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 상담을 공부하는 지인들이 좀 있어서 노골적으로 드러낸 적은 별로 없지만, 각종 심리 또는 성격검사들에 대해서 사실 속으로는 조금 우습게 여겨 왔습니다. 그렇다고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반대할만큼 특별한 지식이 있어서는 아니고, 단지 이 많고도 많은 사람들을 특정 유형으로 구분하다 보면, MBTI도 그렇고 애니어그램도 그렇고, ISTJ네, ISBN이네, ADSL이네 하는, 많아봐야 여나믄 개의 타입으로 환원시키는 것으로 끝날 게 뻔하니까요. 이렇게 해서야 한 고유한 인간의 진면목이라는 게 드러날까 싶은 거죠. '한 인간의 진면목'이라니, 애초에 그런 검사가 이걸 이해하려고 하는 것도 아닐텐데, 말도 안되는 기대겠죠? 그래도 최근엔 가까운 사람들이 심리나 관계의 문제로 고통을 겪는 경우들을 경우들을 보면서 조금은 이해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런 문제에 도움을 주려면 일단은 파악을 해야 하니 아무리 환원주의의 위험은 있다해도 어쩔 수 없는 면이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드는 거죠. 어쨌든, 이해는 한다 해도 그다지 신뢰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 솔직한 생각일 겁니다.

 

  요즘 아도르노의 책을 읽고 있습니다. 사실 어려워서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은데,일단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나 가보자는 심정으로 읽어가고 있어요. 잘은 모르지만, 현대 문명이랄까 정신사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있는 듯합니다. 이건 아도르노를 연구해온 사람들의 말이기도 하죠. 여튼, 이런 평가에 깊이 동감하게 만드는 대목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미니마 모랄리아> 를 읽어보면, 이 사람의 문체도 정말 뛰어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전반적인 문맥을 모른다 해도 번뜩이는 아포리즘들 앞에서 아, 하고 탄식이 나올 때가 많아요. 그건 그렇고, 심리검사 이야기를 한 이유는 아도르노가 정신분석에 대해 언급하는 대목에서 정말 공감이 되서입니다. 기본적으로 아도르노는 '정신분석'에 대한 관심이 궁극적으로는 상처에 대한 공포, 그리고 그것으로부터의 도피로 이어지는 자기 포기 내지 자기 체념과 연관된다고 보는 것 같아요.

 

 

정신분석에는 과장 이외에는아무런 진실성이 없다. (73면)

 

인식과 권력 사이에는 노예 근성의 연관성뿐만 아니라 진리의 연관성도 존재한다. 대부분의 인식은, 형식적인 면에서는 맞을지라도, 힘의 분배에서 균형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어떤 이민 온 의사가 "내가 볼 때 히틀러는 병적인 사례에 불과하다"고 말했다면 임상학적인 전거를 토대로 그의 진술이 결국에는 확인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편집광의 이름으로 세상에 새겨진 객관적 불행을 담아내기에는 부적절한 것으로서 그 때문에 그의 진단은 진단자의 우쭐대는 호기로만 들릴뿐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다. 히틀러는 즉자적으로는 병적인 사례일지 모르지만 '그에 대해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 파시즘에 대항한 망명객들의 수많은 선언이 공허하고 초라하게 보이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자유롭고, 거리를 두며, 이해관계를 초월한 듯한 판단 형식 속에서 사유하는 사람들은 그런 형식으로는 폭력의 경험을 담아낼 수가 없다. 폭력은 그런 사유를 실질적으로 무력화하고 있는 것이나. 거의 풀수 없는 과제겠지만 중요한 것은 타인의 권력에 의해서든 자신의 무력감에 의해서든 자신을 어리석게 만들지 않는 것이다. (83면)

 

어떤 사람의 생각은, 정신분석의 훈련을받은 사람이 그 사람은 강압적 성격인가, 구강기형인가, 아니면 히스테릭한 사람인가를 결정하기 위한 소재를 이룰 뿐이다. 반성, 즉 오성의 통제와 분리되는 데서 비롯된 책임성의 완화 때문에 사변은 학문의 객체로 떨어지며, 학문과 주체와의 연결 고리 또한 사변과 함께 떨어져나간다. 사유는 정신분석의 관리 도식에 의해 자신의 무의식적인 원천이 상기됨에 따라 사유가 되는 것을 잊어버린다. 사유는 진실된 판단보다는 중립적 소재가 되는 것이다. 자신을 제어하기 위해 개념화하는 노동을 행하기보다,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의사의 처방에 자신을 무기력하게 내맡기게 된다. 그리하여 사변은 결국 분쇄되고,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는 분류 목록 속에 하나의 '사실'로서 삽입된다. (98-99면)

 

 

 

   물론 심리검사 이야기는 아도르노가 정신분석에 대해 하고 있는 이 날카로운 지적에 비하면, 아주 소소한 문제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심리 안에서는 인간이 타인과 맺게 되는 관계 내에서는 상처와 고통은 단순히 내가 어떤 방식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유형인지를 확인하는 데서 극복되는 게 아닌 것은 분명하죠. 제가 해 본 검사도 그랬지만, 대개는 나는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행동하는 인간이니, 이런 방식의 갈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니 유의할 것! 이 정도였던 게 사실입니다. 아도르노는 고통이라는 객관적 상황에 대해서 끝까지 사유하지 못하게 하는, 사유중지의 부작용이랄까 이런 걸 지적하는 게 아닌 게 싶은데, 참 철저하게 생각하는 사람인 것만은 분명하죠.

 

  에리히 프롬이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끝까지 같이 가지는 않았다고 하던데, 잘은 모르지만 아도르노의 이런 면을 보면 함께 갔다 해도 이상해 보입니다. 여튼, 아도르노의 글은 힘이 있습니다. 몇 구절 인용하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죠. 그나저나 어렵다고 읽다가 포기하지는 말아야 할텐데, 그게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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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이 책을 읽기 전에는 후세 다츠지라는 인물에 대해서 전혀 몰랐습니다. 다만 공저자 중 고사명, 이규수 선생 이 두 분의 이름이 눈에 띄기에 막연하게 괜찮은 책이겠구나, 읽어볼만 하겠구나! 하고 기대했을 뿐이죠. 읽고 보니, 이제서야 이 분을 알게 된것이 부끄럽다는 말이 빈 말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이 후세라는 분의 삶이 남긴 울림을 결코 적지 않으니 말이죠. 

  후세는 메이지 법률학교를 나온 엘리트 변호사였다가 일종의 회심을 한 후 '민중 변호사'로 다시 태어났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민중'의 범위를 자국 일본 내의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로 제한하지 않고 식민지 조선인들까지 포함시켰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그가 행한 변호의 범위가 넓었다는 것만으로는 후세의 역사적인 의미가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을겁니다. 왜냐하면 온정주의적인 태도로 조선인들을 변호하는 일본 변호사들은 후세 말고도 여럿 있었기 때문이죠. 후세가 그들과 달랐던 점은 식민지 조선인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상황과 논리를 대변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식민지 조선인들에 동감하며 그들을 대변하려 했던 후세가 일본 제국주의적 팽창 의욕을 비판하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운동가들과 연대하는 데까지 나아간 것은 이렇게 보면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이 책은 몇 해 전 고려 박물관이란 곳에서 <후세 다츠지 회고전>과 함께 강연회를 열었던 원고들을 모아 출판한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시작은 조금 딱딱한 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책의 삼분의 일 정도를 차지하는 두 편의 논문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내용은 후세의 외손자인 오오이시와 후세의 도움으로 유치장을 나올 수 있었던 재일조선인 고사명 선생의 회고담인 만큼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글입니다. 인상깊은 에피소드들도 여럿 나오는데, 가령 오오이시 선생의 다음과 같은 회고는 후세의 사람됨을 엿볼 수 있게 하죠.

 

  저는 이 때 중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 할아버지가 아키타 출장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키타 출장이라면 야간열차 이외에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귀를 세우고 듣고 있다가 이런 사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키타 역인지 오다테 역인지에서) 현지 조직 사람이 마중나오기로 되어 있다. 몇 호차인가의 입구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후세는 2등차를 타고 간다. 현지에 도착하기 직전에 3등차로 이동한다. 그리고 자못 우에노에서부터 3등차로 온 것 같은 얼굴을 하고 하차한다.

 

 

아직 어렸던 저는 2등차를 탄다는 것 자체가 부르주아적인 행위로, 용서하기 어려운 타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같은 감각은 당시의 기아와 궁핍에 시달리는 생활 속에서 많은 서민이 공유하고 있었다고 믿습니다. ... 하지만 후세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의 힘겨운 계급투쟁 중에서도 2등차를 탔었습니다. ... 조선에 한하지 않고 어디에서나 차 안 만이 후세의 휴식장소로, 후세는 2등차를 타는 것을 스스로 허락했던 것입니다. 제가 그것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뒤였습니다.

  그렇다면  솔직하게 2등차 앞에서 만나면 된다는 것이 제 생각이었습니다. 3등차에서 내림으로써 민중의 편인 후세 다츠지의 면모가 생생하게 드러난다는 이 어설픈 연극은 제가 처음으로 본 '어른 세계'의 속임수였습니다. 저는 후세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했습니다. ...

  그 생각은 신창석 씨의 이야기를 듣기까지 60년 가까이 제 마음속 깊은 곳에 잠겨 있었는데, 신창석 씨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전혀 새로운 풍경이 제 마음속에 펼쳐졌습니다. 후세가 2등차에서 3등차로 이동해서 하차한 것은 가까스로 3등차 요금을 준비한 의뢰인--일본인 노동자나 농민 조직으로부터 훨씬 가난한 조선인 조직까지--에게 부담을 느끼지 않게 하려는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

                                                                 81-82쪽에서 인용

 

  그리고 고사명 선생의 회고는, 이 분의 문학적인 언어의 힘을 입은 때문이겠지만,  단순한 회고를 넘어 어떤 통찰을 주는 측면이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확실히 전후의 초토화된 자리에 인간의 원점이 싹을 띄우려고 했었던 것입니다. 저처럼 형무소에서 갓 출소한 불량소년, 혹은 모든 것을 잃은 상사 직원, 게다가 헌병이었던 인간에, 전쟁미망인들까지...... 이런 사람들이 작은 모닥불에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때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가장 바라는지 서로의 희망을 이야기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밑바닥에서 서로 이야기했던 바람이야말로 민족을 뛰어넘어 상통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망과 상실감이 교류하고, 서로에게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 인간의 원점을 잃어버리면 세계는 또다시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근래의 세계 상황은 정말 그 원점의 소중함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 당시, 후세 다츠시 선생님은 저와 같이 제대로 글도 읽지 못했던 인간, 그런 인간을 감싸 안고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되돌려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되돌아온 한 소년은 그 품에서 인간의 원점이라는 것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런 인간이기 때문에, 번뇌에 농락당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마음 속의 눈물을 통해 느끼는 인간이라는 감각은 역시 일본인, 조선인 그런 민족의 차이를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그 차이를 초월해가는 인간의 뿌리에 재인식되어도 좋은 것입니다.

145면에서 인용. 

 

 

  팽창주의적 식민정책으로 일관하는 일본의, 그것도 상류계급이라 할 수 있는 변호사였던 후세와, 일본의 식민지 백성인 조선인, 그것도 일본의 최하층 민중이라 할 수 있는 재일조선인, 청년 고사명 사이의 그 '차이'는 쉽게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 겁니다. '극복'이라는 말도 물론 어폐가 있습니다만. 고사명 선생의 표현대로, '인간의 원점'이라는 수준에서 만났기 때문에, 즉 민족을 넘어서는 절망과 상실감, 그 근저에서 이 둘이 함께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는 감각'에 기반한 만남이었기에 이토록 큰 여운을 남기는 것이 아닐지.

  어쨌든 모르고 있던 후세라는 분을 알게 된 것이 이 책을 읽은 가장 큰 소득이겠으나, 오래 전에 <아버지 나의 아버지>--이 책은 절판된지 오래고 다른 제목으로 최근에 다시 출판이 되었네요-- 읽은 후 잊고 지냈던 고사명 선생의 글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도 결코 적지 않은 수확입니다. 새로 번역된 이 책이 없으니 가지고 있던 구간이라도 다시 뒤적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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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95호의 "피터 모린: 농업꼬뮨과 '환대'의 사상가"라는 글을 읽은 것이 계기가 되어 도로시 데이와 피터 모린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가톨릭 노동자회'를 공동설립했고, 같은 이름의 신문을 간행했으며, ‘환대의 집’, ‘농업꼬뮨’, ‘반전운동’ 등의 다양한 활동을 주도했던 두 사람의 이야기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이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하나의 진실한 길을 보여준다. 
  '농업공동체'를 특별히 강조했던 피터 모린은 어떤 의미에서 데이보다 내게 더 매력적인 사람이지만,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국내 자료가 앞서 언급한 <녹색평론> 외에는 거의 없어 아쉬운 반면, 도로시 데이에 대해서는 몇 편의 글이 번역되어 있어 사정이 나은 편이다. 그 중에서도 짐 포레스트가 쓴 <잣대는 사랑>은 데이의 격정적인 삶을 흥미롭게 기술하고 있어서 재미가 있다. <오늘 유성처럼 살아도>라는 데이의 글 모음집도 있지만 다 읽질 못해서 아직 그 책에 대해서는 뭐라 말하기 어렵다.
  데이에 대해 관심은 있었으면서도, 그와 관련된 다른 자료가 있는지 찾아 볼 짬을 내지는 못했었는데, 며칠 전 남편이 “요건 몰랐지?”하는 표정을 하고서는 책 한권을 내밀었다. 도로시 데이 이야기가 나오니 읽어보라는 말이었다.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그 책의 저자 이름이었는데, 다름 아닌 “게리 윌스”였다. 언젠가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와 <바울을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를 무척 재밌게 읽고 나서, 예수나 바울을 한참 내려다보는 일부의 신학자들보다 더욱 진지하고 겸허하게 평가하고 있는 게리 윌스에 대해 감탄한 적이 있는데, 저자만 보아도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책의 소재가  아무리 “지도자”라 한들 고전사가이자 진지한 전기작가로서의 저자의 이력을 고려해 보면  이 책이 무슨 “성공적인 리더십”을 운운하는 자기계발서일 리가 만무한데, 떡하니 번역서 제목을 <(나폴레옹에서 마사 그레이엄까지) 시대를 움직인 16인의 리더: 16가지 유형을 통해 분석한 리더십의 성공과 실패>로 만들어 놓으니 뭔가 모르게 ‘이게 아니다’싶은 불길한 기분이 들더라는 것이다.  

  도로시 데이는 이 책의 마지막 16장에 등장한다. 윌스는 도로시 데이를 ‘성자형’ 지도자로 분류하면서, 그에 대한 반대유형(antitype)으로서 애먼 헤나시를 들고 있는데, 헤나시는 피터 모린이 죽은 후 데이와 운동을 함께 이끌었던 인물이다. 애먼 헤나시에 대해서는 리 호이나키의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녹색평론사)의 마지막 장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나는 호이나키의 글 때문에 얼굴도 모르는-나중에 <잣대는 사랑>을 읽으면서 헤나시의 사진을 보게 되긴 했지만- 이 사람에게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 이후로는 어쩌다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와 같은 진지한 이야기들을 할 때, 회의적인 입장에서 “우리가 애쓴다고 세상이 바뀌냐”며 냉소적인 질문을 던지는 친구들이 있으면, 늘 호이나키의 책에서 읽은 헤나시의 대답을 즐겨 인용하게 되었다. 그러니 내가 좋아하는 저자인 게리 윌스에게서 내가 존경하는 세 사람-도로시 데이와 애먼 헤나시, 거기에 잠깐이긴 하지만 피터 모린까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더없는 ‘호강’이  아닐 수 없었다.  

 

  하나 이 책에서 아쉬운 것은 도로시 데이에 대한 마지막 장만 보아도 번역상의 문제가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가령 475쪽에는 “윌리엄 제임스는 도로시 데이가 가톨릭으로 귀의한 것은 오랫동안 무의식 속에 자라던 것이 갑자기 의식 속으로 들어온 경우라고 설명한다”는 문장이 나온다. 그러나 윌리엄 제임스가 1902년에 쓴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이라는 책에서 1897년생인 도로시 데이(당시 너덧살이나 되었을까)에 대해 이런 평가를 했을 리는 당연히 없을 터인데, 번역서에서 제임스의 책 출간연도와 데이의 생몰연도까지 밝혀 놓았으면서 번역가나 편집자들이 왜 이 대목의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아마존에서 원문검색을 해보니 이 대목에는 도로시 데이의 이름이 등장조차 하지 않는다. 그냥 “윌리엄 제임스는 회심에 대해서 ...이라고 설명했다”고만 나온다. 가톨릭 신자로서 사회운동과 그보다 더 급진적인 형태의 ‘운동’에 헌신하게 된 데이의 ‘회심’을 설명하기 위해 윌스가 종교적 회심에 대한 제임스의 분석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인데, 내용상 정작 가장 중요한 저자의 ‘해석’에 대해서 번역자나 편집자가 진지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앞서 지적한 대로 ‘리더십’에 너무 초점을 맞추다 보니, 사실상 그 “16가지 유형의 지도자들”이 어떻게 해서 그런 형태의 리더십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사상적, (데이의 경우에는) 종교적 분석을 시도한 “본론”을 도리어 곁가지로 취급하는 주객전도가 생겨난 게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에 나온 관련서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그동안 강조되지 않았던 내용들을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아가 그 과정에서 게리 윌스만의 독특한 "관점"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비록 자기계발서로 어울리지 않게 치장하고 나왔을 망정, 이 책을 일독할 만한 가치는 있다고 생각한다.  

   
 

... 그(애먼 헤나시)가 경찰이나 당국자 또는 그를 괴롭히는 사람들에 맞설 때, 그는 언제나 유쾌한 유머감각, 거의 유희감각을 드러내었다. 피켓시위를 하고 있는 동안 그는, 그렇게 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확신하는지 질문을 받고 했다. “아뇨, 하지만 세상이 나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은 확신합니다”라는 게 그의 대답이었다.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3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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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미 FTA협상이 졸속협상인데다, 그 결과가 어마어마한 경제적 종속을 가져올 것이라는 예측과 함께 그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드높다. 소심하기 이를 데 없는 인간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나 자신 굳이 해 봐야 득 될 것이 있는지 확신이 분명치 않은 일은 왠만해서는 보류하는 경향이 있어서인지 몰라도 대체 그 결과에 자신도 없는 일들을 -물론 그 양반들이야 낙관적인 미래를 자신하겠지만- 굳이 하려는 정부를 이해할 수가 없다. 적어도 자신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득하는 차원에서, 아니 합리화하는 차원에서라도 공개적으로 표명하고 설명하는 작업들이 이루어져야 하고, 반대하는 이들에게 정부의 입장을 해명해야 하는데도, 그것마저 불성실하게 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절차적 민주성"만을 들어서도, 한미FTA는 충분히 결함이 있는 협상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사실 그 무엇보다 앞서 나는 기본적으로 한미 FTA 협상을 비롯, 정부의 경제 정책들이 추구하는 대의에 동의하지 않는다. "경제 성장"이라는 목표 말이다. 더군다나 그 "성장"이 원화나 달러화라는 금전적 수치만으로 측정되는 것인 경우에는 더더욱 동의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존"과 "자립"에 직결되는 근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 없이 쌀을 비롯한 농산물을 자동차나 핸드폰, 그리고 MP3 플레이어와 동급으로 여기는 그런 마인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소위 정부가 내세우고 있는 "되는 산업 밀어주기"식 정책이 허점 그득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쌀을 포기하고 핸드폰 팔아서 벌어들인 수익이 금전적으로 동일하다고 하여 그게 과연 동일한 것이겠는가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미화 기준 몇만 달러의 무역수지 적자, 흑자 식의 논리로 "성장" "퇴보"가 매겨지는 그런 목표에 나 자신이 전혀 설득되지 않는다.

 지난 주에 읽은 더글러스 러미스의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녹색평론사)는 앞서 이야기한 생각-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두루뭉수리하던 것인데-을 분명하게 해 주었다. "성장" "발전"과 같은 말들이 가지고 있는 "불가사이한 힘" 때문에 우리 사회 전체가 이것에 현혹되어 끌려가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바로 이것이 빈곤을 재생산할 뿐 아니라 "합리화"하여 사회 구성원들로 하여금 그것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당연시하도록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러미스는 이에 대해 "대항발전(counter-development)"을 말한다. 이것은 경제활동을 줄이고 경제활동 이외의 것에 노력함으로써 인간활동의 풍성함을 회복시켜가자는 주장이다. 넓게 이야기하자면, 현재 우리의 삶을 뿌리 깊이 지배하는 경제 논리에서 벗어나 삶의 전일성(全一性)을 회복하고 삶의 전영역에 대한 인간의 잠재적인 능력들을 발휘해 가는 방식으로 해보자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것은 경제사가 칼 폴라니(Karl Polanyi)식대로 표현하자면, 근대 사회의 변종 자본주의가 발생하기 이전에, 경제가 삶의 한 영역으로 "묻혀있어서(embedded)" 인간이 그 사회적, 정치적, 공동체적 합의와 협력에 의해 자기의 삶을 스스로 꾸려가던 바로 그 때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이것을 러미스 또한 "경제제도를 민주화하는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을 하자면, 사실 "낭만적"이라느니, "이상적"이라느니, "현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퇴보적 생각"이라느니 여러가지 말들이 터져나올 것이다. "애초에 말 안통하는 것들은 뭔 말을 해도 안되는 거지 모"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그러한 반론들을 피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반론들 속에 내포된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무력감"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 동감하게 되는 면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자본의 거대한 물결-너무나 상투적인 표현이지만-의 흐름에 거슬러 새로운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대안적 운동들의 소소한 움직임들이 바로 그러한 무력감들에 대한 강력한 반증으로 존재한다. 더글러스 러미스도 이러한 실례들을 근거로 우리의 무력감 아래 깔려 있는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상식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러미스가 공격하는 그러한 "무력"감이 엄청나게 "강력"하다는 것도 사실인 모양이다. 어제 빗 속에서 "한미 FTA 저지 범국민 궐기" 시위대의 일원으로 서 있으면서 여러가지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느 깃발 아래도 속하지 못하고-또는, 속하지 않고- 친구 둘과 함께 함께 구호를 외치면서 이 시위대 전원이 모두 같은 마음과 생각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미 FTA가 가져올-조심스럽게 이야기해서 가져올지도 "모르는"- 종속적 삶과 새로운 위기 상황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동의가 이루어졌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동의 하에서 표출되었던 행진과 구호외침이 무력하게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앞으로 더 나갈 수 없도록 막아선 전경들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윗사람들, 그리고 그 윗사람들을 주무르는 재벌이나 초국적 기업, 나아가 미국의 세력 앞에서 우리 농민들이, 노동자들이, 빈민들의 외침이 무슨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지. 홍수 피해로 다급한 상황인데도 고속버스 대절해가며 서울로 올라온 농민들 몇 천, 몇 만이 외쳐봐야, "극심한 교통혼란" 정도로 보도되는 현실 앞에서 말이다.

 <가난 이야기>(범우사)를 쓴 가와카미 하지메(1879-1946)라는 일본의 경제학자가 있다. 이번주 이 책을 읽으면서 상당한 충격을 받았었다. 글을 쉽고 평이하지만 그 안에 담겨진 인간 사회에 대한 통찰이 깊었기 때문이고, 그의 대안이 진실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왜 가난한가? 어떻게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저자가 제시하는 대답들에 고개가 끄덕여졌지만 정작 저자 자신은 이 저작을 절판시켰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나의 추측에 불과하지만, 이 책을 읽고 성찰해 주기 바랬던 바로 그 "부유한 인간들"에 대한 기대에 절망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가와카미 하지메가 제시하는 윤리적 근본주의를 만족시키는 부자들, 즉 "자신도 충분히 향유하지 못한 행복을 그저 빈민들의 신상에 있게 되기를 하고 걱정하는 그런 숨겨진 그윽한 동정심을 가진" 그런 정치가나 재벌이 있겠는가 말이다.  물론 이 책을 절판시킨 이유가 그의 자서전에서 말하고 있듯 이 책이 "바위에 새겨서 영원토록 후세에 전해지길 바라는"(러스킨의 말) 그런 책이 못된다고 생각한 그의 겸손한 판단 때문일수도 있겠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인간이 유지해야 하는 윤리성, 도덕성에 대한 믿음이 흔들릴 수 밖에 없는 현실의 무거움이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해 보는 것이다.

 어쨌든, 한국 사회에서는 가와카미 하지메가 기대한 윗사람들의 "도덕성"을 기대할 수도 없을지 모른다. 아니, "도덕성"이 아니라 최소한의 "합리성"이라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나의 솔직한 바람이다. 물론 지금 한미 FTA 협상을 중단, 철회하는 것이 노무현이 남길 수 있는 유일한 치적이 될 것이지만 요즘 보면 그게 될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FTA 반대론자들이 반대 주장을 하면 그것에 대해 수세적으로 반박하는 수준에 머물지 말고, 제발 꼼꼼하게 계산하고 미래를 예측하면서 능동적인 협상이라도 해주길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피디수첩이나 몇몇 기사들에서 볼 수 있는 협상단의 모습은 밀고 당기면서 "제것 챙기려고 하는" 협상가들의 제스추어가 아닌 것은 물론이고, 마치 "흡족하실만큼 가져가시옵소서" 하고 먼저 바치는 조공국의 제스추어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런지. 한미 FTA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과장되게 표현한 염려가 "괴담"으로 치부되고, 왜 그런 "괴담"까지 등장하게 되었는지 맥락도 보지 않은채 "과격한 데모가 불러일으키는 위하감" 운운하는 이들에 대해 썽이 나서 횡설수설 떠들어본다. 에효.

*** <가난 이야기>에서 가장 읽을 만한 부분은 빈곤의 원인을 분석하면서 "부자들의 사치품"을 드는 대목(88-89)이다. 저자는 수요공급의 원칙에 따라 부자들의 사치품이 수요의 주를 이룰 때 쌀과 같은 식량의 공급자들이 부자들의 사치품의 생산자로 바뀌게 되고, 부자들의 사치품의 수요가 많기 때문에 그러한 사치품의 가격까지 하락하여 다시 그것을 만드는 생산자들에게는 그 다지 큰 이익이 되지 않는 악순환의 고리를 말한다. 쌀은 많은데 정작 학교 급식도 못먹는 아이들은 늘고 세끼 식사를 해결하지 못하는 도시 빈민들도 느는 상황을 설명하기에 좋은 분석인 것 같다. 그리고 애덤 스미스에서 출발하는 개인주의 경제학을 이야기하면서 개인의 이기심을 합리화하는 경제학의 문제를 제기하고, 경제 제도가 아니라 제도를 운용하는 인간 그 자체와 국가를 조직하는 개인 자체의 근본적인 개혁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목은 칼 폴라니보다 몇 십년 앞서 저자가 이 글을 썼다는 사실을 상기해 볼 때 정말 놀라운 부분이다. (115-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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