나, 10대 임신이어서 특별한 위험이 있을 수 있다거나, 39세이므로 늦은 임신이어서 특별히 위험하다거나, 태아가 아직 거꾸로 있다거나, 혈액검사상 아기가 다운증후군일 위험이 있다거나, 제때에 엽산을 섭취하지 않았으므로 척추파열의 가능성을 고려해야 된다거나, 풍진에 대한 면역이 없다거나, Rh 음성이라거나, 지난 수요일에 아기를 낳았어야 하니까 유도분만을 고려해야겠다는 등등으로 말이다. 그런데도 '정상적인' 여성으로 존재하는 게 가능할까? >> (146-147쪽)

4주에 한번씩 가서 정기검진을 받고 매번 초음파 사진을 찍어 태아와 산모의 건강을 확인하는 시스템은 결국 언젠가부터 아이를 가진 여성이 "환자"로 인식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의료기술이 발달하면서 태아사망률을 낮추었고, 출산 중 산모 사망률을 낮춘 그 공로에 대해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오당은 출산을 병원에 맡기면서 인류가 잃게 된 것에 대해 지적한다. 임산부가 스스로를 검진, 관리, 통제되어야 할 "환자"로 인식하면서 결국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기르는 감격과 기쁨, 놀라운 경험들을 잃거나, 적어도 반감시키는 불운을 겪게 된다는 것은 틀림없는 것이다.

   얼마전 우연한 기회에 큰 병원에서 하는 건강검진을 하고 서방이 받은 CD에는 엑스레이 필름은 물론 위장 초음파니, 내시경 사진이 그득하게 들어있었는데, 그걸 보면서 사실 조금 황당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걸 본다고 어디가 어떻게 문제인지 알수 없는 것은 물론이지만, 나의 몸에 대해서 조금더 자세히, 사진까지 곁들여 해주는 설명을 듣는다 하여 뭐 그리 달라지는게 있는가 싶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것들을 통해 건강에 대해 "염려"를 하게 되어 소위 "관리"를 더 하게 되는 효과가 있을 수도 있고, 역으로 근거 없는 염려를 하다가 "안심"을 하게 될 수도 있지만, 예수님 말씀마따나 그것으로 "키를 한자라도 자라게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어쨌든 미셀 오당의 이 책은 우리가 우리가 먹을 것과 우리의 자손을 "생산"하는 과정을 전문가에게 의탁함으로써 우리가 맞바꾼 것들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의 생각과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어렸을 적 우리 할머니는 동네에서 산파 역할을 종종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남매들 중 절반은 집에서 우리 할머니의 도움으로 태어났다. 불행히도 나는 칠삭둥이로 병원에서 태어났는데, 그게 제왕절개술을 통해서였는지, 아니었는지 모르겠어서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무리하게 뭔가를 나르다가 양수가 터져 병원에 가긴 했으나 자연분만이었다는 말씀이었다. 이것 저것 코치코치 묻는 딸에게 엄니는 은밀하게, 그러나 기대에 찬 목소리로 물어오셨다. "왜? 혹시 너 임신했어?" 실망하신 엄니께는 더욱 죄송한 일이지만, 사실 나는 "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 아이를 낳고 기르고 싶어지기 보다는 사실 겁이 더 많아져서 "아직은 안되겠어"라고 결심하게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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