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FTA협상이 졸속협상인데다, 그 결과가 어마어마한 경제적 종속을 가져올 것이라는 예측과 함께 그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드높다. 소심하기 이를 데 없는 인간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나 자신 굳이 해 봐야 득 될 것이 있는지 확신이 분명치 않은 일은 왠만해서는 보류하는 경향이 있어서인지 몰라도 대체 그 결과에 자신도 없는 일들을 -물론 그 양반들이야 낙관적인 미래를 자신하겠지만- 굳이 하려는 정부를 이해할 수가 없다. 적어도 자신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득하는 차원에서, 아니 합리화하는 차원에서라도 공개적으로 표명하고 설명하는 작업들이 이루어져야 하고, 반대하는 이들에게 정부의 입장을 해명해야 하는데도, 그것마저 불성실하게 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절차적 민주성"만을 들어서도, 한미FTA는 충분히 결함이 있는 협상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사실 그 무엇보다 앞서 나는 기본적으로 한미 FTA 협상을 비롯, 정부의 경제 정책들이 추구하는 대의에 동의하지 않는다. "경제 성장"이라는 목표 말이다. 더군다나 그 "성장"이 원화나 달러화라는 금전적 수치만으로 측정되는 것인 경우에는 더더욱 동의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존"과 "자립"에 직결되는 근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 없이 쌀을 비롯한 농산물을 자동차나 핸드폰, 그리고 MP3 플레이어와 동급으로 여기는 그런 마인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소위 정부가 내세우고 있는 "되는 산업 밀어주기"식 정책이 허점 그득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쌀을 포기하고 핸드폰 팔아서 벌어들인 수익이 금전적으로 동일하다고 하여 그게 과연 동일한 것이겠는가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미화 기준 몇만 달러의 무역수지 적자, 흑자 식의 논리로 "성장" "퇴보"가 매겨지는 그런 목표에 나 자신이 전혀 설득되지 않는다.
지난 주에 읽은 더글러스 러미스의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녹색평론사)는 앞서 이야기한 생각-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두루뭉수리하던 것인데-을 분명하게 해 주었다. "성장" "발전"과 같은 말들이 가지고 있는 "불가사이한 힘" 때문에 우리 사회 전체가 이것에 현혹되어 끌려가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바로 이것이 빈곤을 재생산할 뿐 아니라 "합리화"하여 사회 구성원들로 하여금 그것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당연시하도록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러미스는 이에 대해 "대항발전(counter-development)"을 말한다. 이것은 경제활동을 줄이고 경제활동 이외의 것에 노력함으로써 인간활동의 풍성함을 회복시켜가자는 주장이다. 넓게 이야기하자면, 현재 우리의 삶을 뿌리 깊이 지배하는 경제 논리에서 벗어나 삶의 전일성(全一性)을 회복하고 삶의 전영역에 대한 인간의 잠재적인 능력들을 발휘해 가는 방식으로 해보자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것은 경제사가 칼 폴라니(Karl Polanyi)식대로 표현하자면, 근대 사회의 변종 자본주의가 발생하기 이전에, 경제가 삶의 한 영역으로 "묻혀있어서(embedded)" 인간이 그 사회적, 정치적, 공동체적 합의와 협력에 의해 자기의 삶을 스스로 꾸려가던 바로 그 때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이것을 러미스 또한 "경제제도를 민주화하는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을 하자면, 사실 "낭만적"이라느니, "이상적"이라느니, "현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퇴보적 생각"이라느니 여러가지 말들이 터져나올 것이다. "애초에 말 안통하는 것들은 뭔 말을 해도 안되는 거지 모"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그러한 반론들을 피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반론들 속에 내포된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무력감"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 동감하게 되는 면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자본의 거대한 물결-너무나 상투적인 표현이지만-의 흐름에 거슬러 새로운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대안적 운동들의 소소한 움직임들이 바로 그러한 무력감들에 대한 강력한 반증으로 존재한다. 더글러스 러미스도 이러한 실례들을 근거로 우리의 무력감 아래 깔려 있는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상식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러미스가 공격하는 그러한 "무력"감이 엄청나게 "강력"하다는 것도 사실인 모양이다. 어제 빗 속에서 "한미 FTA 저지 범국민 궐기" 시위대의 일원으로 서 있으면서 여러가지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느 깃발 아래도 속하지 못하고-또는, 속하지 않고- 친구 둘과 함께 함께 구호를 외치면서 이 시위대 전원이 모두 같은 마음과 생각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미 FTA가 가져올-조심스럽게 이야기해서 가져올지도 "모르는"- 종속적 삶과 새로운 위기 상황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동의가 이루어졌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동의 하에서 표출되었던 행진과 구호외침이 무력하게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앞으로 더 나갈 수 없도록 막아선 전경들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윗사람들, 그리고 그 윗사람들을 주무르는 재벌이나 초국적 기업, 나아가 미국의 세력 앞에서 우리 농민들이, 노동자들이, 빈민들의 외침이 무슨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지. 홍수 피해로 다급한 상황인데도 고속버스 대절해가며 서울로 올라온 농민들 몇 천, 몇 만이 외쳐봐야, "극심한 교통혼란" 정도로 보도되는 현실 앞에서 말이다.
<가난 이야기>(범우사)를 쓴 가와카미 하지메(1879-1946)라는 일본의 경제학자가 있다. 이번주 이 책을 읽으면서 상당한 충격을 받았었다. 글을 쉽고 평이하지만 그 안에 담겨진 인간 사회에 대한 통찰이 깊었기 때문이고, 그의 대안이 진실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왜 가난한가? 어떻게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저자가 제시하는 대답들에 고개가 끄덕여졌지만 정작 저자 자신은 이 저작을 절판시켰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나의 추측에 불과하지만, 이 책을 읽고 성찰해 주기 바랬던 바로 그 "부유한 인간들"에 대한 기대에 절망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가와카미 하지메가 제시하는 윤리적 근본주의를 만족시키는 부자들, 즉 "자신도 충분히 향유하지 못한 행복을 그저 빈민들의 신상에 있게 되기를 하고 걱정하는 그런 숨겨진 그윽한 동정심을 가진" 그런 정치가나 재벌이 있겠는가 말이다. 물론 이 책을 절판시킨 이유가 그의 자서전에서 말하고 있듯 이 책이 "바위에 새겨서 영원토록 후세에 전해지길 바라는"(러스킨의 말) 그런 책이 못된다고 생각한 그의 겸손한 판단 때문일수도 있겠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인간이 유지해야 하는 윤리성, 도덕성에 대한 믿음이 흔들릴 수 밖에 없는 현실의 무거움이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해 보는 것이다.
어쨌든, 한국 사회에서는 가와카미 하지메가 기대한 윗사람들의 "도덕성"을 기대할 수도 없을지 모른다. 아니, "도덕성"이 아니라 최소한의 "합리성"이라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나의 솔직한 바람이다. 물론 지금 한미 FTA 협상을 중단, 철회하는 것이 노무현이 남길 수 있는 유일한 치적이 될 것이지만 요즘 보면 그게 될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FTA 반대론자들이 반대 주장을 하면 그것에 대해 수세적으로 반박하는 수준에 머물지 말고, 제발 꼼꼼하게 계산하고 미래를 예측하면서 능동적인 협상이라도 해주길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피디수첩이나 몇몇 기사들에서 볼 수 있는 협상단의 모습은 밀고 당기면서 "제것 챙기려고 하는" 협상가들의 제스추어가 아닌 것은 물론이고, 마치 "흡족하실만큼 가져가시옵소서" 하고 먼저 바치는 조공국의 제스추어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런지. 한미 FTA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과장되게 표현한 염려가 "괴담"으로 치부되고, 왜 그런 "괴담"까지 등장하게 되었는지 맥락도 보지 않은채 "과격한 데모가 불러일으키는 위하감" 운운하는 이들에 대해 썽이 나서 횡설수설 떠들어본다. 에효.
*** <가난 이야기>에서 가장 읽을 만한 부분은 빈곤의 원인을 분석하면서 "부자들의 사치품"을 드는 대목(88-89)이다. 저자는 수요공급의 원칙에 따라 부자들의 사치품이 수요의 주를 이룰 때 쌀과 같은 식량의 공급자들이 부자들의 사치품의 생산자로 바뀌게 되고, 부자들의 사치품의 수요가 많기 때문에 그러한 사치품의 가격까지 하락하여 다시 그것을 만드는 생산자들에게는 그 다지 큰 이익이 되지 않는 악순환의 고리를 말한다. 쌀은 많은데 정작 학교 급식도 못먹는 아이들은 늘고 세끼 식사를 해결하지 못하는 도시 빈민들도 느는 상황을 설명하기에 좋은 분석인 것 같다. 그리고 애덤 스미스에서 출발하는 개인주의 경제학을 이야기하면서 개인의 이기심을 합리화하는 경제학의 문제를 제기하고, 경제 제도가 아니라 제도를 운용하는 인간 그 자체와 국가를 조직하는 개인 자체의 근본적인 개혁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목은 칼 폴라니보다 몇 십년 앞서 저자가 이 글을 썼다는 사실을 상기해 볼 때 정말 놀라운 부분이다. (115-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