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서른 여섯 살에 죽었다. 그는 섬세하고 친절했으며 잠깐 스쳐 지나갈 수밖에 없는 사람처럼 병약했었다. 생명이었다기보다 생명을 친절하게 환기시켜주는 사람. 그의 삶이 저물어갈 나이에 나의 생명도 저물기 시작했다. 서른여섯 번째 해에 내 생명의 가장 밑바닥에 도달했다. 나는 여전히 살아있었지만,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했다.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중. 파작, <거대한 고독>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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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 책과 삶의 역설에 대하여...>

<<나 자신으로나 그때 그때의 글의 계기로나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만을 이야기하겠다는 것의 나의 유일한 방법이었다면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쉽게 삶의 우발성에 자신을 맡기는 일이다. 이 우발성 속에서 우리의 구체적 시간, 우리의 생각, 행동은 곧 빈 껍데기가 되어버린다.  헌 책보다 빨리 헌 책이 되는 것은 책을 만지작이던 삶의 구체적 순간이다. 나의 헐어버린 책보다 더 허무한 것은 그 책을 샀을 때의 나의 삶의 구체적 계기이다. 나의 생각은 삶의 구체적 계기에 충실한 것일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나무의 몸채를 떠난 잎사귀들처럼 어지럽게 흩어질 뿐이다. 삶의 역설은 가장 구체적인 것이 가장 추상적이라는 것이다.>>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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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버만의 <미국 문화의 몰락>에서 이 소설에 대한 언급을 발견. 서방을 다그쳐 이 책을 찾아내었다. 단숨에 읽히는 놀라운 미래소설이다. SF에서 흔히 기대되는 디테일한 묘사보다는 어떤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통찰이 돋보이는 작품. 그 중 한 토막을 인용해 본다.  (137-139)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필요한 건 뭐든지 있고, 행복해지기 위해서 무엇하나 모자랄 게 없는 세상인데 저는 행복하지 않았어요. 뭔가가 빠져 있었어요.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제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거라곤, 분명한 단 한 가지, 그동안에 사라진 책들, 지난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불태워 없앤 책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책에 뭔가 해답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

  "당신은 구제불능의 낭만주의자구료. 심각하지만 않다면 꽤나 즐길 만한 텐데. 당신에게 필요한 건 책이 아니오. 지난날 한 때 책 속에 들어 있었던 그 무엇이오. 똑같은 것을 요즈음의 벽면 텔레비젼에서 얻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엄청나게 많은, 자질구레한 이야기와 깨달음들이 라디오로, 텔레비전으로 세상 구석구석까지 퍼져가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고 있소. 아아, 아무튼 아시겠소? 당신이 찾아 헤매는 건 책이 아니야! 당신은 낡은 축음기 음반에서, 낡은 영화 필름에서, 그리고 오래 전 친구들에게서 책에서 구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 것들을 얻을 수 있지. 자연 속에서, 당신 자신 속에서 찾아보시오. 책이란 단지 많은 것들을 담아둘 수 있는 그릇의 한 종류일 따름이니까. 우리가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하는 것들을 담아두는 것이지. 책 자체에는 전혀 신비스럽거나 마술적인 매력이 없소. 그 매력은 오로지 책이 말하는 내용에 있는거요. 우주의 삼라 만상들을 어떤 식으로 조각조각 기워서 하나의 훌륭한 옷으로 내 보여주는지, 그 이야기에 매력이 있는 것이오. 물론 당신은 잘 몰랐겠지. 그리고 지금 내 얘기도 언뜻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아무튼 당신의 직관은 옳았소. 중요한 건 바로 그 점이지. 자 세상에 부족한 것은 세 가지가 있소. 우선 첫번째, 당신은 이와 같은 책들이 왜 중요한지 알고 있소? 왜냐하면 이런 책들은 좋은 '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 그렇다면 질이라는 건 과연 무슨 뜻인가? 내게는 짜임새를 의미하오. 이 책은 아주 세밀하게 짜여진 것이오. 아주 작은 숨구멍들이 셀 수 없이 많이 붙어 있소. 이 책은 자기 나름의 뚜렷한 생김새를 지니고 있단 말이지. 현미경으로 들여다봐도 여전히 짜임새가 눈에 보일 정도로 아주 세밀하게 엮여진 것이오. 현미경을 통해서 당신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발견할 것이오. 끊임없이 넘쳐나는 이야기와 깨달음을 발견할 것이오. 현미경을 통해서 한 입방 센티미터마다 얼마나 많은 숨구멍들이 보이는지, 책장 하나하나마다 진실된 삶의 이야기들을 얼마나 많이 얻을 수 있는지, 이것이 내가 내리는 '질'의 정의요. 그렇지만 질이 좋은 책도 읽는 사람을 잘 만나지 못하면 빛을 보지 못하지. 아무튼 내 생각은 이렇소. 세밀하게 이야기하라. 생생하게 이야기하라. 좋은 작가들은 진실한 삶의 이야기를 담지만, 그저 그런 작가들은 수박 겉핥기 식으로 쓱 어루만지고 지나갈 뿐이오. 아주 형편없는 작가들은 삶의 이야기를 제멋대로 강간한 뒤에 파리똥이나 쌓이는 신세로 내팽개쳐버리지요. 이제 알겠소? 왜 책들이 증오와 공포의 대상이 되어버렸는지? 책들은 있는 그대로의 삶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숨구멍을 통해서 생생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골치아픈 걸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저 달덩이처럼 둥글로 반반하기만 한 밀랍 얼굴을 바라는 거야. 숨고멍도 없고, 잔털도 없고, 표정도 없지. 꽃들이 빗물과 토양의 자양분을 흡수해서 살지 않고 다른 꽃에 기생해서 살려고 하는 세상, 그게 바로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참 모습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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