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문화의 몰락 - 기업의 문화 지배와 교양 문화의 종말
모리스 버만 지음, 심현식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6월
평점 :
절판


  사실 “미국 문화의 몰락”이라고 번역된 이 책의 제목은 “미국 문화의 황혼기”라고 번역될 수 있다. “황혼”이라고 하면 너무 근사한 의미가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제목은 미국 문화가 컴컴한 “어둠(암흑)의 시대”로 들어가기 전 “황혼”기를 말한다. 이 제목에 달려있는 “기업의 문화 지배와 교양 문화의 종말”이라는 부제는 원서에는 없는 사항이다. 번역본이 원서와 다른 제목이나 부제를 가지게 되는 것은 나무랄 이유가 없는 일이지만, 황금가지에서 나온 이 번역본은 사실 소소한 오타를 제외하고도 몇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다. ‘본격’ 학술서라 할만큼 논쟁적인 책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을지 몰라도, 이 책은 서구 문명사와 철학 분야의 굵직굵직한 저서들을 많이 인용하고 있고 그러한 논의들에 기대어 논지를 펴나가고 있다. 그런 이유로 참고문헌과 같은 서지사항은 중요한 정보이고, 색인 또한 필수적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국어 번역본은 원서에는 멀쩡하게 있는 참고문헌과 색인을 빼고 출판되었고, 이것은 이 책을 읽고 더 독서를 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상당히 불친절한 처사이다. 아쉬운 대로 인터넷에서 인용되는 저자 인명을 검색을 해보려 해도 이 책은 최초로 나오는 인명에 원어 표기도 하지 않아 그나마 검색에도 불편함이 있다. 
   이러한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한번 잡으면 놓기 어려울 정도로 흥미진진한 책이다. 저자 모리스 버만은 문명의 암흑시대로 사그라드는 미국 문화의 현실을 폭로하고 그 원인을 밝히고,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모리스 버만이 미국 문화의 몰락의 원인이라고 제시한 것이 옳은지, 그리고 나아가 그가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수도사적 해법”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물을 수는 있어도, 이 책에 대한 몇 가지 짤막한 서평들이 제기하는 것처럼, “대안이 ‘없다’”는 식의 비판은 정당하지 못하다. 아마도 이러한 비판은 이 책이 제시하는 대안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생각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판을 하려면, 저자가 분명히 제시하고 있는 대안 자체에 현실성과 정당성이 있는지를 비판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이 책에 대한 비판을 먼저 들먹이는 이유는 “불행히도” 이 책을 읽어가면서 손에 쥐게 된 강유원의 『책』이라는 책 중에서 모리스 버만의 이 책에 대한 서평(306-308)을 읽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불행”인 이유는 나 자신이 읽기에는 상당히 문제제기도 충실하고 그 원인분석이나 대안이 비록 비현실적이고 낭만적으로 보일 수는 있어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아주 “근본적”이라는 점에서 동감할 수 있었던 이 책에 대해서 강유원은 상당히 “졸렬한” 비판을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먼저 강유원은 이 책의 ‘질적인 측면’에서 신문기사, 통계자료, 철학이론, 소설, 인터뷰 등의 자료가 중요성의 “구별없이” 쓰인다는 것을 문제로 지적한다. 그리고 그는 『계몽의 변증법』이 『인터내셔널 트리뷴』과 “동등한 자료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언짢아 한다. 나는 저자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책과 인터내셔널 트리뷴을 “동등하게” 취급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행여 그렇다 해도 철학이 아니라 문화사를 연구하는 학자가 혹시 그 두 자료를 동등하게 취급한다 해서 그게 무슨 큰 문제냐 싶기도 하다. 철학 전공자에게 혹 그것이 언짢을 수는 있겠다는 것은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나 과연 이것 때문에 저자가 “스스로의 통찰력 부족에 대해서 심각한 위기를 느”껴야 하는지 의문스럽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 책은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의 2장과 3장 사이에서 모리스 버만은 문화의 종말을 예견한 문학으로서 세 작품을 예로 들어 “수도사적 해법의 잠재적인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읽어본 작품들은 아니었지만 대략이나마 작가가 해석해주는 대목에서 솔직히 나는 이 작품들이 그려내고 있는 미래가 사실은 “상상”이 아닌 현실이 될 수도 있음을, 아니 사실은 현실이 되어 가고 있다는 저자의 통찰에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강유원의 비판으로 돌아가면, 그가 말한대로 이 책의 주요 논지 중 하나는 “미국의 문화가 몰락하고 있다는 객관적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문화의 몰락의 원인으로 저자는 네 가지를 제시한다. 이에 강유원은 이 네 가지가 ‘사회적 불평등’으로 모든 것이 환원된다고 말하면서 정작 제시되어야 할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해법은 제시되지 않은 이 책을 “어이없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저자가 강유원 만큼 현대 사회의 사회적 불평등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했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버만은 이토록 심각한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가 인간성의 가치들, 공동체성과 상호성의 원리들이 심각하게 훼손된 현대의 문화적 상황에 대한 치유없이 해결될 수 없다는 보다 근본적인 통찰을 하고 있는 것이다. 버만에 따르면 대몰락 이후에 다시 세워야할 사회를 위해 좋은 삶과 인간적 가치를 담지한 지적 전통들을 보존해야 하고, 일종의 “버림받은 자들의 공동체”로서 “수도사적” 집단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강유원은 저자가 제시한 이 “수도사적 해법” 또한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사실 수도사적 해법은 모리스 버만도 길게 설명하고 있지만 일종의 대안적 가치관의 ‘은유’적 표현이지, 강유원이 비판하는 것처럼 “전혀 엉뚱하게 들고 나오”는 것이 아니다. 강유원처럼 “웬 수도사?”라고 반문할 독자들을 위해 저자는 친절하게도, 이 책의 후반부에서 현대 미국의 현실과 상당한 유비를 이루는 로마 문명의 몰락과정과 12세기 문화부흥, 그리고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의 이르는 서구 역사를 이론적으로 개관하고 있다. 그리고 강유원이 신문 기사와 소설과 동등하게 취급하여 “썽”이 난 바로 그 <계몽의 변증법> 이야기도 그러한 역사의 변증법적 과정을 이야기 하느라고 꺼내고 있는 것이다.
   강유원의 서평에서 가장 씁쓸한 대목은 총 5장으로 이루어진 버만의 책에서 “미국 사회의 현주소를 알아내기 위한 다이제스트”로 볼 수 있는 1장만이 읽을만한 것이기 때문에 이 책은 실질적으로 2,000원짜리(이 책의 정가는 10,000원)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대목이다. 기본적으로 책의 가치를 내가 지불한 정가 대비 ‘얼마얼마’로 환산할 수 있는 정서에 전혀 동감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독서의 이득은 툭 까놓고 말해 독자가 “얻어가기 나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책 자체가 아니라 “비판”에 대해서 열을 낸 모양이 되어버렸지만, 여튼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가장 크게 느낀 것은 모두가 다들 알고는 있었다고 하지만 이러한 “문화의 몰락”이 미국의 운명이 아니라 철저하게 “미국화” 되어가는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의 대학을 비판하는 대목이나 방송 프로그램 실태에 대한 보고나 출판 문화의 위기 상황, 기업의 문화지배현상과 같은 것들은 미국에만 해당되는 일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인간적인 가치들이 없어지고 메마르고 건조한 가치들이 지배하는-그것이 경제 논리이든 무엇이든- 암울한 미래에 대한 예측으로 사실은 독자들을 “서글프게” 만든다. 그러나 여전히 희망적인 측면이 있다. 황혼기를 말하고 수도사적 해법을 말한다는 것은 부흥을 꿈꾼다는 것 아닐까? 더욱이 저자는 문명을 영원히 순환하며 반복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 사람의 순환 사관이 오히려 너무나도 낙관적으로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과연 부흥을 기다릴만한 시간적 여유가 있기나 한 걸까? 황혼기가 지나 여명이 다다르기도 전에 문명을 지탱해 줄 이 지구가 끝장이 날지도 모르니 말이다.

 

** 오역  
   p. 9 “『암흑시대 (Dark Age)』에서 프랭크는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  “프랭크는 그의 에세이 “암흑시대(Dark Age)”에서 다음과 같이~~”
              Thomas Frank & Matt Weiland (eds.), Commodify your dissent (New York: W. W. Norton)라는 책 중 “dark Age”라는 토머스 프랭크의 에세이에서 발췌한 것이기 때문이다.
   p. 117 이하에서 <라이보비츠에게 바치는 찬가>(<리보위츠를 위한 찬송>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출간됨)의 저자를 "윌리엄 밀러"로 잘못 번역했는데 "월터 밀러"가 맞다. ,  

 

** 단순 오타들:
   p. 12. 일곱째줄 --- 여졌던--> 여겼던
   p. 54. 밑에서 일곱째줄 --- 장-르랑소아 로타르---> 장 프랑소아 료타르
   p. 61. 마지막 줄 --- 정치성 공정성(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공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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